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31:12-18 요절: 출애굽기 31:
이미 앞에서 십계명을 강해할 때 안식일에 대해서 한 번 다루었습니다(11/16/03-주일 예배). 많은 부분이 반복되지만 사도 베드로가 [그러므로 비록 너희가 이것들을 알고 현재의 진리에 굳게 서 있을지라도 너희로 하여금 항상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는 일에 내가 게으르지 아니하겠노라. 참으로 내가 이 장막(帳幕)에 있는 동안에 너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여 일깨우는 것이 합당한 줄로 생각하노니](벧후1:12-13)란 말씀대로 다시 한번 기억나게 하며, 일깨우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하여 그냥 통과(skip)하지 않고 설교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준수할 것을 명하셨는데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에게 전혀 명령으로 주시지 않았던 율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이 창조 때부터 즉 아담에서부터 지켜지던 절기인 줄로 아는데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오직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언약이며, 율법이요, 표적입니다. 어떤 이방 민족도 안식일에 대한 법이 없었으며, 아담에서부터 모세 이전까지는 안식일을 준수한 성경적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규례는 신약 성도들 즉 교회 성도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흔히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계승한 것처럼 생각해서 그들이 행하던 관례나 율법을 계승해야 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저주받을 교리입니다.
구약의 어떤 율법도 신약에서 구원의 조건이나 규례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십시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율법과 이방인들의 교회에 대한 구원 교리를 다루었습니다. 그 때 그들에게는 안식일 문제보다 ‘할례’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형제들을 가르치며 이르되, 너희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매] (행15:1). 할례는 구원의 필수 요건인가? 그렇지 않는가? 의 문제입니다. 할례는 안식일과 달리 아브라함 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요, 명령입니다. 바리새파에 속한 신자들은 즉시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에 속한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이르되, 그들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니라.](행15:5).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많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일어났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일을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함께 모이니 많은 논쟁이 있은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시려고 매우 오래 전에 우리 가운데서 /나를/ 선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같이 그들에게도 주사 그들에게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사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 오직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행15:6~11).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이 둘이 신약 교회 구원 교리의 핵심입니다. 야고보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내 판결은 이러하니 곧 우리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그들에게 글을 써서 우상들의 더러움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게 하자는 것이라.] (행15:19~20). 이것 역시 율법은 아니고 권고 사항이었습니다. 여기서 할례, 모세의 율법, 안식일 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교회들에게 안식일만은 지키게 하자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신약 교회에 의무나 명령으로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교회 서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바울 서신에는 안식일 문제가 단 한번만 언급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나마 지키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골2:16). 안식일, 월삭, 절기 등은 교회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공생애 사역 동안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문제를 주님께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안식일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모세의 율법을 파괴하는 범법자요, 죄인이라고 판단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안식일에 대한 올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케이스마다 안식일이란 율법의 조문에 대해 바른 해석을 내려 주곤 하셨습니다.
몇 가지 케이스를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비벼 먹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볼 때 안식일을 범한 행위였고, 제자들의 범법 행위에 대해서 주님께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전시하는 빵 곧 제사장 외에 자기나 자기와 함께한 자들이 먹으면 율법에 어긋나는 빵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는 안식일에 /성/전 안의 제사장들이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12:3-5). 이것은 유대인들이 구약을 아무리 읽어도 알지 못했으며, 실제로 적용하지 못했던 문제입니다. “안식일에 성전 안의 제사장들이 안식을 범하여 죄가 없다.”(대상9:32). 이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맞습니다. 안식일마다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서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일상의 업무는 안식일이라고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불을 피우고, 빵을 놓아야 합니다. 심지어 난지 8일째 되는 아이들은 안식일일지라도 할례를 행하기도 했습니다(요7:22). 우리는 모두 영적 제사장들입니다(벧전2:5,9).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입니다(계20:6). 제사장들이 주님을 섬기는데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을 뿐 아니라 당연히 섬겨야 하듯이 우리는 모두 영적 제사장으로서 안식일에 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저는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조명과 통찰력을 얻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성경 어느 부분을 읽어도 현재 나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 예외 규정을 성경으로 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니 이는 사람의 아들이 곧 안식일의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마12:6~8).