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6:15-30
요절: 출애굽기 26:30
오늘은 성막을 세우는데
골조인 널빤지들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사방으로
널빤지를 세워서 벽을 만들어야 하는데 널빤지는 싯팀
나무로 길이기 10큐빗 너비가 1큐빗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규격으로 하면 5m * 75Cm입니다. 널판의 총 개수는 48개였습니다.
오늘 성막의 외곽을 싸는 널빤지들은 지역 교회를 어떻게
새워야 하는가?에 대한 모형을 가장 잘 보여 줍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보여 주신 모양대로 성막을 세웠듯이 우리 역시
성경이 제시하는 청사진을 따라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조국 교회는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성경이 제시하는
말씀의 빛 대신 자신들의 감정, 체험, 성공, 축복 등을
쫓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널빤지를 세우는 일은 매우 단순합니다. 직사각형으로
세우면 되는데 양측에 20개씩, 후면에 6개, 후면 연결되는
곳에 기둥 2개, 각 널판은 2개의 은 받침위에 서 있고,
널판들은 띠로 (양편에 각각 5개, 뒤에 5개) 연결해서 견고케
했습니다. 널판과 띠 목은 모두 금으로 쌌습니다. 받침의
재료는 놋과 은이었습니다. 이상이 간략하게 본 성막의
널빤지들의 개요입니다. 성막에 대한 주석이나 설교가 매우
많지만 널빤지에 대한 견해나 해석은 모두 제 각각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는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에 대한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에만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먼저 재료를
살펴 보겠습니다. 15절과 29절입니다. [너는 성막에 쓰기
위해 시팀나무로 널빤지들을 만들어 세우되](15). [그
널빤지들을 금으로 입히고 그 막대기들을 넣을 자리로 금
고리들을 만들며 그 막대기들을 금으로 입힐지니라.](29).
널빤지의 원 재료는 언약궤와 그 운반 막대, 상(table)과
마찬가지로 시팀 나무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금을
입혔습니다. 이것도 다른 기구들의 제작 방식과 거의
같습니다. 시팀 나무는 견고하고 잘 썩지 않아서 그리스도의
부패하지 않는 인성을 상징하는데, 그 위에 금을 입힘으로서
인성과 신성의 조화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지만 그리스도란 새 사람을 입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진 인도의 선교사 하이드는 “만약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육신의 시체 썩는
냄새만을 맡게 된다면 누가 가까이 오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자아를 처리하고 침례를 통해
완전히 묻어 버린 후에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만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무 위에 금으로
입혀진 모습입니다. [또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이라.](갈3:27).
우리는 모두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4).
새 사람에게 옛 습관, 옛 사람의 행실이 보이는 것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웃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원숭이 흉내를
내는 것보다 더 웃기는 일입니다. 새 사람은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 받았습니다. 새 사람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3:10).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살지만 영적인 말을 해야 하며,
영적인 노래를 불러야 하며, 영적인 가치관에 따라 살아야
하며, 영광스럽고 거룩한 것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시팀
나무에 금을 입혔을 때 금빛만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습은 우리의 행실과 언어와 가치관들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뜻은 마음 가운데
긍휼히 여기는 심정, 친절, 겸손한 마음, 온유함, 오래 참음
등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골3:12). 그렇지 않다면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믿겠습니까?
널빤지들을 금으로 입혔다는 것은 주님의 성소 안이 얼마나
찬란하게 빛 났을지 짐작하고도 남게 합니다. 5m짜리 기둥 48개에
금을 입혔다면 125만 달러 이상의 금이 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나무 널판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무에 불과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옷 입혀
주셨습니다. 금이 나무를 싸고 있듯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감추어져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져 있습니다.
