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살과 내 피-
말씀: 요 6:44-58 요절: 요 6:55
흔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먹어두면 다 살이 되고 피가 된다’고 하십니다. 좋은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살이 되고 피가 될 말’이라고 합니다. ‘살과 피’는 몸을 이루는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선진국은 비만과의 전쟁을 선포할 정도이고 후진국에서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굶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양식은 땅의 수확물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땅에서 나는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을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평생토록 먹고 살 빵을 주기를 원하며 그것을 요청하는 유대인들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수군거리고 말씀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무리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주님은 무리들에게 [수군거리지 말라] 하시고 계속해서 말씀을 더욱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다 같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44절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나니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44). 하나님은 사람을 이끌어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인도자이십니다. 이 구절은 구원 예정론을 지지하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을 이끄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옛적에 [주]께서 내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참으로 내가 영존하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노라, 하셨도다.](렘31:3).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다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요12:32). 주님의 이끄심, 인도하심을 거부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요,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진리 가운데로 나올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스스로 도(道)를 터득하거나 깨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끄심의 결과란 것입니다. 진리란 무엇(what)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who)의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예수를 구주로 알고 믿었다는 것은 주님의 이끄심의 결과이지 스스로 연구와 탐구, 관찰과 실험, 수행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 깨달음의 결과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을 보내셔서 자신에게로 이끌어 오십니다. 침례인 요한을 통해 안드레를 이끌어 오셨고, 안드레를 통해 베드로를 이끌어 오셨고, 베드로를 통해 고넬료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누군가를 통해 이끌려 오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끄시는 사람의 줄이요, 사랑의 띠입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띠로 그들을 이끌었나니 곧 그들에게 턱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았으며 또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11:4). 주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도 끊임없이 이끄시며,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신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서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하여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의의 길, 평강의 길을 혼자서 찾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께서 너를 항상 인도하사 가뭄 속에서도 네 혼을 만족시키시며 네 뼈를 기름지게 하시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으리라.] (사58:11).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끌림을 거부하고, 마귀에게 이끌림을 받습니다. 이전에 우리의 삶을 이끌던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무엇에 이끌림을 받았습니까? 돈, 출세, 명예, 정욕 등의 우상들에게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는 이 말 못하는 우상들에게로 이끌림을 받는 대로 끌려갔느니라.](고전12:2). 마귀는 성도들을 불법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들을 미리 알았은즉 저 사악한 자의 오류에 이끌려 너희 자신의 굳건함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벧후3:17). 사람들은 마음 속의 우상들을 위해서는 불법을 서슴지 않습니다. 욕심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동기요, 자극제이며, 사람을 이끄는 원천입니다. [오직 사람마다 자기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에 시험을 받나니](약1:14). 우상과 자기 욕심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수군거리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45절입니다. [대언자들/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자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 주님이 인용한 이 구절은 이사야 54:13절입니다. [네 자녀들이 다 [주]께 가르침을 받으리니 네 자녀들에게는 큰 평강이 있을 것이며](사54:13).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선한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니 너희는 내 법을 버리지 말라.](잠4:2).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2:2).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듣고 배운 자는 주님께로 나옵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인즉 ‘성경을 듣고 배우지 않는 자는 결코 주님께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44,45절을 요약하면 주님께 나아와 구원을 얻는 사람은 [첫째,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는다. 둘째, 이들은 성경을 듣고 배운 자들이다]란 것입니다. 성경을 배운 사람은 주님께 나아옵니다. 성경은 나침반이 언제나 북극의 방향을 가리키듯이 성경의 저자이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조명과 계시의 빛을 비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46절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이라.](46). 주님께서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증거하시면서 누가 아버지를 본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니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자(獨生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요1:18).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고, 아버지께 배운 사람이라도 아버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버지를 직접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본 사람이라면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이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고 수군대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47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나니](47).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존하는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가질 것(미래)가 아니라 가졌나니(현재)입니다. 영생은 미래가 아니라 믿는 순간 주어지는 현재적인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단순하고 간단합니까? 이것이 구원의 전부입니다. 어떤 신학이나 철학 이론이 필요치 않습니다. 선행이나 고행이 필요치 않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이것이 영생의 조건이며, 구원의 유일한 수단입니다.