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주님을 섬기면서 일을 했고, 안식을 취하지 않았는데 주님의 제자들은 성전보다 더 크신 이이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당연히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안식일 법에 해당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의 취지를 정확히 파악한 후에 적용하고 해석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하신 호세아 6:6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복음서에서 율법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매우 자주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의 정신을 배제한 실행, 율법의 근본 취지를 무시한 행위는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며, 외양보다는 근본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긍휼이 희생물보다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율법의 형식이나 실행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내용과 정신이 빠져버린 것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음이라.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저것도 행하지 않은 채 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마23:23). 안식일을 강제로 지키도록 하면서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하고 짐이 되게 하는 것은 율법의 왜곡입니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곧 안식일의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마12:8). 이는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 자신임을 선포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은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혁명적인 성경 해석이며, 폭탄과 같은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안식일을 제정하셨고, 안식일을 주신 분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십계명 중에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하신 분이 자신임을 선포했는데 이는 곧 자신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는 수십 가지의 세부 항목을 정해 놓고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거기에 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으매 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그분께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 맞나이까? 하니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의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붙잡아 올리지 아니하겠느냐? 하물며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율법에 맞느니라, 하시고](마12:10-12). 안식일에 선을 행해도 된다!! 이것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주님의 법 해석이요, 적용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안식일에는 선을 행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더욱 부지런히 선을 행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성경에 따라 안식일에 대한 분명한 교리와 실행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의 주일로 바뀌었다고 말하고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의 오해요, 왜곡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교회에 주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적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모이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廢)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저는 신약의 영적 제사장들이 구약의 유대인들보다 더욱 열심히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설교를 통해 주일의 예배 모임에 대해 강조하다 보면 안식일 준수를 촉구하는 것처럼 듣는 성도들이 있는데 안식일을 지키라고 설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주일 성수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모이기를 힘쓰고, 예배를 드리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토요일이 아닌 주의 첫날에 모이는가? 그것은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날이 국가 공휴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토요일이 공휴일이라면 당연히 토요일에 모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요일 제도는 콘스탄틴 황제가 정한 것입니다. 첫째 날(일요일)을 태양의 날이자 공휴일로 정한 것은 당시 로마에서 인기 있던 미트라(태양신)의 교도들을 배려한 색채가 짙었습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토요일)을 예배일로 지켜오던 유대인들과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과 미트라 교도등 대다수의 로마인들이 황제의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일요일 휴업령은 제국 내에 서서히 정착되었습니다. 주후 321년에 일요일을 예배의 날로 규정한 법령을 내렸습니다. 이 법령은 주의 첫 날을 이교의 제전일과 동등한 수준의 절기로 인정한 것이며, 일요일은 일을 중지하는 것으로 그 특색을 나타내었습니다.-교회사(초대편) 192p-193p, 사단법인 대한기독교서회. 콘스탄틴은 스스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선포했지만 사실은 이교도였으며, 어떤 점에 있어서 태양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동일시했습니다. 주후 321년에 콘스탄틴이 일주간에 첫날을 휴일로 정했을 때 그는 그 날을 태양의 숭배일(sunday)이라고 명명했습니다. - 교회사 핸드북 33p, 생명의 말씀사.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일요일 준수를 법으로 제정했는데, 내용인즉 “모든 재판관과 시민 그리고 기술자들은 존엄한 태양의 날에 쉬어야한다”(A.D. 321년 3월 7일)입니다. -교회사 핸드북 144p, 생명의 말씀사.
이렇게 되어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이교도들도 구분 없이 일요일에는 모두 쉬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주의 첫날을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날로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이교도의 황제인 로마의 콘스탄틴을 통해서 신약 교회가 더 이상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과 표적으로 주신 안식일 준수를 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며, 자연스럽게 주의 첫날에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성경과 이런 역사의 흐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식교도들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들은 안식일 준수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성도들은 짐승의 표를 받은 적그스도의 수하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교회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안식일이 율법이라면 할례도 율법입니다. [내가 할례를 받은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갈5:3),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모든 것에서 유죄가 되나니](약2:10).
