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다의 믿음
말씀: 히브리서 11:32
요절: 히브리서 11:32
사람들은 대부분 영웅들의 영웅담을 좋아합니다. 밑바닥에서 정상에 오른 사람들을 뽑아서 위인전으로 묶어서 책이나 영화, 연극 등으로 만들고,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도 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어릴 때 위인전을 많이 읽게 하고, 영웅적인 삶을 산 이들을 본받게 하려고 합니다. 저 역시 플루타크 영웅전을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영웅이 되고 싶어하고, 그들을 동경하고 그런 이들을 존경합니다. 그렇다면 바닥에서 정상까지 이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으려면 단연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에 대해서 정확히 말해 주고, 그들이 어떻게 훌륭한 삶을 살았는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겁쟁이 기드온이 강한 용사가 된 이야기는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 아이들을 능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신화, 전설, 역사, 소설 등에서 나오는 인물들보다 더 드라마틱한 성공담이 많이 나옵니다. 세상 영웅들의 이야기는 독자의 흥미를 돕기 위해 허구를 양념처럼 뒤섞어 버리지만 성경의 인물들은 오직 사실에 기초한 진실만 다룹니다. 성경은 인간의 위대함, 천재성, 탁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이 진실로 위대해 질 수 있는 비결을 말해 줍니다.
성경은 인물들의 비천한 출생, 낮은 지위, 못된 성격과 행실 등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지은 범죄, 탐욕, 거짓, 비겁함 등등의 모든 본성이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조금도 가감없이 정확히 보여줍니다. 성경의 등장 인물들은 세상의 영웅들처럼 보통 사람들이 결코 갖고 있지 못한 초인적인 능력이나 지혜를 소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공한 인물들의 특징은 그들이 예외 없이 모두 ‘믿음’의 소유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란 점입니다. 높은 이상과 야망을 세워두고 매진한 사람들에게 운이 따른 것도 아닙니다. 인복(人福)을 타고 났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능력이 탁월한 것도 아닙니다. 재주가 남다른 것도 아닙니다. 가정 교육을 잘 받은 이도 있고, 부모에게 버림 받은 이도 있고,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서 교육을 받은 이들도 있고, 창기와 세리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입다]를 보십시오. 그는 창녀의 아들로 태어났고, 서자였습니다. 세상적 관점으로 보자면 태어날 때부터 불행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바닥에서 정상에 오른 대표적인 인물을 뽑으라면 단연 ‘입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창녀’라는 것은 보통 수치가 아닙니다. 모두 사사기 11장을 펴 보십시오. 사사 입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 길르앗 사람 입다는 강한 용사요, 창녀의 아들이더니 길르앗이 입다를 낳았더라.](삿11:1). 입다는 강한 용사이긴 했지만 그의 타고난 출생과 신분이 치명적 약점이었습니다. 거기다 가족들이 그를 따스하게 감싸 준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상속을 나누기 싫어하는 형제들은 그를 쫓아내어 버렸습니다. [길르앗의 아내도 그에게 아들들을 낳았더니 그의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낯선 여인의 아들이니 우리 아버지 집에서 상속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라.](삿11:2). 본 처의 형제들은 창녀에게서 난 입다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고, 함께 상속을 받지 못하도록 쫓아 내었습니다. 이 문제는 단지 입다의 가족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시기 11:7에 입다의 말에 따르면 길르앗 사람들이 모두 입다를 미워했고, 그를 쫓아내는데 동조했습니다. 창녀의 아들이란 출생에 대한 가족과 사회적 멸시는 엄청났습니다.
