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Pastor. Yoon

킹제임스 성경의 서문. 이미 번역하여 제본을 떠서 보았으나 정작 성경(한킹, 흠정역)에는 보이지 않는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고 올바른 정보를 주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이다. 지금 어떤 형제는 이 글을 보고 흠정역을 공격하며 불을 뿜고 있다. 내 책상 위에 있는 서문 번역은 아래 번역보다는 좀 더 잘된 것이지만 타이핑을 쳐 놓지 못해서 이걸로 대신 보라고 올려 둔다.





THE TRANSLATORS TO THE READER

 

in the Preface of The Holy Bible (The King James Version)

translated into Korean by Tchu, Yeun-Soo

 

* 일러두기

1. 중세 영어로 된 KJV (1611년)을 현대어로 바꾼,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1884년에 발간한 성경의 서문을 번역하였다. 1884년 판은 1611년 판과 달리 서문 전체를 여러 단락으로 나누고, 각 단락마다 소제목을 붙였고, 서문에 있는 난외주를 제외했다.

 

2. James Snapp, Jr.가 현대 미국 영어로 바꿔 쓴 THE TRANSLATORS TO THE READER in American English (Kindle Edition, May 2011)을 참조했다.

 

3. 초판 서문의 난외주와 관련해서는 WIKISOURCE의 Bible(King James)/Preface를 참고했다.

 

4. [] 표시 안에 있는 말은 문장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밝히려고 역자가 삽입한 말이다.

 

5. () 표시 안에 들어 있는 말은 원문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단, ()표시 안에 한자가 들어 있는 경우는 번역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려고 역자가 취한 수단이다.

 

6. 인용 표시인 “”와 ‘’는 독자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역자가 보충한 것이다.

 

7. 원문에는 영어 외에도 라틴어, 헬라어를 위시한 여러 언어의 말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번역시에 음역을 하기도 했으나, 긴 문장인 경우 라틴어 문장을 그대로 쓰고, 영어로 된 그 인용문의 의미만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8. 기타, 인명이나 지명, 혹은 책의 이름과 같은 경우에 나타나는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등의 경우에는 가급적 원 언어의 발음대로 음역하려고 했으나, 역자의 지식이 부족하여 원 언어가 아닌 영어식 발음을 따라 음역한 경우도 있음을 밝힌다.

 

9. 많은, 아니 대부분의 경우에 한국어 문법에 맞는 문장보다는 직역에 의한 영어식 문장 구조로 된 번역문임을 밝힌다. 이는 한국어 문장이 아닌 한국어 표기로 된 영어 문장을 읽게 만든, 매우 형편없는 번역임을 자인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는 바이다.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드리는 글


최고의 것들이 중상모략을 받아왔다.

 

공공의 유익을 신장하려는 열정은, 그것이 우리 자신이 궁리하는 어떤 것을 통해서든, 다른 사람들의 수고로 이루어진 것을 개정함을 통해서든 간에 큰 존중과 평가를 받아 마땅함에도, 세상에서는 냉대를 받는다. 사랑보다는 미심쩍은 생각으로, 고마움보다는 경쟁심으로 받아들여지며, 만일 트집 잡을 어떤 빈틈이라도 남아 있으면 (혹 빈틈을 찾지 못하면 꼬투리를 만들 것이다) 오해를 받거나 정죄 받을 위험에 처한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를 많이 아는 만큼, 또는 어떤 경험이 있는 만큼 쉽게 납득될 것인데,말하자면, 언젠가 그 어떤 계획을 세웠는데,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일이나갱신하는 일을 할 기미를 보였더니, 그 일로 수없이 빗발치는 이의제기나 반대에 직면한 적이 있었는가?

 

어떤 사람은 문명, 건전한 법, 학문과 언술, 종교회의, 교회운영이 (우리가 이런 유의 것들을 더 이상 말하진 않는데) 성소와 같이 안전해야 하고, 그래서 [공격의] 사정권 밖에1)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려들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래서 아무도 그들의 운영자들에 맞서 발꿈치를 들지 않아야 하고, 절대로 안 되고, 개도 혓바닥을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문명에 의해 우리는 관능에 이끌리는 이성 없는 야수와 구별된다. 그리고 법에 의해 우리는 난폭한 행위로부터, 부정한 수단을 통해서나 폭력을 통해서 상해를 입히는 것으로부터 제한되고 억제된다. 학문과 논증에 의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룩한 지식과 지각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종교회의를 통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토의하려고 함께 모이고, 끊임없는 서면 논쟁을 통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우리의 차이를 조정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를 충분히 지원하는 것은 선한 이성과 양심에 아주 잘 맞는 것이다. 자신들의 가슴(그리고 그들 자신도 영적이고 신실한 말씀의 젖을 받기 위해 매달리는 그 가슴)에 매달린 아이들에게서 그들의 생존에 적합한 호구지책과 지원을 거두어버리는 아비들과 어미들(그들이 누구든 간에)보다는, 차라리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이는 어미가 훨씬 덜 잔인하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것들은 절실한 필요성으로 말미암은 것들이기에, 그 누구도 불합리하지 않고는 이것들에 거슬러 말할 수 없고, 악하다는 오명 없이 이것들을 경멸할 수는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존경할만한 사람들이2)어떤 다른 과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동포를 유익한 질서와 규율에 따르게 하려고 하다가 불시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학자들은 알고 있다.

 

또한 어떤 국가들에서는3)옛 법의 폐기를 위해 새 법을 만들자는 발의를 한번 했다가 극형에 처해졌다. 그 옛 법은 가장 유해한 것이었음에도 그랬다. 그리고 나라의 기둥들로, 덕과 분별의 모범으로 여김을 받았어야 될 어떤 이들이4)오랫동안 학식이 높고 유익한 말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암초나 유해한 사람인양 따돌림을 받았다.

 

그리고넷째로, 어린애가 아닌 위대한 교회 서기가5)제안을 했지만 (또한 후손에게 남긴 글에서), 아마도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 했겠지만, 어쨌든 그가 제안을 했으나 어느 종교회의나 성직자 회합으로부터도 유익한 결과를 전혀 보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운영과 급여, 그런 류의 문제에 있어서, 위대한 만왕의 왕의 사자들과 메신저들이 공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여, 어떤 허구와 신화(그렇다고 평가되는, [그 이야기의] 보고자6)자신도 그 이상으로 평가하지 않는, 미신적임에도 불구하고)가 날조 되었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엔 참 교회였던 로마교회에서, 기독교의 교수들과 교사들이 관대한 기부를 받던 그런 시기에, 과연 하늘로부터 ‘지금 교회에 독이 퍼부어지고 있다’는 음성이 들렸다는 등등의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말할 때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말하듯이, 우리가 무슨 주목받을 만하거나 중요한 것을 할 때마다 역시 모든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한다.

 

그러니 사람들의 입에 적게 오르내리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험담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그런 일은 평범한 부류의사람들만의 숙명이요 몫이라거나 군주들은 그들의 높은 지위로 인해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사무엘에 나오는 것처럼7), 칼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듯이, 아니 오히려, 어떤 전투에서 위대한 장수가 휘하 군병들에게 적의 다른 부분이 아닌 정면을 치라고 했듯이, 그리고 아람의 왕이 휘하 장수들에게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고 했듯이8), 질투가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주요한 것을 가장 악의적으로 공격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다윗은 훌륭한 군주였는데, 그의 처음 행위들과 관련해서는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가 일찍이 했던 행위만큼 가치 있는 것을 한 연유로 (즉 엄숙히 하나님의 궤를 다시 가져옴을 인해서) 자신의 아내로부터 경멸과 조롱을 받았다9). 솔로몬이 덕에 있어서는 다윗에 미치지 못했으나 권세만큼은 훨씬 크게 누렸다.

 

그는 자신의 권세와 지혜로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바쳤는데, 이스라엘 땅의 영광이요 전 세계의 경이로움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장엄함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했는가?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니라면, 왜 그들이 그의 아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궁지로 몰면서 짐을 가볍게 해달라는10)요청을 했겠는가?



그들은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11)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솔로몬이 그들에게 얼마큼의 세금을 부담 지웠을 것이고, 또 어느 정도의 [건축재료]운반을 담당시켜서 힘들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이리하여 그들이 비극을 키웠으니, 마음속으로 성전건축이 아예 시작되지 않았었기를 바랐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기쁘시게 하면서 모든 사람의 양심[판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할 때에 바로 그렇다.


고귀한 사람들이 중상모략을 받아왔다.

 

 

훨씬 최근으로 내려오면, 우리는 그런 종류의, 즉 상당히 불친절한 반응의 비슷한 예들을 많이 발견한다. 로마의 첫 번째 황제가12)한 행위는 학식 있는 자들을 더 기쁘게 해주지 않았고, 후손들을 더 유익하게 해주지도 않았는데, 바른 계산을 통해 연대를 바로 잡으려고 한 일이다. 그가 태양의 운행에 맞춰서 역법(曆法)을 바로 고치고 해(年)[일 년의 길이]를 지시했을 때에, 그 일로 그에게는 희한한 [생각을 하는] 사람, 오만한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었으며, 엄청난 욕을 먹었다.

