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마 11:1-12:50
요절: 마 12:40
1-10장까지는 메시야 왕의
계보로 시작하여 왕의 탄생 장소, 탄생 경위, 왕의 기름부음
받으심, 왕의 시험 받으심, 왕국의 선포와 왕국의 생활 규범,
제자를 부르시고, 전도 여행을 보내심으로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11장부터 왕국의 건설은 암초에
부딪히게 됩니다. 백성들은 왕을 거부하고,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 11-13장은 사사건건 주님을 반대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침례인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11:1-19). 주님은
많은 기적들과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과
고라신의 시민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11:20-30). 주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主)란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가 안식일을 어긴다는 죄목으로 죽이고자
의논했습니다(12:14). 예수님은 마귀들을 내어 쫓음으로서 이
땅의 사탄의 왕국을 멸하고자 하늘의 왕국을 건설하시고자
하셨으나 그것마저 마귀를 힘입어 마귀를 쫓아낸다는
모독을 받았습니다(마12:22-50). 계속되는 왕국 백성들의
거부와 노골적인 반대로 말미암아 주님은 이방인들을 향해
손을 내미셨고(11:28), 불신의 유대인들을 대신해 이방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2:21). 주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거부와 배척으로 인해 왕국의 건설이 아닌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반대는 반역이 되고, 후에
공개적인 배척이 되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왕국 복음을 들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도록 권위를 위임하시고, 능력과 표적을 행할
능력을 주신 다음 각자 전도지로 떠났습니다(1). 이 때
감옥에 갇힌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의 질문을 들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의 시험을 받고
돌아오실 때 침례 요한은 감옥에 갇혔는데, 아직까지 감옥에
있는 것입니다(마4:12). 요한의 사역은 주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모두 끝이 났습니다. 3절, [그분께 이르되, 오실
그분이 선생님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하니](3). 요한은 자신이 직접 메시야를
증거하고,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지만
예수님의 사역이 자신의 기대와는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런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눈먼
자가 시력을 받으며 다리 저는 자가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며 귀먹은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일어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하라.](5). 주님은 요한의 불신과
의심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도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성도들의 불신을 돕는 방법이 ‘말씀의
증거’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사야 35:5-6, 61:1을
인용하셨습니다. 불신과 회의, 의심으로 가득찬 마음에는
위로와 동정이 아니라 “때에 적합한 말”을 줌으로써
믿음이 회복됩니다.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말씀으로 그들의 실족한 발을 바로 세우시고 돌리셨습니다.
주님은 불신에 찬 제자들을 도우실 때 구약 성경을
사용하셨습니다(눅24:44,47). 구약의 마지막 대언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전령이었던 침례 요한에게도 영적 위기는 찾아
왔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6). 침례인 요한을
영적 위기에 처하게 한 것은 감옥 생활이나 제자들이나
이스라엘 민중이나 헤롯 왕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의 때에 솔직하게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고,
주님을 찾아 답을 구하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 일들을 일으키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그에게 더 나으리라.](눅17:1-2).
믿음이 약한 형제들은 먹는 문제로도 실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먹는 문제도 신경써야 합니다. 제사 음식이나 신전의
우상에 바쳐진 음식물들이나 양심에 거리끼는 것들은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로마서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즙도 마시지 아니하며 네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실족하게 하거나 약하게 하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아니하는
것이/ 선하니라.](롬14:21). 성도들은 실족하게 하는 자가
되어서도 안되며, 실족해서도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10:32,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실족하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이 사역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어떤 일에서도 실족거리를 주지 아니하고](고후6:3).
이런 인간적인 관계가
아닌 교리적인 문제로 실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실족했습니다. 이사야
8:14, [그분께서 성소가 되실 것이로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실족하게 하는 바위가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주민들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사8:14).
믿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실족합니다. [걸림돌과
실족하게 하는 바위가 되었나니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여
말씀에 걸려 넘어지고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하여졌느니라.](벧전
2:8). 하지만 주님을 믿는다면 이 바위는 실족케 하는 반위가
아니라 구원의 반석이요, 든든한 요새가 됩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실족하게 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3).
제자들조차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실족할 뻔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의 부족,
성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잘못된 적용은 성도들을
실족하게 하는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스스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를 실족하게 하느냐?](요6:61).
