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말씀: 요 6:1-14 요절: 요 6:14
오늘은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명의 무리를 먹이신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한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 복음서에 모두 기술되어 있는 사건이며, 이 기적이 이 기적이 유대인 무리들에게 끼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민중들까지도 메시야가 세상에 오셔서 위대한 선지자가 되실 것을 기대했으며,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율법을 알지 못한다고 경멸하였지만, 그들은 바리새인들 이상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실 메시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통해 그들은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그 대언자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통해 그들은 “이분은 진실로 세상에 오실 그 대언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선지자’란 신명기 18:15과 18,19절에 모세가 언급한 바로 그 대언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 한가운데서 곧 네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켜 세우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니라.](신18:15). 예수님은 이미 5장에서 “모세의 글을 믿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시며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1절입니다. [이 일들 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1). 이 일들이란 5장의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치유해 줌으로써 유대인들로부터 안식일을 어겼다는 비난을 받고, 말씀을 강론한 사건을 말합니다. 주님은 안식일 논쟁을 통해 자신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등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임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배척하자 주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떠나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는 무리들과 결코 오래 있지 않으십니다. 그들 안에 말씀이 머물 곳이 없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을 아신 후에는 그곳을 떠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들을 자기 발 밑에서 짓밟고 다시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염려함이라.](마7:6)란 말씀대로 그들에게 전해준 말씀이 짓밟히고 돌이켜 자신을 찢을 것임을 아셨습니다.
2절입니다. [큰 무리가 그분을 따르니 이는 그들이 그분께서 병든 자들에게 행하신 기적들 곧 그분의 기적들을 보았음이더라.](2). 주님을 따른 큰 무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던 큰 무리가 아니라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기적을 본 큰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것을 보고, 그런 기적들을 더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면 믿을 것 같지만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은 병 고침, 방언, 예언, 통변 등 다양한 이적들이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믿지 않으면 그들 안에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군중들일 뿐 제자들이 아닌 것처럼, 오늘날 교회는 많으나 주님이 누구신지 알고 제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부름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받은 자는 적기 때문이니라.](마22:14)는 주님의 말씀대로 제자로 선택받은 사람은 너무나 적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이 필요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만 합니다. 이것은 제자 입문 단계에서 한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날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둘째,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형제나 자매나 참으로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하나님은 자아에 속한 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아는 부인되고, 죽음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자아는 반드시 처리되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승리에도 자기 만족에 빠지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 자기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고난과 실패와 패배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며, 자기를 십자가에 처리하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자아를 존중하고, 자아를 실현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죄로 인한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자기가 기대하는 선과 의에 도달하지 못한 자아를 탄식하는 눈물입니다. 거의 모든 일이 자아를 위해서 존재하고, 자아에서부터 나오는데 주님은 이것을 온전히 십자가로 부수어 버리시는 것을 원하십니다. 야곱이 자식들을 죽음에 넘겨주듯이 그렇게 죽음에 넘겨 줄 때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셋째, 말씀에 꾸준히 거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8:31). 주님의 말씀에 무신경하면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내 말에 꾸준히 거하면”이라고 제자의 자격 요건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원리가 되고 표준이 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넷째, 열매를 맺어야 제자가 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주님은 이미 제자들이요, 사도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으로 해도 되지만 열매를 맺는데는 지속적인 의존 관계가 필수적입니다. 일은 조직이나 단체나 개인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지만 열매는 “독자적”이란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열매는 생명의 연합 관계요,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한 관계가 아니면 맺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요건은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님 안에 나무와 가지의 관계처럼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4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리 예수님을 따른다 해도 그들은 군중이요, 무리일 뿐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는 군중입니까? 제자들입니까?
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사 자기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깝더라.](3,4). 요한복음에 나오는 세 번째 유월절입니다. 2장, 5장에 이어 세 번째 유월절입니다. 앞으로 남은 한번의 유월절은 주님이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시는 유월절입니다.
