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마 13:1-13:58
요절: 마 13:16
13장은 왕국의 비유로
유명한 장입니다. 왕국의 비유로 알려진 몇 가지 비유들에는
깊은 영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13장은
예수님의 왕국에 관련된 가르침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마태복음의 중추적인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장에서 모두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묻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11-15절,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하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을 너희에게는 허락하셨으나 그들에게는
아니하셨나니 이는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아서 더욱
풍성하게 될 것이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도 빼앗길
것임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니라. 이사야의 대언이 그들에게서
성취되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 까닭은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고 그들의 눈은
감겼기 때문이니 이것은 언제라도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함으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11-15). 주님은 12장에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主)란 사실을 선포하시고, 다윗의 아들이시며(12:3),
표적과 기사를 통해 능력을 보이셨지만(12:13), 모두
배척받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바알세붑을 힘입어
일한다고 극단적으로 모독했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모독죄를 범함으로써, 독사들의 세대란 저주를 받았습니다(12:34).
주님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자들에게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표적과 기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말씀을 주셔서 더욱 풍성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13절에서 더욱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니라.](13). 요한의
증언으로부터 시작된 줄기찬 말씀의 선포를 들어도 그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병자들이 낫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마귀들이 쫓겨나는 놀라운 표적들을 보면서도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기에 더욱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결국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비판과 극한
반대를 원천 봉쇄해 버리신 것입니다. 성경은 믿는 마음이
없을 때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믿는 마음이 없이
들을 때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는 이상한 책입니다. 모든
공부는 지성이 예민하면 성취가 빠르지만 성경은 지성이
아니라 마음으로 공부하는 책입니다. 믿는 마음이 있을 때
깨닫게 되는 책이며,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책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비유로
말씀하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것은 대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되 창세로부터 은밀히 간직한 것들을
말하리라, 하였느니라.](35). 주님은 구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만 무려 7가지의
‘왕국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제외하면 모두 ‘하늘의 왕국은 ...이와같으니라’로
시작됩니다. 비유란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일들을 쉽고 분명하게 알려 줄 수 있지만 동시에,
무지함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 가르침이 더욱 어렵고
모호하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집 밖으로’ 나가셔서 바닷가에 앉으셨는데, 무리는
해변에 주님은 배에 올라서 선상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교회를 짓지 않으시고, 큰 건물없이
발길닿는 모든 곳을 강단으로 삼으셨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해줍니다. 우리는 교회 건물을 짓기보다
우리에게 허락하는 한 가장 편리한 환경을 조성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집밖으로’(out
of the house)란 말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집은 바로
이스라엘의 집(10:6)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3절부터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비유라고 말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비유는 주님께서 친히
해석해 주시며, 관련 구절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3-9절까지의
비유는 18-23절에서 주님이 친히 해석해 주셨기 때문에
자의적 해석을 해서는 안됩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목적”은 하늘의 왕국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자라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는
말씀을 듣는 4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막4:14-20, 눅8:4-15).
길가, 돌밭, 가시나무 사이, 좋은 땅입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마귀인 새”(19절)가 채어가
버립니다. 말씀에 대한 “비평”, “의심”, “불신”, “선입견”,
“무관심” 등으로 인해 흙에 뿌리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즉시 빼앗겨 버립니다. 돌밭(돌짝밭)은 흙이 얕으므로
뿌리가 자라기 전에 죽습니다. 이는 오늘날 은사주의 교회를
비롯한 감정과 감각, 표적과 능력을 선호하는 교회들의
성도들에게 흔히 일어나는데, 몇 가지 놀랄만한 지옥의
공포나, 약간의 강한 호소에 움직여 회심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몇 차례만 삶에서 고난이 계속되면 이들은 곧
실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돌짝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의 흙빛에는 “환난과 박해”라는 돌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시나무 사이에는 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가시밭 같은 마음의 땅은 가시떨기와 뿌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이 씨가 필요로 하는 양분을 흡수하며 그늘지게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가시나무”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로 마가복음4:19에는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에 대한 정욕” 그리고 누가복음8:14에는 “쾌락”으로
언급됩니다. 좋은 땅은 “뿌리”가 나고 “자라나고” 또한
“열매”를 맺으나 양이 다릅니다. 어떤 것은 100배로, 어떤
것은 60배로, 어떤 것들은 30배로 맺습니다. 이것은 흙이
잘못되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은 길가나, 돌이나,
가시떨기도 아닌 좋은 땅입니다. 그렇다면 왜 소출에 차이가
생깁니까? 문제는 경작의 방법상의 차이 때문입니다. 깊이
땅을 갈고, 물을 주고, 적절한 기온이 유지된다면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많이
열매를 맺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호세아 10:12,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로 거두며 너희의 묵은 땅을
부술지니 이는 지금이 곧 [주]를 찾을 때이기 때문이라.
