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 두려워 말라-
말씀: 요 6:15-21 요절: 요 6:20
요한복음은 주님이 행하신 이적들에 반드시 영적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세상에 오신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 맨 나중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 없는 내용들이 추가되고, 다른 복음서에 있는 사건들 중에 중요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사건들마다 영적 해석(의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모든 복음서의 주석서의 역할을 합니다. 다른 복음서들이 사건을 기록했다면 요한복음은 사건의 의미를 기록합니다. 5,000명을 먹인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사람들의 빵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생명의 빵이란 점입니다. 사람들은 먹고 배 부른 것만 생각했지만 주님은 생명의 빵을 얻어먹고 영생을 얻으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이 행하신 이적들의 참 의미를 배울 수 있고,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다 같이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15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 사람들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이 사건을 통해 이 분이야 말로 모세가 이야기한 바로 그 대언자(신18:15,18-19)라고 확신했습니다. 백성들은 이 분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해 주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우리를 해방해 주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백성들이 원하는 지도자 상은 바로 빵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입니다. 전에 U.N 사무 총장을 했던 어떤 사람은 “빵 문제만 해결해 준다면 그는 적그리스도라도 좋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을 왕으로 삼고 싶어합니다. 세계는 현재 기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녁에 잠들 때 배고픔을 느끼며 잠드는 사람이 세계 인구의 75%라고 합니다. 잘 산다는 미국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저녁을 못 먹고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일천 오백만명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뜻을 모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사무엘 시대에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환호했던 조상들과 같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는데 열렬히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의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는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싸한 사업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것은 마귀의 제안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아니면 그것 역시 마귀의 제안입니다.
주님에게 맨 처음 왕국을 제의한 자는 마귀였습니다. [마귀가 다시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보여 주며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매](마4:8-9). 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기서 물러가라. 이는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음이니라, 하시더라.] (마4:10).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고, 왕국을 받으셔야지 사탄에게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주님이 고난의 길을 가지 않고 곧 바로 자기에게 경배함으로 쉽게 왕국의 영광을 가지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왕국을 받는 것보다 어떻게 받느냐? 누구에게 받느냐?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차가지입니다. 성공, 축복, 승리 다 중요합니다. 행복한 가정, 건강한 삶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를 희생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순수함을 버리고 타협의 산물이라면 차라리 재앙입니다. 의가 없는 평화보다는 의로 인한 분쟁이 낫고, 진리가 없는 행복보다는 진리로 인해 겪는 고통이 낫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분명 왕국을 건설하려 오셨고, 왕이 되실 분이지만 마귀가 주는 왕국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부정직한 방법을 통한 부와 성공이라면 거부하고 차라리 정직한 가난을 택해야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의 군중들은 일치단결하여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역시 거절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왕위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의의 왕국을 건설하셔야 합니다. 민중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빵의 왕국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빵으로 왕이 되려 하신다면 주님은 돌을 빵으로 만드시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세 번째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타시니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네 왕이 임하시되 나귀 새끼 위에 앉아 /임하시느니라/, 함과 같더라.] (요12:13~15). 백성들은 열렬히 환호했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접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왕위에 오르는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왕이셨지만 왕좌에 오르시기 전에 십자가에 오르셔야 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법정에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들의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이것은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요18:33~34).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들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왕이시지만 왕좌에 오르시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내 왕국이 여기서 나지 아니하느니라.](요18:36). 주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주셔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왕국이 물질적이요, 정치적인 왕국이 아니란 의미가 아닙니다. 이 구절을 많은 신학자들은 “주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다”라고 해석하고 맙니다. 주님의 왕국은 정치적이요, 물질적이며, 이 지상 위에, 눈에 보이게 세워지는 메시야 왕국이 있고, 우리 마음 속에 의와 희락과 평강과 같은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이 있고, 저 하늘에 하늘 왕국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고, 이 땅에 하늘의 왕국은 대환란이 끝난 후에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 보좌를 둔 천년 왕국이 세워집니다. 백성들이 열렬히 원했지만 주님은 이 백성들이 곧 바로 배신할 무리들임을 아셨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이 되실 주님을 위해 일어선 것이 아니라 죽여 버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소리를 지르되, 없애 버리소서, 없애 버리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하매 수제사장들이 대답하되, 카이사르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요19:15). 주님은 왕 위에 오르실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현재 이 시간까지 왕국의 보좌에 오르시지 못하신 채 계십니다.
