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고후 7:10). *godly sorrow. sorrow of the world.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룹니다.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근심)과 세상의 슬픔(근심)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어떠함(what we are)에 대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근심(슬픔)은 자신이 한 행위(what we have done)에 대해 후회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예를 들어 봅시다.
아브라함은 자신에 대해 “저는 티끌과 재에 불과한 자”(창18:23-27)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주님 앞에서 “나는 입술에 할례 받지 못한 자요, 하나님이 쓰시기에 부적합한 자”(출6:9-12)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영광의 주님을 본 후에 “입술이 부정한 자요, 망케 되었다”(사6:5)고 말합니다.
욥은 주님을 뵌 후에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속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뵌 후에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눅5:4-8)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일컬어 “나는 비참한 사람이요, 파선한 사람이요, 자신의 육신 안에 어떤 선한 것도 거하지 않는다”(롬7:24-25)라고 말합니다. 후에 그는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1:15)고 말합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어떠함을 깨닫고 자신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신의 실체를 슬퍼하고 절망하고 근심하고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입니다.
이와는 달리 ‘세상의 슬픔’은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서 후회하고 걱정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파라오는 모세에게 “이번에는 내가 죄를 지었노라. 주는 의로우시고 나와 내 백성은 사악하도다.”(출9:27)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슬픔입니다. 파라오는 회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발람은 자기를 막아선 주의 천사를 향해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민22:34). 발람 역시 회개에 이르지 못했고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 역시 자신의 죄를 슬퍼했지만 회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신약에서 가장 좋은 예는 베드로와 가룟 유다입니다.
둘 다 주님의 사도입니다. 둘 다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둘 다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둘 다 자신의 죄를 슬퍼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슬퍼했을 뿐 아니라 주님을 배반한 자기 자신을 슬퍼함으로 회개에 이르렀습니다. 가룟 유다 역시 주님을 배반한 것에 대해 [내가 무죄한 피를 배반하여 넘기고 죄를 지었노라](마27:4)고 말하지만 회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귀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회개한다는 사실을 봅니다. 마귀를 예표하는 파라오, 발람 등이 모두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후회하고 슬퍼합니다. 마귀의 자녀들의 삶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후회로 점철되고 세상의 슬픔으로 넘칩니다. 이것은 회개에 이르지 못하며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근심)을 하십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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