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0:8-11
요절: 출애굽기 20:8
오늘은 십계명 중에 네
번째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계명이어서 설교하기 상당히 어려운 말씀이 되었습니다.
흔히 오늘날 성도들이 범하는 오류는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의 주일로,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침례(세례)로
바뀌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여전히 교회에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을 당당히
설교하고, 성도들은 그것을 주일 성수로 알아서 이해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안식일과 주의 첫 날은 전혀 다른 것이며,
주님이 바꾸신 적이 없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표적이며,
언약이었습니다(출31:13,17, 겔20:12,20).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출31:17).
여기에 교회는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또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였나니...](겔20:12a).
역시 마찬가지로 교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니라. 안식일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이
되리니...](겔20:20a).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표적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도들, 교회와는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하지만 몇몇 교단들, 특히 몰몬교도들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칠 안식교도들은 개신교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배교했다고 단정합니다.
이들은 구약과 신약을 나눌 줄 모르고, 이스라엘과 교회를
제대로 나눌 줄 모르는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는 안식일의 표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피로 맺은 언약만
존재할 뿐입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표적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는데, 안식일이 바로 표적이란 것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사역동안 유대인들과 ‘안식일 논쟁’을
통해 그들에게 주님이 누구인지를 계시해 주시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곧 안식일의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마12:8,막2:28, 눅6:5)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내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거하는 나그네나 아무 일도 하지 말라.](10). 이 두 말씀을
비교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바로 구약에서
안식일을 제정해 주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이 이스라엘에게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표적으로 주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은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과 가장 많이 부딪혔던
부분이 ‘안식일 준수’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바리새인들이 활동하던 시기보다 더 엄격하게 제 사계명을
잘 지킨 적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 지켰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해석과 적용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주님이 당시 유대의 주류 층에 위치한 율법사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의 성경 해석이 잘못 되었음을 보여 준 대표적인
구절이 제 4 계명인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성경 해석이었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을 만드신 것이요,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니](막2:27). 주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느라 전혀 안식을 얻지 못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몸이 아파도 안식일이란 이유로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배가 고파도 안식일이란 이유로 밀 이삭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안식일이
아니라 종교 경찰이 지키고 감시하는 ‘고행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형식보다 본질을 가르치셨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법을 정하시고 주신 이유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네 번째 계명을 제정하신 주님의 뜻과 교훈을
정확히 배우고, 신약 성도들이 어떻게 그 말씀을 적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 계명은 어떤 특별한
일을 하라, 어떤 일을 하지 말라는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 주신 한 날, 즉 주의 마지막 날에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는 계명입니다. “오늘은 편히 쉬어!” 이것이 주님의
지엄하신 명령입니다. 군대에 가면 열심히 훈련을 받다가
지휘관이 ‘쉬어’ 또는 ‘편히 쉬어!’를 명령합니다. 쉬는
것이 명령입니다. 인간은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하지만 또한
쉼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쉼을 명하신 분은 사람을
지으시고 일을 하라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 있었지만 주님은 쉼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안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안식과 평안을 찾으려 한다면 절대로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육체적 노동을 쉬는
안식일이 주어졌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혼에 쉼을 얻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8-29). 주님은 안식일을
주시는 대신 혼의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쉬라고 하는 날, 쉬라는 명령을 받아서 쉬는 것이 진정한
쉼이며, 안식이지 쉬라는 명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쉬거나,
놀아 버리는 것은 안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일거리가
없어서 아니면 게을러서 노는 사람이 쉬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을 해야 할 때는
부지런히 수고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엿새
동안은 네가 수고하고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나](9). 일을 하지
않고 쉬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며 노동없는 안식은 안식이
아닙니다. 주님은 엿새 동안은 수고하고 모든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쉬라고 한 바로 그날에 믿음으로
순종해서 쉴 때 우리는 편히 쉬는 안식이 바로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일이 됩니다. 주님은 자신의 음성에
순종하고, 그 명령을 지켜 준행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데,
아무 일을 하지 않고 단지 쉬기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복이 오늘 본문의 4번째 계명입니다.