다시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 주님은 백성들을 피해 혼자 산을 떠나가셨습니다. 주님은 때를 따라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야만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 때에 모친 마리아의 요청에 대해 [...여자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하시매](요2: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명절에 자신을 드러내라고 강력하게 촉구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이르되, 여기를 떠나 유대로 들어가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하소서. 이는 스스로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은밀히 일을 행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니이다. 이 일들을 행하시려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요7:3,4). 사람들은 기회가 있을때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7:6)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완전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요7:8). 주님은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씀하셨고 때에 맞게 일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기회가 주어진 그 때가 바로 적절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앞날을 다 볼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보이는 기회가 바로 내가 잡아야 할 기회인 줄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은 아니다. 그냥 흘려보내라”하면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올 줄 아십니까? 하며 기도하거나 금식하며 떼를 쓰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막상 기회를 잡아 놓고 보니 더 좋은 기회가 옴으로써 후회하는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백성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 보일 기회가 매우 많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친이나 형제들은 마음이 급했던지라 주님을 push했지만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time table에 따라서 일하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에 주님은 내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도시로 들어가 이런 사람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네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마26:18). 주님은 자신의 때를 정확히 아셨고 자기 때가 왔을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때를 따라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여러 차례 계시 받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15:4에서 주의 말씀을 통해 그는 자신과 사라 사이에 태어날 자식에 대해 계시를 받았습니다. [보라,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은 네 상속자가 아니요, 오직 네 몸 속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창15:4).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의 요청을 받고 여종 하갈을 취하여 주님의 뜻을 스스로 성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성취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그는 자신이 나이가 들자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움 받은 줄을 알았습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의 나이가 정확히 사십이 되매 그의 마음에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들더니 그 중에 한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을 그가 보고 그를 옹호하여 학대당한 자의 원수를 갚아 이집트 사람을 쳐 죽였으니 이는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자 하심을 깨달을 줄로 그가 생각하였음이라.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더라.](행7:23~25). 모세는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명을 자기 형제들도 깨달을 줄로 알았지만 형제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때가 아닌 자기 때에 이스라엘 형제를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죽임으로써 구원자로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어떤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몇 가지 일을 하도록 하시는데 그 평범한 일을 무시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1. 성경을 매일 일정 시간 일정량을 읽는다.
2. 정기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의 집회에 참석한다.
3.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데 걸림돌이 되는 생활 습관, 죄악들을 처리한다.
4.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유지한다.
5.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한다.
이 일들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무슨 계시를 받고, 뜻을 확인하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평범하고 일반적인 뜻을 신실하게 수행해 나가는데 열중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찾는데 주력합니다. 이는 자신들 안에 있는 교만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 나를 향한 특별한 뜻이 있으리라 확신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향한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실하게 생활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역 교회에 출석해서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향해 목회로 부르셨던지, 뭔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역으로 부르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영적 시기심이나 특권 의식, 영적 명예욕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 고칠 것이 있으면 고치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없는 것들은 고칠 수 없는 것들은 살펴 두었다고 기술자를 부르고, 여러분의 목회자가 말씀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작은 일을 찾아내어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 전혀 의도하지 않는 곳에 불러 주시기를 기다리며 사역 준비한다는 놈팽이들이 백수로 거들먹거리며 놀고 있습니다. 10 중 아홉명은 1명의 full time 사역자를 위해 지원하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나는 1명이 아닌 아홉명에 속한다고 해서 그 일이 가치 없거나 필요 없는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을 특별한 사역으로 부르셨다고 확신한다면 기다리십시오. 스스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뜻만큼이나 하나님의 때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때가 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때에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야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때를 아셨고, 그 때에 맞게 주님의 뜻을 수행하셨습니다.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드디어 사람들이 나를 메시야로 알아보고,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는구나! 하시면서 덜컥 왕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몸을 피하시고, 숨으셨습니다. 우리도 이 마지막 시대에 때를 깨닫고 주님이 오실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그에 맞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때를 깨닫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바를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의 온 형제들이 그들의 명령을 따랐더라.](대상12:32). 시간을 사서 얻어야 하는 때입니다.
