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지 않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말씀: 요 6:27-29 요절: 요 6:27-29
저주받은 인류의 꿈은 ‘내게 빵을 달라’입니다. 빵 문제의 해결 없이는 자유도 꿈도 이상도 없습니다. 안정적인 빵의 확보 없이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계는 모두 기아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에덴에서 하나님이 금지하신 먹지 말아야 할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 늘 입에 들어가는 음식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입으로 범죄한 인간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땅으로 돌아가기까지는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말씀하셨기에 평생토록 먹고 살기 위해 일만 하다 죽는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 먹을 수만 있다면 에덴에서 받은 저주에서 풀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그것이 가장 큰 행운이요,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전혀 차원이 다른 노동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육신의 빵을 위한 일이 아니라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회복해 주시며 우리에게 일다운 일, 참다운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고, 그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말 성경에 수고라고 번역된 labour는 “노동하다”라는 뜻입니다. 지구상에서 육신의 빵을 위해 노동하는 것에서 해방된 사람은 거듭난 성도들뿐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일꾼(노동자)라 불립니다. 미국은 내일 노동절이라고 해서 모두 휴일을 지킵니다. 그러나 진정한 노동자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빵을 먹기 위해 하는 노동으로는 결코 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미국과 가장 빈곤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북한 중에 어느 나라에 굶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습니까? 미 농무부가 최근 발표한 인구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 1995년 말 현재 미국 내 410만 가구 1100만 명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끼니를 굶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작년에 특별히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농무부는 덧붙였습니다. 북한 인구를 2,400만 명으로 하고 그 가운데 40%인 960만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유엔 산하 국제기구들 의 분석이고 보면, 단순히 드러난 수치만 갖고 비교할 경우 미국에 굶는 사람이 더 많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미국 내 결식자 가운데 약 200만 명이 하루 한 끼도 식사를 하지 못한 채 넘기는 날이 종종 있다고 대답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들 중 일부를 무작위로 뽑아 건강진단을 해본 결과 그 대답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합니다.현재 미국 인구의 1% 가까운 수가 하루 한 끼도 못 먹는 날이 있으며 이에 따라 200만 명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홈리스」라고 불리는 거지 60여만명은 아예 이번 조사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이들까지 합한다면 미국에서 실제로 굶고 지내는 사람의 수는 더 많아집니다.1100만 명이 배를 곯고 있는 미국땅 다른 한편에서는 한해에 무려 4,360만t 즉 8t트럭으로 545만대 분량 식량이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통계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쓰레기를 치우는데 들어가는 돈이 연간 10억 달러에 달한다는 미 행정부 통계도 있습니다. 버려지는 음식은 고사하고 음식 쓰레기를 치우는데 들어가는 돈만 갖고도 미국 내 굶주리는 사람들의 급식문제 가 깨끗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규민=동아일보 뉴욕 특파원>. 빈곤, 기아의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수고해야 할 양식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세상에는 땅에서 나는 양식이 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이 있습니다. 썩어지는 양식이 있고, 영원토록 항상 있는 양식이 있습니다. 육신을 위한 양식이 있고, 영을 위한 양식이 있습니다. 입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와 버리면 그만인 양식이 있고,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도록 자라나게 하는 양식이 있습니다. 밀이나 보리, 쌀로 만드는 빵이 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이 있습니다. 모두 각각의 용도와 목적이 따로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배부르게 빵과 고기를 먹은 무리들이 주님을 찾아 왕으로 삼으려고 왔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육신이 먹는 빵이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빵을 소개해 주시고, 그 빵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주님은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밀과 보리와 같이 땅에서 나지 않는 전혀 다른 종류의 빵을 주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27절입니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고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항상 있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라.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리니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인(印)치셨음이니라.](27). 주님은 두 가지 양식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과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항상 있는 양식이 그것입니다. 육신의 양식보다 더 중요한 양식은 영적 양식입니다. 굶어본 사람들은 굶주림의 고통을 압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종교도 없고, 신앙도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육신이 사람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배가 신(神)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주체는 육이 아니라 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두 끼나 세끼의 식사를 하며, 수시로 간식을 먹습니다. 육신이 필요로 하면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합니다. 아프면 약을 먹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영을 먹여야 합니다. 영은 육신과 마찬가지로 영적 양식을 필요로 하며, 휴식을 필요로 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자기는 영이 없는 것처럼 영을 먹이지도 않고, 돌보지도 않고,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다. 주님은 믿는 성도들 안에 영을 주셨고,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인(印)치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몸에 아무 표시도 하지 않으셨지만 영에는 자신의 이름을 새기시고,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해 두셨습니다.