16절은 크기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각 널빤지의 길이는 십 큐빗, 넓이는 일 큐빗
반으로 하고](16). 십은 언제나 이방인의 수입니다. 십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주님은 7진법을
쓰시지만 인간은 십진법을 씁니다. 주님은 십 큐빗짜리
널빤지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해 주님
앞에 넘어진 존재요, 타락한 존재이지만 주님은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넘어지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역시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굳게 서야
합니다. 성막의 널빤지들이 굳게 세워야 하듯 우리는 그렇게
세움을 입어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앉았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그 다음에는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는 자가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고전15:58).
서지 않으면 걸을 수 없습니다. 서지 않으면 마귀를
대적하여 싸울 수 없습니다. 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서지 않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 믿음에 굳게 서라. [너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행동하며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전16:13). 원수들은 적을 제압할 때 먼저 서
있도록 하지 않습니다. 먼저 꿇리고, 다음에는 엎드리게
합니다. 기둥들로 세운 널빤지들이 굳게 세워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성도들 역시 믿음 안에 굳게 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한 영 안에 굳게 서라.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할지니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 대한 일들 곧 내가 너희에게 가서 보든지 떠나
있든지 너희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이 복음의 믿음을
위하여 한 마음으로 함께 힘쓰며](빌1:27). 성령 안에 굳게
서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서 있어봐야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바람이 한번만 불어도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영 안에 굳게 서면 그 무엇으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매사에 성령을 의지해서 서십시오. 어떤 장애인은 자기를
부축해 주는 사람을 붙들고는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내 힘으로 선게 아니라 이분이 지금
저를 붙들어 주고 있어서 앉아있을 때보다 더 편하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세우시면 여러분은
흔들림없이 굳게 설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 가르침을 받은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골2:7). 여러분은
성경에서 배운 대로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저는 초등학교
때 결석과 조퇴를 자주했습니다. 제가 아는 친구는 학교를
다니면서 단 한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
한시간도 빠진 적이 없는데 그 비결을 물었더니, 자기는
배우기를 ‘학교에 가지 않으려면 차라리 죽어라. 학교에서
죽으면 순국, 순교, 순직에 해당하는 영광이다. 학생은
죽어도 병원이나 집에서 죽지 말고 학교에서 죽어야 한다.’
이렇게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머리 속에는 학교의
수업을 빠지는 것은 아예 메모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르침을 받은대로 굳게 섰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일이 자신의
일상사에 작은 일과만도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한번도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일이 가정의 경조사나 놀러 가는
일이나 학교 시험이나 취직 공부나 출장이나 어떤 사유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가르쳐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핑계 거리 생길 때마다 예배를 빠지면 여러분의
자녀들은 30배에서 100배 정도의 열매를 맺어서 수시로
건수를 만들어서 빠지려 할 것입니다. 그 때 그 예를 바로
여러분에게서 찾을 것입니다. 이런 예는 모든 상황에서 다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서신으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붙들라.](살후2:15)고 말했습니다. 여더분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남겨 놓은 좋은 전통들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한국의 세계 최대 감리 교회를 맡고 있는 김 홍도
목사님은 4형제가 다 목사인데 그 어머니는 아들이 교회를
한번 빠지면 겨울에 옷을 벗겨 버리고 집에서 쫓아내어
버렸습니다. 그 자식들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그 교육을
지금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것이 자랑이
아니라 그렇게 가르침을 받은대로 지금 굳게 서서 현재도
붙들고 있다는 점이 자랑인 것입니다. 어떻게 가르침을
받았느냐도 중요하지만 가르침을 받은대로 현재 굳게 서서
행동하느냐는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 번 세운 기둥이
현재도 서 있어야지 이미 쓰러졌다면 무슨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 굳게 서서 대적하라.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벧전5:9).
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대적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를
향해 일어섰다고 말하면 항거했거나 대적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여매고 의의 흉갑(胸鉀)을
입고](엡6:14).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타협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마귀는 오직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대적해야 합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영적 전쟁이 혈기로만 될 일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진리의
허리 띠를 띠고, 화평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성령의 칼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영향력이나 사상이나 정신이
아니라 실존하는 영적 실체입니다. 마귀는 인격과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갖추고 계략과 속임수에 능한 전사 중의
전사입니다. “대적하라”(약4:7). 이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약4:7).