 

첫 번째로 기독교로 개종한 황제13)(최소한 공개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 첫 황제이면서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허락한 황제)가 제국을 강화하고 교회를 후원하는 데에 그의 많은 재산을 사용했는데, 그 수고의 대가로 “애송이”(Pupillus)14)라고 불렸으며, 혹자는 낭비벽이 있는 군주라고 말함으로 마치 후견인이나 감독자가 필요한 것처럼 말했다.

마찬가지로, 뛰어난 기독교인 황제15)는 평화를 추구했고, 평화를 통해서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려했고, 그래서 전쟁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전쟁을 치렀지만, (실제로는 그의 무예 실력이 뛰어났으며, 화가 나면 유감없이 실력 발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사(戰士)가 아니라16)는 평을 들었으며, 자신의 안락함과 방종에 빠져있다는 정죄를 받았다.

 

이전 시대에 가장 학식이 뛰어났던 (최소한 최고의 정치가였던) 황제17)에 대해서 간략히 말하자면, 법의 지나친 조항들을 폐기하고 손질하여 상당히 체계적인 형태로 정리한 것을 인해 무슨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들었는가?

어떤 사람들이 그를 요약[발췌]자라고 부르며 모욕했는데, 그 말인즉슨 그의 요구대로 축약판을 만들려고 가치 있는 전체 법전을 없앤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과거에 뛰어난 군주들에게 주어지곤 했던 평가이다. Cum bene facerent, male audire, 즉, 선한 행위로 인해 악한 말을 듣는다. 시기와 악의가 옛 시대와 함께 죽어버렸거나 장사된 것 같은 기미가 없다. 없어도, 아예 없다, 모세의 책망은 대부분의 세대들에게 적용된다.

 

“너희는 너희의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이다].”18)지혜로운 자가 말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19)그리고 성 스데반도 말했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20)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영어 번역본들의 연구를 위한 폐하의 일관성

 

[앞에서 언급한] 이러한 것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더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지금 통치하고 계시는 폐하께서 (폐하께서 오래 오래 재위하시고, 그 후손이 끊이지 않으며, 그 자자손손 대대로 보좌를 이어가시길 바라노라)21)충분히 잘 알고 계시는 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비범한 지혜를 따라서, 그리고 자신이 성취한 보기 드문 학식 및 경험을 따라서 이미 숙지하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대중을 위해서 무엇을 (특히 그일이 종교에 관련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공개하고 가르는 것에 관련된 경우) 하려고 하는 사람은 모든 이들이 악하게 눈을 부라리며 바라볼 수 있도록 자신을 무대에 올려놓는 것과 같다. 그렇다, 그는 창끝을 향해 저돌적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날카로운 혓바닥에 찔리려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가 어느 면에서든 사람들의 종교를 간섭하므로 그들의 관습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재산[자유 토지 보유]에 간섭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변경한다는 소리에 참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충성스러운 마음은 이런 저런 안색(顔色) 때문에 겁을 먹거나 낙심하지 않고 결연히 우뚝 섰으니, 누군가의 말처럼, 마치 움직일 수 없는 동상과 같고, 두들겨서 평판(平板)으로 만들기 쉽지 않은 모루와 같다.22) 그는 누가 자신을 병사로, 아니 그보다는 지휘관으로 선택하셨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한 진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또한 그분의 교회의 세움을 위한 것임을 확신하면서, 그 어떤 주장들이나 행동들 때문에 그 일이 좌절되는 것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참으로 왕들이 할 일이다. 그렇다, 그것은 특별히 왕들의 소관이다.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 종교를 올바로 아는 것, 종교를 열심히 공언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세가 미치는 가장 먼 곳에까지 종교를 장려하는 것은 왕들의 소관이다. 이것이 선의(善意)를 지닌 모든 나라들 앞에서 그들의 영광이요, 또한 주 예수님의 날에 그들로 지극히 크고 뛰어난 영광을 얻게 할 것이다.

 

이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23)는 성경의 말씀이 헛말이 아니기 때문이며, 오래 전에 유세비우스가 “하나님을 향한 경건24)이 무기였으니, 콘스탄틴 본인을 보호하고 그의 적들에게 복수한 유일한 무기였다.”고 한 말도 헛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예찬

 

그러나 진리 없이 무슨 경건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 없이 무슨 진리(구원하는 진리)가 있을 수 있는가? 성경 없이 어떤 하나님의 말씀(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성경을 상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요 5:39; 사 8:20. 그 말씀들을 상고하고 연구한 이들이 칭찬을 받는다. 행 17:11과 8:28, 29. 성경에 서투른 자들, 또는 더디 믿는 자들이 책망을 받는다. 마 22:29; 눅 24:25.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딤후 3:15. 우리가 무지하면 성경이 우리를 가르칠 것이다. 길을 잃으면 집으로 데려다 줄 것이요, 망가지면 고쳐줄 것이요, 힘들어하면 위로해줄 것이요, 침체되면 활기를 불어넣어줄 것이요, 냉랭해지면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Tolle, lege; Tolle, lege).” 집어서 읽어라, 성경을 집어서 읽어라. (그 말이 성경을 향하게 했기에) 그것은 성 어거스틴에게 들린25)초자연적 음성이었다.

 

바로 그 성 어거스틴이 말했다.26)“내 말을 믿으라. 성경에 기록된 것은 무엇이든 높고 신성하다. 거기에 정말로 진리가 있고,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를 주고 새롭게 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가르침이 있다.

 

그리고 대단히 알맞아서, 누구든지 참 종교가 요구하는 헌신과 경건한 마음으로 다가가면 자신에게 충분한 것을 거기에서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성 어거스틴이 말했다. 그리고 성 제롬이 썼다.27)“Ama scripturas, et amabit te sapientia, 성경을 사랑하라. 그리하면 지혜가 너를 사랑하리라.” 율리안에 반대하여 쓴 글에서 성 키릴이 말했다.28)“심지어 어린아이라도 성경으로 양육 받으면 가장 경건해진다.”

 

그런데, 믿어져야 하는 것, 실행되어야 하는 것, 소망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이 [전부] 성경 속에 들어 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우리가 언급한 성경 사용의 서너 가지 예가 뭐 별것인가? 또한, 그리스도의 시대 이후로, 교부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누구나 성경의 풍부함 뿐만 아니라 온전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글을 쓴 것에 비춰볼 때, 우리가 언급한 교부들의 글 서너 가지가 뭐 대수인가?



터툴리안은 헤르모게네스에게 맞서면서29)“나는 성경의 충분함을 몹시 사랑한다”고 말했다. 또한 같은 부류의 이단자인 바펠레스에게도 말했다.30)“나는 당신이 성경과 상관없이 당신 자신의 것(머리나 지식, de tuo)으로부터 가져오는 (즉 결론을 내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보다 앞서서 순교자 성 저스틴도31)그랬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우리를 가르치는 선지자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해서나 바른 경건에 관해서 (어떤 것이든) 배운다는 것은 전부 적법하지(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



터툴리안에 뒤이어 성 바실도 그런 말을 했다.32) “기록된 내용들 중에 무엇이든 거부하거나, 기록되지 않은 어떤 것을 ([기록된 내용] 앞에다가, ejpeisavgein) 끌어들이는 것은 믿음으로부터의 명백한 타락이요 추측의 오류이다.”

 

같은 내용을 언급한, 예루살렘의 성 키릴이 그의 4번째 교리 강의에서 한 말, 성 제롬이 엘비디우스에게 한 말, 성 어거스틴이 페틸리안의 서신에 반박하며 그의 세 번째 책에 쓴 말과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단히 많이 들어있는 말들은 생략한다.또한, 이어져 내려온 후대의 교부들의 말도 생략하는데, 이는 독자들이 지루해 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그러면 성경은 대단히 충분하고 아주 온전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것인데, 그런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태만한 우리 자신을 어찌 변명할 수 있겠으며, 또 성경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엉뚱한 것에] 호기심을 갖는 우리 자신을 어찌 변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추수화환(ejiresiwvnh)33)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 한다, 얼마나 많은 달콤하고 좋은 일들이 그것에 달려 있었는지 이야기 한다. 또 구리를 금으로 바꾸는 현자의 돌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양식을 위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풍요의 뿔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모든 질병에 좋다는 약초 인삼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모든 하제(下劑)를 대신하는 만병통치약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모든 무기들의 찌르기와 타격 등등을 다 막아낸다고 알려진 불카누스의 갑옷에 대해서 수다를떤다. 그건 그렇고, 사람들은 몸의 유익이 그런 것들 때문이라는 거짓되고 헛된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 영적 유익이 성경 때문이라고 정당하고도 전폭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

 

성경은 갑옷일 뿐만 아니라, 공격과 방어를 위한 모든 병기들의 무기고이기도 하다. 그것으로 우리 자신을 지키기도 하고 적을 물리치기도 한다. 성경은 그냥 한 뿌리의 약초가 아니라 한 그루의 나무, 아니 그보다는 생명나무들이 우거진 낙원 전체이다. 그곳의 생명나무는 달마다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양식이 되며, 그 잎사귀는 치료제가 된다. 성경은 만나를 담은 하나의 항아리나 기름을 담은 하나의 병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단지 기념물일 뿐이거나, 혹은 그저 한 두 끼니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그러나 성경은, 그 어떤 큰 무리도 충분히 먹고 남을 만큼의 하늘의 빵을 퍼붓는 소나기와 같고, 기름을 채운 그릇들로 가득 찬 커다란 지하[동굴]저장실과 같아서, 그것을 통해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받으며, 우리의 모든 빚을 다 갚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은, 케케묵은34) 전통에 대조되는 건강에 좋은 식료품 저장소요, 독이 든 이단들에 대항해 예방약을 파는 약방이요(성 바실이35)그런 표현을 썼음), 거역하는 정신들에 맞서는 유익한 법규들의 전집이요, 남루한 초보[흔해빠진 돌멩이]에 대비되는 가장 고귀한 보물들의 창고요, 마지막으로 영생에 이르는 가장 깨끗한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것의 원본은 하늘에서 온 것이요 땅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의 저자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작가는 성령이요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의 지혜가 아니다. 기록자들은 태에서부터 구별된 그런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다.그 내용은 진실하고, 경건하고, 정결하고, 똑바르다. 그 형식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증거, 하나님의 계시, 진리의 말씀, 구원의 말씀 등등이다.