인(印)을 친다는 말은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는 법적 증명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유에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합니다. 중요한 물건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왕들이 명령을 내린 후에 반지로 인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에3:12). 주님 역시 인을 치십니다. [그분께서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그들을 위한 교훈에 인(印)을 치시니](욥33:16). 성경의 모든 교훈은 주님이 친히 영감으로 주시고,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작품임을 주님이 직접 인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의 저작설이나 무오성에 대해 공격하고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도 인을 치십니다. 누구에게 인을 치시는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인치십니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고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항상 있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라.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리니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수 그리스도)를 인(印)치셨음이니라.](요6:27).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印)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분 위에 선명하게 찍힌 하나님의 인(印)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물에만 표시하시고, 인을 치셔서 확증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들을 인치십니다. [그분의 증거를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께서 진실하심을 인(印)쳐서 확증하였느니라.](요3:33).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을 인치십니다.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상의 죄악을 보며 탄식하는 사람들을 표시해 두십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 도시의 한가운데 곧 예루살렘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며 그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찍으라, 하시니라.](겔9:4). 하나님은 대 환란 가운데서도하나님이 친히 인을 치신 자들은 보호하시고 해를 입지 않게 하십니다. [또 그것들에게 명령이 떨어져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나무는 하나도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 안에 하나님의 인(印)이 없는 사람들만 해하라 하더라.](계9:4).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를 보호하시고 끝까지 지키십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이 인(印)치신 존재란 분명한 자신의 identity(정체성)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미술품이라도 낙관이나 싸인이 없으면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작곡가는 자신이 쓴 곡 맨 위나 아래에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씁니다. 인을 치지 않는다는 것은 잃어버려도 중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성도들 개개인을 인치십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고후1:22),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를 구원하는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고 또한 그분을 믿은 뒤에 저 거룩하신 약속의 영으로 인치심을 받았나니](엡1:13).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이러한 우리의 독특한 신분으로 인해 주님은 우리가 썩어 없어지는 양식이 아닌 생명에 이르도록 항상 있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유입니다. 갓 거듭난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순수한 말씀의 젖을 먹이려면 부지런히 낙농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고기입니다. 채식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적당히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고기는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빵입니다.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어떤 사람도 놀고 먹을 수 없듯이 영적인 빵 역시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진리를 찾고, 땀을 흘리며, 공부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으며, 풍성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입니다. 양봉업자들은 꽃이 많은 곳에 벌통을 가져다 놓아야 합니다. 벌을 채집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꿀을 채집하는 양봉업자와 같이 말씀을 채집해야 합니다. 이 꿀의 맛을 본 사람의 체험을 들어 보십시오. [주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벌집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맛에 다니라.](잠24:13). 하나님의 말씀은 사과입니다. [/때에/ 적절한 말은 은 그림들에 있는 금 사과들 같으니라.](잠25:11). 동양에서는 천도를 한 개만 먹으면 60갑자의 생명을 살 수 있는 전설의 과일로 생각하듯이 서양에서는 금 사과를 그런 사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금 사과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런 먹을 것들을 위해서 수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라는 말은 “일하라”(labour)는 말입니다.
성경은 노동의 가치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강조합니다. 우리는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엿새 동안은 네가 수고하고/노동하고(KJV)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신5:13)라고 말씀하시며, 이것은 십계명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지 말라고 한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첫째, 부자가 되려는 목적으로 노동하지 말라.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네 자신의 지혜를 버릴지니라./Labour not to be rich : cease from thine own wisdom.] (잠23:4). 둘째,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고...] (요6:27a).