성도들은 마귀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며, 마귀를 결코
과장되이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17절입니다. [각
널빤지에 촉(鏃) 두 개를 내되 서로 맞닿도록 나란히 내고
성막의 모든 널빤지에 그와 같이 할지니라.](17). 성막의
널빤지에 촉(tenon) 두개를 내어 서로 맞닿도록 한 것은 연결
고리로 이으라는 말입니다. 촉이란 말이 건축용어라서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이
단어는 손(hands)이란 뜻입니다. 손들이 서로 서로 맞잡고
있듯이 건물은 구조물들이 서로 서로 맞닿아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촉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한 편으로는 하나님, 한
편으로는 사람의 손을 맞잡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지체를
이어주는 촉(tenon)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언제나
주님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 곧
주를 위하여 친히 강하게 하신 사람의 아들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80:17).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의탁하셨습니다. [내 때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의 손에서 나를 건지시고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시31:15).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영을
주님의 손에 의탁하셨습니다(눅23:46). 이것이 촉 두개를
나란히 내어 연결한 영적 의미입니다.
모든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구조물이 되지 않듯이 우리의 몸 역시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역시 지체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지 않고 불화와 분열, 반목과 갈등이 있다면 이는 몸이
견딜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이며, 건물의 연결 부위가 깨어진
것과 같은 위험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만 분열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분열이 있습니다.
성도들 안에도 벽이 있습니다.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놉니다.
인격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과는 같이 어울리고 싶지
않습니다. 영적 경쟁심이나 시기심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더 큰가?의 문제로 다투었듯이,
교회 내에는 누가 더 영적인가?란 문제로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는 이런 모든 분란과 불화의 장벽을
없애는 도구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심으로서 이런 것들을
철폐하시고 우리 모두가 산돌들로써 주님의 집으로 지어
지도록 하셨습니다.
18, 20절입니다. [너는
성막에 쓰기 위해 널빤지를 만들되 남쪽을 향한 남쪽 면에
널빤지 스무 개를 만들고](18). [성막의 두번째 면 곧
북쪽 면을 위해서도 널빤지 스무 개를 만들고](20). 주님은
남쪽과 북쪽으로 20 개씩 널빤지를 대개 하셨습니다. 오늘날
이곳에 널빤지로 촘촘하게 펜스를 친 것을 연상하면 됩니다.
각 코너에는 2개씩 대어서 사각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너는
서쪽을 향한 성막의 면들에 쓰기 위해 널빤지 여섯 개를
만들고 두 면에 있는 성막의 모서리에 쓰기 위해 널빤지 두
개를 만들되](22-23). 이렇게 되면 직사각형이 됩니다.
모서리에 있는 널빤지 두개는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자주
나오는 모퉁이 돌 되신 주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모든
건물에는 모퉁이 돌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초석이기
때문입니다.
19절입니다. [스무 개의
널빤지 밑에 은으로 밑받침 마흔 개를 만들지니 곧 이
널빤지 밑에도 그 두 촉을 위해 두 개의 밑받침을 만들고 저
널빤지 밑에도 그 두 촉을 위해 두 개의 밑받침을
만들지니라.](19). 21절에도 같은 말씀입니다. [은으로
밑받침 마흔 개를 만들지니 곧 이 널빤지 밑에도 두 개의
밑받침을 만들고 저 널빤지 밑에도 두개의 밑받침을
만들지니라.](21). 널빤지를 모래 위에 그냥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밑에 밑받침을 만들게 하셨는데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널빤지가 48개였으므로 각각 두개씩 만들어서
총 96개가 만들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은 받침마다 약
40Kg의 무게가 나가는 받침을 두 개씩 두심으로써 바람이
불어도 성막은 결코 날려 가지 않도록 견고하게
지어졌습니다. 널판마다 두개의 촉이 있어서 연결되었고, 은
받침에는 홈이 파져 있어서 널판의 촉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은이 성막의 기초로 쓰인
것입니다. 은은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세금으로 반세겔씩
바쳤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더 내서도 안 되고, 가난하다고
해서 덜 내서도 안 됩니다. 이는 속전을 위한 속전세였기
때문입니다. 은은 성경에서 언제나 속전, 속죄의 값을
지불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아브라함은 은 400개로 밭을
샀고, 요셉은 은 20개에 팔렸고, 주님은 은 30에 팔렸습니다.
