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기도와 회개



오늘은  [기도와 회개]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동반되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회개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먼저 회개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역사상 회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회개를 필요로 하는 종들입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으며, 회개 없는 용서 또한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주의 성전을 건축한 후 봉헌 기도를 드렸는데, 이 기도는 회개와 기도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명문의 기도입니다. [만일 주의 백성이 자기들의 원수와 싸우고자 하여 주께서 보내시는 길로 나갈 때에 그들이 주께서 택하신 도시와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해 건축한 집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사정을 돌아보옵소서.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없사오니) 만일 그들이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사 그들을 그 원수에게 넘겨주시매 그 원수가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멀든지 가깝든지 원수의 땅으로 끌고 간 뒤에 그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자기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간 땅에서 회개하며 주께 간구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그릇되이 행하였으며 악한 일을 행하였나이다, 하며 또 자기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원수들의 땅에서 마음과 혼을 다해 주께로 돌아와 주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도시와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해 건축한 집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하늘 곧 주의 거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사정을 돌아보사 주께 범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들의 모든 범죄를 용서하시고 또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자들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사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왕상8:44~50). 범죄와 회개와 용서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비록 범죄하여 징계를 받고, 원수의 땅에서 사로잡혀 갔다고 할지라도 그 땅에서 기도하고, 회개하며 주께 간구할 때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돌이키십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범죄한 백성들의 살 길이 회개와 기도임을 분명히 밝혀 두었습니다. 반복적인 어휘를 보십시오. ‘주께 기도하거든’(왕상8:30, 33, 34,38, 42-44, 47,48), ‘죄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돌이키거든’과 같은 말씀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회개, 기도, 용서는 바퀴처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에 따라 다니엘, 느헤미야는 민족들을 대표하여 철저히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민족의 구원과 회복을 간구했습니다. 회개의 기도는 영적 구원과 회복의 첫 단추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는 말하기를, “회개는 내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며, 거기에 대해서 유감을 가지고, 대속의 근거하여 내가 이전과 반대로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약 100년 전에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쓰는 “20세기의 가장 큰 위험은 ‘성령없는 종교, 회개없는 용서, 중생없는 구원, 지옥없는 천국’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참으로 위대한 선지자의 통찰력있는 예언입니다. 이 말은 이미 수많은 교회에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쟌 헨리 행킨스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찔림을 주시는 것은 죄로부터의 회개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요16:8-9). 회개한 성도들은 모두 죄에 대하여 성령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돌이킨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성령의 찔림을 통해 예수를 믿는 것이 가장 큰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회개를 매우 기뻐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하여 더 기쁨이 있으리라.](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의 눈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5:10). 죄인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회개하여 복음을 믿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들을 맞이하시기 위해 멀리 바라보고 계십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라.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범법(犯法)하거든 그를 꾸짖고 회개하거든 그를 용서하라. 그가 만일 하루에 일곱 번 네게 범법하고 하루에 일곱 번 네게 돌아와 이르기를,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그를 용서하라, 하시니라.](눅17:3-4). 회개는 용서의 근거가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회개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전하는 구원의 복음은 회개의 복음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 요소가 ‘회개와 죄들의 사면’으로 요약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복음을 전하면서 회개와 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믿음만 전하는 풍토가 오늘날 교회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보다는 전하는 것이 낫겠지만 회개와 죄들의 사면에 대한 내용이 빠진 복음은 구원의 복음이 아니며, 새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또 회개와 죄들의 사면이 그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 선포되어야 하리니](눅24:47). 그래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 언제나 먼저 회개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오순절에 천하 각지에서 모인 유대인들을 향해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할 때 “회개하여 죄들의 사면을 얻고 너희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라 했고, 성전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도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눈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抹消)될 것이요,](행3:19)고 설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회개를 선포하지 않는 복음 전파, 회개를 외치지 않는 설교로 인해 교회가 쇠약해지고 병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 연륜이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신앙이 점점 약해지는 것 역시 회개하지 않는 신앙 생활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복음 전파 사역의 기록을 보면서 사도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를 선포했는지 분명하게 보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사도들은 공회 앞에서 채찍을 맞은 후에도 그들이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입에서는 회개가 맨 먼저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들의 용서를 주시려고 자신의 오른손으로 그분을 높이사 통치자와 구원자가 되게 하셨느니라.](행5:31).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한 후에 그들이 믿고 성령을 받는 모습을 본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구원을 주셨도다.’ 또는 ‘성령을 주셨도다.’