마침내 그분께서 오사 의를 비같이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우리는 씨를 뿌리는 농부로서 무엇을 심어야 하는가? 무엇을
뿌려야 하는가? 얼마나 뿌려야 하는가? 언제 뿌려야 하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울며 씨를 뿌려야 하고,
육신이 아닌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하며(갈6:8), 의를 심어야
합니다(호10:12). 씨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 밭은 갈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4:3, [[주]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렘4:3).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
이상의 조건이 갖추어진
성도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첫째, 그리스도 안에
꾸준히 거해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15:5).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곧
말씀안에 꾸준히 거해야 함을 말합니다.
둘째, 한 알의 밀알의
진리대로 죽어야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셋째, 많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뿌린대로 거둡니다. 무엇을 뿌렸든지 그대로 거둡니다(종류와
양 모두 해당됩니다). [씨 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시는
분께서 이제 너희 양식으로 빵도 주시고 너희가 뿌린 씨도
번성하게 하시며 너희의 의의 열매도 늘어나게 하시리니)](고후9:10).
넷째,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할 때 엄청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 속에 씨를 받은 자는 말씀을 듣고 깨닫고 또 열매를 맺는
자니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를 내느니라, 하시더라.](마13:23).
우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알아서 자라는
잡초와 같은 것이 아니라, 밀과 같이 뿌려지고
경작되어져야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왕국의
비유에서 이 씨들은 1/4정도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마13:24-30)
그리스도께서 해석해주시며(37-43절), 이것은 어떤 상상이나
비성경적인 해석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며(37절), 그는 “자기의
밭”에 씨를 뿌리며(24절),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께서 해석해 주신대로 믿지 않고, “밭”은
교회이며, “밀”과 “가라지”는 “진리”와 “거짓”을
나타낸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이 전혀 가치없는 허튼
소리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는 왕국에 밀과 가라지 둘
다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신학자들의 창작일
뿐입니다. 하늘의 왕국에는 밀과 가라지 둘 다 있습니다.
처음 비유에서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씨를 뿌렸는데, 두 번째
비유에서는 사람(왕국의 자녀들)을 뿌립니다. 주님은 이
세대에도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십니다. 말씀을
뿌리시기도 하시고, 동시에 사람을 뿌리시기도 하십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셔서 각 지역에 성도들을
뿌리셨습니다. 박해를 통해 도처에 성도들을 흩으심으로
전역에 교회가 생기게 하십니다.
그러나 “밭”은 밀만
뿌려진 것이 아니라, 마귀가 와서 가라지도 뿌렸습니다. “가라지”는
밀과 거의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이것들이 완전히 자랄
때까지는 진짜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가라지가 뿌려진 것은
씨뿌리는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때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씨뿌리던 자가 잠을 잤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씨뿌리는 자가
들판을 보러 자리를 비운 사이 사람들이 잤던 것입니다. 그
때 마귀가 와서 곡식들 사이에 가라지를 뿌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그의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가매](25). 뿌린 씨는 여전히 자라나고 있습니다. “가라지”는
“사악한 자의 자녀들”이라고 불리는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러한 유대인들의 특징을 가진 자들입니다(요8:44).