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이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5).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따라왔고 병고침을 받기 위해 따른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니라.](마14:14). 주님은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때는 해가 질 저녁 무렵이었고, 사람들이 살지 않는 외딴 곳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들이 목자없는 양처럼 보였고, 제자들은 이들을 먹일 수 있는 빵이 없다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 [저녁이 되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외딴 곳이요, 이제 때가 지났사오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로 들어가 양식을 사게 하소서, 하거늘](마14:15) 하며 건의했고,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오사 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으므로 불쌍히 여기사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더라.] (막6:34). 광야에 모인 사람의 수는 남자만 오천명 가량이었으니 대규모 군중 집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이들을 빨리 주변 마을로 떠나보내서 자신들이 알아서 뭔가를 사먹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들이 떠날 필요가 없나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매](마14:16). 그들은 떠날 필요가 없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들을 군중으로 볼 것이 아니라 양으로 보는 영적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이 목자요, 군중들이 양무리임을 볼 때 그들은 목자의 역할과 책임감이 생깁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생각납니다. 군중들을 단지 군중들로 볼 때 제자들은 그들을 빨리 해산하고 각자 알아서 갈 길을 가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떠날 필요가 없나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신 것은 너희가 그들을 먹여야할 목자들이란 사실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먹이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가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 필요를 아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200만의 이스라엘을 먹이신 사실을 이들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세오경에 나오는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신 일과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일이 역사 속에 신화처럼, 전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다시 행할 수 있는 일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내가 이 민족과 이 세계를 먹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을 능히 먹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하시면 우리가 줘야 할 먹을 것은 주님이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께 받은 것을 나누어 주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영국의 브리스톨에 고원을 운영하던 위대한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 목사님은 평생에 5만 번 기도해서 5만 번 응답을 받았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독일 사람으로 영국 런던에 가서 수천 명의 선교사를 훈련하여 선교지로 보내고, 3000명의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며 교육시켰습니다. 그는 돈이 없었고, 사업체도 없었지만 영국의 고아들을 먹이고 돌보아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도실에는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은 예비하신다”라고 크게 써 붙여 놓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고아원의 총무가 목사님께 다음 날 아침 식사가 없다며 당황해 하고 불안해했습니다. 조지 뮬러 목사님은 성경책을 들고 기도실로 들어가 ‘여호와이레’라는 글자 앞에 엎드려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에 조지 뮬러 목사님은 식탁을 준비하고 수천 명의 아이들을 식탁에 앉게 했습니다. 그러나 식탁 위에는 물 한 컵 외에는 먹을 음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당신의 자녀 수천 명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양식에 축복하시고 먹고 건강을 가지고 오늘 우리가 행할 일을 다 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모두 “아멘”하고 눈을 떴는데 식탁 위로 막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여느 때보다 더 좋은 음식이 차려져 아이들은 실컷 먹을 수 있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시내에 있는 일류호텔에서 그날 아침에 큰 컨퍼런스가 있었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겨 그만 취소되었습니다. 호텔에서는 수천 명분의 음식을 준비했다가 컨퍼런스가 취소되자 남은 음식을 어떻게 할까 상의하다가 조지 뮬러 목사님의 고아원에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호텔에서 컨퍼런스를 위해 준비한 일류식탁이 고아들에게 공급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떼들을 해산하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다시 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이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5). 주님은 제자들 중에 가장 계산력이 밝고, 합리적인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이들을 먹이겠느냐?”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시험 문제입니다. 때는 저녁이고 외딴 곳이요, 주변 마을로 달려가도 남자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상당한 문제가 있을 것임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빵을 사서 먹이려면 차라리 돈을 맡은 가룟 유다에게 물으셔야 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와중에서 빌립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전환해 주시려는 주님의 배려가 묻어나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그를 시험하고자 하심이라.](6). 주님은 어떻게 하실 것을 다 아십니다. 주님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은 아시며 물으시는데 우리는 이 때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다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은 때로 제자들을 시험하시듯이 우리들에게 시험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기회는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믿음에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보기도 해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입증하라.](고후13:5a).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살전5:21).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듯이 우리를 시험하실 때 그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약1:2).
7절입니다. [빌립이 그분께 대답하되, 각 사람이 조금씩 받을지라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이 부족하리이다, 하니](7). 빌립은 즉시 계산을 해 내었는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데나리온은 3.8g의 로마 은전인데, 로마의 카이사르의 초상과 명문이 새겨져 있는 은전입니다. 이곳 미국 돈으로 약 20,000 불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의 계산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행한 계산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합리적 사고방식이라며 하는 대부분의 계획이 빌립과 같이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배제한 채 계획을 세웁니다. 빌립은 열심히 계산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계산이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고, 부족할 것이란 전망을 내 놓았습니다. 주님은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누가 부족함이 없는가?
● 주님을 목자로 삼은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여러분에게 무엇이 부족하십니까? 물이 부족합니까? 풀이 부족합니까? 쉴만한 초장이 없습니까? 주님이 목자시라면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40년 동안 인도하시는 동안 그들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 주님을 두려워하는 성도는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 [주]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이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로다. 젊은 사자들은 부족하여 굶주릴지라도 [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9-10).