우리는 주의 첫날에 모이는 성경적 근거를 대라면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며, 초대 교회 때부터 모였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은 믿는 신자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날이며, 새 생명이 탄생한 첫날입니다. 주님이 탄생하신 날이 언제입니까? 사람들은 성탄절이라고 말합니다. 그 날은 초림한 날도 아닐 뿐 더러 성경이 말한 주님의 탄생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님의 탄생일을 마리아에게 태어난 그 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칙령(勅令)을 밝히 보이노라.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2:7). 여기서 말한 ‘이 날’이 언제입니까? 구유에서 마리아에게서 나신 그날입니까?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은 부활한 날이 주님이 태어나신 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알게 하노니 /이 소식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켜 세우사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 바로 그 약속을 그들의 자녀된 우리에게 성취하셨다 하는 것이라. 이것은 또 시편 둘째 편에,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기록된 것과 같도다.](행13:32-33).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태어난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출생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은 예수님의 탄생하신 그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육신의 생일이 부모님이 낳아 주신 날이지만 모든 생명은 아담이 지어진 날에 시작된 것과 동일합니다. 주님은 피조물이 아니심에도 불구하고 이 부활을 통해 피조물의 처음 나신 분이되셨습니다.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이시요,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나신 분이시니](골1:15).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5:17, 갈6:15).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음이니 이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나신 분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우리 주님의 부활은 창조의 시작이십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인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계3:14). 이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님이 맨 처음 창조된 피조된 신이란 말이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어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주의 첫날이 부활의 아침임을 알고, 그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안식일의 의미는 창조의 마지막 날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에게 주의 첫날은 새 창조의 시작이란 의미입니다.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주의 첫날 동굴에 있는 주님께 나아갔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막16:2,9). 제자들 역시 안식일이 아닌 주의 첫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요20:19).
사도 바울은 제자들과 주의 첫날에 주의 만찬을 행했고 집회를 열어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주의 첫날에 빵을 나누려고 나왔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에는 일요일이란 공식 국경일이 없던 로마 시대였지만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의 첫날에 모였습니다. 주일에 모였다는 또 다른 증거는 이들이 이날에 헌금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16:2). 주의 첫날에 집회를 했고, 그 날에 성도들은 헌금을 했음을 분명히 볼 수 있는데, 이런 것이 자연스럽게 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의 첫날에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린 기원입니다. 우리는 주의 첫날에 모이는 분명한 성경적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율법으로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표적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그 까닭은 이것이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기 때문이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12-13). 사람들은 흔히 표적이라고 하면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야말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표적입니다. 에덴의 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준 유일한 법이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인식하고, 주님의 권위 아래 있을 수 있었듯이 이스라엘은 안식일과 할례(롬4:11-할례의 표적)가 바로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결혼 반지를 낀 사람은 그 반지를 통해 자신이 기혼자임을 자신과 남에게 동시에 보여 주듯이 이스라엘은 안식일과 할례를 통해서 그 사실을 중동의 주변 이교도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 이교도들에게 그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분명히 나와 너희(이스라엘)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교회와는 이런 규정이 없습니다. 에스겔 20:12,20절에도 이 말씀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또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였나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었노라.](겔20:12). 노아의 홍수가 끝난 후에 무지개는 지구를 더 이상 물로 심판하시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이 표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안식일은 주님이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시는 주님임을 알게 하는 표적입니다. 지상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유일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하면 자동적으로 안식일이 떠오릅니다. 그날은 일도하지 않고, 가게도 열지 않고, 비행기도 뜨지 않고, 집에서는 불도 켜지 않습니다. 이들이 철저히 안식일을 지킨다면 우리를 다른 민족과 전적으로 구별하시는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알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 역시 독특한 민족임을 알게 되는 법입니다.
둘째, 안식일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니라. 안식일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이 되리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노라.](겔20:20). 안식일은 노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을 아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승의 날을 지킴으로써 스승의 은혜를 새롭게 생각합니다. 결혼 기념일을 통해 결혼의 소중함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통해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을 알게 됩니다. 신약 성도들은 주의 첫날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셋째, 안식일은 주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킬지니 그들의 대대로 안식일을 지켜 영속(永續)하는 언약으로 삼을 것이니라.](16). 안식일은 폐지되거나 다른 날로 바뀐 적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대대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 준수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란 사실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율법의 일부였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마음 속에 늘 인식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빼 먹고 지키지 않다가 보면 안식일 준수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다 어기게 되는 도미노 현상이 발생하며, 결국 주님마저 잊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한 결정적인 원인은 안식일 준수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하루는 인간 기억력의 한계입니다. 아무리 기억이 좋아도 매주 정한 하루를 넘기고 빼먹게 되면 규칙성이 깨지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잊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습관적으로, 규칙적으로 하던 일이라도 한두 번 빼 먹게 되면 금방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그런 일을 왜 했을까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일과 안식년은 규칙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그들의 신앙은 절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는 교회에 예배를 나오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두 번 집회에 빠지면 한 두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계속 안 나오게 됩니다. 수요 기도 모임에 나오던 사람들이 처음에 한두 번 이유를 대면서 안 나오더니 이제는 나오라고 사정을 해도 안 나옵니다. 좋은 습관은 좀처럼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한 습관은 한 두 번이 곧 지속적이 되고 맙니다.