입다는 길르앗의 깡패로 자랐거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trouble maker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비록 창녀에게서 났지만 자기 계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믿음의 사람이요, 강한 용사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능력 본위의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입다는 자신의 고향 길르앗에서 먼 곳으로 도망을 쳐 돕 땅에 거했습니다. [이에 입다가 자기 형제들에게서 도망하여 돕 땅에 거하더니 허영심 많은 자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어 그와 함께 나다니더라.](삿11:3). 이로써 건실한 믿음의 청년이요, 강한 용사 하나가 피어 보지도 못한 완전히 꺽여지는 듯이 보입니다. 입다의 삶은 여기서 끝난 듯이 보입니다. 돕 땅에서 그가 인생의 방향을 잡아 줄 위대한 스승을 만났다거나 자신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칠만한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다는 등의 전화위복의 계기를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돕 땅에서 입다의 주변에는 형편없는 친구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유상종’이라고 해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함께 놀게 마련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고난의 시절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고난 중에 있는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불만이 있는 모든 자가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 위에 대장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들이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22:2). 입다는 강한 용사였고, 성경에 능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길르앗에서 쫓겨나 돕 땅에 거하자 거기에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 것입니다. 사장이었던 사람이라도 막노동 판에 나가면 ‘김씨, 박씨’ 소리를 들으며 그들과 어울리게 됩니다. 전직이 교수, 의사, 변호사였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입다나 다윗은 모두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강한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되자 낮은 자리에 있던 이들이 그들 주변에 모여 드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낮아지셨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 곁에 몰려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세리들과 창기들과 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낮은 자리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입다나 다윗이 자신을 스스로 낮추었을 때 그의 주변에는 낮은 자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을 높은 지위에 두고 있으면 아무나 접근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높이면 아무도 근처에 오지 않습니다. 물론 입다와 다윗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지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종이 되신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모든 사람들보다 더 낮춤으로써 죄인들이 몰려 들게 해야 합니다. 성격이 깔금한 이들은 이런 모임, 이런 사귐을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상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모욕적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을 보십시오.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유하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우리가 낮아져야 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며 율법 없는 자들에게 (내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 어찌하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전9:20-22). 계속해서 반복되는 한 마디가 무엇입니까? “얻고자 함이요, 얻고자 함이라.”입니다. 사람을 얻는 방법은 자신의 지위, 신분, 학력, 경력, 신앙 연륜 등을 모두 버리고 낮추어야 합니다.
돕 땅에서 입다의 인생이 이대로 끝났다면 우리는 그가 믿음의 사람이란 증거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암논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했습니다. 전운(戰運)이 감돌던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와서 [너는 와서 우리의 대장이 되라](삿11:6b)고 청했습니다. 입다가 누구기에 위기의 때에 급히 찾는 인물이 되었단 말입니까? 우리는 1절에서 그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에 길르앗 사람 입다는 강한 용사요](삿11:1). 입다는 강한 용사였습니다. 그는 비록 고향 길르앗이 아닌 돕 땅에 와서 살았지만 그는 강한 용사로서 이스라엘의 대장이 될 만한 인물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강한 용사였던 입다가 지금까지 이런 대접을 받았는데 만약 보통 사람이라면 맞아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런 때 사람은 모름지기 실력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전쟁의 위기에서 즉시 ‘강한 용사’ 입다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입다를 미워했고, 쫓아내었습니다(삿11:7). 이번에도 전쟁만 끝나면 다시 입다를 쫓아 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거주민의 머리가 되리라.”(삿10:18)고 결정했지만 창녀의 아들인 입다를 ‘머리’로 삼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그들이 약속을 뒤집지 못하도록 주님 앞에서 고하게 했습니다(삿11:10-11).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이해를 따라 움직이고, 이용하려 합니다. 배신, 사기, 버림, 타협, 비굴, 아첨, 속임수 등등을 자연스럽게 행합니다. 입다는 고향 길르앗 사람들에게 맺힌 한(恨), 서운함 등의 사적인 감정을 뒤로 하고 전쟁에 나아갔습니다. 입다는 ‘선으로 악을 이긴 사람’의 가장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입다가 단지 전쟁에만 능한 강한 용사가 아니라 ‘모세 오경’에 능통하며, 이스라엘의 역사에 정통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11:15-27까지 입다가 암몬 왕을 향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하고, 이스라엘이 암몬 땅을 조금이라도 침범하거나 빼앗지 않았음을 설명하는데 이 내용들이 모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역사적 증거들이었습니다. [그에게 이르되, 입다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빼앗지 아니하였느니라.](삿11:15). 15-27절까지 말씀은 입다가 신약의 스데반이나 바울을 연상케 하는 말씀 선포자임을 보여 줍니다. 