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요, 생명인 말씀-
말씀: 요 6:59-71 요절: 요 6:63
주님이 백성들에게 강론한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은 산상수훈 때 하신 설교보다 결코 어렵지 않는 말씀이었지만 백성들은 매우 어려워했습니다. 산상 수훈을 들은 백성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가르치는 권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니 이는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음이더라.] (마7:28~29). 아무도 어렵다거나 못 믿겠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산상 수훈에는 십자가, 부활, 구속, 피의 대속, 죄의 회개, 지옥에 대한 말씀이 없습니다.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까지도 산상 수훈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왕국 복음에 대해서 가르쳤을 때도 백성들은 어렵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 있는 일들이 어디에서 났느냐?] (마13:54). 처음에 회당에서 가르쳤을 때도 사람들은 모두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습니다(눅4:22). 그러나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이란 주제의 설교는 아무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어렵다고 고개를 내 저었고, 백성들은 수군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59-60절입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그분의 제자들 중의 여럿이 이것을 듣고 이르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으리요? 하매](59-60). 가버나움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고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온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이적들을 행하신 곳이지만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이곳의 멸망을 예언하셨고, 그 결과 가버나움은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마8:5-13; 9:9-13; 11:23, 24; 막2:1-12; 9:33-50; 눅10:15).
말씀을 마치실 때 제자들 중에 몇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으리요?]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왜 어렵습니까? 오늘날 알게 모르게 은밀하고도 광범위하게 성도들의 마음에 찾아든 생각 중에 하나는 “성경은 어렵다. 보통 사람은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내 입의 말들은 다 의로운즉 그 중에 비뚤어지거나 뒤틀린 것이 없나니 깨닫는 자에게는 이것들이 명백한 것이요(plain), 지식을 얻는 자들에게는 올바른 것이로다.] (잠8:8~9).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너무 어렵지 않습니다. [비웃는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지식은 깨닫는 자에게 쉬운 것이니라.] (잠14:6). 깨닫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이 어렵다고 합니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찾는가? 명철(明哲)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욥28:12), [이러하거늘 지혜는 /과연/ 어디서 오는가?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욥28:20)란 진지한 질문에 대해 주님은 대답해 주십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고, 학교 교육을 많이 받고, 돈이 있어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성경을 깨닫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며, 마음입니다. 그럼 누가 깨달을 수 있습니까?
첫째, 주를 두려워할 때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곧 지혜요,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셨느니라.](욥28:28). 주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결코 성경을 깨달을 수 없고, 성경이 쉽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나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고 누가 알아 들을 수 있으리요? 의문을 가졌던 것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 안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영감(靈感)이 사람들에게 명철(明哲)을 주시나니](욥32:8). 주님은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가리시며, 깨닫지 못하게 하시고(욥17:4), 악을 행하는 자들 역시 깨닫지 못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악한 자들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주]를 찾는 자들은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지혜를 주시도록 주님을 찾으며 기도할 때 지혜를 주시고(약1:5),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자신의 입에서 내시기 때문이로다.](잠2:6). 멍청하게 앉아 들어봐야 듣고나서 헛소리를 합니다. 주님께 깨달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주의 명령을 행할 때 깨닫게 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는 다 큰 명철(明哲)이 있는 자니 그분을 찬양함이 영원토록 지속되리로다.](시111:10). 어떤 것은 말로나 글로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직접 몸으로 행해 보아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한 후에 행하는 것은 합니다. 하다보면 원리가 이해되고 터득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이해하기 보다 믿음으로 순종해 보면 잘 이해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는 큰 명철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단지 말씀이라는 이유로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할 때 열매가 맺히고, 큰 기쁨이 있습니다.
넷째, 묵상할 때 명철을 갖게 됩니다. [내 입이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의 묵상이 명철(明哲)이 되리로다.](시49:3). 묵상은 말씀을 내 마음에 채우는 것입니다. 명상이 마음 속을 비우는 작업이라면 묵상은 마음 속을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묵상할 때 형통하게 되고 복있는 자가 되며 명철한 자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증거들이 나의 묵상이 되므로 나의 모든 스승보다 더 많은 명철이 내게 있으며](시119:99).
다섯째, 주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면 명철하게 됩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미련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119:13). 말씀들이 들어오면 마음은 빛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주 들었던 책망 중의 하나는 “어찌하여 너희가 깨닫지 못하느냐?”였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에 잘 간직한 대표적인 두 사람은 구약의 야곱과 신약의 마리아였습니다. 천사들이 구유에 놓인 아기에 대해 목자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었을 때 그들은 즉시 널리 알렸습니다.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이 아이에 대하여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널리 알리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말하는 그 일들을 이상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깊이 생각하니라.] (눅2:16~19). 모든 사람들이 이상히 였지만 마리아는 마음 속에 간직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꾼 후에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했을 때 형제들은 시기했지만 야곱은 꾸중을 하면서도 그 말을 간직했습니다. [그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창37:11). 마음속에 말씀을 받아서 간직해 두어야 합니다.