48절입니다.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48). 육신의 생명을 위한 육신의 빵은 입으로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배에서 소화를 시키고 뒤로 배설합니다. 배고프면 또 먹어야 합니다. 반면 영존하는 생명을 위한 생명의 빵은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식인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뜯어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체설과 같은 종교 의식으로 뜯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시기에 이 빵을 먹는 방법은 육신의 입과 이빨, 혀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자보십시오.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이 여기에 서 있습니다. 밀과 보리, 쌀, 옥수수 등으로 만든 육신의 빵, 물질적인 빵이 아닙니다. 신비한 마법의 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류 모든 사람에게 주신 빵입니다. 누구든지 먹으면 다시는 주리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먹기만 하면 영원히 삽니다. 47-48절을 이어서 한 문장으로 읽어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나니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 (요6:47~48). 그 생명이란 영존하는 생명을 말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고, 나는 영존하는 생명의 빵이다.”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존하는 생명을 위한 생명의 빵을 먹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먹는 것이다!!!
49-50절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니 사람이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아니하리라.](49-50).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었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육신적, 물질적인 음식입니다. 만나는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전혀 다른 빵이 있으니 생명의 빵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 빵을 먹는 방법은 너무나 쉽습니다. 이가 약하고 없어도, 위장이 약해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니 사람이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주님 자신을 생명의 빵임을 가리켜 쓴 말씀입니다.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은 불로초, 불사약과 같이 육신의 죽음을 연장하는 약의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도 죽습니다.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둘째 사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육신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히9:27). 그러나 이들은 모두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경험할 것이며, 새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빵이십니다. [이는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자 곧 그가 하나님의 빵이기 때문이라.](요6:33).
51절입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51). 주님은 다시 한번 자신을 빵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특별 계시가 없는 한 절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그 사실을 믿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빵은 영의 양식이지 육신의 양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사는 것 역시 영적 생명을 말하는 것이지 육신의 생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과 육의 선명한 대조와 대비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고자 하는 ‘내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들은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을 일제히 육신과 물질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주님의 살로 갔습니다. 식인종도 아닌데 갑자기 살을 먹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마 캐톨릭은 아직도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고 하면서 성병을 만들어 미사 때마다 먹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성병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육체의 살이 변한 것(화체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빵을 먹으면”이란 말씀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 영접하면”이란 뜻입니다. 육신의 빵은 입을 통해 뱃 속으로 들어가고,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을 통해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52절입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매](52).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아무리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병자를 고치고, 놀라운 기적을 행했다고는 하지만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들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생명의 빵,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을 먹으라는 주님의 말씀 중 알아 들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의 다투는 모습을 보십시오. 마치 무식한 아이들이 오답(誤答)을 가지고 서로 우기며 맞다고 다투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다 문제가 잘못 출제되었다고 단정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살을 주겠다고 하신 말씀은 있을 수 없는 잘못된 말씀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못이 박히시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53절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 주님은 무리들의 오해와 잘못된 해석, 강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반응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으셨습니다. “말해 보아야 입만 아프다”, “우이독경(牛耳讀經)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대언자의 직무입니다. 구약에 사람의 아들로 묘사된 에스겔의 직무가 이와 같았습니다. [또 /너는/ 가되 포로로 잡힌 자들 곧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하라, 하시니라.](겔3:11). 주님 역시 사람의 아들로서 이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이렇게 선포하면 그들은 한 대언자가 자기들 속에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그들 가운데 지금까지 한 대언자가 있었음을 그들이 알지니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이니라.)](겔2:5). 이는 우리가 복음 전파할 때 가져야 태도가 무엇인지 잘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주님은 ‘살’에 대해서 다투는 사람들을 향해 이번에는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한층 더 강력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율법에 유대인들은 피를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자신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는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그들이 모세오경을 통해 아는 사람의 피는 이렇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기 때문이니라.](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피는 혼을 위해 속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피 역시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이니 육체의 피는 육체의 생명을 위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피가 그 육체의 생명인즉 누구든지 피를 먹는 자는 끊어지리라.](레17:14). 