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없는 것-
말씀: 요 5:38,42 요절: 요 5:38,42
오늘은 지난 시간에 다 다루지 못한 말씀을 보충해서 좀 더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부족한 것이 있음을 보시고, 그것을 지적할 때 우리는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주님은 명절에 유대인들과 안식일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에게 부족한 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너희 안에 말씀이 없다. 너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 신앙생활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모독에 가깝습니다. 그것 빼면 유대인들은 시체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자랑거리요, 삶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 사랑한다는 것 하나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냉철하게 그들이 갖고 있지 못한 중요한 것 두 가지를 일러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실 때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고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에 능하며, 깨끗하게 살아온 건전한 청년 하나를 만나셨습니다. 그 청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부족한 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막10:21). 청년에게는 모든 것이 족했지만 한 가지 재물에 대한 욕심, 자기 것을 버리지 못하는 욕심이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발견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살펴 보고 고침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사람마다 약점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다 좋은데 인내심이 없고, 어떤 이는 담력이 없고, 어떤 이는 지혜가 없고, 어떤 이는 믿음이 없습니다. 없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어떤 이는 고집이 너무 세고, 어떤 이는 탐욕이 너무 강하고, 어떤 이는 정욕이 너무 강하고, 어떤 이는 자존심이 너무 셉니다. 세고, 크고, 강한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믿음이 없으면서도 자존심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없지만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과 사랑을 받으려는 욕심은 아주 컸습니다. 이는 우리 개개인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요한 계시록에 7개의 교회가 나옵니다. 주님은 각 교회에 칭찬할 점은 칭찬하셨지만 그들의 부족한 점, 잘못된 점 역시 지적해 주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조금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음이라.](계2:4)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그러나 네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거기에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네게 있기 때문이로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고 또 음행하게 하였느니라.](계2:14)라고 하십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으니 이는 네가 이세벨이라는 그 여자를 용납하기 때문이라. 그녀가 자기를 가리켜 여대언자라 하며 내 종들을 가르치고 꾀어 음행하게 하고 또 우상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는도다.](계2:20). 주님은 라오디케아 교회를 책망하시며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단련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나지 아니하게 하며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 (계3:18). 결론은 이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3:19). -앞으로 일곱 교회 시리즈를 할 때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책망하고 징계하시며, 말씀을 보내시지 아무 관계없는 자들을 징계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5장에서 유대인들의 문제점을 가장 핵심적으로 요약해 주셨는데 첫째는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는다는 점이요(요5:38),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요5:38). 둘째는 그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속에 없다는 것입니다(요5:42). -[다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너희 속에 없음을 내가 아노라.](요5:42). 이는 비단 당대의 유대인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이며, 이 시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습니까?
●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은 성경에 대한 지식 외에 부수적인 영적 유익이 매우 많습니다. 그 중 단연 압권은 기도가 풍성해지고, 기도 응답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는 기도 생활이 달라집니다.
●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영적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성도 상호 간에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말씀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 이야기로 화제의 꽃을 피우고 관심을 갖지만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할 때 시와 찬송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은혜로 주께 노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영적 교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왜 오늘날 교회가 마치 연애당이 되고 사교 클럽이 되고, 세상 회합 장소들처럼 되었습니까?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꾸준히) 거하면/continue in/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8:31). 말씀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 말씀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은 내 안에 빛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까닭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사8:20).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12:35). 그러나 우리 안에 말씀이 없으면 우리 등불은 타오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의 말씀이 등불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이는 그 명령이 등불이요, 그 법이 빛이요, 훈계하는 책망들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니라.](잠6:23). 말씀이 내 안에 거할 때 내 안에 뜨거운 열기가 솟아 오르고, 환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말씀은 뜨겁습니다. 주님이 예레미야에게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산산조각 부수는 쇠망치 같지 아니하냐?](렘23:29)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없으면 우리는 냉랭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여러분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까?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그들 안에 없을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씨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8:37).
● 말씀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은 마귀와 죄와 세상과 육신에 패배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음이요,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며 너희가 저 사악한 자를 이겼음이라.](요일2:14).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엡6:17).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 사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하는데, 내 안에 말씀이 거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원수를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은 검술 훈련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찌르지 못하는 것이 없고, 가르지 못하는 것이 없는 양날 선 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권능이 있어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骨髓)를 찔러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니](히4:12).