다시 6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분의 제자들 중의 여럿이 이것을 듣고 이르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으리요? 하매](60).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합니다. 주님이 백성들에게 보이신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말이 생소하거나 어려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가되 이스라엘의 집에게로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말할지니 이는 /내가/ 말이 생소하거나 언어가 어려운 백성에게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집에게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말이 생소하거나 언어가 어려워 네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백성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라면 그들이 반드시 네 말에 귀를 기울였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집은 네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이스라엘의 온 집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 (겔3:4~7). 그들이 어려웠던 것은 마음이 뻔뻔하고 완악했기 때문입니다.
6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스스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를 실족하게 하느냐?](61).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수군거렸습니다. 백성들의 수군거림이야 이해한다 하더라도 제자들이 수군거리는 것은 참으로 가관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실족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누구도 ‘피’를 마실 수 없습니다(레17:10). 유대인들 가운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셨으니 제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영적인 말씀을 육신적으로 이해하려 했을 때 그들은 실족할 지경이었습니다.
때로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목사님이 하는 설교로 인해 실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서 미칠 지경이 됩니다. 영이요, 생명인 말씀을 육신적으로 세상 적으로 물질적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말이 되지 않는 헛소리로 들리기 마련입니다. 전에 어떤 자매는 [회초리를 아끼는 자는 자기 아들을 미워하는 것이나 아들을 사랑하는 자는 제 때에 징계하느니라.](잠13:24)는 말씀으로 설교하는 목사님으로 오랫동안 힘들어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생각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 똑똑한 성도들이 제법있으며, 때로 성경의 오류를 고쳐 주려는 사람들이 앉아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가정 폭력이 문제가 되고, 매질이 아이들의 성격을 비뚤게 하고, 문제아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은 교육학 이론이지 성경 말씀이 아닙니다. 가정 폭력이 왜 일어납니까? 부모에게 회초리로 교육을 받지 않고 제때에 매질을 받지 않는 사람이 결혼을 해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 가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요즘 아이들이 문제아가 됩니까? 성경적 방식으로 양육하지 않고 어설픈 교육학 이론이나 사람들의 충고에 따라 교육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사고와 가치관에 어긋나는 설교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62절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려느냐?](62).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이 말에 제자들이 실족하면, 그 후에 있을 부활과 승천은 어떻게 하겠느냐? 는 것입니다(눅24:51, 막16:19). 주님은 이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부활 승천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이전에 있던 곳’이란 하늘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이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오셨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이해하면 다른 모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주님이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것과 그분이 주님이란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63절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라.](63). 주님은 제자들이 계속해서 육과 물질로 이해하는 것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들은 모두 영이요, 생명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육신적인 어떤 것도 영적 생명을 주지 못하며, 살리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주의로 가득 차 있는지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무가치하게 여기고, 의미 없는 것으로 알지만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3:6). 성령은 살리는 영이십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살리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역시 영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이신 ‘성령, 주님, 주의 말씀’만이 살립니다.
‘말들’(words)이란 사상, 가르침, 메시지, 교훈이 아닙니다. 말씀이 생명을 살리지 사상이나 메시지, 가르침이나 교훈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셨지 사상을 전파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words)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한 단어, 한 단어가 다 영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휘를 바꾸거나 더하거나 빼면 안 됩니다. 어휘가 바뀌어도 의미는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단어가 틀려도 가르침은 같다고 생각하고, 같은 메시지요, 같은 사상을 전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들(단어들)이 바뀌면 그것은 영이요, 생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 역시 ‘믿음의 말씀들’입니다. 사상이나 교훈이 아닙니다. 말씀이 다르면 영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신 단어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이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정신이나 사상이나 메시지나 가르침으로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우리가 성장하는 것 역시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이 젖으로 자라가도록 하라.](벧전2:2). 기독교 사상을 이해하자. 예수의 정신을 이해하자. 교회는 초대 교회의 순수함을 회복해야 한다와 같은 메시지는 어떤 사람에게도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말씀을 말씀(단어)이 아닌 정신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모두 생명이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64절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며 또 자기를 배반하여 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셨음이라.](64). 주님은 드디어 제자들 가운데 있는 한 명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마귀인 가룟 유다입니다(요6:70). 주님은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같이 생활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맨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를 다 아십니다.
65절입니다.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5). 이 구절은 지난 시간에 다룬 44절 말씀과 더불어 캘빈의 구원 예정론을 지지하는 중요 구절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시며”이란 말을 “예정해 두지 않으면”이라고 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원 예정론과 관련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게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고 초청하십니다. “다 내게로”입니다. [그 명절의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전부를 초청하셨지 일부만 부르시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오게 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올 수 없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죄인들은 누구든지 주님께 오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단 마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귀들을 구원할 계획이 없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가룟 유다 뿐입니다.