주님의 시간이 아닌 자신들의 뜻대로 일을 처리하다가 망한 경우가 성경에는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 올라간 40일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주님을 만나러 올라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기까지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라. 보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하나니 누구든지 할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출24:14). 그러나 그들은 그 시각을 견딜 수가 없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집트로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함으로 재앙을 초래하는 예는 수두룩 합니다. 기도를 한 후에도 기다리지 못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로 아무렇게나 결정해 버립니다. 나중에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이 정해준 시각에 맞추어서 일해야 합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해 준 때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사무엘이 정해 준 때를 따라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을 떠나 흩어지므로 사울이 이르되,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이리로 내게로 가져오라, 하여 그가 번제 헌물을 드렸더니 그가 번제 헌물 드리기를 끝마치매 사무엘이 오므로 사울이 나아가 그를 맞으며 문안하니라.] (삼상13:8~10). 그는 일주일을 기다리긴 했는데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기 마음대로 번제 헌물을 드렸습니다. 마침 번제 헌물을 드린 후에 사무엘이 왔습니다. 사무엘은 그 시각에 오고 있었습니다. 설령 사무엘이 오지 않아도 그는 번제 헌물을 드릴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번제 헌물을 드리고 보자는 쪽으로 일을 벌렸습니다. 번제 헌물을 드리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정을 살펴 주시겠지!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주님의 기록된 말씀과 달리 행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목적이 선해도, 동기가 선해도, 과정이 틀리면 틀린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동기, 일의 과정, 일의 목적을 다 보십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될 일을 기다리지 못해 사울은 망해 버렸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안식하고 끈기 있게 그분을 기다리라. 자기 길에서 형통한 자나 사악한 꾀를 이루는 자로 인하여 초조해 하지 말지어다.](시37:7). 우리는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일은 한 시간이라도 몇 년 처럼 길게 느껴집니다. 급한 일일수록 더욱 다급해지고, 길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정한 정확한 시간까지 기도하게 하시고, 마음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찌꺼기들을 제거하도록 하신 후에 때가 되어야 주십니다. [내 혼아, 너는 오직 하나님만 기다리라. 이는 내가 기대하는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로다.](시62:5). 일을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면 게으르다, 가만히 노는 사람이란 욕을 먹지만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다가 얻지 못하면 ‘바보’ 소리를 듣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뜻을 아는 것 못지 않게 주님의 때를 아는 데 집중해야만 합니다. 하박국 대언자는 주님의 답변을 들었습니다. [이는 이 환상이 정한 때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그 끝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말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리라. 비록 이것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이것이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그 까닭은 이것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라.](합2:3).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인내로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는 장면을 목격하기 위해 모였던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또 사도들과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명령하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너희가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하셨으니 곧 이르시되,](행1:4).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할 일이 있겠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바로 일입니다.
저는 자식을 키우면서 한 가지 배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기다림입니다. 저는 돌이를 매일 기다립니다. 말을 할 때 까지 기다리고, 내가 기대하는 정도에 도달할 때까지 마냥 기다립니다. 마음 속에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찬송도 큰 소리로 부르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기를 기다립니다. 지금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도 마땅하지 않거니와 괜히 가르친다고 앉혀 놓아야 머리만 쥐어 박을 것 같아서 그냥 둡니다. 잘 못하는게 못한다고 두들겨 맞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는 마음입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얼마나 급한지 아이가 아프거나 넘어지면 금방 달려가서 일으키고, 안고 달랩니다. 그냥 혼자 일어나도록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가르치다가 느리면 속이 치며 답답해 하고 한 대 때려 줍니다. 답을 스스로 찾도록 몇 일이라도 기다려야 하는데, 몇 분을 못 참습니다. 헬렌 켈레는 물이라는 단어를 배우는데 6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박사 학위 2개에 4개 국어를 구사했습니다. 기다림이 열매를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를 기다리고, 주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것은 반드시 선한 열매를 거둘 줄 믿습니다. [사람이 [주]의 구원을 소망하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3:26).