어떤 분은 성경이 너무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가득하다며 실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읽다가 ‘주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요구들을 하는
엄격하고 불의한 분’이란 인상을 받고 믿음을
포기했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좁은 길,
고난의 설교를 듣고 구원의 길이 너무 험난하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믿음을 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남녀
불평등, 노사 불평등, 독재 권력 비호, 타종교 배척 등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으로 인한 실족입니다. 잘못된
믿음, 잘못된 이해, 잘못된 적용으로 말씀에 실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를 실족케 하는 또
하나는 십자가의 선포입니다. 갈라디아서 5:11, [형제들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핍박을
받겠느냐? 그렇다면 십자가의 실족하게 하는 것이
그쳤으리라.](갈5:11). 십자가의 복음, 십자가의 전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고, 실족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수치와 모욕거리며,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복음의 지성화, 고등 종교, 이성과 논리에
부응하는 설교를 부르짖는 성도들에게 십자가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는 성도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power)입니다.
7-15절은 침례인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입니다. 주님은 말라기 3:1에 ‘내 사자’가
바로 요한이란 사실을 증거해 주셨습니다(10).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 백성들이
받아들이려 한다면(if),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 요한은 엘리야의 현신은 아니었지만(요1:21),
엘리야의 영으로 와서(눅1:17), 엘리야가 해야 할 사역을 한
사람입니다(마17:10-13). 하지만 유대인들은 요한은 감옥에서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메달아 죽임으로써
말라기 3:1-3에 예언된 내용은 재림 때까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하늘의 왕국을 선포했지만 하나님의
왕국의 일원은 되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신랑의 친구였지만
그리스도의 신부는 되지 못했습니다. 하늘의 왕국 안에서(in)
가장 작은 자도 하늘 왕국이 임하기 이전의 어떤 사람보다
더 큽니다. 12절은 흔히 난해 구절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하늘의 왕국은 아담이 마귀에게 탈취
당했습니다. 노아 역시 탈취 당했습니다. 모세로부터
사사들의 시대를 통해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신정 국가를 이루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왕을 구함으로써 하늘의 왕국은 급격히
위축되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이상적인 하늘의
왕국이 건설되는 듯 했지만 606 B.C년에 이방인 느부갓네살
왕에게 완전히 망해 버림으로서 하늘의 왕국은 약속의
땅에서조차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 왕국은
이방인들에게 빼앗겨 버렸고, 이방인의 때가 끝날 때까지,
주님이 다시 와서 천년 왕국을 건설하실 때까지 폭력을
당하고,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습니다. 침례인
요한이 400년의 침묵을 깨고 하늘의 왕국이 가까왔음을
선포했지만,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리고, 죽임으로서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했고, 폭력배들(헤롯을 비롯한 당시
정치 세력들)이 강제로 빼앗아 버렸습니다1).
16-19절은 이 세대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세대는 장터에 앉아 친구를 부르지만 전혀
호응이 없는 아이들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울어도 애곡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반응이
없습니다. 이 세대는 완전히 망가진 아이들과 같은
세대입니다. 망가진 아이들은 뭐든지 삐딱하게 반응합니다.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금식을 하자 ‘마귀들렸다’고
했다가 주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음식을 탐하는자요,
술주정뱅이로 몰았습니다(18-19). 이 세대는 ‘독사들의 세대’(마3:7,
12:34, 23:33), ‘악하고 음란한 세대’(12:39,16:4), ‘사악한 세대’(12:45),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17:17),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막8:38), ‘믿음이 없는 세대’(막9:19), ‘구부러진
세대’(행2:40)라고 불립니다. 주님께서 이 세대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씀하시거나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사역 기간 동안 90% 이상 부정적인 설교로
채우셨습니다.