 

그것의 효과는 총명의 빛이요, 신념의 확고함이요, 죽은 행실로부터의 회개요, 생명의 새로움이요, 거룩함과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공부함의 결말과 상급은 성도들과의 교제이며, 천상의 본질에 동참함이며, 영원하고 순결한 유업의 결실이니, 결코 쇠하지 아니 할 것이다. 성경을 즐거워하는 자는 복 있는 자요, 그것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는 세 배로 복 있는 자이다.

 

번역의 필요성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묵상하겠는가? 알지 못하는 언어 속에 가둬놓은 것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36)라고 기록된 것과 같다.



그 [말을 한] 사도는 어떤 언어도 예외로 치지 않았다.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도, 가장 풍부한 헬라어도, 가장 세련된 라틴어도 마찬가지이다. 본성은 일반인에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 언어들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명백히 귀머거리라는 것을 시인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런 언어들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스키타이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는 아테네인을야만인37)으로 취급했다. 마찬가지로 로마인은 시리아인과 유대인에게 그랬다. (심지어 성 제롬38)자신도 히브리어를 야만적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아주 많은 이들에게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39)교황 니콜라스가 격노함에도 불구하고,40)라틴어를 야만적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이전에 유대인들은 다른 모든 민족들을 로그나짐[뭔 소린지 모를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나마 야만인이라는 말보다는 좀 낫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불평한 것처럼, 로마의 원로원에는 항상 통역을 위해서 불려온 한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불렀다.41)교회도 그런 상태로 내몰리지 않도록 준비된 번역본들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번역은 창문을 열어서 빛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껍질을 깨서 우리로 속살을 먹게 하는 것이다. 휘장을 걷어서 우리로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우물의 덮개를 치워서 우리로 물에 다가가게 하는 것이다. 마치 야곱이 우물의 아귀에서 돌을 옮겼고, 그로 인해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인 것과 같다.42)진실로, 통속어로 된 번역본이 없이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물을 길을 두레박이나 어떤 것 없이 (깊은) 야곱의 우물 곁에43)있는 어린아이들과 같다. 또는 이사야가 언급한 사람과 같으니, 그에게 봉한 책을 주면서,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고 제안하자, 그는 부득이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44)고 대답했다.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

 

하나님께서 단지 야곱에게 자신을 알리셔서 이스라엘 내에서 그 이름이 우러름을 받고 다른 곳에서는 안 그랬던 동안에는, 기드온의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그 밖에 땅은 말랐던 동안에는45), 동일한 사람들이 쓰는 하나의 언어, 그들 모두가 사용하던 가나안의 언어 즉 히브리어라는 원어 된 하나[의 성경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때가 차 가면서, 의의 태양이신 하나님의 아드님이 세상에 오셔야 할 때가 가까워지면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 화목을, 유대인만이 아니라 헬라인들까지, 그렇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들 모두의 화목을 이루고자 하나님이 정하신 그분의 때가 가까워지게 되자, 그러자 보라, 주님께서 헬라인 군주(헬라어를 쓰는 헬라인 후손인 왕)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기뻐하셨으니, 곧 이집트의 왕 프톨레미 필라델프로 하여금 하나님의 책을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하는 일을 주선하게 하셨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칠십 명의 해석자들의 번역본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 구두 설교로 유대인 가운데서 그랬듯이, 그 번역본은 기록된 설교로 이방인들 가운데 우리 구주의 오심을 위한 길을 예비했다. 헬라인들은 교육열이 높았기에, 귀중한 책들이 왕의 도서관에서 [먼지나 뒤집어쓰고] 처박혀 있도록 내버려두질 않았다.

 

그들은 많은 종들과 준비된 필기자들을 동원해 그 책들을 베끼고 퍼뜨려서 흔하게 만들었다. 또한 헬라의 언어는 아시아의 대부분의 주민들에게 잘 알려져 친숙했다. 헬라인들이 그 먼 곳까지 나아가 정복을 하고 식민지를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일한 이유로 헬라어는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잘 이해되었고,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헬라어로 제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촛대 위에 둔 촛불처럼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고, 저잣거리에서 외치는 선포처럼 대부분의 사람들로 이내 지식을 얻게 했다. 그리고그러했기에 그 언어는, 증거를 위해 [성경에] 호소하려는 복음의 첫 전파자들과, [성경을] 살펴보고 시도해보려는 그 당시의 학습자들 모두를 위한 성경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였다.

 

그 번역본이 아주 철저하거나 아주 완벽하지는 않았으며, 많은 부분에서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교정을 한다면] 사도들이나 속사도들만큼 그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또 누가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새로운 세상과 교회의 초기에, 성령과 사도들에게는 새로운 번역을 하는 것보다 그들이 발견한 것을 (그 번역본의 대부분은 바르고 충분했기 때문에) 취하는 것이 좋아보였던 것 같다. 새 번역본을 만드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많은 반대와 비난에 노출시켰을 것이다.



마치 그들이 번역본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자신들의 방향에 기여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를 증언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들의 증언이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왜 지금까지 칠십인역본이 전수되어 왔는지에 대한 어떤 이유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칠십인역본이 일반적으로는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을 충분히 만족시키지는 못했으며, 특히 유대인들에게 그러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시대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퀼라가 새로운 번역에 착수했으며, 그 사람 다음에는 데오도티온이, 또 그 다음에는 쉼마쿠스가 했다. 그렇다, [그 외에도] 역자가 알려지지 않은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번역본도 있었다.

 

이것들이 칠십인역본과 함께, 오리겐이 큰 목적을 갖고 훌륭하게 편찬한 헥사플라[여섯 역본의 대조 성경]를 구성했다. 그러나 칠십인역본은 여전히 명성을 이어갔고, 그래서 오리겐이 칠십인역본을 (에피파니우스가46)결론을 내렸듯이, 칠십인역본이 다른 나머지 것들보다 훨씬 가치 있고 뛰어났기 때문에) 헥사플라의 중앙에 위치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헬라 교부들이 그들의 주석을 위한 근거와 기초로 칠십인역본을 사용했다.47)그렇다, 앞서 언급한 에피파니우스는 칠십인역본을 아주 대단히 높이 평가해서, 그것의 역자들을 상당히 존경하여 단지 해석자만이 아닌 선지자라고도 생각한다.

 

그리고 황제 져스티니안이48)그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만나 특별히 칠십인역본을 사용하라고 하면서, 그 이유로 든 것이 그 역자들이 말하자면 선지자적 은혜로 깨우침을 받았다는 것이었다.49)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50)고 말했듯이, (또한 성 제롬이51)

여러 번 단언했듯이) 그 칠십 인은 해석자들이었을 뿐 선지자들이 아니었던 것이 명백하다. 그들이 배운 사람으로서 많은 일을 잘 하였으나, 그들도 사람인지라 걸려 넘어졌으니, 한편으로는 간과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무지함으로 실수를 했다. 그렇다, 그들은 종종 원문에다 두드러지게 더하기도 했고, 때로는 빼기도 했다.

 

그것이 사도들로 하여금 많은 경우에 칠십인역본의 구절들을 버리게 했다.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서 벗어난 구절들이 있을 때에는, 사도들이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심을 좇아 말씀의 진리에 따른 그 구절의 의미를 전달했다. 이것으로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들에 관한 이야기는 충분하리라.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 또한 그리스도 이후 채 몇 백 년이 안 되어 많은 라틴어 번역본들이 나타났다. 이는 이 언어 역시 율법과 복음을 전하기에 아주 적합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시기에 서쪽은 물론이요 남쪽 및 동쪽과 북쪽의 많은 나라들이 로마제국의 도(道)로 편입되면서 라틴어를 말하거나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좋다고 하기에는 라틴어역본들이 너무 많았는데, 셀 수 없을 정도였다.

 

(Latini interpretes nullo modo numerari possunt 라고 어거스틴이 말했다.)52)다시 말하지만, 그것들은 (구약성경의 라틴어 역본들에 대해 말하는 것임) 히브리어라는 샘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헬라어라는 개울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따라서 전체가 명쾌한 것은 아닌 헬라어 역본으로부터 번역해 낸 라틴어 역본은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다.