넷째,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반드시 휴식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세포는 7일마다 새롭게 됩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규칙적으로 안식함으로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음이니라, 하라.](17).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셨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이 6일 동안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6일 동안은 열심히 일을 하고 하루는 쉬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창조의 마지막 날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사람에게는 첫 날이 됩니다. 우리는 먼저 쉼을 얻고 일을 합니다. 안식일의 제정 목적은 사람을 위한 것임을 주님은 분명히 증거 하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을 만드신 것이요,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니](막2:27). 휴식과 안식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안식은 필수적입니다. 육체는 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안식과 평안을 찾으려 한다면 절대로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육체적 노동을 쉬는 안식일이 주어졌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혼에 쉼을 얻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8-29). 주님은 안식일을 주시는 대신 혼의 안식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나의 몸의 상태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라. 그리하면 네 소와 나귀가 안식할 것이며 네 여종의 아들과 나그네가 원기를 회복하리라.](출23:12). 몸은 쉽게 지칩니다. 과로(過勞)하면 쉽게 병이 들고, 빨리 죽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킴으로써 몸은 원기를 회복하게(refresh) 됩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원기를 회복하는 대신 주의 첫날 주님께 예배를 통해 원기를 회복합니다. 이는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며,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쉼의 원리는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상쾌함을 얻는 길입니다. [그분께서 이 백성에게 이르시되, 이것이 안식이니 너희가 피곤한 자로 하여금 이 안식으로 안식하게 하라. 이것이 상쾌함이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고자 하지 아니하므로](사28:12). 지치고 낙심될 때 주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집회 시간에 놀러 가는 것은 몸의 피곤함을 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은 몸의 피곤함을 이기는 영의 상쾌함을 줍니다. 회개하는 일은 마음에 상쾌함을 줍니다.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눈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抹消)될 것이요,](행3:19). 주님은 회개하는 심령에게 상쾌함을 주십니다. 죄를 안고 있는 것은 더운 여름 날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무거운 짐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이는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므로 내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것같이 되었음이니이다. 셀라.](시32:3-4)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회개할 때 우리는 새롭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쉼을 얻는가? 주님에게로 나아와서 안식을 얻습니다(마11:28). 성도들 간에 교제를 통해 쉼을 얻고 새 힘을 얻습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새 힘을 얻게 하시기를 구하라.](롬15:32). 바울은 스데바나를 비롯한 몇몇 형제들로 인해 자신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이 시원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나와 너희의 영을 시원하게 하였음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인정하라.](고전16:18). 우리는 서로 간에 영을 시원하게 하고, 새 힘을 얻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만나기만 해도 마음이 기쁘고,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는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형제와 형제들은 서로 위로를 주고받고, 기쁨을 주고 받음으로 영이 활력을 받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너희의 위로를 통하여 위로를 받았고 참으로 디도의 기쁨으로 인하여 우리가 넘치도록 더욱 기뻐하였으니 이는 그의 영이 너희 모두로 인하여 활력을 얻었음이라.](고후7:13). 바울도 자주 낙담하고 지쳤지만 그 때마다 형제들로 인해 새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상쾌하게, 형제들을 시원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했습니다.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기 원하노니 이는 그가 자주 나를 유쾌하게 하고 나의 쇠사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딤후1:16).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형제들이 얼마나 다른 형제들에게 힘을 주었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도 이 점에서는 조금도 뒤쳐지지 않았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인하여 상쾌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도 네 사랑 안에서 큰 기쁨과 안위를 얻었노라.](몬1:7), [참으로 형제여, 나로 하여금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주 안에서 상쾌하게 하라.](몬1:20). 주일의 집회로 모이는 것은 이런 원기 회복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안식일은 창조 신앙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 주님은 안식일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관습적으로 생각없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 날은 무엇인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날이며, 인간은 지음받은 첫 날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히 구별하셨으니 이는 이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며 만든 자신의 모든 일을 떠나 안식(安息)하셨음이더라.](창2:3). 