피를 먹는 일은 금지된 일이며, 저주받을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이라고 했으니 듣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해서 흘릴 자신의 피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54절입니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54). 주님의 살은 우리와 동일한 모양의 육체이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주님의 피는 우리와 동일한 피이지만 사람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이 피입니다(행20:28). 내 살을 먹는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요1:14, 딤전3:16). 내 피를 마신다는 것은 주님이 흘린 피가 대속의 피요, 죄사함의 피요, 의롭게 되는 피요, 깨끗하게 하는 하나님 자신의 피란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어떤 피입니까? 이미 수 차례 말씀을 증거했지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1. 죄사함의 피입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사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롬3:25). [우리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代贖)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엡1:7).
2. 의롭게 하는 피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롬5:9).
3. 가깝게 하는 피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 피를 통해 친밀해 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벽이 허물어졌습니다.
4. 대속의 피입니다. [이 아들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代贖)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5. 화해의 피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음이니라.](골1:20).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대속(代贖)을 얻으셨느니라.](히9:12).
6.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피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4)
7. 담대함을 주는 피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히10:19).
8.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한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해 보라.](히10:29).
9. 씻으시는 피입니다.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계1:5).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
10. 승리의 피입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55절입니다. [이는 내 살이 참된 양식이요, 내 피가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라.](55). 이 말씀 역시 예수님의 육신의 사로가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상 누구도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하나님의 빵이요, 생명의 빵이기에 참된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보배로운 피이기에 그 피의 효능은 믿는 자들을 모두 구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음료입니다.
56절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56). 이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반복된 말씀입니다. 주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주님 역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만약 주님이 말한 살과 피가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라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위장에 머물다가 뒤로 나가 버립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은 주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게 되고, 우리 역시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이는 조직체적인 연합이 아니라 유기체적인 연합이며, 생명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이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상호 연합의 관계야말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려면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晩餐)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3:20). 주님은 우리 안으로 들 어 오십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는 그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힘입어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우리의 믿음을 통해 주님을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속에 거하게 하옵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엡3:17).
57절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57). 여기서 문장 구조를 살펴 보십시오. As--So 용법입니다. 같이, 처럼 등이 나오면 이것은 유사 용법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그 사람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사는 방법 면에서 동일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를 씹어 먹고 사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믿고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삽니다. “나를 먹는 그 사람”이란 의미 역시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가 거하시듯이 주님 안에 우리가 거하고,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는 살게 됩니다.
58절입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빵이니 /이것은/ 너희 조상들이 먹고 죽은 만나와 같지 아니하여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시니라.](58).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이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란 점에서 만나와 자신이 같은 점이 있지만 만나는 먹고 죽는 육신의 양식이지만 주님 자신은 영원히 사는 생명의 빵이란 영적 양식이란 차이가 있습니다. 영적인 음식은 영적 생명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이 먹어야 할 양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 죽습니다. 영을 먹여 본 경험이 없습니다. 혼의 주림과 갈증을 채우기 위해서는 이것 저것 시도해 보지만 영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양식을 보고도 양식인줄 알지 못합니다. 다윗은 어떠했습니다. 말씀을 먹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에 말씀을 간직했고, 그것을 묵상함으로 소화를 시켰습니다. 그는 그 일이 너무나 달고 맛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묵상하는 일이 달고 맛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 배부름이 있어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영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영의 주림과 갈증을 채워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생명의 빵을 먹고 생명의 음료를 마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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