20-24절은 예수님의
저주입니다. 이 곳이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처음 저주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능력 있는 일들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꾸짖기
시작하시니라.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이는 너희 안에서 행한 능력 있는 일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오래 전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속에서 회개하였을 것임이라.](20-21). 가버나움과
고라신은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서 가장 많은 일들을 행하신
곳이며 본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8:5-17, 9:1). 하지만 이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회개를 거부하는 도시는 소돔과
고모라만도 못한 도시입니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는
요나가 전파하는 심판의 설교에도 모두 회개함으로 건짐을
받았습니다. 반면 이들은 주님의 능력있는 일들을 가장 많이
접하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25-30절은 유대인 중심
사역에서 이방인으로 사역이 확장되는 장면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여, 이것들을 지혜롭고 분별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기들에게는 드러내셨사오니
감사하나이다. 과연 그러하옵나이다. 아버지여, 그리하심이
아버지 보시기에 좋았나이다.](25,26). 주님은 왕국
백성들의 반역과 공개적인 배척에 절망하거나 낙심하시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서기관들, 율법사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과
같은 학식이 있고, 지혜를 갖춘 자들이 아니라 어부, 세리,
창기와 같은 죄인들에게 주님의 뜻을 계시하셨고, 그들의
마음 속에 말씀을 심으셨습니다. 이는 [기록된바,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무너뜨리고 분별 있는 자들의 명철(明哲)을
쓸모 없게 만들리라, 하였으니](고전1:19)란 말씀대로
입니다.
주님은 이제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 하시니라.](28-30).
10:5-6절과 비교하면 이것은 엄청난 특권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겼지만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성전에 올 때는 십일조와
헌물, 양들과 소, 염소를 들고 왔습니다. 종교의 짐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어깨에 짐을 지웠는데 주님은 이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또 무겁고 지기에 힘든 짐들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로도 그 짐들을 옮기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마23:4). 각종 공역, 세금, 종교적
의무에 지치고 힘든 혼들은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죄의 짐으로 무거웠습니다. 죽은
왕들의 무덤을 만드느라 노역에 동원되었고, 신전을
건축하고, 스핑크스와 피라밋을 만드느라 어깨에는 무거운
돌들이 지워졌습니다. 주님은 이런 무리를 향해
외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 하시니라.](28-30). 다(all) 내게로 오라.
모든 종교는 ‘가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오라’고
하십니다. 모든 종교는 ‘바치라’고 합니다. 주님은 ‘내가
...주리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할
때 안식은 구원과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너희
혼이 안식을 발견하리니...’는 순종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화평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주님께로 나아와 화평을 얻었다면 이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움으로써 혼의 안식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멍에는 세상이 주는 멍에처럼 무겁지 않습니다. 어렵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주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12장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주님은 반대를 직면하셨습니다. 안식일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시비를 걸었고 마침내 마귀
들린 자를 넘어서 마귀의 종으로 몰아 부쳤습니다. 1-2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에서 이삭을 따 먹은
것을 포착하고 안식일 규례를 어겼다고 고소했습니다.
율법을 제정하시고, 율법을 수여하신 주님 앞에서 율법
문제를 가지고 따지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과
같습니다. 신명기 23:25절에 따르면 제자들이 이삭을 따 먹는
것은 율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외에 자신들이 정한 전통과
규례에 어긋날 뿐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출31:12-17). 안식일은
말 그대로 안식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기록된
말씀에다 세세한 항목들을 갖다 붙여서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3-8절에서 주님은 구약에서 다윗이
부하들과 함께 안식일에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먹었음을 예로 드셨습니다(삼상21:1). 다윗 역시 당시에
배척받는 왕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것은 절묘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일하는 헌물을
드리고, 희생제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음을 율법서에서 읽어 보지 못했느냐?(민28:9-10)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호세아 6:6을 인용하시며 [그러나,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니](12:7)라고 결론 지으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외적 형식을 준수하는 것보다 율법의 정신,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희생물보다 긍휼이
더 중요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는 사람의 아들이 곧
안식일의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12:8). 안식일에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주인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따지고, 안식일에 대한 해석, 안식일에 대한
권위는 바리새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에게
있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선포하신 분이 바로 주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9-20절은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10-12절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율법에
맞다고 가르치셨습니다(12). 이 일은 당시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규례로 정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은 구해 주면서, 병자의 병을 고치는 것은 금지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14). 이 날 주님은
무리들의 병을 다 고치셨습니다(15). 이런 가운데서 주님은
그들과 더 이상 다투지 아니하시고 묵묵히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그는