라고 해야할 곳에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 역시 철저하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가 이방인들을 향해 한 설교를 보십시오. [이같이 무지(無知)하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으니](행17:30). 회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회개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회개없는 복음 전파는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죄를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역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증거하였노라.](행20:21). 회개와 믿음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회개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며 구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회개한 후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고,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먼저 다마스커스와 예루살렘 사람들과 온 유대 지방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행하여야 함을 보이매](행26:20). 회개했노라 하고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일 뿐 아니라 행동의 변화입니다. 믿음 없는 회개는 절망이요, 죄로부터 회개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에 불과합니다. 회개는 관점의 변화가 아닙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요, 행동의 변화이며, 삶의 방향과 태도의 변화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이 말을 베드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여기서 '원하시느니라'고 번역된 말이 will/willing(하나님의 뜻, 의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 모든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멸망입니다. 주님은 연속 두 번에 걸쳐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눅13:3,5).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침례인 요한은 [너희는 회개하라](마3:2)는 말로 신약 성경을 열었습니다. 주님 역시 [회개하라]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마4:17). 제자들 역시 복음 전파하러 성읍들을 돌며 전파한 내용은 ‘회개하라’였습니다. [그들이 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선포하고](막6:12). 이것은 비단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면 이방인 역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방인들을 향해 동일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같이 무지(無知)하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으니](행17:30).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주님은 친히 교회들을 향해 회개하라 외치시고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언제나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내 입의 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6). 회개하라는 음성은 침례인 요한이 신약의 첫 성경인 마태복음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성경인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관통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지 방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고 굳게 붙잡아 회개하라. 그런즉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이르리니 어느 시각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3). 주님은 왜 회개해야 하는지 이유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3:19).

회개란 자신의 본질에 대한 돌이킴입니다. 구약의 의인이라고 하면 욥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의롭게 살았던지 자신의 의가 하나님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범죄가 없이 깨끗하며 무죄하고 내 안에는 불법도 없거늘](욥33:9). 그는 정말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이는 욥이 이르기를, 내가 의롭거늘 하나님께서 나에 대한 정당한 판결을 빼앗아 가셨도다.](욥34:5) [그대가 말하기를, 내 의가 하나님의 의보다 더 낫다, 하였으니 그대는 이것을 옳은 것으로 생각하느냐?](욥35:2). 그는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오셔도 자신의 잘못을 찾아 낼 수 없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그가 정작 그토록 갈망하던 하나님을 만났을 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욥42:6). 회개란 우리가 한 행위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신, 자아에 대한 본질적인 돌이킴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고, 구원받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인식하고, 주님의 구원을 구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회개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 이는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음이라, 하시니라.](마9:13).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 회개는 후회 그 이상입니다. 후회는 했지만 결코 회개하지 않음으로 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파라오는 수 차례의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회개하지 않음으로 망했습니다. 그의 말만 들어보면 그는 마치 회개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에 파라오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내가 범죄하였노라. [주]는 의로우시고 나와 내 백성은 사악하도다.](출9:27).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한 후회는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회개는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자신의 죄를 모두 토로하고, 시인하고, 긍휼을 구했지만 아무 변화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의 회개가 하나님 앞에서 한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하나님 앞에 죄를 토로한 것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 앞에서 했습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파라오처럼 일의 결과가 나빠진 것, 자기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예는 허다합니다. 장군이 참모에게, 사장이 임원들에게, 가장이 가족들에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런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잘못을 시인한 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밥죤스 시니어 목사님은 말하기를 "여러분의 슬픔이 자신의 죄로부터 여러분을 돌아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슬픔은 아무리 큰 것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고백이 아무리 애절하고 눈물에 젖은 호소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샘 존스는 “회개란 이것이다. 나는 나의 야비함에 대해 깊은 유감을 가지고, 더 이상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파라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깊은 슬픔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그런 마음을 가진 자기 자신의 성품과 본인에 대한 슬픔과 탄식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우리의 행위 이전에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와 죄들은 성질(성격)과 행동의 관계와 같습니다. 죄는 성격이라면 죄들은 행위입니다. 죄는 원인이라면 죄들은 결과입니다. 죄는 뿌리라면 죄들은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회개는 우리의 행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람됨, 인격, 기질, 성격, 본성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죄들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몸은 우리의 죄의 창고요, 뿌리인 육신을 처리했습니다.