주님은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구별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를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12:1에 [이제 /너는/ 젊은 시절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전12:1a)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정확하게 안식일을 지킨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를 기억한다면 바알신과 아스다롯이나 몰렉이나 하늘의 여왕 등에게 분향하는 죄는 결코 지을 수 없습니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숭배하는 일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여섯째, 안식일을 지킴으로 이스라엘은 창조된 백성이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게 됩니다. [나는 [주] 곧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사43:15).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 행하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실을 확인하는 믿음과 신앙 고백의 시간으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피조된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옛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주 주의 첫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며 경배함으로 이 사실을 늘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창조되었습니까? 여섯 째 날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첫 사람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여섯째 날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날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 /효력이/ 있기 때문이라.](갈6:15). 우리는 새롭게 지음 받은 피조물이기에 구약의 안식일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의 첫날에 함께 모여 주님을 기억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창조 신앙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라면 주일 예배는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을 새롭게 기억하고 능력을 덧입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일곱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킴으로 이들은 주님의 풍성한 복, 공급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은 7일간 일하는 것이나 6일간 일하고 하루 쉬는 것이나 소득의 차이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수확을 얻었습니다. 이는 역설의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늘 체험하며 살아 있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이미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두 배의 빵 곧 한 사람을 위하여 이 오멜씩 거두니라. 회중의 모든 치리자가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나니 곧 내일은 안식하는 날로서 [주]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오늘 굽고 끓일 것도 끓이고 남은 것은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하셨느니라.](출16:22-23). 주님은 여섯째 날에 두 배를 주심으로써 일곱 째 날에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걱정할 것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선한 손길과 은혜의 풍성한 공급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안식일에 쉬는 것이 바늘 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법입니다. 하루만 지나면 썩어 버리던 만나가 안식일에는 썩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은 광야에서 이들이 매주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무려 40년이나 그들은 매주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남들과 똑같이 일해서 똑같은 수확을 거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하심을 통해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바른 경제관을 소유하게 됩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킴으로써 우리는 돈(물질)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주일 예배를 드리느라 사업이 망했다든가 건강을 망쳤다든가 치명적인 손해를 보았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황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때로 박해를 받기도 하고, 큰 손해를 입기도 합니다. 신앙의 박해를 받는 경우가 아닌 일반적인 성도들의 교회 생활에서 주일 예배로 인해 여러분이 받는 피해는 없습니다. 오히려 일을 하느라 예배를 빠뜨릴 때 입게 되는 손해가 훨씬 큽니다.
여덟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킴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인도하심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안식일을 지킬 수 없습니다.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면 안식일을 지킬 수 없습니다. 가족이나 내가 병이 들거나 사고가 나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려면 주님께서 전쟁을 막아 주셔야 하며, 포로로 사로 잡혀가지 않아야 하고, 병이 들거나 사고가 나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인도하심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주님은 그것을 행할 힘을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고자 하는 자에게 주님은 복을 주십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 선하신 손길, 풍성한 긍휼이 우리를 두르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까지라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겠다고 결단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선한 결심을 지켜 주시지만 그들이 안식일을 범할 때 주님은 그들을 두르셨던 보호의 손길을 걷어 버리셨습니다. 여러분이 주일 예배나 수요 기도 모임이나 이런 모임을 손해 막급한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육간에 건강하지 않으면 이곳에 여러분은 결코 올 수 없습니다. 가정이 평안하지 않고, 사업터가 엉망이면 여러분이 이곳에 규칙적으로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보호와 신뢰,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주님이 이곳에 여러분을 있게 된 것입니다.
