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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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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마 17:1-28

요절: 마 17:8


마태 복음 17장은 16:28절과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마16:28). 이 말씀은 제자들 중 몇이 주님의 재림
때까지 살아 남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사도 요한은 환상으로 육신의 몸이 죽기 전에
천년 왕국과 그 이후까지 모두 보았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변화산상에서의 사건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주의 영광을 친히 목격’(벧후1:16)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엿새 뒤에
주님은 변화산으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이 산 이름이 무엇인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엿새 후면 아마 헬몬 산일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셋을 데리고
가셨는데, 이들은 12제자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인
제자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500여명
정도 되었습니다1). 이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뒤
일시에 보이셨던 제자들입니다(고전15:6). 이들은 구원받은
신자,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구성체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가까이서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멀리서 보며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께서 70명을
세우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눅10:1). 주님은 이들을 둘씩
짝지어서 전도 여행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어디로 가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무엇을
전해야 할 지에 대해서도 상세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서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칠십 명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마귀들도 우리에게
굴복하더이다, 하니
](눅10:17). 이들은 500명 가운데 주님의
사역을 위해 쓰임받은 사람들로서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요,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역 교회에서 성도들이 많아도 막상 일을 시킬만한 사람을
찾기가 쉽기 않습니다. 교회 청소를 비롯해서 곳곳에서
섬겨야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강성한 지역 교회가
되려면 500명의 신자에 70명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다음
제자군은 12명의 사도입니다. 마가복음 3:13-15을 보십시오. [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오니라. 이에 그분께서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것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또 내보내어 /복음/ 선포도 하며 병
고치는 권능과 마귀들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더라.
](막3:13-15).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 열 둘을 세우셨습니다. 첫째는 자기와 함께 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그들을 내어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고상하게 살며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예수님께서도 고독한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교제를 그리워하셨고, 자신이
계시던 곳을 그리워하셨다는 것이 그분의 기도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교회는 많은 일꾼들이 있지만 모두 집사가
되거나 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 유익하고,
목사에게 최대한의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같은
직분을 맡은 사람은 목사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목사는 그들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고
이같은 교제는 서로에게 도움과 기쁨이 됩니다. 이러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짝을 지어 봉사의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될 때 목사는 사역지로 그들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이들 열 둘 가운데 주님은 다시 세명을
뽑으셨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왜 주님께서 항상 이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히 이들이 특별한
자격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자신들은 몰랐지만
그들이 아주 특별한 일을 하도록 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들의 으뜸이 되고,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머리가 되고, 요한은 교회에 대한 계시를
목격하고 기록하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들을 이루기 위해 이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확고히 믿으며
의심하지 않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미리 아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곳마다 이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과 신성을 바로
곁에서 목격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습니다(막5:22-24).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주님은 이 셋을 데리고 가셨습니다(막14:32-52).
주님은 이들에게 갈보리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고뇌하며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함께 깨어 기도하도록 명함으로써 마귀와 영적
전투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잠을 잤기 때문에
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의 모습은 현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축소판입니다.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잠에 빠진 교회와 활개를 치고 다니는
마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변화산에도 이들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는데 있었습니다. 창세 전에 이미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을 보여주고, 또 자신이 육신으로 오기
전에 이미 존재하셨음과 모세와 엘리야도 이미 자신을 알고
있었고 자신도 그들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들을
변화산으로 데리고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야이로의 집에서 일어난 일과 변화산에서 일어났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한 것은 그분의 신성이 때가 되기
전에 알려져 자신의 사역이 방해를 받지나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셋 가운데 다시
한명을 뽑았습니다. 그는 바로 요한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였습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요한일서에서만 사랑이란 말을 무려 31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담대히 맞섭니다. 아마도 어머니의
사랑은 자기의 아이를 위해 가장 무서운 질병에도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셨을 때
모든 제자들이 그분을 버리고 도망갔지만(막14:50), 요한만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들어간 '또 다른 제자'입니다(요18:15). 예수님과
요한간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는 어떤 사랑의 관계도 능가할
만큼 크고 깊었습니다.