다투지 아니하며 외치지 아니하리니 아무도 거리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며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마침내 공의를 보내어
승리하리니](19-20). 여기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흔히 연약한 죄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정확한 의미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 주님을
배척하는 이스라엘의 상태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대적하고, 말씀을 배척하고,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시키는 그들에게
심판을 보내셔서 꺽지 아니하셨고, 그들을 끄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입니다. 18절과 21절에 ‘이방인들’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이제 유대인들의 배척받은 예수님을
이방인들은 신뢰하고 영접할 것입니다. 41,42절에 이방인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22-27절은 바리새인들을 마귀들린
자들에게서 마귀들을 내어 쫓는 주님을 향해 바알세붑을
힘입어 마귀를 쫓아낸다고 고소하였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25-27). 주님은 성령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내셨는데, 성령의 역사를 마귀의
역사로 모함한 것을 일컬어 주님은 ‘성령 모독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의 온갖 죄와 신성 모독은 용서받되 성령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사람의 아들을 대적하면 용서받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님을 대적하면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용서받지 못하리라.](31-32).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매질하고 감옥에
집어 넣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한 사울(바울)의 죄도
용서받았지만, 마귀를 쫓아내는 주님을 향해 마귀들린
자라고 말한 바리새인들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생각없이, 적의(敵意)에 차서 예수님을
향해 마구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말이 마음의
문제임을 말씀하셨고 모두 심판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오 독사들의 세대여, 너희가 악하니
어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으리요? 이는 입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보고(寶庫)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보고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니 이는 네 말로 네가 의롭게 되며 네 말로 네가
정죄받을 것임이라.](34-37). 나무의 열매를 통해서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입술의 열매를 통해서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33절,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썩었고 열매도 썩었다 하든지 하라. 이는 그 열매로 나무를
알기 때문이니라.](33).
38-39절은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표적을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자,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아니하리라.](39)고 대답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표적과 능력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이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요나는 삼일밤 삼일낮을 고래
배 속에서 죽음을 경험한 후에 이방 니느웨에 주의 말씀을
전함으로서 그들을 회심시켰습니다. 주님 역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일어나신 후 이방인들을
믿게 하실 것입니다(요12:35-43). 40절을 보십시오. [이는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중심부에 있을
것임이라.](40). 이 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세상이
존재한 이래로 가장 큰 표적이 바로 부활의 표적입니다.
구약의 예를 볼 때, 이방 니느웨는 요나의 전파로
회개했습니다. 이방인 시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듣고자 하여 땅 끝 지역에서 왔습니다.
요나보다 크고, 솔로몬보다 더 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43-4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마음의 회심과 중생의 새롭게 하심이 없는
삶의 변화는 무용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악한
영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70년의 바빌론 포로 생활을
통해 우상 숭배를 청산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상을
청산하고, 그 마음 속에 주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했지만
텅 빈채로 그냥 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우상 숭배보다
더 심한 죄를 범했는데,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렸습니다. [부정한 영이 사람에게서 나와 마른 곳으로
다니며 쉴 곳을 구하나 찾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어 있거늘 이에 가서 자기보다 더 사악한
다른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쁘게 되니라. 이 사악한 세대도
참으로 그와 같이 되리라.](43-45). 이것은 개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고, 예배에 참여하고,
경건한 종교적인 삶을 구가하지만 주의 영으로 채움받지
못한 채 자신의 더러움을 제거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필히
더 악한 영들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종교 생활은 외적
생활을 일시적으로 정결하게 해 주지만 복음은 우리의
마음과 영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해 줍니다. 마귀는 사람의
몸을 자신의 집, 처소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 되는가? 마구의 전이
되는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46-50절은 주님께서 누가
자신의 형제, 자매, 모친이 될 수 있는가?를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어머니 마리아, 육신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세,
시몬, 유다가 밖에 서 있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진리와
지식, 은혜와 긍휼에 가장 가까이 서 있으면서도 부주의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종교의 가식 아래서 우리는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친척에게 불친절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냐? 누가 내 형제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이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이라, 하시더라.](48-50). 예수님의 말씀, 사역을
유대인들은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세상의 "누구든지"(whosoever)
초청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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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의 왕국 vs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