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8:31-42
요절: 출애굽기 28:42
오늘은 대제사장의 겉옷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대제사장의 겉옷은 긴 옷으로 에봇
받침으로 입도록 되어 있으며, 모두 푸른색이었습니다. [너는
에봇에 받쳐입을 겉옷을 만들되 다 청색으로 하고](3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 하늘의 제사장직을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신 대제사장이십니다.
땅에 있는 지성소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지성소로 곧 바로
들어가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청색실로 짠 에봇 받침 긴
옷은 대제사장이 하늘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자임을
상기시켜 줄 뿐 아니라, 참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의
신성을 예표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계속해서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땅에서 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직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적 제사장 직분 역시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목사든 집사든 교사든 선교사든 어떤 직분이든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32절입니다. [한가운데
있는 꼭대기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 주위에 짜서 만든
것으로 돌아가며 가를 둘러 사슬 갑옷의 구멍처럼 찢어지지
않게 하라.](32). 에봇과 같이 앞, 뒷면을 견대로 연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하나의 통옷으로 짜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꼭 대기에 구멍을 내는 것은 머리가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며, 구멍 주위란 말은 목둘레를
말합니다. 대제사장의 겉옷은 단추가 없이 곧 바로 머리를
통해 입는 옷입니다. 우리나라 선비들이 입던 옷처럼 앞이
트인 것을 끈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입는 옷입니다.
그래서 쉽게 찢어지지 않게 구멍 주위에 가를 둘러 짰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입는 옷들을 생각해 보시면 간단합니다. 위로
입는 옷은 모두 둘레를 한 겹 더 대는 것과 같습니다.
33-35절입니다. [또 너는
그 옷의 단 밑으로 돌아가며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석류를
만들고 또 돌아가며 석류 사이에 금방울을 달되 그 겉옷의
단 주위로 돌아가며 금방울 하나 석류 하나, 금방울 하나
석류 하나가 있게 할지니라. 이 옷은 아론이 섬기기 위하여
입을 것이며 그가 [주] 앞의 성소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에
그 소리가 들리게 할지니 그리하여야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33-35).
옷의 단 밑으로 청색, 자주색, 주홍색 석류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석류는 고대 근동에서 장식용 소재로 많이
쓰였는데, 특히 열매는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석류는 일반적으로 풍요로운 말씀을 상징하며, 금방울을
달아서 소리가 나게 한 것은 말씀의 선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석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재 사역의 성취를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의 열매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행1:1-4). 석류 사이에 금방울을 단 것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왕이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방울달린
옷을 입는 습속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의 옷에 방울이
달렸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제사장의 왕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왕정
국가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모든 권한을 갖는
신정국가였습니다.
세대적으로 조명해 보면
이 말씀은 열매와 소리라는 점에서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임한 오순절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강한 바람소리와 같은
성령의 임재와 더불어 수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수 천명이
구원받았습니다. 석류와 방울이 대제사장의 옷에 붙어 있는
것처럼 수많은 혼들이 주님께로 이끌림을 받았고, 열매로
주님께 바쳐졌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소리가 들릴 때
이 땅에 있는 모든 구원받은 혼들이 첫 수확의 열매들로
주님께 드려질 것입니다.
금방울을 단 또 하나의
이유는 대제사장이 제물을 바치고, 성소와 지성소를 들어가
1
어떤 행동을 취할 때마다 방울 소리가 울리게 되므로 삼가
신중하고 경건한 자세로 집례에 임하도록 해 준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그 안에서
들리는 방울 소리를 통해 대제사장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자신들의 제물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사역은 백성들에게 소리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성소나 지성소에 들어가면 우리는
대제사장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안에서 주님 앞에서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소리로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계시며, 모든 선한 일을 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오직 주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증거하는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생생하게 울리고 있습니다.
금방울과 석류를 돌아가며
하나씩 있게 했으므로 총 갯수가 각 몇 개이며 그 크기도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적게는 12개에서 그 이상으로
추정합니다. 일반적으로 중동 지역에서 방울은 마귀를 쫓는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그 소리가 마귀를
제거하거나 부정을 물리쳐서 생명을 보존하는 한
상징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고대 근동 지방의
문지방과 문은 이런 세력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출입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관념이었습니다(삼상5:5).