그럼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이는 당시 무리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리이까? 하매](28).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들을 하리이까? 묻는 것은 너무나 건전한 질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런 진지한 질문과 고민이 필요하고 답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을 깨닫고 일하는 것을 사명자요,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곰탕집을 하나 운영하더라도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 속에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리이까?”(28) 묻고 답을 얻어야 합니다. 침례인 요한의 설교를 들었던 무리들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눅3:10). 세리들도 물었습니다. [그때에 세리들도 와서 침례를 받고자 하여 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눅3:12). 군인들도 물었습니다. [군사들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눅3:14a). 베드로는 자신에게 [내 양들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소명을 받은 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그런데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 하니](요21:21). 전혀 물을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남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고 참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내가 하는 일,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남이 하는 일과 비교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의 할 일을 물었습니다. [사울이 떨며 심히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행9:6a). 주님은 직접 대답하는 대신 [일어나 도시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듣게 되리라, 하시니]](행9:6b)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요, 주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선교회 간사로 부르셨는지, 공무원 시험을 보아서 교회를 봉사하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도록 부르셨는지, 지역 교회의 집사로 섬기도록 부르셨는지 모르겠지만 무엇인가 하도록 부르셨고,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썩지 않는 항상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은 무엇인가? 말씀을 통해 함께 답을 얻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받기보다 주는 삶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너희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었노니 너희가 마땅히 이렇게 수고하여(so labouring) 약한 자들을 도와 주고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노라,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주님은 노동을 해서 연약한 자들을 도와 주는 것이 복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도둑질을 한 자는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 오히려 노동을 하여 궁핍한 자에게 줄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선한 일을 할지니라.] (엡4:28). 이렇게 할 때 노동은 고역이 아니라 신성한 노동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려고 노동하는 것은 신성한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이야 말로 육신을 위하여 썩어지는 양식을 위한 수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기 위해 하는 노동은 주님이 인정하시는 신성한 노동입니다.
둘째, 주님께서 받아 주시는 자가 되고자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있든지 떨어져 있든지 그분께서 받아 주시는 자가 되고자 수고하노니](고후5:9).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어떤 수고나 애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주님께서 받아 주시는 자가 되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하셨고, 선한 일을 하도록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주님께 보상을 받기 위해 노동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는 자가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고전15:58). 사람들은 모두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일합니다. 그 이상이 되면 자신의 가치관, 꿈, 이상을 쫓아서 일을 합니다. 이곳 미국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국가라 노동을 매우 가치있게 여기며,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이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4대 명절 가운데 하나도 ‘노동절’(labour day)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노동은 노동자로서의 일생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인정받고, 보상을 받는 노동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몸으로 행한 일에 대해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주의 일을 넘치게 하십시오.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의 행위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지금까지 성도들을 섬기며 지금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 For God is not unrighteous to forget your work and labour of love, which ye have shewed toward his name, in that ye have ministered to the saints, and do minister] (히6:10). 주님께서 우리가 행한 모든 수고를 기억하십니다. 잊지 않으십니다. 보상해 주십니다. [또 네가 참고 인내하며 내 이름을 위하여 수고하고 낙심하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3). 육신의 썩을 양식을 위해서 모든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린 사람들은 주님께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일의 대가가 좋은 집, 좋은 차, 안락한 생활이 전부라면 그 얼마나 한심하고 비참한 일입니까?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주의 일꾼이란 주님을 위한 노동자들이란 말입니다. 일을 한 삯과 대가는 반드시 주어집니다. [심는 자와 물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니](고전3:8).
넷째,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 막스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만국의 노동자여 일어나라” 외쳤고 그 이상을 실천한 사람은 레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을 따랐던 노동자들은 더욱 비참하게 망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할 노동자들의 천국만 생각했지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하는 영적 양식에 대해서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공동체적 신앙을 바탕으로 그들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면 세계는 엄청 달라졌을 것입니다. 영적 양식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세우는 삶입니다. [너희에게 속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종인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도로 뜨겁게 수고하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완벽하고 완전하게 서게 하려 함이라.](골4:12). 에바브로 디도는 땅을 파는 일을 하는 대신 기도로 일했습니다. 그는 땅에서 나는 것으로 남을 돕지 못했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각양 좋은 선물들로 형제들을 돕기 위해 항상 열정적으로 일했던 기도의 일꾼(노동자)였습니다.