 

이것에 자극을 받아, 그의 당대나 그 이전의 누구보다도 가장 학식이 높은 교부요 논란의 여지없는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성 제롬이 구약성경을 그것의 원문으로부터 직접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을 수행함으로 큰 학식, 판단력, 근면, 충성을 지녔음을 증명했고, 교회로 하여금 자신에게 특별한 기억과 감사를 영구히 하게 만들었다.

 

일반 대중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함

 

이리하여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가 보편적으로 수용되기도 전에 이미 교회에는 헬라어 및 라틴어 번역본들이 공급되었다. 그렇지만 (학식 있는 자들은53), 심지어 성 제롬의 시대에도 로마의 집정관과 그의 아내가 모두 다른 민족 출신이고, 거의 같은 시기의 원로원의 대다수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경건하고 학식을 갖춘 이들은 모두 그들이 이해하는 언어인 헬라어와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으로 만족하지 않고 (마치 착한 문둥병자들이 자신들이 잘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풍성함을 이웃들에게 알려서 그들도 양식을 얻게 해주려고 했던 것처럼)54), 의에 주리고 목마른 무학자들, 자신들처럼 구원받아야 할 영혼을 지닌 그들의 유익과 덕 세움을 위해서, 동포들을 위한 자국어 번역본들을 제공했다. 

 

그래서 하늘 아래 대부분의 민족들이 그들의 회심 직후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자신들의 모어(母語)로, 사역자의 말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번역되어 적혀진 말씀을 통해서도 듣게까지 되었다.



만일 누구든 이것이 의심스럽다면, 그것을 납득하게 해 줄 수 있는 예들이 충분히 있으니,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 제롬이 말하기를, “Multarum gentium linguis Scriptura ante translata docet falsa esse quae addita sunt, 성경이 이전에 많은 민족의 언어들로 번역되었다는 것이, (루시안과 헤시키우스에 의해) 덧붙여진 것들이 거짓임을 보여준다.”55)라고 했다.

 

성 제롬이 그곳에서 그렇게 말했다. 바로 그 제롬이 어디 다른 곳에서, 한 때 그가 sune linguae hominibus, 즉 그의 고향 달마티아의 사람들을 위해서 칠십인역본의 번역을 제안했었다고 확언한다.56)에라스무스만 그 말을, 성 제롬이 성경을 달마티아 언어로 번역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사람들로부터 이의 제기를 받지 않을 사람들인 식스투스 세넨시스57)와 알폰수스 아카스트로58)도 (예를 더 들진 않겠음) 솔직하게 거의 같은 말을 한다.

 

그와 같이, 성 제롬 시대에 살았던 성 크리소스톰59)도 그와 함께 증거를 제시한다. “성 요한의 교리(크리스소톰의 표현)는 (철학자들의 가르침처럼) 사라져 버리는 그런 종류에 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리아인, 이집트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에디오피아인, 그리고 야만인들인 수많은 다른 민족들이 그것을 그들의 언어(모어)로 번역했고, (진정한) 철학자가 되는 것을 배웠다.” 그가 말한 철학자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이것에다 고대사와 학문에 있어서 크리소스톰에 버금가는 데오도렛60)의 말을 부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한 말은 이렇다. “해 아래 있는 각 나라에는 이러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말씀들로 가득하고, 히브리인의 언어(히브리어 성경을 의미함)가 헬라인들의 언어로만 번역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로마인, 이집트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아르메니아인, 스키타이인, 사우로마티아인의 언어로도 번역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어느 민족이나 사용하는 모든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같은 식으로, 파울루스 디아코누스61)와 이시돌62)의 (그리고 그들 이전에 소조멘63)의) 보고에 의하면 울힐라스가 성경을 고트족 언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바세우스64)에 의하면 세빌의 감독 요한이 주후 717년 무렵에 성경을 아랍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시스텔티엔시스에 의하면 베데가 성경의 대부분을 색슨족 언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트리데미우스의 보고에 의하면, 800년경에, 베데가 히브리어 시편을 갖고 했듯이 에에프나르가 프랑스어 시편을 요약했다고 한다. 키스테르티엔시스의 말에 의하면 알프레드 왕이 시편을 섹슨족 언어로 번역했다65). 아벤티누스(잉골슈타트에서 인쇄된)에 의하면 메토디우스가 성경을 슬로바니아어로 번역했다66).

 

베아투스 레나누스에 의하면67)프라이징의 감독 발도가 그 당시에 복음서들을 독일어 운문(韻文)으로 번역하라고 시켰는데, 그것은 코르비니아노의 장서68)가운데 현존해 있다. 여러 저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발두스가 1160년경에 그 자신이 직접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했거나, 또는 프랑스어로 번역된 것을 얻었다고 한다. 발두스의 시대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후에 현자라는 별명을 가진 샤를 5세가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게 하였고, 베로알두스가 증언하듯이69)그 번역본의 필사본들이 여럿 현존한다.

 

거의 동시대에 우리의 왕 리차드 2세 시대에 존 트레비사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지금도 그 당시에 번역된 것으로 보이는, 손으로 베껴 쓴 많은 영어 성경들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위드민스타디우스가 출판한 시리아어 역본 신약성경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장서에 들어 있고, 아우구스티누스 네비엔시스가 출판한 아랍어 시편도 많은 이들이 소장하고 있다.

 

포스텔은 여행 중에 에디오피아인의 언어로 된 복음서를 보았다고 확언했다. 그리고 암브로스 데시우스는 인도어 시편을 봤다고 단언했는데, 그가 증언한 것은 포트켄이 시리아 문자로 출판한 것이었다. 따라서,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는다는 것은 최근에 갑자기 생긴 이상한 생각이 아니다.

 

영국에서 크롬웰 경에 의한 것도70), 폴로니에서 라데빌 경에 의한 것도, 황제의 영토에서 웅나디우스에 의한 것도 아니고, 심사숙고해서 예부터 해 오던 것을 따른 것이니, 바로 어느 민족이든 회심의 초기부터 실행해 오던 일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더 빨리 자라게 하는 데에, 그리고 사람들을 “우리가 들은 대로‥‥‥보았나니”71)라는 시편의 말씀으로 말할 수 있게 하는 데에 가장 유익하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모어로 알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꺼려하는 우리의 대적자들

 

이제 로마교회가 그 자녀들을 향한 모성애를 실천해서 그들에게 그들의 모어로 된 성경을 허락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선물이 선물이라고 일컬어질 만하지 않은72), 무익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어로 된 성경을 사용하려면 먼저 서면 허가서를 받아야 하는데, 그걸 받으려면 그들의 고해 사제에게 자신이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혹은 그런 찌꺼기들 속에 [함께] 눌어붙어 있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미신의 누룩으로 발효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야만 한다.

 

그런데, 클레멘트 8세에게는73), 자국[통속]어로 된 성경을 갖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마저도 너무 과분하게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피우스 4세의 인가를 각하하고 취소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빛(Lucifugae Scripturarum, 터툴리안이 한 표현74))을 대단히 두려워해서, 성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들의 맹약한 사람들이 출판한 성경을 갖는 것조차도 안 되고, 자신들의 감독들과 조사관들로부터 허가를 받은 사람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성경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전달하는 것을 몹시 꺼려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그들의 뜻에 어긋나게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라고 강요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쁜 근거를, 아니면 나쁜 양심을, 혹은 둘 모두를 강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확신하건대, 시금석 앞에 내어놓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좋은 금을 가진 자가 아니요, 짝퉁을 가진 자이다. 빛을 피하는 자는 진실한 사람이 아니요, 

 

자기의 행위가 책망 받지 않게 하려는 악인이다75). 저울이나 잣대를 가져오는 것을 꺼려하는 자는 정직하게 거래하는 장사꾼이 아니라 속임수를 쓰는 자이다. 그러나 이 오류의 문제는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번역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돌아가겠다.

 

이 일을 반대하는 우리의 형제들, 그리고 적들 모두에게 하는 발언과 논증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는데), 오래 진행 중인 번역에 대해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전에 한 번역들을 검토함에 대해서 말들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 일을 해야 할 필요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들은 묻는다. 교회가 그 동안 내내 속아 온 것이냐?


교회의 달콤한 빵은 누룩이 섞인것, 은은 불순물이 섞인 것, 포도주는 물을 탄 것, 우유는 석회가 섞인 것이었느냐? (Lacte gypsum male miscetur, 성 이레네우스의 표현76)) 우리는 우리가 올바른 길을 걸어왔기를,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지녀왔기를, 그리고 온 세상이 상처받고 불평하는 이유를 가졌을지라도, 우리에겐 [그런 이유가] 하나도 없기를 바랐다.

 

유모가 젖가슴을 내밀어 왔는데 아무 것도 없는 빈 젖이었는가? 교회의 교부들이 빵을 전달해 주었는데, 바로 그것이, 세네카의 표현처럼, 돌처럼 단단한 것으로 판명이 났는가? 이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을 허위로 다루는 것인가?

 

어떤 형제들이 그렇게 말했다. 또한 우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대적들이, 느헤미야에 나오는 산발랏과 같은 자들이 그 일과 일꾼들을 조롱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77)이전의 그들의 번역본이 좋았잖아? 그걸 왜 지금 손질한다는 거지? 좋지 않았던 건가? 그랬다면 어째서 사람들에게 그걸 강요했었지? 