오늘날 무당들이나 점치는 사람들 중에 방울을 들고 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대세사장의 겉옷에
방울을 달게 한 것은 방울 소리에 어떤 힘이 있거나 효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방울 소리를 통해 대제사장이 어떤
잘못된 행위로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방울 소리는 죽지 않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죽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히브리 전승에 의하면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발목에 밧줄을 매고 들어갔다 하는데, 이것은 대제사장이
제사를 잘못 드림으로 징벌을 받아 성소에서 죽었을 경우
일반 백성들은 그 안에 절대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이 줄로
시체를 끌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나 이러한 규례는 당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이 그만큼 엄숙하고 두려운
일이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일입니다. 제사장이었던
침례인 요한의 아버지가 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를 보면, [평생토록 자신 앞에서 거룩함과 의로
두려움 없이 자신을 섬기게 하고자 하심이라.](눅1:75)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깁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갑작스런
죽음의 공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대해 주시며, 은혜와
긍휼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의 겉옷에 매인
방울소리가 나지 않으면 성소 안에서 대제사장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표시이며 그것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하게
됩니다. 대제사장이 죄를 씻지 않고 지성소에 들어가면 그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안에서
끌어내야 했습니다. 방울 소리는 누구든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 살아가는 자마다 모든 행동에 있어서 삼가 조심해야
함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그런즉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 (고전10:12).
넘어지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제사장들은 앉을 수가
없습니다. 성소, 지성소 어디에도 의자가 없습니다. 섬김의
직무는 오직 서서 행하는 일 뿐입니다. 방울 소리는 우리가
넘어지는 것을 방지해 주며, 늘 깨어 있게 합니다.
36-37 절은 패에 관한
말씀입니다. [너는 또 순금으로 패(牌)를 만들어 도장을
새긴 것같이 그 위에, [주께 거룩], 이라 새기고 그 패를 청색
띠 위에 놓아 관 위에 있게 하되 관의 맨 앞에 있게 할지니라.
](36-37). 순금으로 패를 만들라고 하셨는데, 패는 반짝임, '꽃'이나
'꽃모양의 무늬'를 의미합니다. 장식 패입니다. 이방인들이
왕관이나 머리에 이런 패를 맨 것은 주술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 왕 파라오의 왕관에는
글자대신 뱀의 머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왕들의 패에는 꽃 무늬를 장식으로 사용했습니다. 제사장이
꽂 모양의 패를 쓴 것은 이방 종교의 주술적 효과를 따른
것이 아니라 왕과 같은 위엄과 권위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성도들을 가리켜 '왕같은 제사장'(벧전2:9)이라 했고, 천년
왕국에서는 왕과 제사장의 겸직을 하는 신분을 예표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계 1:6;5:10;사 61:6;66:21). 패를 도장같이
새겨서 그 위에 [주께 거룩]이란 글자를 썼는데, 이는
제사장의 직무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제사장의
의복은 사람들 앞에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백성들의 죄를 도말하는
희생물을 드리는 일인데, 핵심은 [주께 거룩]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일은 천년 왕국 때에 있을 지상의 모습입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도, [주께 거룩], 이라 기록될 것이요,
[주]의 집에 있는 솥들은 제단 앞의 대접들과 같으리니
참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주께 거룩한
것이 될 것이요, 희생물을 드리는 모든 사람이 와서 이 솥들
중에서 취하여 그 가운데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주의 집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슥14:20-21).
주님은
자신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린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 역시 거룩한 희생물을 드리는 제사장들이어야 합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를지니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영적인 제사장인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 역시 [주께 거룩]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거룩한
형제로 불립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3:1).
거룩함이 없는 어떤 것도 주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주께
거룩] 이란 말씀은 주님께는 무엇이나 거룩해야 하며,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거룩케 하시는 분이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께 거룩]이란 아론의 이마에
쓰여진 패는 죄와 허물을 들고 주님께 희생물을 드리는 모든
백성들을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란 간구와 탄원이 들어
있습니다. [주께 거룩]이란 명패의 글은 주님이 희생물을
받으시는 순간 죄인들은 거룩히 구별된다는 주님의 사역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은 어떻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까? 우리 주님의 이마에는 무엇이
쓰여 있었습니까? 주님은 아론과 같은 화려한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지 않으시고, 관을 쓰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께
거룩]이란 명패는 기도로써 생생하게 재현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또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내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오니 이것은 그들도 진리를 통해
거룩히 구별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9). 주님은
자신의 피와 말씀으로 우리를 [주께 거룩]하게 드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모든 사람을 위해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히10:10).
우리의 기도는 주께
거룩해야 합니다. 부정한 입술과 더럽혀진 손을 들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과 영은 주께
거룩해야 합니다(롬12:1).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고전3:17).