파라오와 같은 식의 회개를 회개라고 했다면 이 시간 깊이 돌이키는 시간을 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행위 뿐 아니라 그런 행위를 지속적으로 유발하는 나의 사악함, 정욕, 기질들을 주님께서 처리해 주시도록 나오십시오.

민수기 22:34에는 발람 역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불의의 삯을 사랑했고(벧후2:15), 발람의 교리(계2:14)를 가르쳤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감히 발락을 가르쳐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들에게 희생물을 바친 것들을 먹게 하는 계략을 꾸미지 못했을 것입니다(계2:14, 민25:11, 민31:16). 그는 주의 천사가 칼을 잡고 자기 앞에 섰을 때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발람이 [주]의 천사에게 아뢰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이는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음이니이다. 그런즉 이제 당신이 이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내가 돌아가겠나이다, 하매](민22:34).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영혼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짓는 짓을 결코 단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 두려움을 알면서도 떨면서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살다가 주님의 심판을 받지나 않을까 조마조마 해 하면서도 여전히 죄를 떨치지 못하는 것은 발람과 같은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 발람과 같은 부류의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는 “주님, 앞으로 다시는...더 이상은 절대로...****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은밀하게 죄를 지을 방법을 연구하고, 틈을 엿보고 있다가 죄를 짓고야 맙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발람이 주의 두려움을 맛보고도 죄의 정욕에 이끌려 범죄한 것은 그가 불의의 삯을 너무나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려면 다른 문제가 아닌 ‘불의의 삯’, 즉 ‘탐욕’을 사랑하는 마음부터 회개해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 안에 들어있는 탐심, 정욕, 야망, 시기심, 자기 자랑과 같은 근본 문제를 제쳐두고 아무리 자주 ‘주님, 제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해도 문제는 반복적으로 터지고 맙니다.

사울 왕 역시 사무엘 앞에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삼상15:24, 30)라고 두 번이나 고백했지만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음성에 순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15:24).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찢고 회개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것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데서 끝마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울과 같은 식으로 회개합니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결과가 좋지 못할 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저는 예전에 이런 식의 회개를 회개의 전부인 줄 알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죄를 시인하고, 고백하고, 인정하는데도 회개의 열매를 전혀 맺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위,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죄를 시인하기 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고 버려야 했습니다. 사람 앞에서 하는 회개는 계속 반복됩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원하옵나니 이제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존중히 여기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주] 당신의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삼상15:30). 그는 자신이 범죄하였을지라도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좀 세워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심심하면 ‘내가 범죄하였노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자책을 자주 했고, 정신이 들고나면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그러했듯이 다윗 앞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이에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이 날 네 눈이 내 혼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크게 잘못하였도다, 하니](삼상26:21). 사울은 이 후에도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살인이요, 큰 죄악이란 사실을 깨닫고 회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사울처럼 회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울은 죄를 시인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 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두려워서 범죄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의 본의가 아니라 상황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상황 윤리라고 말하는 이 논리는 죄인들의 가장 강력한 자기 방어 논리입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이는 아담도 그러했고, 이브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죄를 죄인 줄 알고 인정하지만 그보다 더 강조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XXX 때문이란 것입니다. D.L 무디는 말하기를, “나의 죄를 죄로서 충분히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복음을 