 

참으로, 왜 가톨릭교도들(교황의 로마주의자들을 뜻함)은 항상 위험 속으로 걸어 들어갈까, 듣기를 거부하면서? 그렇기는 하나, 만일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야 한다면 가톨릭교도들이 그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그들은 학식이 있고, 적당한 때를 알고 있으며, 금지명령서를 해제할(manum de tabula) 수 있다. 우리가 그들 양쪽 모두에게 간단히 대답하겠다. 먼저 앞 사람들, 즉 형제인 이들에게 성 제롬의 말78)로 대신하겠다.


Damnamus veteres? Mineme, sed post priorum studia in domo Domini quod possums laboramus. 그 말인즉슨, “우리가 옛 사람을 정죄하는가? 전혀 아니다. 다만 우리 앞서 살았던 이들의 수고를 본받아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 말은 그가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내 이전에 살았던 학자의 본보기에 자극을 받으며, 언어 지식에 있어서의 나의 재능이 하나님의 교회에 어느 정도로든 유익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내 의무라고 생각했었다. 그 언어들을 가지고 수고한 것이 헛되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 안에 있었던 것 이상으로 그들 (옛사람이기는 하나) 가운데서 뽐내려는 것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성 제롬이 말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우리의 형제들에게 주는 만족

 

그리고 동일한 효력에 대해서 우리가 말하는데, 이 땅에서든 바다 건너에서든, 헨리 왕 시대에든 에드워드 왕 (만일 그의 시대에 어떤 번역이나 번역본의 교정이 있었다면) 시대에든, 항상 유명하게 기억되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든, 이런 종류의 일에 있어서 우리 앞서 고생한 그들의 일꾼들의 그 어떤 것도 정죄하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아주 멀리 떠나 있다.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의 설립과 공급을 위해서 일으켰다고 인정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서와 후손들에게서 영원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바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판단79)은 가치가 있고 잘 알려졌다.

 

“만일 티모데우스가 없었다면 우리는 많은 감미로운 음악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프리니스(티모데우스의 스승)가 없었다면 티모데우스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얼음장을 깨뜨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돕는 일을 출범시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으며, 그들의 이름은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 여기에 덧붙여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된 하나님의 책을 전달해주는 것보다 더 유용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감춰진 보물과 봉인된 샘은 아무 유익이 없기에, 프톨레미 필라델프가 유대인 랍비들 곧 선생들에게 편지를 썼다. “사람은 낯선 사람(자신이 알지 못하는 언어를 쓰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개와 함께 있으려 할 것이다.” 에피파니우스가80) [그 편지에 대해] 증언하고 있으며, 성 어거스틴도81) 같은 말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도 첫 시작과 동시에 완벽한 것은 없다.

 

그리고 나중 생각이 더 현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앞서 이루어진 토대 위에 세우며, 또 그들의 수고로부터 도움을 받으면서, 그들이 남긴 대단히 뛰어난 것을 더 낫게 만들려고 노력한다면, 확신하건대 누구도 우리를 미워할 이유가 없으리라. 우리가 자신하건대, 만일 그들이 살아있다면, 그들도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다. 일격(一擊)을 가한 것은 아비에셀의 포도 수확이나 에브라임의 남은 포도 거두기도 무시되지 않았다. 사사기 8:2를 보라.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는 바닥을 세 번이나 치기까지는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지자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데, 왜냐하면 그보다 더 많이 쳤어야 했기 때문이다82).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던 아퀼라는 최선을 다해 주의 깊고 능숙하게 성경을 번역했는데,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반복해서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카타 아크리베이안(kataV ajkrivbeian), 즉 정확하게 된 [번역]으로 불렸다고 성 제롬이83)증언한다. 얼마나 많은 세상 학문의 책들이 동일한 번역자에 의해, 그리고 다른 이들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재번역이 이루어져 왔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한 권의 번역서만도 적게 잡아도 예닐곱 가지나 현존한다.

 

이제 만일 이런 수고를 박 넝쿨에 하면 그것은 작은 그늘로 우리에게 여유를 주고는, 오늘 번성하다가 내일은 베어진다. 우리는 어떤 수고를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수고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과연 포도나무에, 사람의 양심을 기쁘게 해주는 그것의 열매에, 그리고 거기에 영원히 붙어있는 가지에 우리가 무슨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가? 이 [포도나무]는 바로 우리가 번역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84)(터툴리안이85)말했다.) Tanti vitreum, quanti verum margaritum, 즉, 우리가 유리 장난감을 좋다고 여길진대 진짜 진주는 얼마나 귀히 여겨야 하겠는가?86)그러므로 아무 사람의 눈도 나쁘지 말라. 왜냐하면 폐하의 눈은 좋기 때문이다.



누구도 슬퍼하지 말라. 우리에겐 이스라엘의 영적 부유함의 증가를 추구하는 군주가 계시기 때문이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라. 그리하여 정당한 책망을 받게 하라.)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군주의 마음에 이런 종교적 관심을 갖게 역사하셔서, 성경 번역본들을 분별 있게 연구하고 검토하게 해 주심을 인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송축하자.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지 이미 건전한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판본들의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있어서 전부가 본질적으로 건전하다.

 

우리의 것들 가운데 가장 형편없는 것일지라도 저들의 인증된 통속어 역본보다는 훨씬 더 낫다) 것은 다듬어지고 고쳐지면서, 황금처럼 더욱 밝게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완전하거나 불필요하거나 혹은 원어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바로 잡아서 진리를 그 자리에 채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의 명령으로 이룰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이것보다 더 크고 진정한 명예를 그에게 안겨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임무를 부여 받은] 그들이 그들의 봉사에 헌신하여 자신들에게 있는 모든 것을 그 일의 필요를 위해서 바치는 것보다 더 나은 무엇으로 왕에 대한 그들의 충성, 하나님께 대한 순종, 그의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인정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 모든 것 외에, [지금 번역에 반대하는] 그들은 그 일의 주동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그것을 따져봐야만 한다. 진정한 역사의 진실은 이렇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의 성가신 청원에 따라, 폐하의 대관식 후에, 햄프톤 궁정에서 회의를 열어 그들의 불만을 청취하였다. 이성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다른 모든 [불평의] 근거들이 설득력을 잃었을 때, 그들이 마지막으로 이런 핑계에 호소했다. 그들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는 도저히 [영국 성공회의] 신앙고백서(the Communion book)에 서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것에 들어 있는 번역된 성경이, 그들의 말로 하자면, 가장 부패한 번역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아주 형편없고 헛된 핑계에 불과하다고 판단되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폐하께서는, 새로운 번역을 하면 그에 뒤따를 유익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 여러분에게 내놓는 이 번역본을 만들라는 명령을 곧바로 내리셨다. 이렇게 우리가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우리의 양심적인 형제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의 비난에 대한 대답

 

이제 [우리의 대적자들인] 그 후자에게 우리가 답변한다. 우리가 부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단언하고 맹세컨대, 우리 인간 동료들에 의해서 발간된, 영어로 가장 형편없이 번역된 성경도 (우리가 아직 그들이 완성한 성경 전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 아니, 하나님의말씀이다. 


왕께서 의회에서 발언하시는 말씀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로 번역되어도 여전히 왕의 말씀인 것처럼, 모든 통역자들이 동일한 세련미를 지니게 하지도 않고, 혹여 문구가 딱딱 들어맞게 하지도 않고, 곳곳에서 의미가 아주 명쾌하지도 않게 해석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왕의 말씀인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그것의 훨씬 큰 부분에 따라서 이름이 붙여져야 한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한 일반인은 Verum ubi multa nitent in carmine, non ego paucis offendor maculis,87)“살면서 많은 실수를 한 사람이라도 덕 있는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덕스러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인데, 우리 모두 많은 일들에 있어서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88))


또한 손에 사마귀가 몇 개 났을지라도, 그렇다, 얼굴이 주근깨로 덮여있을 뿐만 아니라 흉터가 있다할지라도 그는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간주 수 있다. 그러므로 번역본의 표현 중에 어떤 불완전한 것들과 흠들이 지적된다고 하더라도 그 번역된 말씀을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통용을 금지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일찍이 해 아래에서, 하나님의 영을 비상한 수준으로 부여받고 무오류의 특권을 받아 누린 사도들이나 사도들과 같은 사람들의 손으로 하지 아니 한 그 무엇이 완벽했는가? 그래서 듣기를 거부하며 번역된 말씀을 감히 불태우는 로마주의자들은 은혜의 영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 말씀은 원래, 인간의 연약함을 능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의향과 의미가 표현되게 하신 그분으로부터 나왔다.

 

한두 가지 예로써 판단해보자. 플루타르크의89)기록에 따르면, 갈리아 사람들이 로마를 불태운 후에 곧이어 재건에 몰두했다. 그러나 급히 서두르느라 이전에 아주 보기에 좋고 편리했던 것 같은, 그런 아름다운 형태로 도로를 깔거나 건물의 비율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걸 불태워버리기를 꾀했던 카틸리나가 정직한 사람이요 훌륭한 애국자인가? 아니면 실제로 로마에 불을 지른 네로가 선한 군주인가? 마찬가지로, 에스라의 이야기와90)학개의 예언에 의하면,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후에 스룹바벨이 건축한 성전이, 어느 모로 보나 솔로몬이 세운 이전 성전에 비교가 안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의 성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후자를 보고서 울었다는 것을 보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중 것을 유대인들이 싫어하거나 버렸는가? 아니면 헬라인들이 더럽혔는가? 번역본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그와 같다. 칠십인 역본이 많은 곳에서 원어 성경과 차이가 나며, 명쾌함이나 진지함이나 장중함에 있어서 원어 성경의 근처에도 못가지만, 그렇다고 사도들 중 누가 그 역본을 정죄했는가? 폐기처분을 내렸는가?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사용했다. (그것은 성 제롬과 대다수의 학자들이 시인하듯이 명백하다.)