다섯째, 우리가 하는 일은 주님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는 노동자이십니다. [이것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분의 활동을 따라 힘쓰며 수고하노라.](골1:29). 함께 일하는 일꾼이 능숙하면 일의 능률은 물론이요 성과는 극대화 됩니다. 유능한 기술자 옆에서 시키는 일만 해도 우리는 보람을 느끼고, 기쁩니다. 최고의 석학들과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연구팀에 조원이 되면 영광스럽습니다. 대가들의 작업에 참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쁩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일꾼입니까? 천지를 설계하시고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입니다. 주님은 아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셔서 일을 주시고, 함께 일하는 영광과 특권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노동도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는 일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아무 기술도 능력도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 일할 때는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묻고, 지도를 받아가면서 일해 보십시오.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아직은 너에게 무리다. 좀 더 크면 하라고 하면 기다리십시오. 어느덧 점차 유능한 일꾼이 되어 갈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기 때문이라.](고전3:9).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유스도라 하는 예수가 문안하니 이들은 할례자들에 속한 사람들이라. 이들만이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나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니 이 사람들이 내게 위로가 되었느니라.](골4:11). 우리는 최고의 권위자, 최고의 전문가, 최고의 능력자, 최고의 지혜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팀웍을 깨뜨리지 말고 철저히 순종하며 일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은혜로 일해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사람들은 인격의 완성, 완전한 자아를 실현하는 꿈을 가지고 수행을 하거나 종교 생활을 합니다. 어느 한 방면에 달인이 경지에 이를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합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의 철학은 어느 한 방면을 평생토록 일함으로써 고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인격의 완성이요, 자아를 발견한 것으로 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나의 나됨은 그런 수행이나 일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듯이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더 많은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동기요, 힘의 근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필수 요건입니다.
육신의 힘은 육체 노동을 하는데 유용하지만 영적인 일을 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열매를 맺는 영적인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바울이 위대한 사역자가 되게 한 것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인해 위대한 복음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따라 그분의 권능이 효력 있게 활동함을 힘입어 내가 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노라.](엡3:7). 하나님의 은혜를 안 그날부터 우리 안에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의의 열매가 맺히고, 하는 일마다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그것을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 그 날부터 온 세상에서처럼 너희 안에서도 열매를 맺는도다.](골1:6). 우리는 은혜로 일하는 영적 노동자들입니다.
일곱째,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고하고 치욕을 당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니 그분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시요, 특히 믿는 자들의 구원자시라.](딤전4:10).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일을 하는 것은 거듭난 성도의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영이 죽어 있고 육신만 살아 있을 때는 육신의 일을 하고, 세상의 일을 하고, 마귀의 수하로서 마귀의 일을 했지만 이제 우리의 몸과 영은 온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한다면 당연히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치욕을 당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고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항상 있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라.](요6:27a).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가? 물었던 유대인들에게 하신 주님의 답변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29). 하나님의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해야 할 첫 번째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도가 된 후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매 순간 믿어야 합니다. 믿음에서 나지 않는 일은 무엇이나 다 죄입니다(롬14:23).
하나님, 이 사건 앞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물으면 주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느낌이나 감정, 환경이나 돌아가는 사정을 믿지 말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힘과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알량한 재주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만 있으면 무엇이나 하실 수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작은 믿음만 있으면 산을 들어 바다로 옮기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우리를 통해 주님은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해야 할 일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도 힘들고 어려운 일,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일일수록 전적인 신뢰와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합니다. 군에서도 힘든 임무일수록 신뢰와 복종은 더 크게 요구됩니다. 신뢰와 복종없이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한 신뢰, 믿음을 요구하시며 전적인 복종을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실 수 없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 깊은 신뢰가 생기고, 믿으면 믿을수록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제 친구 중의 하나는 고전 기타를 황홀하게 연주하는 선배에게 매료되어 고전 기타반에 들어갔는데 그 선배가 “왜 고전 기타반에 들어왔느냐?”고 묻길래 “선배처럼 멋지게 클래식을 연주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그 선배가 “그러려면 너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대로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그만두고 나가라”고 하더란 것입니다.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화실을 찾아가면 커다란 화판에 가로 줄, 세로 줄 긋는 연습만 만 번 이상씩 시킵니다.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세상 일의 원리도 믿음과 복종의 원리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데 영적인 일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은 “네가 해야 할 일은 내가 한 말을 믿는 것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내가 한 일을 믿는 것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나를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딸이 죽을 병에 걸려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가서 병을 고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야이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 딸이 온전하게 되리라, 하시고](눅8:50). 해답이 없다고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길이 없다면 좌절하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며 울지 마십시오. 주님은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러 주셨습니다. “믿기만 하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들어 주십니다.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믿을 때 기적은 상식이 되고, 마음 속에만 있던 일이 현실이 됩니다. 생각 속에만 머물던 일이 손에 잡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