영접하거나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자신의 죄를 전적으로 자신의 탓이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구원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죄를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요, 자신의 탓임을 고백하고 주님께 긍휼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울은 회개에 실패한 종이었지만 다윗은 회개에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회개의 시편을 기록할 만큼 많은 회개를 했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으면 기도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내가 마음 속으로 불법을 중히 여기면 {주}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그래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습니다. 시편 51:2-4절은 회개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으로 내게 긍휼을 베푸시며 주의 크신 긍휼로 내 범죄들을 지워 주소서. 내 불법에서 나를 완전히 씻기시며 내 죄에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이는 내가 내 범죄들을 시인하기 때문이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오직 주께만 범죄하고 주의 눈앞에서 이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로써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시고 판단하실 때에 깨끗하시리이다.](시51:1~4). 그는 죄를 숨겼다고 나단 대언자의 책망을 받자 곧 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주]께 범죄하였노라, 하거늘...](삼하12:13a). 사람이 사람에게 한 잘못이나 범죄는 이자를 쳐서 갚던가 율법이 정한대로 몇 배로 갚으면 되고, 어떻게 상호 해결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 죄가 하나님 앞에 행한 것이라면 사람이 달리 갚을 수도 없고, 해결할 길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한 죄는 회개 외에 용서를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범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행한 죄이며, 우리의 죄는 주의 목전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고백한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내지만, 우리의 변명은 절대로 덮어주지 않습니다(잠15:29/28:9/사1:15/59:1,2/요9:31/약4:3 참조). 우리는 어떤 죄를 범할 때 그것이 주께 범한 죄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범죄하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범죄하는 것이니라.](고전8:12). 그래서 우리는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범죄 하면 형제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하지만 주님 앞에 고백하고, 시인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과 등지고 태어납니다. 진심으로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 몸을 돌리고, 얼굴을 돌립니다. 회개란 마음의 변화이며, 정신(지각)의 변화이며, 행동의 변화입니다.”-D.L Moody.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배반한 후에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마27:4)라고 했지만 그것은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연민과 자책이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한 것 같지만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한 것은 단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란 말로 그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고, 그중에 한번은 주님을 저주하면서 맹세까지 곁들여 부인했습니다. [그때에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매 즉시 수탉이 울더라.](마26:74). 베드로는 가룟 유다처럼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진정한 회개를 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 몹시 슬프게 우니라](마26:75). 그는 수탉이 울 때 아차! 하고 후회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회개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범한 죄에 대해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의 죄가 둘로 분리될 때까지 결코 우리와 하나가 되려 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안고 있는 눈물, 죄를 품고 있는 회개는 성경적인 회개가 아닙니다. 스펄전은 말하기를 ‘죄와 지옥은 결혼한 상태인데 회개는 이 둘의 이혼장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도우실 수 있지만 회개를 해야 할 주체는 분명히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어 주셨지만 나를 대신해서 회개해 주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사람 가운데 바른 회개를 한 사람은 다윗 한 명 뿐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였노라](삼하12:13). 다윗은 자신의 죄를 지적한 나단 대언자에게 죄를 고백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죄를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바로 주께 범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I have sinned’였지만 다윗은 I have sinned against the LORD(삼하12:13)라고 함으로써 마음으로부터 정확하게 죄를 뉘우쳤습니다. 사무엘하 24:10, [다윗이 백성의 수를 센 뒤에 그의 마음이 찔렸으므로 다윗이 주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하여 크게 범죄하였나이다. 오 주여 이제 간청하옵나니 주의 종의 불법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이는 내가 매우 어리석게 행하였음이니이다.](삼하24:10). 여기서도 다윗은 자신의 죄를 주께 아뢰었습니다. 이것이 바른 회개의 기도입니다.