● 주님이 함께 하시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는 [주] 네 하나님이 네 손의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었기 때문이요, 또 네가 이 큰 광야를 걸어서 지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니라. [주] 네 하나님이 이 사십 년 동안 너와 함께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에](신2:7). 주님은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I am with you alway!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끝까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 인내와 기도는 모든 부족을 메꾸어 줍니다.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4-5).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19). 성도들은 무엇이든지 부족할 때 주님께 구하면 됩니다.
● 가난한 자에게 선을 베풀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는 부족하지 아니하려니와 자기 눈을 가리는 자는 많은 저주를 받으리라.](잠28:2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주는 것은 주께 빌려 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께 빌려 드리는 것이니 그분께서 그가 베푼 것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주님은 갚아 주시는 분이시며, 넘치도록 갚아 주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빌립은 이와 같은 것을 전혀 계산에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빌립의 입에서 200데나리온이라도 부족하다고 한 것은 틀림없는 계산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빌립의 계산에 근거해서 주님께 헌금 중에 200 데나리온을 빵을 사는데 결제해도 되는지 묻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거늘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다가 그들에게 주어 먹게 하리이까? 하매](막6:37). 그들의 잔고에 얼마나 남아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님이 먹이라고 하신다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다가 그들에게 주면 되느냐? 고 결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차라리 주님께, 우리가 가진 돈을 다 풀지요, 저희들이 사 오겠습니다! 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돈을 군중들의 한끼 저녁 식사로 풀기에는 너무나 아까 왔습니다. 주님께서 이 돈을 풀라고 하시는가?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있어도 부족하고, 없어도 부족하고 부족한 것투성이입니다. 계산하지 말로 주님 앞으로 들고 나오십시오. 내가 가진 것은 몸 밖에 없으면, 그 몸을 드리십시오. 시간이 있으면 시간을 드리십시오. 주님께서 사용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일과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다릅니다. 우리는 돈으로 고급 침대를 살 수 있지만 단잠을 살 수는 없습니다. 먹을 것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을 살 수는 없습니다. 쾌락을 살 수 있지만 기쁨을 살 수 없습니다. 책을 살 수 있지만 지혜를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을 살 수 있지만 믿음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습니다. 인격을 살 수도 없습니다. 성령을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돈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 때의 교훈으로 제자들은 세계 선교를 돈이 아닌 믿음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6). 우리는 은과 금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사용함으로 일으킵니다.
8-9절입니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이며 시몬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그분께 아뢰되, 여기 한 소년이 있어 보리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나이까?](8-9). 제자들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먼저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사람이 가진 대로 /주께서/ 받으실 것이요, 그가 갖지 아니한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주님은 우리에게 있는 적은 것으로 일하십니다. 주님은 산을 옮기는데 겨자씨 한 알만한 적은 믿음이라도 충분하십니다. 주님은 과부의 한 렙돈이라도 그녀가 가진 것 전부를 넣었으므로 오늘의 best giver요, 가장 많이 넣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없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안드레는 자신들이 가진 것을 찾았고, 주님께 드렸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가 혼자 가지고 있으면 나 혼자에게만 유익이 있지만 내가 가진 것을 주님께 내어 놓으면 주님은 백배, 천배, 만 배로 늘려 주십니다.
안드레는 성경 전체에 네 번 밖에 그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네 번 다 매우 결정적인 장면에서 나오는 믿음의 사도였습니다. 처음에는 요한과 더불어 주님을 쫓았고(마4:19), 주님이 부르실 때 지체하지 않고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안드레는 지체하지 않는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안드레는 형제 베드로를 주님께로 인도한 사람입니다(요1:42). 안드레는 연결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에 탁월했습니다. 안드레의 이름이 또 한번 나오는 예가 오늘 본문입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소년을 주님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는 이번에도 위대한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아무도 자신들 속에 있는 것을 찾아 보지 않을 때 안드레는 그것을 찾아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안드레는 십자가를 목전에 둔 주님께 헬라인들을 인도했습니다(요12:20-22). 안드레는 무슨 기적을 행하거나 무엇을 가르치거나 그런 능력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주님께로 인도하고, 주님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면한 문제이든 사람이든 그는 주님 앞으로 들고 나오는 그런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들이 안드레와 같은 신앙을 소유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소년이 보리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 다. 어른이 아니라 소년입니다. 소년이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없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거나 고아란 뜻입니다. 이 소년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일당을 받아 돌아오는 저녁 길에 예수님과 많은 군중들이 모인 것을 보고 합류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리를 향해 가르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빵 문제가 나오자 안드레를 찾아 갔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께 헌금(물)로 드린 것입니다. 그는 풍족한 가운데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당 전부를 드린 것이요, 자신의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그에게 빵은 곧 생명입니다. 아무도 먹을 것이 없고, 자신만 적은 양이지만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을 보고 드릴 의사를 피력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안드레는 주님께 자신의 것을 드리겠다는 소년을 데려와서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나이까?”라고 한 것입니다. 소년은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의 가족이 먹어야 할 것을 모두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많이 봅니다. 인천 말씀 침례 교회의 박참하 목사님은 교회 차를 사고, 몇 가지 설비를 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습니다. 돈 문제로 고민을 하기 시작하자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간 넷째 아들 모세는 자기가 모은 용돈 몇 백 원 혹은 몇 천원을 주겠다고 가져옵니다. 그러한 잔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지만, 마음을 모으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동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주님은 소년이 들고 온 헌물을 받으셨습니다.