요한은 거리낌없는 선한
양심의 소유자였습니다. 배반의 저녁으로 가봅시다.
마태복음 26:20-22, [이제 날이 저물 때에 그분께서 열둘과
함께 앉으셨더니 그들이 먹을 때에 그분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하여 넘겨주리라, 하시거늘 그들이 심히 근심하여
저마다 그분께 말하기 시작하여, {주}여, 나니이까? 하매
](마26:20-22).
그러나 이 때 요한은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가슴에 그대로 누워 이르되, {주}여, 누구니이까?
하매
](요13:25). 요한은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께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 가운데 그런
거리낌이나 어둠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주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품에 안겨 주님과 묻고 답하는 그런 사랑의 친교
속에 거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6절은 육신을 입으시기
전의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성육신하신
육신의 예수님을 보았지만 변화산에서 3명의 제자는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 참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라 해도 육신이란 겉사람을 뚫고 나오는 주님의
신성을 여러 번 접할 수 있었겠지만 그분의 참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바울 사도는 처음부터 주님의 신성과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던 사도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니
참으로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분을 더 이상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5:16).
오늘 제자들은 바로 이 말씀대로 주님을 더 이상 육신으로
알지 않는 기회였습니다. 2절의 모습은 계시록에서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 주님과
대화했습니다. 이 대화의 내용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9:31, [그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서
앞으로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셔야 할 죽음에 관하여
말하나
](눅9:31).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 이야기만 나오면
그냥 잠이 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베드로와 또 그와 함께한 자들은
깊이 잠드니라. 그들이 깨어나서 그분의 영광과 그분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9:32). 잠에서 깬 베드로의 말이
마태복음 17:4입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황홀한 나머지
이곳에서 장막을 치고 살고 싶었습니다. 천국이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산을 내려가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에 대해
들었다면 다 때려치우고 여기서 살자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할 때 영광의 구름이 그들을 덮었고 하늘에서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매우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17:5).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엘리야는 대언자를 대표합니다.
주님은 율법과 대언자의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회피하고
영광만을 추구하는 것은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 말에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접할 때 땅에 엎드려져
떨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눈을 들어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8).
우리가 듣고 보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무엇이 보인다면 우리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순결한 비둘기의 눈처럼 오직 주님 한 분만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튿날 주님이 제자들과 산에서 내려왔을
때 제자들은 한 가지 큰 난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기관들의 성경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에 따르면 메시야 이전에 엘리야가 반드시 먼저
와야 합니다(11). 서기관들은 성경 지식이 있었고, 예언에
정통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점에 답변이 막혔습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으로 왔습니다. 그는 하늘의 왕국을 선포했고,
회개의 침례를 주었고, 주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요한의 핵심적인 증언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1:32,
[이는 요한이 의의 길로 너희에게 왔어도 너희가 그/의 말/을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들과 창녀들은 믿었으며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그 뒤에 회개하여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마21:32). 이로써 메시야 왕국의
건설과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란 엘리야의 사역은
재림으로 연기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분명히
엘리야였지만 백성들의 불신으로 엘리야의 사역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엘리야로 온 요한이 거부되고, 배척받고,
죽었듯이 자신 역시 그렇게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란 사실을
선포했습니다(12).