일견 생각하면 십계명 중 가장 지키기 쉬운 계명이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돈드는 일도 아니고, 힘드는 일도 아니며,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고, 일꾼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제 4
계명을 지키는데는 학문도, 지식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잘못 지킨 계명 가운데 하나가 바로
네 번째 계명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하라는 계명도 무겁지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라는 계명 역시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마음에 탐욕이 있으면
결코 지킬 수 없습니다. 더 벌고 싶은데 쉬라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쉬라는 말은 절제의 영이
없으면 힘듭니다. 그들은 바빌론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무려
490년을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고,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대언자들을 통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반복해서 명령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8).
주님은 안식일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관습적으로
생각없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 날은 무엇인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날이며,
인간은 지음받은 첫날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히 구별하셨으니 이는 이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며 만든 자신의 모든 일을 떠나 안식(安息)하셨음이더라.](창2:3).
주님은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구별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창조주를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12:1에
[이제 /너는/ 젊은 시절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전12:1a)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정확하게 안식일을 지킨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를 기억한다면 농경 신, 바람 신, 물신과 같은 가나안
민족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생각하거나 그리 마음이 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창조주에 대한 창조 신앙이야말로 믿음의
출발이며, 기초입니다. 오늘날 성경에서 가장 많은 공격을
받는 부분은 단연 창세기입니다. 과학이나 철학의 이름으로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하고, 창조 사역을 신화나 우화로
돌리려는 집요한 공격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세에
사람들이 회복해야 할 신앙, 대환란 때 이 세상에 천사들이
전하는 복음은 바로 창조주에 대한 창조 신앙입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계14:7).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듯이
우리는 주의 첫날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매주 주의 첫날에 모여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말씀을 듣는다면 그는 결코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음
받은 피조물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고 지으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지키고
다스리도록 복 주시고, 사명을 주신 첫 날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킴으로써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기억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게 되며, 존재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허무하게 지음 받지 않았으며, 저절로 생겨나지도 않았으며,
원시 동물에서 진화한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이요, 또 모든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음이니이다, 하더라.](계4:11). 피조물은
지음 받은 목적을 알고, 그 목적대로 살 때 허무하지 않고,
참된 가치와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시
창조되었습니다. [나는 [주] 곧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사43:15).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 행하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실을
확인하는 믿음과 신앙 고백의 시간으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안식일을 왜 지키지 않는가?란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안식일을 교회가 지키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외로 안식일을 지키는 종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약을 들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할말을 읽고 당황하게
됩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첫 창조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창조, 즉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창조되었습니까? 여섯 째 날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첫 사람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여섯째 날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날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 /효력이/ 있기 때문이라.](갈6:15). 우리는 새롭게
지음받은 피조물이기에 구약의 안식일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의
첫날에 함께 모여 주님을 기억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창조 신앙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라면 주일 예배는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을 새롭게 기억하고 능력을 덧입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우리를 구별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그 까닭은 이것이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기 때문이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출31:13).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에 할례를 행함으로써
자신들이 주님의 백성이란 언약을 기억하게 하셨고,
안식일을 지키게 하심으로써 주님이 자신들을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셨습니다. 할례와 안식일은
유대인들을 지상의 모든 민족들과 확연하게 구분하는
요소였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쉰다는
것은 다른 민족들에게 창조주와 창세기를 자연스럽게
선포하는 말씀 선포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안식일을 전혀 지키지 않고 산다면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신
구분점이 없어지고, 이교도들과 똑같아 지고 맙니다. [그녀의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고 내 거룩한 것들을 더럽히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의 차이를 전혀 보이지 아니하며 자기 눈을 가려
내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서
더럽혀졌느니라.](겔22:26). 차이를 없애는 것, 구분을 없애는
것은 차이와 구분을 두신 주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 어느 민족도 안식일을 지키는 민족이 없습니다.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혼자만 하게 되면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이방 민족들과
저절로 구별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의 주된 목적은 그들이 ‘자신들을
거룩히 구별하는 주님’을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매주 한
번 모든 일을 쉬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은 신앙 생활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양을 치는
사람들이 바쁜 계절에 하루 쉬는 것은 엄청난 자기 부인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일을 중단하라고 하면 미칠 지경이 되고 맙니다.