복음 전파는 이방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이것은 곧
나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하게 하사 이방인들을 바치는
일이 성령님을 통해 거룩히 구별되어 /주께서/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6).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거룩한 교회여야 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그분
안에서 모든 건물이 서로 꼭 맞게 뼈대를 이루어 {주} 안에서
거룩한 전(殿)으로 자라가고](엡2:21). 물론 지역 교회는
허물과 연약함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적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거룩합니다. 교회의 구성 요소는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우리 거듭난
개개인입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 자기
앞에 영광스런 교회로 세우사 점이나 주름이나 그런 것들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6-27).
우리의 처신은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 가운데서 얼마나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처신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살전2:10). 우리는
모든 것에 거룩해야만 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갖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벧전1:15).
종교적 행사나 특정한 일에서만 거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행실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38절입니다. [또 /너는/
그 패를 아론의 이마에 두어 아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모든 거룩한 예물로 거룩하게 하는바 그
거룩한 물건들에 대한 불법을 담당하게 할지니라. 그 패가
항상 아론의 이마에 있으므로 [주]가 그것들을 받으리라.](38).
여기서 주님은 “거룩하게 하는 물건들에 대한 불법”을
언급하십니다. 죄를 대속할 양이나 염소를 가져오면 그것은
일단 하나님께 희생물이 됩니다. 문제는 희생물 자체에 있는
불법들입니다.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인간의 죄를 전가(轉嫁)받아
여호와께 드려지는 동물이나 곡물의 죄와 허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가져오는 예물은 일단 죄에
오염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취급하는 제사장은 그 불법도
함께 담당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이마에 있는 패는 백성들이
주님께 드리는 모든 거룩한 예물에 대한 불법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가져 온 헌물은 본래 죄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지만 대제사장의 이마에 있는
성결의 패로 인해 이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바치는 것을 비록 죄가 있는 것이지만 대제사장의 패(牌)를
인해 기쁘게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흠없고 완전히 거룩한 것이라 할 수 없지만 기쁘게 주님께
드립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때로 죄악 투성일 수
있습니다. 허물과 더러운 기도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송은 거룩한 찬송이라고 하지만 엉망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영적 희생물은 더러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는 회개를 필요로 하는 회개요,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완전히 거룩하게 드리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것들에 있는 불순물들은
주님께서 담당하시고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칭의(justification)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으나, [주께 거룩]이라고 쓰인 대제사장의 패 때문에
헌물이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칭의, justification)입니다.
39절입니다. [너는 고운
아마로 속옷을 수놓아 만들고 고운 아마로 관을 만들고
바느질로 허리띠를 만들지니라.](39). 이제 속옷과 머리에
쓰는 관, 허리띠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고운 아마로 속옷은
수놓아서 만들었습니다. 머리에 쓰는 관이나 허리 띠 역시
아마로 만들었습니다. 이것만 착용하면 제사장의 옷은
완벽합니다.
40절입니다.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고 그들을 위하여
허리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모자를 만들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40). 아론은 대제사장이고, 여기는 아론의
아들들 즉 제사장을 위한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들은 아론과
같이 화려한 옷(7가지 장식-흉패, 에봇 ,겉옷, 속옷, 관, 띠,
패)을 입지 않고 단순한 복장(3가지 장식-속옷, 띠, 관)만을
취했습니다.
41절입니다. [그것들을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그들을 거룩히 구분하고 거룩히 구별하여
그들로 하여금 제사장 직분으로 나를 섬기게 할 것이며](41).
하나님은 옷을 입히시고,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옷은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을 예표하며, 기름은 성령을
예표합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신 옷을
입어야 하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자격 없는 제사장들이
주님을 섬기는 흉내를 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즉석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사역을 한다고 자임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습니까?(롬13:14).
