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원하노라? /글-임동선 /
축도?
설교 말씀은 못 들어도 축도는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예배당의 식당 한 구석에서 일하다가도 축도시간만 되면 허둥대며 예배실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축도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정한 예배의 마지막 순서입니까? 목사 안수를 앞둔 많은 전도사들이 열심히 연습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축도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보, 어때, 이 정도로 올리면 괜찮을까?" 팔을 들어 보이면서 사모에게 지도를 부탁하는 전도사들, 이제 곧 나도 축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실컷 부풀어 오릅니다.
축도의 정의
기독교 사전에서는 축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목사가 예배 시간에 회중을 위하여 드리는 축복 기도로서 보통 고린도후서 13장13절에 있는 말씀을 외운다. 이 축도 때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옛적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축도를 가장 엄숙한 순서로 인정하여 교직은 예복을 입고 이를 선언 한다"
예배의 마지막 순서? 예수님이 명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축도를 가르치신 일이 없습니다. 아무 제자에게라도 축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르치신 기도, 도고, 감사 등의 기록은 있으나 축도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 축도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악을 악으로,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축복하라. 이런 일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줄 아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목회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의 축도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성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악인에 대한 선한 대응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라.』(롬12:17),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경배는 어떻게 끝나는가? 사실 경배는 끝나는 개념이 없습니다. 경배는 계속적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듣고 만찬을 나누었습니다(행20:7-11,고전11-). 저들의 모임은 말씀을 강론하고 빵을 나누고 교제하고 헤어졌던 것입니다. 경배는 끝나는 게 아닙니다. 경배는 삶 속에서 계속되는 것입니다. 축도는 경배를 폐회하는 선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론으로부터 계승된 것?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백성을 축복하는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레9:22-23, 민6:22-27).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오늘날 강단에서 목사들이 하는 축도의 기원이라고 주장합니다. 구약의 축복기도는 중보자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축도권을 주신 것은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대제사장(히3:1, 히4:14)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딤전2:5). 목사는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칠 뿐이지 하나님과 성도(혹은 죄인)들 사이에 중보적 권한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히6: 19-20)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요(딤전2:5)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한 대언자이십니다(요일2:1). 오히려 우리는 목사나 집사나 성도나 모두 주 안에서 다 형제입니다(히2:11, 마23:8).
이와 같이 아론의 대제사장적인 축도권에서 그 기원을 찾아 축도한다면 아직도 복음을 통해 이루어진 교회의 성격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아론의 직무와 성전제사제도 등을 폐지시켰습니다.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사장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었습니다(행4,5장).
손을 들어 기도하라?
『그러므로 나는 모든 곳에서 남자들이 진노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축도의 모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손을 들고 기도하던 관습(시63:4, 119:4)에 따라 말한 것이고 다투기보다 서로 기도하기를 힘쓰라고 하는 권면입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경건한 풍습이었습니다. 저도 어릴 적에 20리터 짜리 석유통을 강대상인 것처럼 앞에 놓고 목사님 흉내를 내면서 축도를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소꿉놀이였습니다.
고후13:13에서 따온 것?
또 어떤 이들은 서신서 말에 있는 축원을 축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交通)하심이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고후13:13).
『이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넘어지지 아니하게 하시고 너희로 하여금 자신의 영광이 있는 곳 앞에 흠 없이 넘치는 기쁨으로 서게 하시는 분 곧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 구원자께 영광과 존엄과 통치와 권능이 이제와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유23-24)
그렇다고 한다면 목사만이 축도를 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이는 편지의 끝인사로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편지로나 말로 서로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린도 후서 13장의 말씀이나 유다서의 말씀은 예배시의 축도가 아니라 서신의 끝인사라는 것입니다. 왜 김 집사는 이렇게 편지를 쓰면 안 되는 것입니까? 왜 황 집사는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왜 꼭 목사만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단 말입니까? 서로를 위해 축복하는 기도는 모든 성도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새해에 복 많이 받으라고 빌어주는데, 성도 간에 축복하는 일이 어떤 직책에 의해서 제한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특별한 위치에서의 기도?
그러면 그것은 사도로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바울이 그가 세운 고린도 교회를 위한 축복이었다고 말하며 오늘날 개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도를 목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어떤 특별한 지위와 관계된 기도라면 그것은 그렇게 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생님이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일은 부활 후 승천하실 때 한 번 뿐이었습니다(눅24:50-53). 멜기세덱도 마찬가지 입니다(히7:6, 창14:19 ). 멜기세덱은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가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삭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는 야곱은 축복하였으나 에서는 축복하지 않았다(창27:34-38). 에서는 동생에게 축복을 다 빼앗긴 후에 "아버지의 빌 복이 이것 하나뿐이리이까"(창27:38)하며 애원하였다. 그럴지라도 아버지의 위치에 선 이삭은 또 다시 축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성도들을 치리하는 목자적인 특별한 위치에서 자기 교인들을 위해 축복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흔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그가 은퇴할 때라든지, 그의 임종 때나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매 주일마다 자기 몸에서 무슨 복(福)이 흘러나오는 양 손을 들어 강복의식을 행하는 것은 때때로 돈만 넣으면 커피가 쏟아지는 자판기를 생각나게 합니다(신18:22).
『 만일 대언자가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그 일이 뒤따라 일어나지도 않고 성취되지도 않으면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대언자가 자기 뜻대로 말한 것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20:22)
복을 비는 기도?
만일 그것이 기도라면 “있을 지어다”라고 끝나는 것은 웬 말입니까? “간절히 축원하노라”라고 끝나는 것은 웬 말입니까? 복을 비는 사람이 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과연 기도의 합당한 모습입니까? 이것은 종교적 지위를 이용해서 스스로를 격상시키려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내가 복을 비니까 너는 들어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는 자는 권위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기도의 첫번째 태도가 구하기 위해 높은 자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또 축도가 기도라면 그것은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빌지 않습니까?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을 부탁하셨는데(요14:13) 왜 축도는 이 중요한 원리를 깨뜨리는 것입니까? 오히려 그것이 기도라면 이렇게 끝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몇 가지 문제점?
우리는 축도의 문제점을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축도의 정의처럼 까운을 입고 해야하는 기도와 까운을 벗으면 할 수 없는 기도가 있다면 성경에도 없는 의식의 산물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아직도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전통을 모방하여 복음이 온 후로도 여전히 그 전통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 축도가 복을 비는 기도라면 기도할 수 있는 자(성직자들)와 기도할 수 없는 자(성직자와 대조되는 성도들:평신도)의 구별이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위엄과 권위와 자만의 태도로 기도한 바리새인보다 "나는 죄인이로소입니다"(눅18:13)라며 겸손히 기도하는 자가 의롭다함을 얻고 돌아갔습니다.
셋째, 일반적으로 어두운 교인들은 의식화된 축도를 복 받는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도를 한 그 사람에 의해서 복이 좌우되는 것처럼 헛되이 믿고 있습니다.
축도의 기원
축도는 비 복음적인 용어이며 의식입니다. 이는 로마 카톨릭에서 교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며 성도들의 기복신앙을 이용한 발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무당이나 샤만들이 행하는 기복을 답습한 교회의 이교화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본래 축도를 베네딕숀(Benediction)이라 하는데 이는 신부와 평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베네딕트 신부가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는 개신교가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에도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교권이라는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예수 한 분으론 부족한 것처럼 어떤 대리자를 세우고 그를 통하여 복을 받으려고 하는 성도들의 태도는 더 이상 성경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목회자나 사제(신부)라고 더 의롭게 하시고 평신도라고 덜 의롭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자에게 그리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이는 거기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롬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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