은은 구속의 몸값으로 사용되는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바로 우리의 속죄를 위한 몸값으로
지불되었습니다(벧전1:18-19).
24절입니다. [그것들을
밑에서 서로 연결하고 위에서도 그 머리 위로 /쇠/고리에
서로 연결하여 그 둘을 다 그와 같이 만들고 그것들이 두
모서리가 되게 할지니라. 그것들은 널빤지 여덟 개와 은으로
만든 밑받침 열 여섯 개니 이 널빤지 밑에도 두 개의
밑받침이요, 저 널빤지 밑에도 두 개의 밑받침이니라.](24-25).
널빤지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사진으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위로 견고하게 하여 흔들림이
없게 연결하셨습니다. 널빤지는 아래에도 서로 연결되고,
위에도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은 계속
반복되는 ‘둘’이란 말입니다. 두개의 밑받침, 두 모서리,
둘...둘은 증거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둘이 증거하면 법적
효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아버지와 성령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늘 하나님과 성경의 증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에 대하여
증거하시느니라.](요8:17~18). 주님의 증거는 성막의
널빤지의 아래 위에 연결된 두개의 연결 고리보다 훨씬 더
강력하여 더 이상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
증거를 무효화 시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사역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으니
이는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더라.](요2:25).
사람들이 하는 증거는 사람들끼리도 맞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미리 입을 맞추고 증거를 해도 딴 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거는 너무나 확실해서 모순이
없으며,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습니다. 성막은 비록
이동식이었고, 광야에 세워졌지만 한번도 쓰러지거나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설계자가 주님이셨기 때문이듯이,
우리가 믿는 주님에 대한 증거 역시 그러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비방하고 모독하고 부인하려는
시도를 해 왔지만 아무도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증거들만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까? 주님이
주신 내적 증거와 확신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쓰러지고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증거(말씀)로 인해 생긴
믿음은 세상의 풍파에는 결코 휩쓸려 사라지지 않는
법입니다.
26-28절입니다. [너는
시팀나무로 /가로지르는/ 막대기들을 만들지니 성막의 이쪽
면의 널빤지들에 쓰기 위해 다섯 개요, 성막의 저쪽 면의
널빤지들에 쓰기 위해 다섯 개요, 성막의 면 곧 서쪽을 향한
두 면의 널빤지들에 쓰기 위해 다섯 개라. 널빤지들
한가운데 있는 중간 막대기는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게
하고](26-28).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세운 널빤지들
바깥으로 고리를 만들어 막대기를 위에서 아래로 4개씩 가로
지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개는 널빤지 사이를 관통해서
가로 질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널빤지들은 흔들림 조차
없이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세로로 세워놓은 기둥들에
세로로 철심을 박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널빤지들은
제멋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네게, 속으로 한
개를 가로 질러 꽉 짜인 연합체와 같았습니다.
이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나누며 기도하더니](행2:42).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성도들을 연합시켰던 4가지를 봅니다. 첫째, 사도들의
교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제 안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교제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위로는 주님과 교제해야 하고, 아래로는
형제들과 서로 교제해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을 가르침 받는
곳이기도 하지만 서로 교제하는 모임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부추깁니다.
배운 것이 많은 사람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 잘난 것이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혼자만의 자유, 혼자의 삶을 즐기려
하고, 함께하기를 싫어합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생활을 잘
할 수 없습니다.