그의 입에서 이렇게 성경 말씀이 줄줄 흘러 나오는 것을 통해 입다가 평소에 영적 생활에 나태하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이 자신의 육신의 강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다는 점을 보게 됩니다. 믿음은 육신의 출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의 아들들인 옵니와 비느하스는 ‘벨리알의 아들들’이란 욕을 먹었지만(삼상2:12) 창녀의 아들인 입다는 믿음의 사람이요, 강한 용사였습니다. 지금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입다가 암몬 왕에게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념해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입다가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고 암송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입다의 용맹이 단지 인간적인 성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단련된 신앙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입다가 힘깨나 쓰고 싸움을 잘하는 용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자요, 말씀에 대한 믿음과 지혜가 출중한 자였음을 봅니다. 그는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신 땅을 빼앗으려는 암몬 왕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300 년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다가 지금 와서 시비를 거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입다의 생각과 삶의 일부였고, 그의 국가관이요, 세계관이었습니다. 입다의 외교술은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의 판단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입다의 몸과 마음 속에 스며들어 있었기에 그는 필요할 때 말씀을 가지고 싸울 수 있었고, 정확히 인용하여 적용할 수 있었고, 땅을 돌려달라고 시비를 거는 암몬 왕에게 논리정연하게 반박할 수 있었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살고 있는 땅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이기에 단 한 뼘도 내어 줄 수 없다는 분명한 역사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넘보는 자들을 대적해서 싸우는 데는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친히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 부분에서 입다의 믿음을 평가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입다의 믿음은 유업을 주신 주님께서 자신의 유업을 지키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입다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말씀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기드온이나 삼손과 같이 개별적으로 어떤 사명으로 주신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세 오경을 통해 이스라엘의 지경과 그 땅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란 분명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입다의 자신의 출생, 사람들에게 받는 멸시와 부당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고,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았고, 강한 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입다와 같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지켜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암몬이 이스라엘의 땅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며 반환을 요구하며 침범하듯이 마귀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향해 무엇인가를 빼앗으려고 공격합니다. 마귀의 공격 목표는 우리 마음 속에 뿌려진 말씀입니다(막4:15).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마음 속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는 자들이요,](막4:15).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할 때 마귀에게 말씀을 빼앗겨 버리게 됩니다. 둘째, 우리의 보상입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報償)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골2:18a). [볼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 아무도 네 왕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3:11). 셋째,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있는 자마다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19:26).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을 소홀히 함으로써 그 은사들을 소멸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딤전4:14).
암몬 왕이 입다의 입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전쟁이 선포되었습니다. 이 때 주님의 영께서 입다에게 임했습니다(삿11:29). 그런데 여기서 입다의 돌출 행동이 나왔습니다. [입다가 [주]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암몬 자손을 틀림없이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떠나 평안히 돌아올 때에 무엇이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11:30-31). 여기서 개역 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무엇이든지”(whatsoever)를 “누구든지”(whosoever)로, “나를 맞이하는 것은”을 “나를 맞이하는 자는”, “내가 그것을”을 “내가 그를”하고 모두 인칭 대명사로 바꿈으로써 입다가 사람을 번제 헌물로 바치겠다는 서원을 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입다가 성경에 무지한 일자무식의 사람이요, 돕 땅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며 굴러먹던 사람이 아님을 이미 살펴 보았습니다. 그는 길르앗의 어떤 사람보다 성경과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었고, 말씀이 마음 속에 찬 사람입니다. 번제 헌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번제 헌물로 쓰이는 희생물이 양이나 소란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헌물로 쓸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이 드리는 인신 공양을 매우 가증히 여긴다는 사실은 길르앗의 어느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서원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서원에 관한 법이 있습니다. 