●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씨앗입니다. 거듭남은 말씀을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은 씨앗입니다. 씨앗이 없는 곳에서 자라나고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성경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은 더 많은 씨앗을 뿌려서가 아닙니다. 다른 종류의 씨앗도 아닙니다.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씨앗을 여러분의 마음 속에 뿌리되 좋은 밭을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로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이 젖으로 자라가도록 하라.](벧전2:2). 자라지 않으면 비정상입니다. 병입니다. 나이에 맞게 자라야 하고, 나이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아이와 같으며 생각하는 것이 아이와 같았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유치한 일들을 버렸나니](고전13:11). 말씀이 거하지 않으면 계속 어린 아이로 머물게 됩니다. 아이들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나’란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같이 하였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고전3:1). 왜 그렇습니까?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 갓난 아이들은 젖을 먹어야 합니다. 누가 먹여 주어야 합니다. 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깊은 진리들에는 접근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을 ‘고리타분하다, 교리적이다’, ‘네가 목사해라.’, ‘신학교 가라’고 해 버립니다. [이는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원리인 것들을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나니 이는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한 자로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5:12~14). 이들이 왜 자라지 못했습니까? 말씀이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旺盛)하여 /increased/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제사장들의 큰 무리도 이 믿음에 순종하니라.](행6:7).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나고/grow/ 흥왕하더라.](행12:24).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말씀은 증가하고,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자라가고/mightily grew/ 세력을 얻으니라.](행19:20). 말씀을 내 안에 새겨 두고, 숨겨 두고, 쌓아 두어야 합니다. [원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도를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 속에 쌓아 두라.](욥22:22). 말씀으로만 우리는 강건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 말씀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은 거룩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가정과 각 신자들의 영적 생활이 엉망이 되었습니까? 그 안에 말씀이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배가 끝나자마자, 성경공부가 끝나기가 무섭게 세상 가치관으로 사고의 운영 체제, 모드를 바꾸는 성도들을 접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그것이 거룩히 구별되기 때문이라.](딤전4:5).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말씀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없으면 나는 더럽혀집니다. 성경이 죄로부터 너희를 지켜 주지 않으면 죄가 여러분을 성경으로부터 지켜 줄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엡5:26). 바른 말씀이 내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더러움을 씻을 수 있습니다.
● 말씀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과 믿음의 관계는 나무와 같습니다. 말씀은 뿌리이고 믿음은 열매입니다. 말씀없이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10:17). 미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D.L 무디 목사님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믿음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날 로마서 10:17절을 읽고 믿음을 크게 하는 법을 알고, 그 이후로 계속 성경을 읽었습니다. 믿음은 자연스럽게 커졌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간증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믿음은 커집니다. 성경은 믿음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롬10:8, 딤전4:6).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그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8). 믿음의 말씀이란 믿음을 생성해 주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더 크고 강한 믿음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우리 속에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만 합니다.
말씀이 거하지 않으면 진리를 알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경을 읽으라. 찾아보라, 공부하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는 일은 단순히 성경 지식을 늘리고, 책장을 넘기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지적하신 두 번째 문제는 “너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그리스도인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준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이는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슬쩍 넘어가기 때문이라. 너희가 마땅히 이것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저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눅11:42).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많은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 행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 무슨 일을 해도 주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사람들의 언어와 천사들의 언어로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징과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대언하는 은사가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며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를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무엇인가 되기 위해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속에 있지 않다면 그 일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내게 아무 유익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의 율법적 행위는 아무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어떻게 온전해 집니까?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완전하게 되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2:5). 말씀을 지켜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완전해 집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말씀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관계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마음 속에 없었던 사람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 속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문제는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가 그렇지 않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며, 위선입니다. 사랑에 앞서 진리가 있습니다. 사랑에 앞서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3-24).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이 말은 동서 고금의 진리입니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는 내 말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무시하지 않습니다. 왜곡하지 않습니다. 