❏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astor. Peter Yoon

성령의 열매(07) -평강
말씀. 골3:15



성령의 열매(fruit) 가운데 세 번째는 평강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갈5:22). 화평이라고 번역된 말은 영어로는 peace 한 단어인데 반해 우리말로는 평화, 화평, 평강, 평안, 안녕 등 참으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안에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평강)의 열매를 맺으심으로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사랑으로 살고, 기뻐하며 살고, 평강 가운데 살도록 하십니다. 성도가 성령의 열매 없이 산다면 그가 목사이든 선교사이든 성경 연구만을 평생 직업으로 해 온 사람일지라도 그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주님은 사람의 일보다 사람이 맺은 열매를 보십니다. 내 안에 기쁨과 평강이 없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의 열매가 없다는 뜻이며, 육신적이란 뜻입니다.

육신적이란 뜻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짓을 하며 사는 성도란 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일만 골라하는 성도들이 육신적인 성도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육신의 노력으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평강을 인간적 노력으로 맺을 수 있는 것이라면 성령의 열매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평안하십니까? 이렇게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히브리어에 “샬롬”이란 인사나 한국에 “안녕”은 동일한 말입니다. “평안하다”는 것은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을 말합니다. 사건 사고 없이 무탈하게 사는 것, 걱정거리나 근심거리가 별로 없는 것을 평안한 삶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화평)을 약속하셨지만 평안한 삶을 약속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신체적, 물질적, 세상적, 외적인 평안은 매우 기복적인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성경적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 바울과 그 동료들, 초대 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고난의 길을 걸은 순교자들, 앞으로 환란 때에 믿음을 지킬 성도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에게 평안한 삶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성도들이 이 점에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화평, 성령의 열매로서의 화평은 결코 평안한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평강이란 환란 속에서 누리는 평강이요, 박해와 시련 속에서 누리는 평강입니다. 이 평안은 구원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재앙과 저주의 삶이요, 질곡의 삶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런 삶을 살라고 하면 미쳐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성도들은 이런 가운데서 우리 속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지고, 일치되며, 형성되는 하나님의 손길로 여기며,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너무나 기복적이고 육신적인지라 ‘하나님의 화평’, 성령의 열매로서의 평강보다는 편안함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주님께 그것을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난 후로는 마음에 참된 평안을 잃고 살았습니다. 항상 불안과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마음 속에 안고 사는 이런 내재적 불안, 염려, 걱정, 두려움, 공포 등을 없애기 위해서 참으로 다양한 노력을 다 해 보았습니다. 철학과 종교는 모두 내적 불안들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인간들이 만든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행복해 보이고 걱정과 불안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속으로는 한두 가지 깊은 시름을 안고 사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평강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절대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령 없이도 얼마든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화 조약도 맺고 만나서 화해도 하고, 평화의 노래를 불러가며 노래도 부릅니다. 국가와 국가 간에, 인종과 인종 사이에, 민족과 민족 사이에, 회사와 회사 사이, 이웃 사이에, 가족들 간에도 평화를 원합니다. 그래서 법(law)과 규칙(rule)을 만들어서 공정한 경쟁을 하자,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외칩니다. 법과 제도 아래서 반칙을 하지 말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형제간에도, 친구 간에도 원하는 평화 대신 불화, 다툼, 시기, 경쟁, 원수 맺음, 분노 등이 주류를 이루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의 열매인 화평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전쟁을 하고, 싸웁니까?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지간이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역시 같은 아버지를 두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였지만 그들 사이에는 평화가 없없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친 누이였지만 그들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다윗과 압살롬은 부자지간이지만 평화가 없었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고 같은 설교를 듣고, 말씀을 배웠지만 그들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한일 관계, 한중 관계, 한미 관계 등 한국은 지금 어느 나라와도 평화의 관계가 아닙니다. 적고 힘이 없는 나라여서 그렇습니까? 그럼 미국을 보십시오. 미국과 북한, 미국과 이라크, 미국과 리비아, 미국과 이란, 미국과 유럽 어디...평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주위의 모든 국가들과 평화가 없습니다. 이것이 나라와 민족만의 문제입니까? 부부 관계도 평화가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럼 돈 많은 부부들은 다 화목하게 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격의 차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격은 차이가 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럼 원인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인 [평강]이 마음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주신 평강, 성령의 열매인 평강이 없다면 여러분은 언제나 갈등과 분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가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은 공연할 때 박수 소리가 평소보다 좀 더 작아도 우울해 하고 불안해합니다. 어떤 이는 자기 이야기가 방송이나 신문에 적게 나온 것만으로도 불안해합니다. 어떤 이는 관중이 적어도 불안해하고, 정치인들은 여론 조사의 숫자에도 마음이 요동합니다. 어떤 이는 자기 이름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에도 신경이 쓰이고 불안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친한 사람이 전화를 자주 해 주지 않는다고 전전긍긍하는 것을 보이기도 합니다. 자주 찾아와 주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의사는 병자가 적어도 걱정이고, 변호사는 분쟁에 휩쓸린 사람이 없어도 걱정입니다. 장사꾼들은 손님이 적어도 걱정이고, 잘되면 잘되어도 걱정입니다. 주위에 같은 가게들이 마구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문제는 밖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주님이 주신 평강이 없다면 이 현장의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매우 조잡합니다. 왜냐하면 불안과 걱정, 염려와 근심,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원인에 바른 처방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어려운 일이나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건강 때문에, 가족 간의 갈등 때문에 평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불안과 걱정거리입니다. 세상은 그것이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이 원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죄가 원인이라고 말씀합니다.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5장과 에베소서 2장을 펴 보십시오. 