모세 오경에 능했던 입다는 서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서원으로 자신의 혼을 속박할 때 하나님이 그 서원을 들으시고 승리를 주실 것이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위기의 상황에서 흔히 하나님께 좀 크고 확실한 서원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아들을 주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고, 어떤 이는 남은 인생을 주를 위해 전적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 저는 이런 서원을 하는 이들을 많이 듣고 보았으며, 주님이 응답하신 선한 간증도 많이 들었습니다. 서원 기도를 처음 한 사람은 야곱입니다(창28:20). 야곱은 도망가면서 자신을 지켜 주실 것과 먹을 빵과 입을 옷과 다시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해 달라는 서원을 했습니다. 우리가 볼 때 매우 소박한 것 같지만 당시에 야곱에게는 매우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입다 역시 전쟁을 나가면서 승리를 위해 서원을 했습니다. 이 전쟁은 입다의 인생에 너무나 중요한 일전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기면 그는 이스라엘의 대장이 됩니다. 지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립니다. 그는 죽거나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입다는 이 전쟁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는데 최선을 다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서원으로 자신의 혼을 속박해 버렸습니다. [입다가 [주]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암몬 자손을 틀림없이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떠나 평안히 돌아올 때에 무엇이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삿11:30-31). 이 서원에는 입다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나를 맞이하는 것은”에 사람이 될 수 있고, 특히 자신의 아내나 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서원의 법은 무효로 하거나 취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3:23, [네 입술에서 나간 것은 지켜 행할지니 곧 자원 헌물은 [주] 네 하나님께 네가 서원하여 네 입으로 약속한 대로 행할지니라.](신23:23), [사람이 [주]께 서원하거나 자기 혼을 속박(束縛)하기로 서약으로 맹세하거든 자기 말을 깨지 말고 자기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지니라.](민30:2)고 말합니다. 이런 율법의 내용을 입다가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전쟁터로 나가는 입다가 전쟁의 승리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승리를 위해 서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서원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승리는 서원을 통해서 주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입다가 승리하고 자기 집에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한 사람은 ‘그의 외동딸’이었습니다(삿11:34). 이 일로 입다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원을 이행하자면 딸을 죽여 번제 헌물로 드려야 합니다. [입다가 그녀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네가 나를 매우 침울하게 하였으며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도다. 이는 내가 [주]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할 것임이로다, 하매](삿11:35). 입다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놀라운 결단을 합니다. 자신이 한 서원을 이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서원은 해로울지라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 앞에서 네 입을 경솔히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어떤 것도 말하지 말지니 이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기 때문이니라. 그런즉 네 말 수를 적게 할지니라. 이는 꿈은 일이 많아 생기고 어리석은 자의 목소리는 말이 많아 알려지기 때문이니라.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미루지 말라. 이는 그분께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 네가 서원한 것을 갚을지어다. 네가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으니라. /너는/ 네 입이 네 육체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허락하지 말며 천사 앞에서, 그것이 실수였노라, 말하지 말라.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인하여 분노하사 네 손으로 행한 일을 멸하시게 하겠느냐?] (전5:2~6)라고 합니다. 시편 15:4, [비열한 자는 자기 눈으로 멸시하되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존경하며 맹세한 것은 자기에게 해로울지라도 바꾸지 아니하며] (시15:4). 여기서 입다의 놀라운 믿음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일, 자기를 슬프게 하고 괴롭게 하는 일이라도 결코 말씀 앞에서 변명하거나 후퇴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마치 독생자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을 연상케 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입다의 딸은 아버지 입다가 서원한 내용을 알았을 때 원망하거나 반발한 것이 아니라 기꺼이 순종해서 자신을 번제 헌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독생자 이삭을 번제 헌물로 바치게 명령하셨지만 입다의 경우에는 자신의 입으로 서원함으로 하나 뿐인 딸을 번제 헌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부활을 믿고 순종했지만 입다는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씀의 절대성’에 순종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입다의 딸은 죽었습니다. [입다]는 탁월한 신앙과 인격의 소유자였지만 그의 서원은 경솔한 것이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믿음과 순종은 놀라운 것입니다. 때로 성도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자신의 입술로 내 뱉은 서원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의 생명을 주님께 기꺼이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나의 남은 생을 다 주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기도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 자신이 무엇을 서원했는지도 잊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과가 이럴게 풀릴 줄 알았다면 괜히 서원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기도 할 필요도 없었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입다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자신이 입으로 낸 서원은 하나님이 들으셨음을 믿었기에 지켰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입다의 믿음을 평가하고 후대의 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