여기서 주의할 것은 마귀는 “밀”을 바꾸거나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를 통해 들판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들에는 가라지가 자라고 있었고, 종들은
주인에게 그것을 뽑아 모으기를 원하시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둘 다 추수 때까지 같이 자라게 두어라.
추수하는 때에 내가 거두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함께 모아 불태우게 단으로 묶되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들이라, 하리라.](30). 여기서 추수꾼들은 교회의
성도가 아니라 천사들입니다.
셋째, 겨자씨 비유입니다(32-33).
겨자 씨 비유에 이어 바로 누룩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들은 똑같이 “하늘의 왕국은...와 같으니라” 하신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도 다른 하늘의
왕국에 관한 비유와 틀린 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하늘의
왕국”에 관한 같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
두 비유”가 교회의 팽창이나 확산에 적용합니다. 복음이 전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을 비유한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하늘의
왕국은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차라리 이 말씀을 세상에
있는 기독교계(Christendom)에 비유하면 조금은 나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두 비유를 교회에다 적용한다면, 겨자씨의
비유는 외적으로 팽창하는 교인들의 증가와 교회 수를
말하고, 누룩은 내적으로 성장하는 교인들의 영적
성숙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보십시오.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지만 정원에 심겨지면 7-8m 가량 자랍니다. 가장 좋은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는 마땅히 정원에 심겨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들판”(자기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고 합니다. 비유를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은 “들판”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겨자씨는
자라서 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라고 씌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식용이나 부드럽게 자란 것이 아니라 야생에서 억새게
자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겨자씨는 그 종류에 따라
알맞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상징하는 공중의
새들의 날아와서 거기에 거처를 삼습니다. 이 새들은 기록된
말씀의 비유를 통해, 길가에 뿌려진 씨를 먹어버리는
마귀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마13:4,9).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새는 “회심한 신자”나 “교회에 새로온 신자”가 아니라
사탄의 종인 마귀들임이 분명합니다.
흔히 오늘날 가르쳐지고
있는 기독교계에 비유해서 겨자씨의 말씀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겨자씨”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침례를 받은 120명의 성도들로 시작되었다. 이 씨는 계속
자라나서 로마를 국교화 시킬만큼 자라났다. 그러나,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서 나무에 둥지를 틀고 더럽혔다. 예를 들어,
아나니아, 삽비라, 마술사 시몬, 후메내오와 필레투스 같은
사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A.D 324년 콘스탄틴은 교회와
국가를 하나로 일치시켜 버렸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정치를 하기 위해서 교회에 들어왔다.-
자! 이 비유가 맞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딘가 비정상적이라고 스스로 느낄 것입니다.
하늘의 왕국의 비유에서
겨자씨는 이 세상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기독교의 이름을
내걸고 부와 지위와 권력을 획책하는 “거대한 세상 제도”를
말합니다. 그는 이 시대의 어두움의 통치자의 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를 아는
지식”을 온 땅에 물같이 덮으실 때까지,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 순수한 기독교가 이 세상에 널리
전파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흔히 잘못해석하고 있는 이 비유의 본 뜻을 더욱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보겠느냐?](눅18:8).
다음은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의 비유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여자는 교회를
나타내며, 누룩은 복음이요, 밀 세말은 인류입니다. “복음의
누룩”이 교회에 의해서 세상에 소개될 때 세상은 충분히
부풀어올라서 완전히 변화되어 모든 사람들은 복음으로
변화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장로교를 비롯한 대부분
개신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말 같지도 않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절대로 “복음”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악, 죄의 상징”입니다.
누룩은 음식물을
발효시켜서 부패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룩이
들어가면 어떤 음식물이라도 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칠일간을 누룩없는 빵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게 됩니다(출12:15). 어떤 희생물에도 누룩을 넣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출34:25. 레2:11,10:12).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 외에도 3번이나 누룩에 관한 비유를 사용하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 “사두개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마16:6-12, 막8:15).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은
“거짓 교리”입니다. 바리새인의 거짓 교리는 주로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전혀 없었고,
사두개인의 거짓 교리는 “회의주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천사나 영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헤롯의 거짓 교리는 “물질주의”였습니다.