16-17절입니다. [이제 날이 저물매 그분의 제자들이 바다로 내려가서 배에 올라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제 날이 어두웠고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16-17). 제자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러 왔다가 휴가 첫날을 완전히 망쳐 버렸습니다. 이튿날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날이 저물자 다시 바다로 내려가서 배를 타야 했습니다. 주님은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제자들만 보내셨습니까? 첫째, 주님은 이 때에 산에 올라 가셔서 혼자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부분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자기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뒤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가 저물매 거기 홀로 계시더라.](마14:22-23). 주님은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가장 크고 위대한 사역,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사건을 통해 주님은 조금도 흥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잠잠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가장 기도가 필요한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큰일을 했다고 생각될 때 곧바로 따로 기도하십시오. 부흥회가 있거나 행사가 있으면 곧 바로 기도하십시오. 그 때가 시험의 때입니다. 이 시간을 잘못 보내면 받은 은혜는 모두 재앙으로 변합니다. 목사님들은 월요일에 잠잠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 날은 쉬면서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성도들은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일 예배를 본 후에 1시간 채 지나지 않아서 짜증을 내고, 성질을 내고, 집에서는 푹 늘어서 T.V를 보거나 비디오를 보거나 노닥거리는 경우가 있는데 은혜를 다 잃어 버립니다. 마귀는 그때 마음 속에 있는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기도하는 동안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습니다. 시간은 어두운 밤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주님은 현재 하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 위에 있습니다. 바다가 잔잔한 것도 아닙니다. 날은 어두워 캄캄하기만 합니다.
18절입니다. [큰 바람이 불어 바다가 출렁이더라.](18). 주님이 함께 계셔도 무서울 판국에 주님이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방금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은 일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바다에서 죽을 판국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라고 해서 오른 배이건만 평탄하지를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가라고 한 길을 갈 때 성도들이 형통하고 평안하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배를 타고 가면 어둡고, 바람이 불 태니 내일 아침에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큰 바람이 불 것도, 바다가 출렁일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런 환경 속에 밀어 넣으십니다. 주님은 평탄할 길만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어두운 밤에 풍랑이 이는 곳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분명히 주님의 뜻인데, 왜 안 될까?” 괴로워하거나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런 환란이 없으면 결코 믿음은 연단되지 않으며, 체험을 할 수 없습니다.
19절입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이십오 내지 삼십 스타디온쯤 가다가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19). 삼십 스타디온이라면 3.3마일 정도의 거리입니다. 역풍을 맞아 가면서 이만큼 갔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너비가 7마일, 길이가 15마일 정도이니까 이들이 밤새 노를 저어 건넌 것은 너비로라면 반 정도, 길이라면 1/5정도 온 것입니다. 마태복음 14:24에 따르면 이들이 너비로 건넜음을 알 수 있는데 바다 한 가운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때까지 기도하시다가 그제서야 제자들을 향해 바다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때 시각이 밤 사경쯤이라고 말합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그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四更)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시거늘](막6:48). 바람은 역풍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저었습니다. 주님은 배에 오르시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주님이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분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영(靈)인 줄로 생각하여 소리 지르니](막6:49). 그들은 주님을 영인줄로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영으로 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람과 파도만으로도 힘들어 고생하는데, 이들은 이제 “영”을 보았으니 더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리적으로 적용하자면 이 부분은 대환란을 통과하는 유대인들 및 환란 성도들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라면 괴롭게 노를 젓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물을 던져도 고기가 잡히지 않았던 베드로, 이집트로 팔려가는 요셉, 광야로 도망가는 모세, 복음을 전하지 못한 채 2년간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 등은 이런 과정이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말해 줍니다. 저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노젓는 괴로움이 저마다 한 번씩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괴로이 노 젓는 과정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오래 참는 것을 배우고, 주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부르짖는 법을 배웁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이 이 과정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매](20).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려 365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성도들이 삶에서 닥치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인해 늘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갑자기 병이라도 들면 어떻게 하나? 사업이 망하면 어떻게 하나?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하나? 별의 별 걱정으로 근심을 하고, 두려움에 떱니다.
