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사람, 존 하이드(John Hyde)를 통한 부흥의 불길
인도에서는 웨일즈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북부 카사이 지역 부흥운동과 묵티 부흥운동 외에도 존 하이드를 통한 부흥의 불길이 강하게 일어났다. 미국 북장로교 출신 선교사인 존 하이드는 1892년 인도에 도착한 후 펀잡(Punjab) 지역에 머물면서 그 지역의 부흥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회심자가 없는 이 지역에서 부흥을 놓고 기도하는 것은 보통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하이드는 “참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룬 자, 끝까지 싸워 이긴 왕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계속했으며 기도를 시작한지 4년 후인 1896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899년 경 하이드와 장로교 선교부는 밤을 지새우며 인도의 부흥과 선교 사역에 종사하는 이들의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였다. 지속적으로 자신의 사역과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있던 하이드는 1904년 4월, 펀잡 지역 및 인도의 부흥을 위해 펀잡기도연합회를 설립하고 기도운동을 전개했다. 기도연합회에 합류하는 사람들은 아래의 다섯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2. 당신은 자신의 삶과 사역에 성령의 더 큰 능력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이 능력 없이는 계속 해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3. 당신은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도록 기도하겠습니까?
4. 당신은 이 영적인 각성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기도가 가장 중요한 도구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5. 당신은 이 각성을 위해 가능한 한, 정오 이후 반시간씩 할애하여 기도하되 각성이 올 때까지 계속 기도할 예정입니까?”
하이드가 펀잡기도연합회를 결성한지 4개월 후인 1904년 8월 말 펀잡 주 시알코트(Sialkot)의 연합장로교 센터에서는 인도 전역에서 기독교에 종사하는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제 1회 대표자 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가 열리기 1달 전부터 존 하이드, 맥셰인 패터슨(M'Cheyne Paterson), 조지 터너(George Turner) 세 사람은 이 모임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했다. 이 센터에는 남녀를 위한 각 기도실이 두개 있었으며, 이 기도실에서는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듀웰이 지적한대로 두 기도실은 한번도 빈 적이 없었다.이 기도실에는 하이드와 인도인들이 계속해서 기도했으며, 개중에는 며칠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하이드는 “정말 뜬 눈으로 밤을 새며 대부분이 시간을 기도실에서 보냈다.” 이들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였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자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자유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1905년 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 1차 대표자 회의에서 하이드는 여전히 밤낮으로 기도실을 떠나지 않고, 때로는 기력이 쇄할 정도로 금식하며 선교사들과 인도의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영적각성이 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의 사람, 하이드가 한 집회에서 우르투어와 영어로 “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Oh Heavenly Father!)라는 단 세 마디만 기도했는데도 청중들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주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 사탄에게 져서 죄를 짓게 된 이야기들을 공개적으로 자백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승리를 경험했다.”
대표자회의 집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곧 지역의 미션스쿨과 신학교로 확산되었다. 메리 캠벨(Mary Campbell)이 사역하는 한 장로교 여학교와 이어 그곳의 신학교에 성령이 임하자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대표자 회의에 참석했다 돌아온 사람들을 통해 루디아(Ludhiana)의 남자 미션스쿨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1906년 제 2차 시알코트 대표자 회의에는 70명의 선교사들을 포함하여 1300명이 참석했으며 다른 지역의 부흥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렸고, 실제로 1905년 11월과 1906년 11월 사이에 파테푸르(Fatehpur)와 파테가르(Fatehgarth)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았다. 존 하이드의 기도가 12,3년 만에 드디어 응답된 것이다.
하이드를 통한 시알코트의 부흥의 불길 역시 주변 지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어 나갔다. 존 하이드 선교사를 통한 부흥운동이 장로교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장로교를 넘어 타 교단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1905년 10월 우타르 프라데시(Uttar Pradesh) 동북부, 메러트(Meerut) 쳐치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에, 그리고 1906년 2월에 모라다바드(Moradabad) 감리교 여학교에서 부흥이 일어났다. 이어 1906년에 접어들면서 펀잡 주 카달라(Kathala)의 스코틀랜드 교회, 캐슈미르(Kashmir) 주 자무(Jammu), 랜도(Landour) 주 데라 던(Dera Dun)과 히말리아 산맥 기슭 알모라(Almora)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알라바하드(Allabahad)에 있는 힌두어를 사용하는 한 감리교회에서는 묵티 소녀기도단을 초청하여 영적각성을 위해 기도하는 중 놀라운 역사가 회중 가운데 일어났다. 성령의 역사가 너무도 강해 기도회를 해산시킬 수 없을 정도였다. 집회는 여러 주 동안 계속되었으며 그동안 각 개인이 각성하고, 해묵은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원수와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복음이 놀랍게 확산되었다. 부흥의 불은 곧 다른 감리교회들과 선교회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1906년 티네벨리(Tinnevelly)의 워커(Walker)가 인도한 아그라(Agra) 집회에서, 그해 2월에는 캘거타의 리(D. H. Lee) 목사가 주도한 “금식과 기도의 날”을 통해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나타났다. 리 목사가 1906년 2월 9일 금식과 기도의 날로 정하고 여러 사람들을 규합하여 기도하자 통회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나타났고, 그 불길은 곧 벵골로 확산되어 나갔다. 이렇게 해서 1905년 존 하이드 목사의 시알코트에서 시작된 부흥은 1910년까지 그 주변 전역으로 확산되어 많은 결실로 이어졌다.
인도 북부 전역에서 일어난 이 부흥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첫째, 장로교에서 시작하여 곧 교파를 초월하여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부흥운동이 일면서 이 지역 장로교의 경우 4년 동안 11,000명이 세례를 받아 파테가르의 경우 1905년 1,200명이던 교인이 1909년에 6,000명으로 급증했고, 펀잡 주의 경우 37,695명이던 교세가 163,994명으로 무려 4배 이상이 증가했다. 부흥운동이 일던 10년 동안 기독교인이 69.9%나 증가하는 기록을 세웠다. 둘째는 대표자회의가 부흥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이다. 첫 대회에 300명이 참석했으나 두 번째에는 참석자가 1,300명으로 무려 4배 이상이 증가했고 시알코트 대표자 회의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계속되면서 인도 북부의 부흥을 주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캐슈미르의 자무, 데라 던, 알모라, 무수리, 메러트, 럭노우, 모라다비드도 부흥의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셋째 부흥운동으로 자연히 사역자들이 급증했다. 부흥운동으로 수많은 새 신자들이 교회로 영입되면서 1900년과 1905년 사이 복음전파 사역자가 2배로 증가했고, 1905년과 1910년 사이 다시 배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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