가족이나 친지, 친구 간, 국가 간의 화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직장 동료들, 이웃 간에 화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인 우리들이 가장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요건은 주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도다.](롬5:1). 우리가 누리는 화평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peace with God)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어떤 평강도 거짓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면 마음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불안과 염려,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생각과 사상에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의 양심을 누그러뜨리고, 완화시키는 각종 달콤한 위로와 심리적 치료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각종 상담은 모두 거짓 평안을 줄 뿐입니다. 죄 의식과 죄책감을 덜어 주려는 정신과 상담이나 약물 치료나 각종 명상 프로그램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시도들은 마음의 평안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본질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은즉 화해하게 된 자로서 더욱더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임이라.](롬5:10). 하나님과 원수 관계로 있는 한 그에게는 어떤 평강도 없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시느니라.](사57:21).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그는 평강이 없습니다. 종교적 수행을 하든지 명상을 하든지, 심신을 단련하든지, 각종 선행을 하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평강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 포기하고 오직 내 갈 길로만 가자!”고 외쳐도 평강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그 피가 나의 죄를 씻으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가 되고,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원수된 것을 무너뜨리고 화해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들, 형제와 형제, 이웃과 이웃 등 모든 것을 화해케 하고 화평을 줍니다. [원수 되게 하는 것 곧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그 원수 되게 하는 것을 멸하사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 /그분께서/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에게 화평을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그들에게 화평을 선포하셨으니](엡2:15~1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죽음은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통해 죄인 된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케 하셨습니다. 이로써 죄로 빚어지는 공포와 근심과 두려움, 모든 불안과 염려는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아들로서 받아 주심으로 더 이상 걱정도 염려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형벌에 대한 공포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인으로서 받아야 할 심판 등에 대한 모든 근원적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짐으로써 우리는 참다운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大使)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너희에게 간청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후5:20). 사람들이 강 같은 평안을 얻고 싶어 하며,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살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제시하신 평강의 길을 외면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품과 지위와 경제력을 가진 어떤 한 사람이 “자네들 보기에 내가 행복해 보이는가?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나는 지금 이 날까지 단 하루도 평안히 자 본 적이 없는 사람일세.”라며 자신의 심적 고통을 토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게도 동일하게 적용해 보았습니다. “자네들 보기에 내가 불행해 보이는가? 가진 것도 없고, 인품도 없고, 지위도 없고, 별로 재주도 없지만 나는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살아간다네!” 이것이 저의 간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이 주신 평안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누구도 성령의 열매인 평강/평안/화평을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화평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가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그들이 스스로 굽은 길을 만들었으니 누구든지 거기로 가는 자는 화평을 알지 못하리로다.](사59:8). 길 되신 주님을 알지 못하면 그가 어디로 가든지 화평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화평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롬3:17). 화평은 얻겠다고 해서 얻는 것이 아니며 노력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의 길이신 주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화평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크게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평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있으면 걱정거리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걱정거리가 없다.”, “좋은 직장이 있으면 걱정거리가 없다.” 는 식입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면 마음에 평안이 저절로 찾아오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안은 내 손에 무엇을 소유했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무엇이 없었으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게 속 썩이는 누구만 없었으면 평안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수 같은 누구만 없으면, 골치 아픈 누구만 없으면 걱정할 일이 없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 안에 없는 평안은 외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거나 피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해결책이 될지 몰라도 성령의 열매로서 평강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평강은 외적 환경이나 사건이나 사람들과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화평은 갈보리 십자가를 통과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화평, 평강, 평안의 근거는 십자가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모든 걱정, 근심, 갈등, 두려움, 염려들을 일시에 제거하는 그런 강 같은 평강이 마음에 넘치게 됩니다. 내 안에 평강이 있다면 불화와 다툼, 분냄과 시기와 같은 그런 육신적인 일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평강이 있으면 여러분의 말과 행동은 예수님처럼 나오고, 예수님처럼 용서하게 되며, 예수님처럼 참고 견디게 되며,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주님이 주신 평강을 잃어버리면 여러분의 육신적 기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소한 짜증에서부터 시작하여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매사에 부정적이고 삐딱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육신의 행위들인데 이는 단지 육신의 일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 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의 화평(Peace of God)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주님이 믿는 자들 안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화평의 근거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범죄들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불법들로 인함이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53:5).