내 말에 의문을 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 마음 속에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words of God)으로 표현되며, 드러납니다. 말씀(Word)이신 하나님과 말씀(words)이신 성경은 동일한 권능, 동일한 신성,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 유일한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자신의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성육신 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보내신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께서 이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그분의 모든 성도가 그분의 손 안에 있으며 그들이 주의 발 밑에 앉아 각 사람이 주의 말씀들을 받는도다.](신33:3).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은 주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자신의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들이 흐르는도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자신의 법규들과 판단들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시147:18~19). 눈과 흰서리와 얼음을 녹이시기 위해 주님은 말씀을 보내십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추위를 녹이십니다. 여러분의 냉랭한 가슴을 뜨겁게 하십니다. 자신의 말씀을 보내사 냉랭한 교회를 뜨겁게 하십니다. 말씀을 보내사 냉랭한 기도를 열정적이고 뜨겁게 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식어 버린 형제 사랑을 피차 뜨겁게 하십니다. 뜨거운 구령의 열정을 주십니다. 죄에 대한 둔감하고 식어 버린 마음을 뜨겁게 하사 회개하도록 하십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얼어버린 심장, 추위에 떠는 여러분을 주님은 말씀을 보내사 녹이시고, 성령의 바람을 불게 하사 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십니다. [이에 그들이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자신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며 멸망들에서 그들을 건지셨도다.] (시107:19~20). 여러분이 고난 중에 부르짖을 때 그 기도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들으십니다. 구조대에서 외면할지라도, 정부에서 외면할지라도, 민간 단체에서 거절할지라도 주님은 들으십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어 고치시며, 건지십니다. 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나의 눈물을 보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을 속히 보내십니다. [자신의 명령을 땅 위에 보내시니 그분의 말씀이 빨리 달리는도다.](시147:15). 말씀을 보내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말씀을 통해서 임합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십니다.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매 이 말씀이 이스라엘 위에 임하였으므로/lighted upon](사9:8). 이것은 심판에 관한 구절입니다. “말씀이 이스라엘 위에 임하였으므로”란 구절에서 임했다는 것은 light upon인데 벼락이 치듯이 들이닥쳤다는 뜻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즉시 그대로 그들 위에 임한 것ㅇㄹ 말합니다. 주님은 죄인들에게도 말씀을 보내십니다. 이곳 속담에 있는 것처럼 ‘빛을 거부하면 그것은 번개가 되어 돌아온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번개를 보내신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거부하면 주님은 심판의 말씀을 보내십니다. 은혜의 말씀을 거부하면 재앙과 저주의 말씀을 보내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면 거짓말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주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오 나의 힘이 되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시18:1)고 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사랑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말씀 사랑이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그것을 사랑하나이다.](시119:140). 그냥 사랑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종일토록 묵상했습니다. [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그 법이 종일토록 나의 묵상이 되나이다.](시119:97). 그의 말씀 사랑을 보십시오. [내가 허탄한 생각들은 미워하오나 주의 법은 사랑하나이다.](시119:113). 다윗은 말씀을 사랑하기에 말씀이 아닌 것들은 미워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면 불법을 미워하게 됩니다. 악을 싫어하고 증오하게 됩니다. 불법과 악, 죄에 대한 미움이 없이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성경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거짓말은 미워하고 몹시 싫어하나 주의 법은 사랑하나이다.](시119:163). “싫어할 것은 싫어하고, 사랑할 것은 사랑하라” 이것이 성경적 진리입니다. 주를 사랑하면 악을 미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라. 그분께서 자신의 성도들의 혼을 보존하시며 사악한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지시느니라.](시97:10). 주의 법을 사랑하면 평안이 임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을 실족하게 할 것이 없으리로다.](시119:165).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NOTHING(ZERO)입니다.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요일4:9).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들인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음이니](롬5:5). 우리는 스스로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통해, 성령님에 의해 부어진 사랑을 통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첫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환란, 기근, 칼, 위협, 곤고, 박해, 매질 ....’ 등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당하는 어려움은 어려움이 아니라 선을 이룰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그 사람을 아십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고전8:3). 안다는 표현은 그냥 이름이나 그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지 안다는 정도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깊이 안다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홍 길동씨 아세요?”하면 “몇 번 만나기는 했어도 안다고 하기에는 좀...” 이런 적 있을 겁니다. “알기는 알지만 잘 아는 사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서로 깊은 관계성 속에서 아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님은 그 사람을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시고 욥을 아셨듯이, 다윗을 아셨듯이 저와 여러분을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직접 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 우리가 이 명령을 그분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 형제 사랑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랑은 확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줄 아나니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니](요일5:2-3).
넷째, 주의 오심을 기다리게 됩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5).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그는 위선자요, 거짓말쟁이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부족한 점, 그들 속에 없었던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런 것이 넘치기를 빕니다.
'권별 강해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병이어 (0) | 2009.01.29 |
---|---|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0) | 2009.01.29 |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2) (0) | 2009.01.27 |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1) (0) | 2009.01.27 |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 (0) | 2009.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