그는 세상과 종교를 혼합해서 이용해 먹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악하다는
의미를 제외하고는 “누룩”이란 표현을 쓰신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6-8).
바울은 누룩을 “악하고 가증한 누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룩없는 성실과 진리의 빵”과 멋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고 엄히
경고했습니다(고전5:6, 갈5:9).
누룩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원리에도 두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레위기23:6-14에서
우리는 “첫 열매들”의 “흔드는 제사” 에는 절대로 “누룩”이
들어가서는 안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써 부활 때에 첫 열매들은 “죄”와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23:15-17에 나오는
새로운 “음식 제사”를 드릴 때는 “누룩”을 넣어서 빵을
구워야 합니다. 이는 부활한 후 50일 뒤에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후 50일이 지난 후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모두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행2:1-4). 성령을 받은 제자들도
아직 몸의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구원받은
죄인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외는 아모스4:4,5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꾸짖으며, 누룩과
함께 감사의 희생제물”을 드리라고 조롱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룩을 사용하는 것이 그들의 잘못을 바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 허용하신 뜻 가운데 행해져야 할
명령임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누룩”은 여전히 악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때, 누룩의 비유에서 누룩은 거짓된, 또는 부패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만약 누룩이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우리는 참으로 기묘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복음은 누룩과 같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룩은 일단 빵 안에 들어가면 저절로 빵 전체로 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런 식으로 퍼지지 않습니다.
만약 복음이 누룩과 같이 퍼지는 것이라면, 한 마을에
복음을 전파해 두기만 하면 그 마을은 저절로 모두 복음화
되고, 곧 도시와 국가가 모두 복음화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 한 번 보십시오. 우리 주위에서 그런 곳이
있습니까?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복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복음은 실패한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굵은 가루 서말 속에
넣은 누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가루는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가루는 절대 가라지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은 가라지가 아닙니다.
가루는 밀에서 얻어집니다. 그러므로 가루가 가리키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인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루 서말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교회들입니다. 이들은 로마 캐톨릭,
희랍정교, 개신교로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가루 서말에 “십자가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침례에
의한 중생” 등의 거짓 교리가 들어가서 모든 가루들을
부풀게 하고 있습니다.
누룩을 숨긴 여인은
계시록에 나오는 두아티라 교회(계2:20)의 음녀 이세벨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님은 로마 카톨릭을 일컬어 계시록
17:5절에서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밝혀
놓으셨습니다. 누룩이 나쁜 것이고, 타락하게 한다는 사실은
그 여인이 그것을 몰래 숨겨 넣는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만약 누룩이 복음이라고 한다면, 여인이
그것을 숨겨 넣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네 가지 경고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생기는
결과를 정확하게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발생하는 실패들과 교회의 타락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예측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문제로
낙담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비유를 통해서
주님이 이 땅에서 떠나 계시는 동안 전 세계적으로 복음이
수용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복음을 거부하고
마귀와 자신의 육체를 따라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 권세 잡은
자입니다. 교회는 깨어있지 못하고 사탄에게 농락을 당하며,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사탄은 교회에 다니면서,
단지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 교리를
파괴하고, 선한 행실을 부패시킬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사탄의 이런 활동은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로써 심판하실 때까지 누룩은 점점 더 퍼져서 모든 것을
부패시키고 말 것입니다. 누룩의 비유는 바로 이 시대의
모든 종교주의에 물든 기독교의 산물인 것입니다.
다섯째, 숨겨진
보화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화”와 “진주”에 대한
비유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해 왔습니다. 즉 ‘보화나
진주는 그리스도며,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팔아서 그분을
사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전히
뒤엎는 해석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이 시대를 향한 구원
계획과는 완전히 배치됩니다. 이 비유에서 “밭”은 “세상”입니다.