만일 그 역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기에, 그런 이름으로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려들지 않았을 것이요, 자신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본을 보여 교회에게 그것의 사용을 용인하거나 천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적들이 영어 성경들을, 혹은 그들이 접한 그 영어성경들의 일부분을 헐뜯고 욕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두 번째 변명으로, 그 번역본들의 번역자들이 (실제로) 이단들이기 때문이라고 강변하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스스로를 가톨릭[보편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유로 우리를 이단이라고 부르는데, 둘 모두 잘못이다.) 도대체 어떤 신학이 그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는지 놀랍다. 우리는 터툴리안이91)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확신한다.

Ex personis probamus fidem, an ex fide personas? 우리가 사람들의 됨됨이로 그들의 믿음을 판단하는가?

우리는 사람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됨됨이를 판단해야 한다. 또한 성 어거스틴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도나티스주의자인 티코니우스가 만든 어떤 규칙들을 발견하고서,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규칙들을 활용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렇다. 어거스틴의 세 번째 책 기독교교리(De doctrina Christiana)9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들이 추천받을 가치가 있다고 크게 평가하면서 그 내용을 자신의 책에 삽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오리겐도 그랬고, 몇 백 년 동안의 하나님의 교회 전체도 다른 생각을 지녔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아퀼라의 번역본을 발로 짓밟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불태우는 것으로부터는 더더욱 멀었다.)


그들은, 가장 지독한 이단인 에비온파에 속했던 심마쿠스의 번역본과 데오도티온의 번역본을 히브리어 원어 성경 및 칠십인역본과 함께 엮어서 (이전에 에피파니우스의 글에서 설명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연구하고 읽도록 공개적으로 내놓았다. 그런데, 배우지 못한 사람들, 너무 많이 알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우리가 피곤하게 만들고 있고, 배운 사람들 즉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줄 안다.

 

그럼에도 글을 마치기 전에, 우리를 대적하는 그들의 세 번째 생트집과 반대에 대해서, 즉 우리가 번역본들을 너무 자주 변경하고 수정한다는 것에 관해 우리는 대답해야만 하겠다. 이 점에 있어서, 참으로 그들은 우리를 가혹하고도 이상하게 다루고 있다. 누군가가 자신이 한 것을 다시 돌아보고 그럴만한 이유가 보여서 개정하는 것 때문에, (그런 일로 지혜로운 이들이) 그에게 허물을 돌린 적이 일찍이 있었는가? 성 어거스틴은93)성 제롬에게 Palinodia 즉 번복하라고 충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어거스틴도 자신이 이미 했던 많은 것들을 번복하기를94), 우리는 해약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부족함을 찾아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95). 만일 우리가 진리의 자녀이고자 할진대, 진리가 말하는 바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 자신의 명성이, 물론 다른 사람의 것도,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방해가 된다면 짓밟아버려야 한다. 이것이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말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들이 가장 침묵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닌 다양성은 무엇인가? 그들이 만든 변경들, 즉 그들의 전례서들, 기도서들, 성무일과서는 물론이요, 또 그들의 라틴어 번역본은 무엇인가?

 

성 암브로스가 만든 것으로 주장되는 전례서(Officium Ambrosianum, 암브로시우스의 성사서)가 상당한 기간 동안 선호를 받으며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황제 샤를의 도움을 받아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하드리안이 그것을 폐기했다. 그렇다, 그것을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성 그레고리의 전례서를 보편적으로 사용하라고 명령했다96). 어쨌든, 그레고리의 성사서(Officium Gregorianum)는 이렇게 해서 명성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변화 즉 변경 없이 지속되어 왔는가? 그렇지 않다.

 

로마의 전례 자체가 두 가지 형식이었다. 미크롤로구스 이전의 로마주의자 파멜리우스가 쓴 서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형식과 옛 형식(하나는 한 교회에서 사용되었고, 다른 것은 다른 교회들에서 사용되었음)이 있었다.

 

바로 그 파멜리우스가 주후 1277년경에 라둘푸스 데 리보에게 답변을 보내면서, 교황 니콜라스 3세가 로마의 교회들로부터 훨씬 고대의 책(전례서)들을 치워버리고, 프라얼스 미노리테스의 미사 전례서를 가져다 사용하고, 사람들에게 그곳에서 그것을 지키라는 명령을 했다고 보고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약 백 년 후에 앞에서 언급한 라둘푸스가 우연히 로마에 들렸을 때 모든 책들이

새 책(신판)임을 발견했다. 이러한 난도질과 변경이 훨씬 오래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최근까지도 이루어졌다. 피우스 퀸투스 자신이 시인하기를, 거의 모든 주교들이 나름대로의 전례서를 갖고 있었으며, 서로 다른 사람의 것과 상당히 달랐다고 했다.


그 사실에 자극을 받은 그가, 그것이 얼마나 오래 된 것이냐, 그들의 교구 주교들에 의해서 특권이 부여되고 발행된 것이냐를 따지지 않고 다른 모든 성무일과서들을 폐기해버렸다. 그리고 1568년에 그 자신이 제안한 것만 확립하고 승인해버렸다.


그들의 교회의 신부가 그 백성의 딸의 상처를 부드럽고 섬세하게 치료해 주기를 기뻐해서 최선을 다하다가 그것들의 괴상함과 부조화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대단히 큰 잘못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일관성을 자랑할 큰 이유가 없음을 그 자녀들이 알기를 바란다.

 

그런데 우리의 번역본들 사이에 차이가 드러나서 우리가 그것들을 자주 교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히 부여된 일이다. 그러므로 과연 그들 자신은 이 부분에서 잘못이 없는지 (만일 교정하는 것이 잘못으로 치부된다면),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돌을 던지기에 합당한 사람들인지 살펴보자. O tandem maior parcas insane minori:97)자신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약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않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발라, 스타풀렌시스, 에라스무스, 비베스가 그들의 통속어 역본에서 오류를 찾아냈고, 그래서 그 역본을 다듬거나, 아니면 아예 새로운 번역본을 만들기를 희망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맞서 증언할 적들을 만들어냈다고 대답하려 들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진리를 말함으로 그들의 원수가 되었던 성 바울과98) 다른 부류의 적들은 아니다.

 

그리고 아쉬운 것은, 그 사람들이 그들에게 훨씬 더 명백하고도 더 자주 그것을 당당히 말했더라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는 그들이 뭐라고 말할까? 교황 레오 10세가 교황령과 칙서를 통해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 번역본을 허락했는데, 그것은 그 통속어 역본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 동일한 레오가99) 파그니니에게 성경 전체를 번역하라고 강권하고 그 일에 필요한 비용을 전부 감당했다.

 

확실히, 사도가 히브리인들에게 논하면서, 만일 이전 율법과 언약이 충분했다면 나중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는데100),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옛 통속어 역본이 모든 점에서 용납할 만 했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려는 하찮은 목적에 수고와 비용을 들인 것이다’라고 말이다.

 

만일 그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한 교황의 개인 의견이었고 그가 혼자서 궁리해본 것이라고 한다면, 그때는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엇비슷한 그들의 최고위 인물들이 더 많이 있음을 단언하겠다. 바로 그들의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앞장을 섰던 파이바와 베가, 그들의 종교 재판관 예로니무스(ab Oleastro 올아스트로 출신의), 그들의 주교 이시도루스 클라리우스, 그들의 추기경 토마스 아 비오 등이 스스로 새 번역본들을 만들거나, 다른 사람이 만든 새 번역본을 따르거나, 그 통속어 역본 해석자가 갈팡질팡했다고 지목한다.

 

그들 중 누구도 그[번역자]와 의견이 다르다고 주장하거나 그에게 반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수용되고 있는 생각을 부정하는 그들의 명사(名士)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그들은 이것을 균일한 본문이나 본문에 대한 균일한 입장이라고 부르는가? 말이 안 된다. 그러면, 우리가 핵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보겠다.