안식일이라고 급한 일, 중요한 일이 없으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려면 생활의 일정, 계획 등이 안식일을
최우선 순위로 고려하게 되고, 서로가 그 날을 피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안식일이 날들의 중심이 되며, 생활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늘날 우리는 이스라엘과 달리 그런 절기와
명절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해 교회를 세상과
거룩히 구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히 구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또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내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오니 이것은
그들도 진리를 통해 거룩히 구별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9).
교회는 진리로 낳음을 받았고, 진리로 거룩히 구별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히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자기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히13:12).
교회는 성령을 통해 거룩히 구별됩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 택하심을 받고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에 이른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을지어다.](벧전1:2).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 대신 진리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성령을 통해 우리를 구별하신
주를 알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주님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영적인 열매를 맺음으로써 주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주님의 풍성한
복, 공급하심을 체험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7일간
일하는 것이나 6일간 일하고 하루 쉬는 것이나 소득의
차이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수확을 얻었습니다. 이는 역설의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늘 체험하며 살아 있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이미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두 배의 빵 곧
한 사람을 위하여 이 오멜씩 거두니라. 회중의 모든
치리자가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나니 곧 내일은 안식하는 날로서 [주]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오늘 굽고 끓일 것도
끓이고 남은 것은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하셨느니라.](출16:22-23). 주님은 여섯째 날에 두 배를
주심으로써 일곱 째 날에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걱정할
것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선한 손길과 은혜의
풍성한 공급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안식일에 쉬는 것이
바늘 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법입니다. 하루만
지나면 썩어 버리던 만나가 안식일에는 썩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은 광야에서 이들이 매주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무려 40년이나 그들은 매주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남들과 똑같이 일해서 똑같은 수확을 거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하심을 통해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바른 경제관을
소유하게 됩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킴으로써 우리는 돈(물질)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주일
예배를 드리느라 사업이 망했다든가 건강을 망쳤다든가
치명적인 손해를 보았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황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때로
박해를 받기도 하고, 큰 손해를 입기도 합니다. 신앙의
박해를 받는 경우가 아닌 일반적인 성도들의 교회 생활에서
주일 예배로 인해 여러분이 받는 피해는 없습니다. 오히려
일을 하느라 예배를 빠뜨릴 때 입게 되는 손해가 훨씬
큽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인도하심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전쟁이 나면 안식일을 지킬 수 없습니다.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면 안식일을 지킬 수 없습니다. 가족이나 내가
병이 들거나 사고가 나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려면 주님께서
전쟁을 막아 주셔야 하며, 포로로 사로 잡혀가지 않아야
하고, 병이 들거나 사고가 나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인도하심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주님은 그것을 행할 힘을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고자 하는 자에게 주님은 복을 주십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 선하신 손길, 풍성한 긍휼이 우리를 두르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까지라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겠다고 결단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선한 결심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한 몸에 쉼을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은 물론이려니와 소와 나귀, 남종과
여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쉼을 명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거하는 나그네나 아무 일도
하지 말라.](10). 하루 쉬는 것은 우리의 몸과 기분을
상쾌하게 하기 위해 만드신 주님의 배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친히 창조하신 창조주로써 우리 몸의 상태, 영혼의
상관 관계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나의 몸의 상태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라. 그리하면 네 소와 나귀가
안식할 것이며 네 여종의 아들과 나그네가 원기를
회복하리라.](출23:12). 몸은 쉽게 지칩니다. 과로(過勞)하면
쉽게 병이 들고, 빨리 죽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킴으로써 몸은 원기를 회복하게(refresh) 됩니다.