주님은 “두려워 하지 말라고”고 하십니다.
- 아브라함이 사병을 동원해서 롯을 데려간 다섯 부족의 동맹을 무찔렀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긴 후에 두려움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과 관계가 틀어지면 앞으로 살아 갈 날이 걱정이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防牌)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報償)이니라, 하시니](창15:1).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의 방패이시오, 보상이시기입니다. 주님이 막으시는데 그것을 이기고 꿰뚫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이삭은 아비멜렉이 자주 시비를 걸어서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미국에 이민와서 살고 있는데 본토 주민들이 자꾸 시비를 걸고, 방해를 한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삭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밤에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내 종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내가 너와 함께하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씨를 번성하게 할 것임이라, 하시매] (창26:24). 저와 여러분은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주님이 함께 하시고, 복을 주셨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현현을 본 후 자신들의 죄악을 함께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은 이런 경건한 두려움에 떨게 마련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임하신 것은 너희를 시험하사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20:20). 주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심으로 범죄하지 않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 모두 가나안에 거주민들을 두려워할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너희는 [주]를 대적하여 반역하지 말며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우리의 빵이기 때문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주]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14:9). 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것이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선한 목자시오, 함께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네가 나가서 네 원수들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를 보고 또 너보다 많은 백성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이집트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주] 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니라.](신20:1). 말과 병거를 보고, 더 많은 백성을 볼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편입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膽大)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이는 [주] 네 하나님 그분께서 너와 함께 가실 것임이니라. 그분께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니라.](신31:6). 주님이 동행하심을 믿으십시오. 내 주위를 둘러보아도 주님이 보이지 않으면 성경 속에 기록된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십니다(히13:5).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주] 너희 하나님 그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임이라, 하였노라.](신3:22). 모든 전쟁은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때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 우리와 함께 한 자들이 더 많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우리와 함께한 자들이 그들과 함께한 자들보다 많기 때문이니라, 하고](왕하6:16). 엘리사는 영적 군대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영적 군대를 동원해서 돌보십니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 주님이 도우시고 붙드시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기 때문이니라. /너는/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이는 나 [주] 네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너 벌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주] 네 구속자(救贖者),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말하노라.](사41:13-14). 주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은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 영적으로 반역한 유다 백성들 앞에 주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에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니 /너는/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가 말하노라, 하시고](렘1:8).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주님이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 기도 응답으로 인해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주를 부른 그 날에 주께서 가까이 오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애3:57). 주께 기도하면 주님은 가까이 오십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네가 마음을 정하여 깨닫고자 하며 또 네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을 징계하기로 한 첫날부터 /주께서/ 네 말들을 들으셨으므로 내가 네 말들로 인하여 왔음이니라.](단10:12). 다니엘이 기도한 첫날부터 이미 주님은 말씀을 들으셨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 우리는 참새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마10:31).하늘의 참새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새보다 더 귀중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 생명의 왕관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앞으로 당할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너희 중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왕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우리는 죽는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예배해 둔 의의 왕관, 생명의 왕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21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그분을 반가이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뭍에 이르렀더라.](21).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하고 배에 오르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반가이 영접할 때 배에 오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쳐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반가이 영접할 때 들어와서 식사를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영접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들이 배로 영접했을 때 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순간적으로 뭍에 이르렀습니다. 노를 저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는 물위를 걸으시는 주님보다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것은 휴거의 예표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우리가 가려는 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바람이 멎었다든가 파도가 잔잔해졌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시기까지 결코 바람과 파도는 가라앉지 않습니다.
22절입니다. [그 다음 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들이 탄 배 외에는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그분의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니라.](22). 사람들은 제자들이 탄 배를 발견했습니다. 어제 분명히 제자들만 배에 타고 주님은 타지 않으신 것을 보았는데, 다른 배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한 밤 중에 걸어서 배에 타시고 같이 온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어디에 계실까 찾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떨어져 바다 건너편에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찾아서 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던지라 기어코 주님을 찾겠다고 이리 저리 찾아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2-71절까지는 주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위대한 설교를 하시는 장면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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