요즘 여러분 주위에 여러분을 자극하는 어떤 일들이나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이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교회의 형제일 수도 있습니다. 전에 어떤 분은 수련회를 함께 가자고 했더니, “이번 수련회에 누구도 갑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형제가 가면 자신이 안가고, 그 형제가 안 가면 자신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는 형제들 사이에서도 원수 맺음, 쓴 뿌리, 용서하지 못하는 일은 이제 매우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사이에 진정한 화해와 용서, 평안이 임할 수 있습니까? 인격 수양을 하려면 몇 년이 필요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둘 중에 하나를 없애 버리면 교회는 모두 떠나야 할 것입니다. A형제의 문제로 B형제가 떠나면 그런 꼴을 본 C형제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모두 갈보리의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화해, 용서를 통한 평강은 십자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음이니라.](골1:20). 갈보리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 긍휼, 은혜, 평강이 모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의 평강을 받아 마음에 거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화평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 속에서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이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맺어진 관계임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형제와 형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이웃과 이웃, 나와 원수들 사이]에까지 반드시 갈보리 십자가를 세워두어야 합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속에 넘쳐 흘러 들어오게 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본성적 성품으로 참으면서 웃어 보아야 몇 번이나 할 수 있겠으며, 얼마나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힘과 성품으로 행한 일은 설령 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인정을 받고 대가를 받으려 듭니다. “내가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런 부류입니다.