현대인들은 재충전이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몸이나
마음이 지치고 고갈될 때 재충천이 필요하다며 여행을
떠나거나 활동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6일동안 일하고 하루 쉼으로써 원기를 회복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원기를 회복하는 대신 주의
첫날 주님께 예배를 통해 원기를 회복합니다. 이는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며,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쉼의 원리는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상쾌함을
얻는 길입니다. [그분께서 이 백성에게 이르시되, 이것이
안식이니 너희가 피곤한 자로 하여금 이 안식으로 안식하게
하라. 이것이 상쾌함이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고자 하지
아니하므로](사28:12). 지치고 낙심될 때 주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집회 시간에 놀러 가는 것은
몸의 피곤함을 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은 몸의 피곤함을 이기는
영의 상쾌함을 줍니다. 회개하는 일은 마음에 상쾌함을
줍니다.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눈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抹消)될 것이요,](행3:19). 주님은 회개하는
심령에게 상쾌함을 주십니다. 죄를 안고 있는 것은 더운
여름 날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무거운 짐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이는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므로 내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것같이
되었음이니이다. 셀라.](시32:3-4)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회개할 때 우리는 새롭게 됩니다.
성도들의 교제는 영을 시원하게 합니다. 악한 사귐은 선한
행실을 부패시키지만, 성도의 영적 교제는 우리에게 새 힘을
줍니다. 바울 사도는 서로간에 새 힘을 얻기를 구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새 힘을 얻게 하시기를 구하라.](롬15:32). 바울은
스데바나를 비롯한 몇몇 형제들로 인해 자신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이 시원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나와
너희의 영을 시원하게 하였음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인정하라.](고전16:18). 우리는 서로 간에 영을
시원하게 하고, 새 힘을 얻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만나기만 해도 마음이 기쁘고,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는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형제와 형제들은 서로 위로를 주고 받고,
기쁨을 주고 받음으로 영이 활력을 받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너희의 위로를 통하여 위로를 받았고 참으로 디도의
기쁨으로 인하여 우리가 넘치도록 더욱 기뻐하였으니 이는 그의 영이 너희 모두로 인하여 활력을 얻었음이라.](고후7:13).
바울도 자주 낙담하고 지쳤지만 그 때마다 형제들로 인해 새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상쾌하게, 형제들을
시원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했습니다.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기
원하노니 이는 그가 자주 나를 유쾌하게 하고 나의 쇠사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딤후1:16).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형제들이 얼마나 다른 형제들에게 힘을 주었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도 이 점에서는 조금도 뒤쳐지지
않았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인하여
상쾌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도 네 사랑 안에서 큰 기쁨과
안위를 얻었노라.](몬1:7), [참으로 형제여, 나로 하여금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주
안에서 상쾌하게 하라.](몬1:20). 주일의 집회로 모이는 것은
이런 원기 회복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주님이 주신
시간, 날들이 다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하루하루의 날들은 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란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온 땅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주님의 소유를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 때 주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강도라고 불렀습니다. 매일 매일의 날들(시간) 역시 주님의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가 다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인정할 때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우리의
시간이 다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시간에
얽매여 다급하게 되거나 허둥대지 않습니다. 시간이 없다,
급하다는 이유로 편법을 쓰고, 인내하지 못하고, 죄를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안식일을 기억하려 거룩히
지킴으로써 이런 시간 개념을 모두 주님의 때에, 정하신
때에 이루어 주시도록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날들’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 함으로써 주님이 주신 날들을 단축시킬 수도
있고, 날들을 늘리기도 합니다. 성경은 지상에서 우리의
날들이 길어지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이 땅에서 날들이
길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걷는
것입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길로 걸을지니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또 잘되고
너희가 소유할 땅에서 너희 날들이 길리라.](신5:33).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시간을 되찾으라. 이는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니라.](엡5:16), [바깥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걷고
시간을 되찾으라.](골4:5). 주님은 시간을 구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순간 이미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여분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인생의 모든 날들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이루실 천년 왕국을 소망하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우리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음이니라, 하라.](출31:17). 주님께서 6일 동안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느라 지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곤함을 모르십니다. 주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된 것은 창조하신 결과에 대한 만족함을
드러낸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 함으로써 하나님의
안식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주님은 범죄한
인간들을 완전히 구속하시는 그날까지 결코 안식을 얻을 수
없게 되셨습니다. 주님은 범죄하는 사람들로 인해 뜻을
후회하시기도 하시고, 지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7:6절을
보십시오. [[주]가 말하노라. 네가 나를 버리고 뒤로
물러갔으므로 내가 너를 치려고 내 손을 내밀어 너를
멸하리니 내가 돌이키는 일에도 지쳤느니라.](렘17:616).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 백번은 넘게 뜻을 돌이켰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셔서 복을 주시고, 모든 것을 주신
이스라엘의 반역과 배교,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해 주님은
이제 지쳤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주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지치시지 않는 분이시지만 두 가지 일에는
지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범죄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돌이키는 일에 지치셨고, 이스라엘의 위선에
지치셨습니다. [내 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명절들을
미워하나니 그것들이 내게는 괴로움이니라.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내가 지쳤느니라.](사1:14). 주님 역시 간절히
안식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일하시고 계십니다. [...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5:17).