1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을 앉게 하라, 하시매 이제 그곳에 잔디가 많으므로 사람들이 앉으니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10).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이 사람들을 앉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돌려 보내라” 아니면 “돈을 가져가서 사오라”고 말씀할 줄 알았는데, 전혀 뜻 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풍성하심 가운데 양들을 먹이십니다. 이미 광야에서 200만이 넘는 무리들을 40년간 먹이신 경험이 있는 주님께서 5천명 정도의 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19). 주님은 예산에 따라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에 따라 공급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기준은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입니다.
이 사람들을 앉게 하라! 이것은 제자들이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그들이 떼를 지어 백 명씩 오십 명씩 앉으매] (막6:39~40). 사람들 역시 이런 상황에서 빨리 집으로 가야할 판이지만 주님께서 명하신대로 순종해서 떼를 지어 앉아야 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무리지어 앉히시고, 질서 정연하게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사람들을 앉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조용히 신뢰하고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앉아서 주님의 역사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앉아서 기다리지 못합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줄로 압니다. 앉기도 전에 걸으려고 하고, 서려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앉아야 합니다. [또 함께 일으켜 세우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의 처소들에 앉히셨으니](엡2:6). 주님은 우리를 앉혀 놓았습니다. 앉아 있으면 평안합니다. 앉아 있는 사람은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앉아서는 놀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드러누워 자기도 합니다.
형제들은 어머니나 자매가 부엌에 서서 요리를 할 때 앉아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꾸 서서 돌아다닙니다. 그 때마다 가만히 좀 앉아 있으라고 소리를 칩니다. 시편 68:19을 보십시오. [날마다 우리에게 은택(恩澤)을 더하시는 주/짐을 져 주시는 who daily loadeth us with benefits,-KJV. 곧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셀라.](시68:19). 주님이 우리의 짐을 져 주시기에 우리는 앉아 있으라고 하십니다. 자꾸 일어나서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경쟁 사회에서 1초라도 더 빨리 움직이고, 좀 더 일해야 하고, 좀 더 서 있어야 하는 줄로 압니다. 도무지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앉게 하십니다.
① 주님께 맡긴 사람은 평안합니다. 앉아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구하겠고 내 사정을 하나님께 맡기리라.](욥5:8).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알려지게 하시는 일은 여러분의 할 일이고 일을 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어떤 사람이 은행에 돈을 맡겨 놓고 매일 은행에 가서 자기 돈이 제대로 있는지 보여 달라고 하면 아마 은행에서 돈을 찾아가라고 할 것입니다.
②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시고](시37:5). 사람들은 자신이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을 다 보여 주시면 걸음을 옮기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루 한 걸음씩만 인도하십니다. 길을 맡겼으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등산 안내원의 뒤를 따르듯이, 여행 가이드를 구했으면 그의 지시대로 움직이듯이 그냥 가는 것입니다. 확실한 목자요, 가이드라면 따라 가는 길은 평안합니다.
③ 우리는 짐을 주께 맡겨야 합니다. [네 짐을 [주]께 던져서 맡기라. 그분께서 항상 너를 붙드시고 의로운 자의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주님이 짐을 져 주십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맡긴 짐을 여전히 붙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비행기를 타면 무거운 짐을 맡겨 버립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가서 찾으면 됩니다. 차를 타면 트렁크에 넣어 버립니다. 그것을 지고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짐 걱정을 전혀 하지 않고, 평안하게 앉아서 경치를 구경하거나 쉬며 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생의 짐을 모두 주께 던져 맡길 때 주님은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④ 우리는 일들을 주께 맡겨야 합니다.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리라.](잠16:3). 때로 우리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은 전문가를 찾아서 맡깁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모든 일에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주님은 어려워서 맡기는 일을 반려하는 일이 업습니다. 변호사들은 귀찮은 사건을 맡지 않으려고 합니다. 돈이 안되는 일은 누구라도 맡기 싫어합니다. 힘드는 일도 맡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맡기면 다 맡아 주십니다.