우리의 화평은 무엇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됩니다.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엡2:14).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임하게 하신 “하나님의 왕국”을 통치해 주시면 “의와 화평과 희락”(롬14:17)이 넘쳐 납니다.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님을 통한 화평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화평을 이루는 일”은 문제가 해결되는 그 시간 동안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한 육신적 일들이 내 안에 차고 넘치게 됩니다. 우리는 문제의 해결과 상관없이 그 가운데서 평안해야 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봅시다. 누가 암이 걸렸습니다. 이것은 당사자나 가족들에게 예사 문제가 아닙니다. 기쁨으로 평안하게 감당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물론 기도하고 좋은 의사를 만나 암을 치유함으로써 마음에 평강이 임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암을 몸에 지니고 있는 동안에 평강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평강을 통해 오히려 질병을 이겨내야 합니다. 몸의 병은 못 이기더라도 영혼은 오히려 평강을 넘어선 넘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질병 가운데서 누리는 평강과 기쁨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바로 그런데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평강은 암(癌)이란 질병의 유무와 상관없이 우리 속에서 우리 마음을 다스려 줄 그런 평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련과 환란을 주시는 것은 그런 것을 통해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질병이나 파산이나 이별이나 갈등 속에서 평강, 기쁨, 오래 참음, 인내, 절제, 친절, 선함, 온유 같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불같은 시련 속에서 성도들이 화평을 누리고 기뻐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문제가 좋게 해결된 줄로 생각합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도 없고, 환경이 나아진 것도 없고, 세상이 바뀐 것도 없는데 마음에 평강이 있고, 기쁨이 있을 때 사람들은 놀라게 됩니다. 저는 우리 주변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많이 보고 듣습니다. 가족 관계, 사업 관계, 교회 문제 등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통해 마음이 상하고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들을 봅니다. 동시에 그들 안에 주님이 주신 평강이 있는가를 함께 봅니다. 평강이 없는 분들의 특징은 일단 ‘피하자’입니다. 도피 심리입니다. 피하는 것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것들은 어떻게 합니까? ‘참자, 견디자’입니다. 사랑으로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면 이 역시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내 속에 잠복시켜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언젠가는 마음속에서 부풀어 오르고 올라서 몇 배나 더 크게 터져 나오고 맙니다.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의 해결 방법은 “싸우자, 따지자”입니다. 그렇게 해서 잘 해결되면 좋겠지만 여러분이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파괴되고 부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을 부르시고,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하시고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혼란 가운데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는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이시기 때문이라.](고전14:33).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화평을 정하셨습니다. [[주]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화평을 정하시리니 이는 또한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셨음이니이다.](사26:12).

여러분이 평강을 편하게 사는 것, 편안과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은 순복음 교회를 하시다가 바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안 후에 3년 만에 기복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추구하는 순복음 교회를 사임하고 고난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간판만 달아도 성도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순복음 교회대신 전도를 해도 잘 찾아오지 않는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침례교회를 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편할 것 같습니까? 편하기로는 순복음 교회가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럼 마음에 평강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입니다. 그 목사님은 가족들의 반대, 특히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회를 옮기고 새로 개척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고생길이 훤히 열렸습니다.

그때 그분이 본 구절이 이것입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을 실족하게 할 것이 없으리로다.](시119:165). 큰 평안이 누구에게 옵니까?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옵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큰 평안이 옵니다. 박해나 시련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생 끝이란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큰 평안은 시련과 박해와 가난과 조롱과 사람들의 모욕을 능히 이길 수 있고, 그보다 훨씬 크다는 뜻에서 “큰 평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평안이라면 큰 시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큰 평안이라면 엄청난 시련도 이길 수 있습니다. 큰 평안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실하게 할 것이 없으리로다]입니다. 그 무엇도 실족할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네 자녀들이 다 [주]께 가르침을 받으리니 네 자녀들에게는 큰 평강이 있을 것이며](사54:13). 우리는 위에서 본 ‘큰 평안’(시119:165)과 지금 말씀하는 ‘큰 평강’(사54:13)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음을 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큰 평안이 주께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는 ‘큰 평강’이 있다고 합니다. 큰 평강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너는 의 안에서 굳게 서리라. 네가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인즉 학대가 네게서 멀리 떨어질 것이요, 두려움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인즉 /그것도/ 멀리 떨어지리라.] (사54:14). 평강의 결과가 놀랍지 않습니까? 큰 평강의 결과는 ‘의 안에서 굳게 선다. 두려워하지 않는다.’입니다.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의 화평은 어떻게 누립니까? 이미 앞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것의 핵심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 사람들에게는 성경 말씀을 통해 큰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첫째, 말씀을 사랑하고(시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을 실족하게 할 것이 없으리로다.](시119:165).

둘째, 주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사54:13). [네 자녀들이 다 [주]께 가르침을 받으리니 네 자녀들에게는 큰 평강이 있을 것이며](사54:13).

셋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네가 내 명령들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하였더라면 네 화평이 강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사48:18).

넷째,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말씀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빌4:9).

성령의 열매는 영이요 생명인 말씀의 씨앗을 통해 맺혀지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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