육신의 정욕을 채우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만 합니다.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4). 주님은 육신에 걸치는 눈에 보이는 옷,
물질적인 옷을 비싸고 좋은 명품을 입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백성들과는 완전히 다른 복장을 입었지만 이들이 입어야 할
옷 역시 의의 옷이었습니다.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기뻐 외칠지어다.](시132:9). 욥과 같은
부자가 입었던 옷 역시 비단 옷, 보석을 수놓은 옷이 아니라
의의 옷이었습니다. [내가 의로 옷을 입으매 그 의가 나를
옷처럼 감쌌나니 나의 재판은 의복과도 같고 왕관과도
같았느니라.](욥29:14).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의로 옷입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새
사람의 옷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4).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몸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바뀌지 않더라도 영은 완전히 바뀌고,
생각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가끔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부딪힙니다. 건전한 생각의 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누더기를 걸치고 있습니다. 새사람을 입은 사람이란 [성경관,
교회관, 가족관, 인생관, 교육관, 물질관, 세상에 대한 관점]
등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란 뜻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곧 추석이 옵니다. 추석은
기본적으로 달맞이를 하는 우상 숭배이며, 조상 신들의 음덕(陰德)을
기리는 마귀의 축제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 추석 명절을 지켜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내가 추석을 조상들이 아닌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로 바꾸어서 지키면 좋은 것이다! 손을
들어 보십시오. 아니다. 그날은 전혀 지킬 필요가 없다. 손을
들어 보십시오.
요즘 T.V에 마술이
유행합니다. 좋은 마법사가 있고, 나쁜 마법사가 있다. VS
아니다. 그렇다면 HWG은 마귀, 나쁜 마귀가 있습니까? 조상
제사는 성경이 금하지만 그 날에 제사대신 형식을 바꾸어서
추도식을 하는 것은 상관없다. 사람들은 좋고 나쁘고를
따집니다. 나쁘지 않다면 좋은 것이다. 좋은 것은 해도 된다.
좋다, 나쁘다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사람입니다. 자기가
기준입니다. 성경적 원칙이 서 있습니까?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삼가라.](살전5:22). 여러분이 영적
제사장이라면 먼서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옛 사람, 옛
행실,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 가치관 들을 모두
깨부수고 성경적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영적 제사장이 입어야 할
옷은 그리스도요, 새 사람의 옷입니다. 영적 제사장이
입어야 할 옷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골3:12). 이것들은 모두 마음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몸의 옷이 아니라 마음의
옷을 갈아 입으라는 것입니다. 몸을 씻기 전에 마음을
그리스도의 피와 말씀의 물로 씻고 새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눈에는 화려한 복장이 아니지만 속 사람이 이런
옷을 입으면 그는 영적 제사장의 자격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니라.](벧전5:5).
겸손의 옷은 언제나 입고 있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옷이라
할 수 있습니다.
42절입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아마로 반바지를 만들되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에까지 이르게 하여 그들의 벌거벗음을 덮게
할지니라.](42). 하나님의 성전 위에 복무할 때 벌거벗음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전신을 모두 덮게
하셨습니다. 벌거벗음의 수치를 가리도록 하신 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분 부분을 모두
가림으로써 주님이 주신 것들만 보여 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실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덮어지고,
가려진 부분만이 주님께 보여집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보시지 그리스도 없이 우리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에겐 그리스도만이 보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수치를
남김없이 가려 주십니다. 제사장의 복장 규례는 이렇습니다.
[거룩한 아마 속옷을 입고 그 살 위에 아마 반바지를
입으며 아마 허리띠를 띠며 아마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의복이라. 그러므로 그가 물로 몸을 씻고 그것들을
입을 것이며](레16:4).
43절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나아와 성소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만 할지니
그리하여야 그들이 불법을 담당한 채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그와 그의 뒤를 이을 그의 씨에게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 (43). 옷은 장식용으로 보관하거나 걸어
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옷을 입고 시장에 가거나
잠을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옷의 용도는 성막에서, 제단
가까이, 성소에서 섬길 때 입어야하는 옷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여러분은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이
주신 옷을 멋지게 입고 폼잡고 사람들 앞에 거닌다면 우스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제사장인 저와 여러분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육신의 안일을 즐긴다면 예복입고
놀이터에서 노는 것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옷을 입지 않고
주님을 섬기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옷을 입은 채
섬길 때 불법을 담당한 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왕같은 제사장이라 불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아무도 육신으로 자기 힘으로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습니다.
가인과 같이 자신이 흘린
땀과 수고의 열매를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가인도 그의
제물도 받지 않으셨듯이 성도가 자신의 노력, 재능, 힘,
지혜로 주님을 섬기면 주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먼저
십자가에서 자신을 처리하고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것만 받으십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로
옷입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영적 제사장이란 사실을
주님께 감사드리고 주님의 법도대로 주님을 섬기는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지성소에는 겉옷을 입고 들어가지 않았다는 설이 있음(레16). 성소에 들어갈 때는 확실히 *겉옷을 입지 않았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복장 규례가 없지만 본문 문맥에 따라 겉옷을 입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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