아홉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킴으로 우리의 모든 시간, 날들이 다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하루하루의 날들은 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란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온 땅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주님의 소유를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 때 주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강도라고 불렀습니다. 매일 매일의 날들(시간) 역시 주님의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가 다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인정할 때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우리의 시간이 다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시간에 얽매여 다급하게 되거나 허둥대지 않습니다. 시간이 없다, 급하다는 이유로 편법을 쓰고, 인내하지 못하고, 죄를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안식일을 기억하려 거룩히 지킴으로써 이런 시간 개념을 모두 주님의 때에, 정하신 때에 이루어 주시도록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날들’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 함으로써 주님이 주신 날들을 단축시킬 수도 있고, 날들을 늘리기도 합니다. 성경은 지상에서 우리의 날들이 길어지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이 땅에서 날들이 길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걷는 것입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길로 걸을지니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또 잘되고 너희가 소유할 땅에서 너희 날들이 길리라.](신5:33). 예배와 기도 모임, 성경 공부 모임 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처럼 보여도 시간을 아끼는 일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시간을 되찾으라. 이는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니라.](엡5:16), [바깥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걷고 시간을 되찾으라.](골4:5). 주님은 시간을 구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순간 이미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여분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인생의 모든 날들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 번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킴으로써 주님께서 장차 이루실 천년 왕국을 소망하게 됩니다. 안식일은 우리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6일 동안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느라 지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곤함을 모르십니다. 주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된 것은 창조하신 결과에 대한 만족함을 드러낸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 함으로써 하나님의 안식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주님은 범죄한 인간들을 완전히 구속하시는 그날까지 결코 안식을 얻을 수 없게 되셨습니다. 주님은 범죄하는 사람들로 인해 뜻을 후회하시기도 하시고, 지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7:6절을 보십시오. [[주]가 말하노라. 네가 나를 버리고 뒤로 물러갔으므로 내가 너를 치려고 내 손을 내밀어 너를 멸하리니 내가 돌이키는 일에도 지쳤느니라.](렘17:6).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 백번은 넘게 뜻을 돌이켰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셔서 복을 주시고, 모든 것을 주신 이스라엘의 반역과 배교,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해 주님은 이제 지쳤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주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지치시지 않는 분이시지만 두 가지 일에는 지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범죄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돌이키는 일에 지치셨고, 이스라엘의 위선에 지치셨습니다. [내 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명절들을 미워하나니 그것들이 내게는 괴로움이니라.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내가 지쳤느니라.](사1:14). 주님 역시 간절히 안식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일하시고 계십니다. [...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5:17). 주님은 안식일을 통해 장차 다가올 완전한 안식의 모형을 제시하고, 그것을 다시 찾으시고자 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천년 왕국의 건설은 주님이 다시 안식을 찾으시는 예언적 파노라마입니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건설하신 영원한 왕국이란 예언적 소망을 갖게 해 줍니다. 안식일은 예언적 의미가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 참 안식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9-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한 안식이 남아 있나니 이는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들을/ 그치신 것같이 이미 자기 일들을 그쳤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쓸지니 이것은 아무도 믿지 아니하던 그 동일한 본을 따라 넘어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4:9-11). 우리에게는 안식이 남아 있습니다.
열한 번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킴으로 영적 타락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타락하고 범죄한 유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적 타락의 회복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게 함으로써 바로 잡고자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7:21-22절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여 안식일에 짐을 나르거나 예루살렘의 문들로 들여오지 말고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어 옮기지도 말며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한 대로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렘17:21-22). 유다는 먼저 안식일 준수를 다시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주님은 우상 숭배의 죄와 더불어 안식일을 범한 죄를 지적하신 것은 이들이 안식일 준수를 통해 영적 회복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인간들을 위해 제정하신 것이지만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이라고 불립니다(출20:10). 예레미야 17:2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으며 자기 목을 곧게 하여 듣지도 아니하고 교훈을 받지도 아니하였느니라.](23).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일을 안하면 손해가 얼마인데? 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깔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물질을 동시에 숭배할 수 없습니다(눅16:13). 주님은 이들이 안식일만 제대로 준수하면 심판을 철회하고, 재앙이 아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부지런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안식일에 이 도시의 문들을 통해 짐을 들여오지 아니하고 오직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여 그 날에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면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들과 통치자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도시의 문들로 들어오되 그들과 그들의 통치자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그리할 것이요, 이 도시는 영원히 있을 것이며 또 사람들이 유다의 도시들과 예루살렘 주위의 장소들과 베냐민 땅과 평야와 산지와 남쪽으로부터 와서 번제(燔祭) 헌물과 희생물과 음식 헌물과 향을 [주]의 집으로 가져오고 또 찬양의 희생물을 가져오리라.](렘17:24-26). 재앙과 심판이 정해진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방법이 바로 안식일 준수라는 지극히 평범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재앙을 복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한 가지 작은 일에서부터 신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 바로 잡아간다면 나머지 모든 영적 질서들이 바로 잡히게 되며,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이 만약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도시는 멸망대신 영원히 거하며, 다윗 왕조는 단절되지 않을 것이며,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약 성도들의 영적 부흥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기도 모임과 성경 공부 모임에 신실하게 참석함으로써 됩니다. 저는 이런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는 사람 가운데 믿음이 자라지 않고, 실족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반면 모임에 빠지는 횟수가 증가하는 사람들이 설교를 들어도 삐딱하게 듣고, 불만을 제기하고, 쓴 뿌리를 가득 품습니다. 집회의 모임은 여러분의 영적 성장과 회복의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강단에서 선포하는 말씀은 주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선포하는 말씀이지 듣지도 않는 저 외인들을 향해 선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쪼록 안식일의 교훈을 귀를 열고 들으신 분들은 자신에게 잘 적용해서 영적 양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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