주님은 안식일을 통해 장차 다가올 완전한 안식의 모형을
제시하고, 그것을 다시 찾으시고자 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천년 왕국의 건설은 주님이 다시
안식을 찾으시는 예언적 파노라마입니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건설하신 영원한 왕국이란 예언적
소망을 갖게 해 줍니다. 안식일은 예언적 의미가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 참 안식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9-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한
안식이 남아 있나니 이는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들을/ 그치신 것같이 이미 자기
일들을 그쳤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쓸지니 이것은 아무도 믿지 아니하던 그
동일한 본을 따라 넘어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4:9-11).
우리에게는 안식이 남아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영적 타락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타락하고
범죄한 유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적 타락의 회복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게
함으로써 바로 잡고자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7:21-22절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여
안식일에 짐을 나르거나 예루살렘의 문들로 들여오지 말고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어 옮기지도 말며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한 대로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21-22). 유다는 먼저 안식일
준수를 다시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주님은
우상 숭배의 죄와 더불어 안식일을 범한 죄를 지적하신 것은
이들이 안식일 준수를 통해 영적 회복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인간들을 위해 제정하신
것이지만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이라고 불립니다(출20:10).
예레미야 17:2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으며 자기 목을 곧게
하여 듣지도 아니하고 교훈을 받지도 아니하였느니라.](23).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일을 안하면 손해가 얼마인데? 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깔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물질을 동시에 숭배할 수
없습니다(눅16:13). 주님은 이들이 안식일만 제대로 준수하면
심판을 철회하고, 재앙이 아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부지런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안식일에 이 도시의 문들을 통해
짐을 들여오지 아니하고 오직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여 그
날에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면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들과
통치자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도시의 문들로 들어오되
그들과 그들의 통치자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그리할 것이요, 이 도시는 영원히 있을 것이며
또 사람들이 유다의 도시들과 예루살렘 주위의 장소들과
베냐민 땅과 평야와 산지와 남쪽으로부터 와서 번제(燔祭)
헌물과 희생물과 음식 헌물과 향을 [주]의 집으로 가져오고
또 찬양의 희생물을 가져오리라.](렘17:24-26). 재앙과 심판이
정해진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방법이 바로 안식일
준수라는 지극히 평범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재앙을
복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한 가지 작은 일에서부터 신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 바로 잡아간다면 나머지 모든 영적 질서들이
바로 잡히게 되며,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이 만약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도시는 멸망대신 영원히 거하며,
다윗 왕조는 단절되지 않을 것이며,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왜 안식일이 아닌 주의 첫날을 지키는가?는
이미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의 첫날은
율법으로 정해진 안식일보다 훨씬 자유로우면서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1. 제자들이 보여 준 본 때문입니다(행20:7). 제자들은 주의
첫날에 모였고, 빵을 떼었고, 설교했습니다.
2. 성도들의 본 때문입니다(고전16:2).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의 첫날에 모여 집회를 가졌고, 헌금을 했습니다.
3. 성령께서 주의 첫날에 능력을 주셨습니다(행2:1-4).
예수님께서 주의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요20:1).
4. 안식일은 다시 지켜질 것입니다(골2:17). 사도 바울은
안식일을 다가 올 것들의 그림자라고 말했는데, 이는 천년
왕국이 진정한 안식일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계20:1-7).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사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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