⑤ 염려를 주께 맡기십시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벧전5:7). “염려 놓으라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해 줄테니까”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더 불안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라면 정말 염려를 놓아도 됩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앉게 하신 것은 위와 같이 깊은 안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들을 그치신 것같이 이미 자기 일들을 그쳤기 때문이라.](히4:10). 여러분들은 더 이상 자기 일이 없습니다. 모두 주님의 일입니다. 이 교회가 나의 교회입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맡기시고 앉아 있으시기 바랍니다.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식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요, 조용히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이것을 원치 아니하고](사30:15).
1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니 제자들이 자리를 잡은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그와 같이 물고기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시더라.](11). 제자들은 ‘부족하리이다’, ‘얼마나 되겠나이까?’라고 부정적인 불신의 소리만 내뱉었지만 주님은 “원하는대로 주시더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조금씩 주어도 부족하다고 말했지만 주님은 원하는 대로 주고도 남았습니다. 주님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넘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일하는 방법을 보십시오. 먼저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들은 적다고 불평하고 원망할 일이지만 주님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먼저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의 입술은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희생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주님은 직접 줄 수 있고, 직접 가져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손에서 받아서 나누어 줍니다. 이것이 사역자들이 할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먼저 주님을 믿은 사람들로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나누어 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누어 주지 않고 감추어 두고 있으면 [있는 줄로 여기는 그것까지도 빼앗길 것임이라](눅8:18b).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시더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얼마나 먹을 수 있는가?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입니다. 주님은 일인당 빵 몇 개, 물고기 몇 마리라고 기준을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풍성하시며,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빈그릇이 차고, 없을 때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그녀가 물러가서 자기 아들들과 함께 문을 닫은 뒤에 아들들은 그릇을 그녀에게로 가져오고 그녀는 부었더니 그릇들이 다 차므로 그녀가 자기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그가 이르되, 더 이상 그릇이 없나이다, 하매 기름이 그쳤더라](왕사4:5-6). 주님은 결코 인색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은혜도, 긍휼도 풍성하신 분이시며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거지들을 보면 ‘한 푼만 줍쇼’라고 구걸합니다. 그들은 결코 많이 구하지 않습니다. 한 푼을 구하는 사람은 결코 한 푼 이상 얻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마치 거지처럼 주님께 한 푼, 두 푼만 구하는 것은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크게 구하고, 많이 구하십시오. 우리가 가난하고 부족하다면 그것은 주님의 인색함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적게 구하고 잘못 구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그들이 배부른 뒤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어 잃어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12). 주님은 풍성하시며 넘치시는 분이시지만 결코 낭비하시거나 쓸모없이 버리시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진리입니다. 낭비가 너무나 심하고, 버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13절입니다. [그들이 다 거두니 보리빵 다섯 개로 충분히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13). 나누어 주는 사람은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 풍성함의 근원은 나누어 주는데 있습니다. [흩을지라도 더욱 불어나는 일이 있으며 지나치게 아낄지라도 가난에 이르는 일이 있느니라. 후하게 주는 혼(魂)은 풍부하게 될 것이요, 물을 대는 자는 자기도 물을 받게 되리라.](잠11:24-25). 제자들은 열심히 써빙을 하고 자신들은 쉴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지만 그들 손에는 각자 한 바구니씩 가득히 들려졌습니다. 주님은 양들을 섬긴 제자들에게 그만큼 풍족하게 보상하셨던 것입니다. 남들 다 나눠주고 내 손에는 빵 한 조각 남지 않을 것 같았지만 결과는 각자에게 한 바구니씩의 빵이 안겨졌고, 이것이 바로 사역에 대한 대가인 것입니다. [거룩한 것들에 관하여 섬기는 자들이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며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제단과 더불어 /희생물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전9:13~14).
14절입니다. [이에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기적을 보고 이르되, 이분은 진실로 세상에 오실 그 대언자시라, 하더라.](14).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명기 18장에 모세가 대언한 바로 그 선지자, 메시야란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그 선지자”로 알아 보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의 구원자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주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 보았기에 엎드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 (눅5:8)라고 고백했습니다. 반면 이들은 주님을 잡아다가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인가 배운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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