교제란 무엇입니까? 서로
나누는 것이며, 서로 돕는 것입니다. 모여서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모여서
해야 하는 교제란 이런 것입니다. [(또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되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廢)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3~25). 모여서 서로 믿음의
고백을 굳게 잡고 서로를 살펴보십시오. 사랑과 선행에
이르도록 격려하십시오. 모이지 말자고 하거나 귀찮아하는
자들을 엄히 책망하고 그런 나태한 마음이 내 안에 있으면
서로 권면하여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더욱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사람마다 자기 바쁜 일만 생각하면 결국 주님의
교회는 와해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가족만 가족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소중한 영적
가족이 있습니다.
● 기도의 교제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기억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너희 모두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항상
기뻐하며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너희가 복음 안에서
교제하였음이라.](빌1:3~5). 간절히 서로 기도해 주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영적 교제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없습니다.
● 물질의 교제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서로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고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이제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초기에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로
나와 교제한 교회가 너희 외에는 없었느니라.](빌4:15).
여기서 바울이 말한 교제는 물질의 교제, 즉 선교 헌금을
받았다는 의미에서의 교제입니다. 저도 많은 교회와
형제들을 알지만 저와 물질의 교제를 나누는 교회는 세 곳
뿐입니다. 바울 사도에 비해서 3배나 많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물질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선물을 받아 줄 것과 또 성도들을 섬기는 교제의 일을
맡아 줄 것을 간절히 구하였음이라.](고후8:4). 이것은
기도 못지않게 성도들에게 중요한 교제입니다. 이 외에도
있습니다. [이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기부하였음이라.](롬15:26). 이런 것이 참된 교제입니다.
● 서로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참된 교제입니다. [너희는 서로 남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개인주의자들, 이기주의자들은 결코 남의 짐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자기 짐을 져야하지만 서로 남의
짐을 져야 합니다. 남의 일이 나의 일처럼 생각하고
걱정하고 기도하는 것이 성도들의 기본 정신이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입니다(빌2:5).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안위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인정(人情)이나 긍휼이 있거든 너희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일치하여
내 기쁨을 성취하라. 무슨 일이든지 다툼이나 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만 돌아보지 말고 남의 일도
돌아보라.](빌2:1~4).
셋째, 성도들은 빵을
나누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은 무엇을 먹었습니다. 주님께서
설교를 마치신 후에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게 하신 일은
구약에서도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귀족들에게
자신의 손을 대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도 하나님을 보며
먹고 마셨더라.](출24:11). 교회가 적으면 먹고 마시기에는
더 없이 좋은 법인데 우리 교회는 너무 멀리 사는 형제들이
많은 관계로 이 점이 잘 되지 않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하나님을 위하여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취하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빵을 먹으니라.](출18:12). 빵을 나누는 일은
신구약은 물론이고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던 일들인데
성도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세로로 세워진 널빤지를 가로
지르는 막대기와 같은 것입니다.
넷째, 기도했습니다. 이미
앞에서 말한 교제에서 이미 다루었는데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했고, 빵을 떼었으며,
기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널빤지 속을
가로 지르는 막대기가 있습니다. 밖에서 보이지 않는
막대기인데, 성도들 안에도 이렇게 보이지 않는 띠가
있습니다.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엡4:3).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덧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니라.](골3:14). 성령의 하나됨,
사랑은 널빤지 속을 관통하는 막대기입니다.
주님이 쏟아 부어 주신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은 외식이요, 위선이요,
가식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속을 관통하여
형제와 형제를 이어줄 때 성령의 하나됨은 외부적인 어떤
환경이나 충격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견고하게 묶여질
것입니다.
30절입니다. [너는
산에서 보여 준 형식에 따라 성막을 세울지니라.](30).
이렇게 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신대로
성막을 세웠습니다. 우리 역시 성경이 보여준 청사진대로
성경적인 지역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가정, 성경적인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이
세워질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굳게 세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