 

그들의 파리 판본이 로바인 판본과 다르고, 헨테니우스의 판본이 그 둘 모두와 다르다. 그럼에도 그것들 모두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는가? 어쨌든, 식스투스 퀸투스가101), 어떤 가톨릭교도들이 (자기 편 중에 어떤 사람을 의미했음)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황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비록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사단이 그들을 기회로 삼고 전력을 기울여서, 대단히 불확실하고 잡다한 여러 번역본들로부터 모든 것들을 혼합해서,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 그 안에 전혀 남아있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실토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동일한 식스투스가 그의 추기경들의 조언과 동의를 얻어 불가침의 칙령으로 규정하기를, 트렌트 공회의가 인증하려고 했던 구약과 신약의 라틴어 판본이, 바티칸의 인쇄소에서 부지런히 교정하고 인쇄해서 자신이 발행한 것과 논란의 여지없이 동일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식스투스가 자신의 성경 서문에서 그렇게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바로 다음 후임자인 클레멘트 8세는 식스투스의 판본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다른 판본의 성경을 발행했다. (그런 차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중대하고 본질적인 것들이었음) 그럼에도 이 판본은 어찌됐든 틀림없는 인증본이었다. 무엇이 예, 아니오로 대답하여 우리의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갖게 하는가, 만일 이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무엇이 달콤한 조화와 일치인가, 만일 이것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므로, 고린도의 데마라투스가 위대한 왕에게, 그리스인들 사이에 분쟁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그의 가정불화부터 정리하라고 조언했듯이, (왜냐하면 당시에 그의 왕비와 아들과 후계자가 그와 맞서 극도로 반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동안 내내 우리의 적들 자신이 수없이 많고 다양한 판본들을 만들어왔으며, 또한 그 판본들의 가치와 권위에 관해서 너무나 많이 [서로] 티격태격해왔기에, 그들이 변경하고 수정하는 것 때문에 우리에게 공평하게 따질 수는 없다.

 

번역자들의 목적, 참여 인원, 비품, 신중함, 등등

 

이제 우리의 적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두고, 우리가 기획했던 것이 무엇이며, 성경을 정독하고 조사함에 있어서 어떤 과정을 밟았는지 간략하게 설명하기에 좋은 시점이다. (선한 그리스도인 독자여,) 참으로 우리는 처음부터 새 번역본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나쁜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만들어 내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식스투스가 한 비난, 즉 우리 백성들을 포도주 대신에 용의 쓸개즙으로, 우유 대신에 유장(乳漿)으로 먹이고 있다고 한 말이 어떤 면에선 진실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하나의 좋은 것을 더 낫게 만들거나, 여러 좋은 것들로부터 하나의 주된 좋은 것을 만드는 것이었고, 당연히 반대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가 한 일이고 또 목표였다. 그 목표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눈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아주 위대한 사람들로 비춰진 이들이다. 또한 자신이 칭찬받는 것보다 진리를 추구한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누군가 말했듯이) causa가 아니라 exercendi로, 즉, ‘훈련받으려고’가 아니라 ‘숙련공’으로 과업에 임했다. 또는 임했다고 생각된다.

 

즉, 배우려고 온 것이 아니라 배운 자로서 온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 교회가 크게 묶여있는 분인 폐하의 수하에 있는 최고 감독자와 간역자(ejrgodiwvkth")는 그의 지혜로 나지안젠이102) 아주 오래 전에 가르쳤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먼저 가르치다가 나중에 배우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순서라는 것이다. 그렇다. toV ejn pivqw/ keramivan manqavnein,

즉 배우면서 동시에 실습하는 것은 일군에게 추천할만한 것도 아니며, 일 자체를 위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다103). 그러므로 그런 생각 위에서, 성 제롬의 말로 겸손하게 말할 수 있었다. Et Hebraeum Sermonem ex parte didicimus, et in Latino pene ab ipsis incunabulis etc. detriti sumus, 즉, “우리가 [두 언어를 모두 아는데,] 히브리어를 어느 정도 배웠으며, 라틴어는 거의 요람에서부터 사용해왔다.”

 

성 제롬은 자신이 뛰어나게 잘 하던 헬라어는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구약 성경을 헬라어가 아닌 히브리어로부터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이 사람들이 모였는가? 그들 자신의 지식을, 혹은 날카로운 현명함을, 또는 사려 깊은 판단력을 신뢰함으로써, 마치 육체의 팔에 그 일이 달려 있는 것처럼 했는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열면 닫을 자가 없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을 신뢰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주 아버지께 기도했다. 성 어거스틴이104) 기도했던 취지로 기도했다.

 

“오, 주님의 성경이 저의 순수한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성경을 잘못 보지도 않게 하시고 성경으로 속이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확신으로, 그리고 이 헌신을 갖고 그들은 함께 모였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너무 많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많은 것들을 놓칠까 싶어 충분히 많은 인원이 모였다.

 

그들 앞에 놓였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한가? 참으로 그것은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본문과 신약성경의 헬라어 본문이었다. 그것들은 금으로 된 두 개의 파이프들, 아니 그보다는 그것을 통해서 감람나무 가지들이 금[기름]을 흘리는 도관(導管)들이다. 성 어거스틴은105) 그것들을 선례(先例), 또는 원래의 언어들이라고 불렀다. 성 제롬은106)

샘들이라고 불렀다. 같은 성 제롬이107) 단언하고, 그라티아누스가 그의 칙령 가운데 삽입하기를 아끼지 않았던 말은 이렇다: “옛 책들(구약성경을 의미했음)의 신용은 히브리어 사본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듯이, 새 책들의 신용은 헬라의 언어에 의해서 검증되어야 한다.” 그가 말한 헬라어란 원어로 된 헬라어 사본을 의미한다. 만일 진리가 이 언어들에 의해서 검증되어야 한다면, 그 [원어로 된 사본들]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번역본을 만들어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언어들을,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 언어들로 기록된 성경인데,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로 말미암아 그분의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 이 언어들을 번역하려고 우리 앞에 놓았다. 칠십인역본 번역자들이 72일108) 만에 번역을 마쳤다는, 그들에 관해 보고된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했듯이 급하게 서둘러서 일을 해치우지 않았다.

 

또한 일단 번역을 마친 다음에 그것을 재차 반복해서 검토하는 것을 금지당하거나 방해받지도 않았다. 성 제롬처럼 되지는 않았다. 만일 그가 보고하는 바가 사실이라면, 그는 무엇이든지 더 빨리 쓰지 못했고, 그래서 [그가 쓰자마자] 곧바로 낚아채져서 출판되는 바람에 그는 그것을 수정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109).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한 사람이 우리가 처음은 아니어서,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오리겐처럼 도움이 되는 이전 자료들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오리겐에 관한 기록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처음으로110)성경 주석을 썼는데, 그랬기에 그가 여러 번 빗나갔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한] 그 일은 72일 안에 황급히 처리되지 않고, 일군들의 희생을 초래했다.

 

아무리 가볍게 잡아도, 72일의 일곱 배의 갑절이 되고도 남는다. 그 이상이다. 그와 같은 무게와 결과를 지닌 일들은 분별 있게 진척되어야 한다111). 중요한 일을 처리 중인 사람은 안일한 느림뱅이라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갈대아어, 히브리어, 시리아어, 헬라어나 라틴어, 심지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번역자들이나 주석가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번역을] 마친 것을 개정하기를, 우리가 망치질을 했던 모루에 다시 올려놓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필요한 대로 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갖고 사용하면서, 느리다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신속함의 칭찬도 탐하지 않으면서, 우리 위에 계신 주님의 선한 손길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여러분이 보고 있는 곳으로 작품을 가져왔다.

 

우리가 난외주에 의미의 다양성을 표시한 이유는

각 단어를 위한 큰 개연성이 있어서이다

 

어쩌면 어떤 이는 난외에 [다르게도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표시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단어의 의미의] 불확실성을 보임으로써 [어느 의미가 맞느냐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켜서 성경의 권위가 어느 정도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판단이 바르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소스톰이 말한 것처럼112)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고”,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113) “성경에 명백히 표현된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에는 믿음, 소망, 사랑에 관한 것들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치미를 뗄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모든 [이유]들 때문에, 즉,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지각을 훈련하고 단련하려고, 부분적으로는 성경의 모든 부분들이 너무 평이해서 성경을 싫어하고 [다른 것으로 향하는] 호기심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해서, 부분적으로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알고자] 기도로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우리의 헌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형제들과 상의함으로 도움을 구하는 자세를 갖게 하려고, 그리고 마땅히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결코 조롱하지 않고 우리 자신도 여전히 많은 것들[에 있어서 나아지기]를 추구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섭리 가운데 이곳저곳에 어느 정도 어렵고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들과 문장들을 섞어 놓으셨다.

 

물론, 구원에 관한 교리적 내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고, (그런 문제와 관련해서는 성경이 명쾌하다는 것이 증거되어 왔다.) 단지 덜 중요한 경우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리하여 확신보다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더 잘 맞게 하려함이었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결심을 한다면, 성 어거스틴과 같이 겸손하겠다고114) 결심 한다면, (그가 한 말이 지금 이 경우와 똑 같은 경우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일한 토대 위에서), “Melius est dubitare de occultis, quam litigare de incertis, 불명확한 것들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난해한 것들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것이 더 낫다.”

 

성경에는 단 한번만115)나타나는 단어들이 많은데 (히브리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형제도 이웃도 없는 단어들), 그래서 우리가 지역 회의들을 통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특정한 새, 짐승, 보석 등등의 희귀한 명칭들이 많이 있는데, 히브리인들 내에서조차도 그 뜻이 무엇인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정의를 내리는데, 자신들이 하는 말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롬도 어디에선가 칠십인역본에 관해서 마찬가지로 말했다. 해서, 그런 경우에는, 난외주를 통해 독자에게 좀 더 연구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 낫지 아니 하며, 독단적으로 [단어의 의미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결론을 내리거나 독선적 주장을 펴지 않는 것이 낫지 아니 한가?