이미 “가라지”의 비유에서 배운 바 있습니다. “죄인”은
세상을 사는(buy) 것이 아니라, 세상을 포기하고, 미워하고
버려야 합니다. 죄인은 세상에서 팔아야 할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에 감추어진 분도 아니며,
세상에서 찾는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구원은 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은혜로
얻어지는 선물이요(롬6:23), 죄인이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사셨습니다(고전6:20).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요1:12).
구원을 얻는데는 돈없이, 값없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사55:1).
주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지불하셔서 그 밭을
사셨습니다(고후8:9). 밭에 숨겨진 보물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참으로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모든
백성들보다 뛰어난 특별한 보배가 되리니 이는 온 땅(세상)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출19:5). [이는 [주]께서 자신을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보배로
택하셨음이로다.](시135:4). 보물은 아직도 세상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들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직 그것을 소유하시지 못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값주고 사신 그 “소유를 구속하실 때”까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실 것입니다(엡1:14).
그 때까지 이스라엘은
열방들 가운데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왕국의
신비”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된다는
것이라.](롬11:25).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찰
때까지 들에 숨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숨겨 놓은 보물”인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후 자신들의 땅인 이스라엘로 돌아올 것입니다.
여섯번째는 진주의
비유입니다. 진주의 비유에서 부유한 상인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진주는 교회입니다. 숨겨진 보물의 비유에서
값을 주고 산 것은 보화가 아니라 밭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값을 주고 산 것은 진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진주를 모두 다 사시면, 그 진주를 다시 시장에 내어 파는
일은 없다. 주님은 진주를 자신의 영원한 소유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이 비유로부터 이 시대의 목적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지키는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째, 그물 속의
고기입니다. 이 비유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 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물”은 “복음의 그물”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가운데 더욱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이 시대에는 한 사람, 한 사람씩 구원받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이 시대에서 복음의 그물을 드리움으로써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 오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부들은 나쁜 고기를 좋은
고기로부터 분리해야 합니다. 먹을 수 있고, 시장에서 팔 수
있는 고기는 그렇지 않는 고기와 같이 섞어 둘 수 없습니다.
교회가 늘 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비유의 끝과 가라지의 비유의 끝과는 서로 일치합니다.
수확하는 시기는 “시대의 끝”입니다. 이 시대의 끝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나누십니다. 이 일은 천사들에 의해
수행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가라지 먼저 모아진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밀이
하늘의 창고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라지는 불에 태워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쁜 고기가 가려져서 버려지기 전에
좋은 고기는 하늘의 창고로 모아집니다.
그물이 바다 속으로
던져지고,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더라도 바다 속에 있는
많은 고기는 여전히 잡지 못합니다. 이 비유에 따르면 잡은
고기에 한해서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나눕니다. 결국
구원받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복음의 경륜에서, 비유가 가르쳐 주는
바와 같이 세상은 완전히 변화되지 않습니다. 의인과 불의한
자들을 구분하는 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야 이루어 질
일입니다.
주님의 이런 가르침에
듣던 무리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54절을 보십시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 있는
일들이 어디에서 났느냐?](54). 이런 놀람 가운데서도
그들은 믿음이 생기지 않았던지 계속해서 예수님의
육신적인 면을 캐내기 시작했습니다. 55-56절을 보십시오.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그의
동생들은 야고보와 요세와 시몬과 유다라 하지 아니하냐?
그의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데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났느냐? 하고](55-56).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만 알았을 뿐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은 믿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한 자가 되었습니다. 57절, [그분으로 인해
실족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대언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고](57).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는 무리들, 말씀으로 인해 실족하는
무리들, 십자가로 인해 실족하는 무리들을 한 마디로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라고 부릅니다. 가장 능력있는
설교에서 얻은 회심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58절,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거기서 능력 있는 일들을 많이 행하지
아니하시니라.](58).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하는 말씀 전파를
통해서 아무도 얻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계속 전파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마태복음 13장
외에 나오는 다섯 가지 왕국의 비유를 간단히 다룬 다음 14장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