누가복음에는 회개한 탕자의 유명한 비유가 나옵니다.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거슬러 아버지 앞에 범죄하였사오니](눅15:18). [아들이 아버지께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거슬러 아버지의 눈앞에서 범죄하였사오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눅15:21). 탕자는 단지 아버지 앞에 잘못을 빈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늘을 거슬러 즉 하나님 앞에 범죄했음을 시인했습니다. 회개의 첫 단계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인데, 자책이나 후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슬러, 그리스도께 범죄한 것이란 사실을 아는데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를 주십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도다(granted), 하니라.](행11:18). [자기 자신을 대적하여 행동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그리하면/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give them repentance)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딤후2:25).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셔서 회개하도록 도우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양심의 찔림을 주심으로 회개하도록 도우십니다. 때로는 번민과 고통 가운데 두시며, 때로는 일이 잘 풀리지 않게 하심으로써, 때로는 징계를 통해서 “너희는 회개하라” 명령하십니다.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한다고 기도하면서 사실은 전혀 마음을 바꾸지 않는 거짓 회개가 너무나 많습니다.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 고백입니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아버지가 무서워서, 선생님이 무서워서 일단 위기를 모면하려고 무조건 잘못을 빌 듯이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올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카톨릭 교인들이 사제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참회 역시 성경적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8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8)라고 말씀합니다. 파라오, 사울, 발람, 가룟 유다 중 어느 누구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범죄하였노라.’는 자책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이것은 반성과 후회이지 회개가 아닙니다. “살인자가 교수형을 싫어하듯이 사람은 죄를 싫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회개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형벌 때문에 죄를 싫어한다면, 나는 죄를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란 사실만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범죄로 볼 수 있다면, 내가 그분을 상처 입히고 죽게 만들었단 사실을 보고, 내 마음이 부서져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죄의 단절과 더불어 죄를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의 핵심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반성문을 쓰듯이, 재판정에서 ‘네 죄를 네가 알렸다’에 대한 반응으로 ‘예’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이사야 55:7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죄의 단절을 볼 수 있습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는 그분께서 넘치도록 용서하실 것임이라.](사55:7).-버리고/ 돌아오라. 이것이 회개입니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누구든지 죄들을 시인하고 버리는 자는 긍휼을 얻으리라.](잠28:13).-시인하고/ 버리는 자. 이런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요,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오래 참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킴이 없이 죄로부터만 돌아서는 것은 거듭남이 없는 개혁과 개선에 불과합니다.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고 자기 잘못만 시인하는 것은 일이 실패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손해를 본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파라오, 발람, 사울같은 죄인들은 하나같이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돌아왔기 때문에 잘못했다는 것이지 죄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 뉘우침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자기가 죄인인줄 깨닫는 지적 요소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왜 죄인지, 왜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회개는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주셔서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란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이는 내가 내 범죄들을 시인하기 때문이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 여기서 시인한다는 것은 죄를 죄로 알고 인정하며,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알려 주며, 말씀 선포는 죄인들에게 마음 가운데 찔림을 줍니다. 사도 바울도 구원받기 전에는 자기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빌3:6).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난 후 죄인 중의 우두머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나 집사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를 할 때 그들의 설교는 듣는 이들의 감정이 아니라 그들의 지성과 이성에 호소했습니다. 듣는 이들은 그들의 정연한 논리와 구약을 관통하는 구속사적 관점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지적할 때 그들은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참된 회개는 감성에 호소합니다. 죄의 회개는 머리 속에 지성과 이성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파라오, 발람, 아간, 사울, 가룟 유다 등은 마음으로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참된 회개는 죄를 깨닫는데서 오는 슬픔과 근심이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무슨 벌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내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는가를 뼈저리게 느낌에서 우는 감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흘린 눈물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불법을 밝히 드러내고 내 죄로 인하여 슬퍼하리이다.](시38:18). 자신의 죄에 대해 눈물이 없는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도 눈물이 없습니다. [이제 내가 기뻐함은 너희가 근심하였기 때문이 아니요, 오히려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에 이르렀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어떤 일에서도 우리로 인하여 상처를 받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기 때문이니라.](고후7:9~10). 근심--sorrow(슬픔)/KJV. 세 번 째 참된 회개는 의지적 요소가 있습니다. 죄를 버리고, 단절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돌아서면 깨끗함을 추구하며, 거룩함을 지향하는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에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열매맺는 생활로 귀결됩니다.

회개는 늘 동사가 두 개입니다.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가지 아니하겠나이다, 하고는 그 뒤에 뉘우치고 갔고](마21:29). 뉘우치기만 하면 회개가 아닙니다. 뉘우침이 없이 할 수 없이 가는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뉘우치고, 가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거슬러 아버지 앞에 범죄하였사오니](눅15:18). 탕자는 일어났고, 갔습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이는 회개의 의지적 요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할 때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용서의 은혜와 긍휼을 맛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범죄들을 [주]께 고백하리이다, 하고 주께 내 죄를 시인하며 내 불법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불법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시32:5).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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