왜냐하면, 명백한 것들을 의심하는 것이 불신이라는 잘못일진대, 하나님의영께서 (심지어 신중한 판단으로 살펴봐도) 의문의 여지가 있는 상태로 남겨 놓으신 그런 것들에 대해 [그 뜻을] 단정한다는 것이 추정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116), 번역본의 다양함은 성경의 의미를 찾아내는 데에 유익하다.

 

그래서 난외에 있는 의의와 의미의 다양성이 본문[의 뜻]이 분명하지 않은 곳에서는 반드시 좋은 역할을 한다. 그렇다, 그것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는 식스투스 퀸투스가117)그들의 통속어 판본의 다양한 해석[독법]을 난외에 기입하는 것을 (그것이 우리가 한 것과 전체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그렇게 보이는) 명백히 금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 공상(空想) 때문에 자기의 지지자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진 못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현명한 그들은 [단어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을 때에는, 한 가지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다양한 해석들 중에서 자유롭게 판단하곤 했다. 만일 사람들이 그들의 대제사장이 그의 흉중에 감춰진 모든 법규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면, 바오로 2세가118) 자랑했듯이, 그리고 그가 특별면제에 의해 오류로부터 자유롭다고 확신했다면, 마치 신성불가침의 법에 의해 로마의 독재자들이 만들어진 것과 같았더라면,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신탁(神託)이요, 그의 의견은 곧 판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제 세상은 눈을 떴고,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교황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애욕과119) 연약함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그의 살갗이 [칼이나 창에] 찔릴 수 있는120) 것임을 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가 주장하는 만큼이 아니라 그가 증명하는 만큼만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표현의 동일성을 억지로 유지하지 않게 된 이유

 

우리가 (너그러운 독자인) 그대에게권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다른 한 가지는, 우리가 표현의 통일성에, 혹은 단어의 동일성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다른 곳에서 몇몇 학자들이 할 수 있는 한 직역을 한 것을 살펴봤기 때문에 우리가 한 것을 바랐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앞서 번역했던 단어가 그곳에서도 같은 것을 가리키면 그 의미 분별에 차이를 둘 수 없었다. (어떤 단어들은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기에)121)우리는 특별히 조심하면서 우리의 의무에 따라서 판단을 내렸다. 그렇지만, 동일한 특정 단어에 있어서는 동일한 개념을 표현해야 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를 일단 Purpose(목적)로 번역하면, 그 단어를 다시는 Intent(의도)라고 부르지 않았다. 한 곳에서 Journeying(여정)이라고 했으면 다시는 Traveling(여행)이라고 하지 않고, 한 곳에서 Think(생각하다)라고 했으면 다시는 Suppose(가정하다)라고 하지 않고, 한 곳에서 Pain(고통)이라고 했으면 다시는 Ache(아픔)라고 하지 않았고, 한 곳에서 Joy(기쁨)라고 했으면 다시는 Gladness(즐거움)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단어 대 단어로 직역하는] 문제를 완곡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번역하는 것을] 지혜보다는 기이함의 느낌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경건한 독자에게 유익을 주기보다는 무신론자 속에 냉소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단어들과 음절들이 되는가? 만일 우리가 자유로울 수도 있다면 왜 굳이 그런 것에 얽매여야 하는가? 같은 정도의 적절한 다른 말을 폭넓게 사용할 수 있을 때에도 굳이 정확한 한 단어만 사용해야 하는가? 옛날에 한 경건한 교부는, 최신식을

따르는 사람이 실제로는 차이가 거의 없거나 아주 없는데도, 크랍바톤(kravbbaton, 소파, 침상)이라는 말을 스킴푸스(skivmpou", 작은 소파, 낮은 침상)122)라고 바꿔 부르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 다른 한 사람은123) (사람들이 늘 사용해오던 표현인) 쿠쿠르비타(Cucurbita, 박 넝쿨)라는 말을 헤데라(Hedera, 담쟁이덩굴)로 바꿨다가 엄청난 모욕을 당했다고 보고한다.

 

헌데, 이런 일이 [지금보다] 더 나은 시기에 그토록 작은 사안에 대해서 일어났던 것일진대, 만일 우리가 대체로 불필요하게 말을 바꾸었다면, 당연히 우리는 맹렬한 비난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조롱하는 자들에 의해) 우리는 대단히 많은 수의 좋은 영어 단어들을 어느 정도 불균형적으로 다루었다는 혐의를 받았을 것이다.

 

어떤 위대한 철학자에 대해서 기록된 것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해야 했다, “경배 받을 우상으로 만들어진 통나무들은 행복하다. 이는 그들만큼 좋은 다른 동료들은 불 땔 장작으로 쌓여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도 그와 같이 말했다면, 그 말은 이랬을 것이다. 특정한 단어들에게는, “더

높이 일어서라, 성경 곳곳에서 자리를 차지하라.” 그리고 같은 등급의 다른 단어들에게는, “여기서 나가라, 영원히 사라져버려라.” [만일 그랬다면] 아마도 우리는 성 야고보가 한 말로 책망을 받았을 것이다. 즉, “[우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여기에 덧붙여 밝힐 것이 있다. 단어들에 있어서의 정밀함124)은 언제나 사소함125) 다음으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이름들에 관한 호기심126)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하신 것보다 더 나은 말투를 위한 패턴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분은 거룩한 지혜로 다양한 단어들을 사용하셔서 담담하게 자연 가운데 한 가지127)를 표현하셨다.

 

만일 우리가 미신적이지 않으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本) 혹은 선례(先例) 때문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부터 번역한 우리의 영어 사본들 내에서 우리가 동일한 자유를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편으로, 청교도들이 옛 교회 용어들을 버리고 다른 말로 대체했는데, 그들이 밥티즘(Baptism)을 씻음(washing)으로, 교회(church)를 회중(congregation)으로 한 경우는 우리가 그들의 꼼꼼함을 피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주의자들의 애매모호함을 피했는데, Azimes(무교병), Tunike(속옷), Rational(합리적), Holocausts(대량학살), Praepuce(할례), Pasche(유월절), 그리고 그와 같은 여러 용어들을 피했다.



그들의 최신 번역본에는 의미를 애매하게 만들 목적으로 그런 용어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그들이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 꼭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그 언어로 인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가나안 언어로 [기록되었을 때에] 그랬던 것처럼, 일반 대중들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되기를 소원했다.

 

(너그러운 독자여,) 이미 서문의용량을 초과하지 않았더라면, 그대에게 더 많은 것들을 경고해 주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 세워주실 수 있는 하나님과 그의 자비의 영께 그대를 맡기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벗기시고, 우리의 마음을 덮은 수건을 걷어내신다.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우리의 지각을 여시며, 우리의 마음을 넓히신다. 그렇다. 우리의 애착을 바로 잡으셔서 우리로 금이나 은보다도 그 말씀을 더 사랑하게 하신다.

 

참으로 끝까지 그 말씀을 사랑하게 하신다. 그대들은 자신이 파지 않은생수의 샘들로 인도되었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그 샘들을 흙으로 메우지 말라128). 악한 유대인들과 함께 그들 앞에 있는 터진 웅덩이를 선호하지도 말라129). 다른 사람들이 수고했고, 당신들은그들의 수고한 것을 누릴 수 있다.

 

오, 이렇게 큰 것을 헛되이 받지 말라. 오, 이같이 큰 구원을 멸시하지 말라. 이토록 귀한 것을 발로 짓밟는 돼지처럼 되지 말고, 또한 거룩한 것을 물고 찢는 개처럼도 되지 말라. 거라사인들과 함께 우리의 지경을 떠나달라고 우리의 구주께 말씀드리지 말라130). 또한 에서와 함께 팥죽 한 그릇에 당신의 장자권을 팔아먹지도 말라131).

 

빛이 세상에 왔으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지 말라. 양식이 주어졌으면, 의복이 주어졌으면, 벌거벗고 살지 말라, 굶주린 채로 살지 말라. 나지안제네의 조언을132)기억하라. “큰일을 등한히 여기고, 나중에 가서 거래를 하려고 드는 것은 통탄할 (혹은 위험한) 일이다.” 또한 성 크리스소톰의 격려도133) 기억하라.

 

“정신을 차리고 있는 (그리고 경계하는) 사람이 어느 때든 무시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성 어거스틴의 충고와 위협을134)기억하라. “그들을 초청하는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보응하는 하나님의 뜻을 감지할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135).

 

그러나 복된 것이 있으니, 그리고 마지막에 영원한 복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듣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 앞에 그분의 말씀을 놓아주실 때 그것을 읽는 것이다. 그분이 손을 뻗어 우리를 부르실 때에 대답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의 뜻을 행하려고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주님을 알고 섬길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 속에 관심과 분별력을 역사하시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그분의 인정을 받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 모든 찬양과 감사가 있어지이다. 아멘.

 


번역에 도움을 주신 한국 밥존스 신학교 교수이신 추연수 교수님과 캔죤슨 박사 , 덕드레플 교수님과

영문학을 전공하시고 미국 밥존스대학의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에드마이어 박사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번역된 서문의 웹사이트의 사용은 출처가 킹제임스 성경연구소라는 것을 반드시 밝히고 사용해야 합니다.


출처. http://www.kjbi.org/?m=173 [킹제임스 성경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