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요?
답변. 사람들의 불신과 무지 때문입니다. 아래 설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우셨던 장면이 나옵니다(눅19:41, 요11:35). 이외에도 예수님은 우셨습니다(히 5:7).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이런 질문에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각기 그럴 듯한 추측, 상상, 자기 경험에 비춘 감정이입 등을 통해 주님이 우셨던 장면을 떠올립니다.
성경 본문을 앞 뒤로 읽어 보면 주님이 우셨던 이유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잠들었다고 하셨고 잠자는 나사로를 깨우러 오셨습니다.
[이것들을 말씀하시고 그 뒤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자는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하시니](요 11:11)
생명이신 분에게 죽음이란 없습니다.
이런 예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다.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냐?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 하시니](막 5:39).
사람들은 소녀의 죽음에 슬피 울었지만 주님은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잠든 자를 깨우듯 죽은 자를 깨우십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앞에 두고 울고 있는 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죽음으로 고통 받는 가족들, 친지들, 주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께서 덩달아 우신 것이 아닙니다.
자, 그런데 죽은 자를 두고 왜 슬피 우느냐고 하셨던 주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요 11:35).
주님께서는 마르다와 거기있던 유대인들에게 동일하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냐?"고 물으시지 않고 주님께서도 우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나사로가 죽은 줄 아셨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심을 말씀하셨기에 전혀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잠에서 깨우러 오셨기에 나사로의 죽음 자체를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주님께서 사람들이 죽음으로 인해 받는 슬픔과 고통에 동화된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우신 것입니까?
32절을 보면 예수님을 본 마리아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때에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에 와서 그분을 보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하더라.] (요 11:32).
예수님이 여기 안 계셔서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는 마리아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믿는 신자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고 사람을 보냈을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리라, 하시더라.] (요 11:4)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게 된 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을 것이란 사실을 들었을 때 믿었을까요? 그들은 주님이 죽기 전에 오셔셔 고쳐 준다는 의미로 알아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지 않으셨기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하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마리아는 나사로의 죽음이 예수님의 책임이요, 병들었을 때 연락을 했지만 빨리 오지 않으셨던 예수님 때문이란 원망,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울었고 그와 함께 한 유대인들도 울었습니다. 병자들을 살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은 왜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믿는 자(마리아)와 믿지 않는 자(유대인들)의 견해가 동일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죽지 않도록 고칠 수는 있지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고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이요 부활이란 사실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죽음은 어떻게 할 수 없고 죽은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죽은 자는 단지 잠자는 자에게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나사로가 죽은 뒤에 뒤늦게 오신 예수님께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울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원망하며 우는 것을 보신 주님은 영으로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녀가 우는 것과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고] (요11:33). -예수님이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신 이유.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기록하기에 따로 해석이 필요치 않습니다. 생명이신 분을 앞에 두고 죽은 자로 인해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함께 우는 것을 보시고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요, 이 일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란 말은 믿지 않는 그들에게 아무런 위로와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생명이요 부활이신 분이 잠든 자를 깨우러 현장에 오셨지만 그들에게는 그분은 없는 분처럼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분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그분이 누구인지 믿지 않고(불신) 알지 못했기(무지) 때문입니다.
주님의 괴로움, 신음, 눈물은 사람들의 불신에 기인합니다.
37,38절을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이르되, 눈먼 자의 눈을 열어 준 이 사람이 이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느냐?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속으로 신음하시며 무덤에 가셨는데 그 무덤은 동굴이며 그 위에 돌이 놓였더라.] (요 11:37, 38). 예수님이 "다시...신음"하신 이유.
38절에서 주님은 "다시...신음하시며"라고 하셨습니다. "다시"란 말은 33절에서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신 이유와 동일한 이유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불신'의 말을 할 때 속으로 신음하셨습니다.
그렇다면 35절에서 예수님이 왜 우셨는지는 너무나 간명하게 답이 나옵니다.
죽은 자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산자들이 불쌍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고통당하는 것에 감정이 동화되어 우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냐?"고 되물으시고 책망하십니다. 생명이요 부활이신 주님을 앞에 두고 마리아를 비롯해 유대인들은 죽음에 슬퍼하고 죽은 자로 인해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병자는 죽지 않도록 고칠 수 있지만-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이 정도까지만 믿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적과 기적과 권능과 표적을 행하는 분이지만 죽은 자는 어찌할 수 없다는 불신으로 슬피 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라도 사람의 병은 해결할 수 있지만 죽음은 해결할 수 없다는 불신과 생각이야 말로 주님이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는 마리아조차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시고 우신 이유는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 때문입니다(눅19:41).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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