14-21절은 매우 의미 깊은
사건입니다. 주님이 세명의 제자와 변화산에 있을 동안 남아
있던 아홉 명의 제자에게 마귀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16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전에 분명히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권능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없는 사이에 마귀들린 아이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휘장 안에”2)(within
the veil), “진영 밖으로”3)(without the camp)입니다.
땅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주님이 자신들을 남겨 두고 세
명의 제자들만 데려 간 것에 대한 시기심, 질투심, 주님에
대한 섭섭함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밑에 남아서 기도와
금식을 했을리는 없고, 서기관들과 엘리야에 대한 논쟁을
벌여서 연전연패했을 것입니다. 마음에 숨은 죄악과
원수들에게 시달림을 당했을 때, 영적인 힘은 급격히
떨어집니다. 특히 성경 문제나 영적 지식에 관련된 논쟁에서
패하여 믿음이 떨어지고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주님이
함께 있을 때와 없을 때, 제자들의 믿음은 천양지차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크게 책망했습니다. 17절,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언제까지
너희를 용납하리요? 그를 이리로 내게 데려오라, 하시고
](17).
잠시 주님이 산에 올라 간 사이에 제자들이 이토록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다면 주님이 교회 시대 동안 저 하늘에 가
있을 때 제자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교리적으로 적용할 때, 왕이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 땅에 설치고 있는 사탄을 결박하여 지하의 깊은 끝없이
깊은 구렁에 가두어 버리고, 세상에 자유를 줄 것을
예표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왜 마귀를 못 내쫓았는지
주님께 물었습니다. 첫째, 믿음의 부족입니다(20). 둘째,
기도와 금식의 결여(21)입니다. 말씀은 믿음의 씨앗이며,
기도는 씨앗을 자라게 하는 수분입니다. 개역 성경을 비롯한
새 역본들에는 ‘금식’이란 말이 빠져 있는데, 이는 마귀가
성도들이 자신을 대적하지 못하도록 말씀을 변개시켜 놓은
결과입니다. 20절은 회의론자들이 흔히 주님의 말씀을
공격할 때 쓰는 구절이지만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진리입니다.
‘산은 고사하고 우리 마당에 있는 화분 하나도 옮겨지지
않더라’고 피식 웃으며 말씀을 조롱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산을 옮기고, 무거운 짐을 옮기고, 가방을 나르고,
사람들을 운송하는 자동차, 선박, 항공기 대용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에게 만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20)이라고 말할 때 겨자씨는 작은 믿음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폭발적인 비율로 성장하고 자라나는
생명력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겨자씨의 믿음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강한 생명력, 성장력이 있는 믿음인데, 이는
주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22-23절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다가올 십자가의 사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고,
구약을 종결짓고 신약을 여시기 위해서 주님이 당할
십자가의 수난은 인류가 들을 수 있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제자들이 흥분과 설렘, 기대 가운데
기다려야 할 그런 사건이었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22b).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24-27절은 세금 납부
문제입니다. 세금 징수원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세금을
내시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세금을 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국가에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세금 납부 거부,
조세 저항, 탈세 등은 살인, 간음, 우상 숭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죄입니다. [이런 까닭에 너희가
공세도 바치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을 것을 주되 공세 받을 자에게 공세를,
관세 받을 자에게 관세를, 두려워할 자에게 두려움을,
존경할 자에게 존경을 주라.
](롬13:6-7). 주님은 수중에
세금을 낼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8:9).
주님은 처음으로 자신의 필요를 위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성전 세금으로 반
세켈을 내야 합니다(출30:11). 주님은 성전의 주인이시지만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이 돈을 내셨습니다. 주님은 25-26절에서
왕의 자녀들은 면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성전세는
당연히 내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왕권, 왕되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일으킨 이적은 다른 것과 달리 매우 정교하고도 복잡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누군가 돈을 바다에 빠뜨려야 합니다.
다음에는 고기가 그것을 입에 물어야 하고, 그 고기가
베드로의 낚시 바늘에 처음으로 걸려야 합니다. 입에 동전을
문 고기가 베드로의 낚시 바늘에 걸리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은 자신이 온 피조물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분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시편 8:6-8을 참고할 것. 주님의
이 이적은 돈을 사용한 유일한 이적이며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세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구속된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구속의 몸값으로 내는
세금입니다. 주님은 금이나 은이 아니라 자신의 보혈로
이들을 구속하실 것입니다. 은 세켈은 구속의 몸값을
나타냅니다. 27절 끝 부분에 주님은 “나와 너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여러번 특별한 은혜를
많이 베푸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일, 물위를
걸어오게 하신 일, 큰 물고기를 잡게 하신 일, 그물을 오른
쪽에 던지게 하신 일 들은 모두 베드로를 위해 베푸신
특별한 이적들입니다. 주님이 왜 베드로를 위해 이런 일들을
많이 행하신 것입니까? “나와 너를 위하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실 때 그 일은 ‘주님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런 특별한 보살핌을
입었기에 성도들에게 확신에 찬 권면을 했습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
](벧전5:7). 필요가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은
그것을 충족시키십니다.


17장에서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을 더 정리하면, 저 하늘에서 우리는 서로의 소개
없이도, 본적이 없어도 다 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주님은
변화산에서 변화되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저
하늘의 영광을 이 땅에, 우리의 삶 속에 가져 오는 유력한
수단입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그의 시체는 천사장 미카엘이 저 하늘로 옮겨
버렸습니다. 모세는 부활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모세가 약속의 땅에 발을 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입니다.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던, 밟아보고 싶어했던 약속의 땅에
모세는 결국 발을 디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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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킨 목사님은
매사추세츠 주의 노스필드란 곳에서 스피어 박사가 강의한 '내부의
원'이란 강연을 도표로 그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들’이란
설교를 했습니다. 본문은 필자가 라킨 목사님의 글을
압축하여 재정리한 것입니다.


2)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나니
-히6:19


3) Let us go forth therefore
unto him without the camp, bearing his reproach.
-Heb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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