66절입니다. [그때부터 그분의 제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돌아가고 다시는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고향 앞으로 돌렸습니다.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듣고, 살리는 것은 영이란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왜 돌아갔습니까?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육은 아무 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많은 제자들의 제자된 동기와 목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질적인 기적을 일으켰을 때,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보았을 때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영적인 진리가 제시되자 등을 돌렸습니다.
여러분은 제자입니까? 모든 신자가 모두 제자는 아닙니다. 제자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사람인데 자격 요건이 있습니다.
제자의 자격 요건이 무엇입니까?
첫째, 가족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형제나 자매나 참으로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우리는 가족된 부모를 공경하고, 아내된 자매와 자녀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주의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가족주의란 혈통 중심의 가치관은 우상숭배입니다. 물질과 물질주의는 다르듯이 가족과 가족주의는 다릅니다. 가족주의란 모든 기준이 가족의 유익, 가족의 행복, 가족의 끈끈한 틀을 유지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신앙을 버리는 것이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교회를 나오는 것도 가족주의란 우상이 그들을 이끈 결과입니다. 가족주의 때문에 제자가 되지 못했던 예를 보십시오. [또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다른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먼저 내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葬事)지내게 허락하옵소서,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마8:21~22). 주님은 가족주의를 벗어나서 제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7). 많은 사람들이 가족주의란 우상 때문에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신자로 머물고 있습니다.
둘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대부분 교회에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의무를 다한다거나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라도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를 모시기 싫은데 모시고 사는 며느리는 자기 삶을 가리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자기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이며, 당연한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 생활이 자기 십자가라고 합니다. 이 역시 십자가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자기 십자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주님께 맡겨 버리면 됩니다. 이런 것들은 짐이 될 수 있지만 모든 짐은 주님께 던져서 맡기면 평안합니다(시55:22, 잠16:3).
자기 십자가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그 믿음의 증언자로서 그 증인인 자기 자신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채로 가정 생활, 직장 생활, 교회 생활을 하는 전인적인 신앙 생활을 해야하는데 이것이 제자의 요건이란 것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말씀은 그 누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어떤 사람에게 설명하고 해설하는 연설자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자요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자요, 날마다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로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살아갈 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 소유를 모두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청지기는 자기 소유가 없습니다. 청지기의 손에 있는 모든 재산은 다 주인의 것입니다. 군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군인은 몸도 국가의 소유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소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제자는 모든 소유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모든 것을 확실히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그런데 버려야 할 것들을 얻기 위해 전력질주하면서 스스로 제자로 자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입니까? 더 유능한 제자가 되기 위해 학위를 따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훌륭한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 무엇을 갖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버려야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말씀에 꾸준히 거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꾸준히/continue in)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8:31). 주님은 참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방법이 영이요, 생명인 자신의 말씀에 꾸준히 거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제자의 필수 요건입니다.
다섯째, 열매를 맺지 못하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가지로서의 쓸모가 없듯이 열매맺지 못하는 제자는 제자로서의 의미가 없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와 구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을 끝까지 따랐던 제자들과 제자직을 그만두고 포기한 사람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67절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니](67).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따르던 무리가 거의 대부분 떠났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인들이 거의 다 떠난 교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 때에 남은 제자 열둘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는 너희도 저들과 같은 동기와 목적으로 제자가 되었느냐?는 질문이며 도전입니다.
주님은 무리들의 평판이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가 어떻게 믿고, 따르는가를 더 주목하셨습니다. 제자 양육이 중요합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니](마16:15).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보다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주님은 무리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목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68-69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분께 대답하되,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는 주께서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확신하게 되었나이다, 하매](68-69).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들였습니다. 물질과 육신이 아니라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믿었습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을 알았고, 주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주목하십오. 그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믿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기적을 보고서가 아니라 말씀을 믿고서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안 후에 믿고, 본 후에 믿지만 성도들은 정반대입니다. “믿고 확신”하게 됩니다. 믿고 알고, 믿고 확신하고, 믿고 깨닫고, 믿은 후에 받고...항상 ‘믿고’가 먼저 나옵니다. 믿음은 모든 영적인 일들에서 항상 맨 앞 자리를 차지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님께 있습니다. 어떤 종교에 있지 않습니다. 학교에 있지 않습니다. 철학에 있지 않습니다. 출판사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책, 신문, 잡지 등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고대 위인들, 학자들, 종교 창시자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때 구원을 받았지 다른 무엇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70-7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선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마귀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그가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님을 배반하여 넘겨줄 자이기 때문이더라.](70-71). 주님은 베드로가 포함시킨 “우리는”이란 말씀에 한 명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12 전부가 아니라 11명이란 것입니다. 주님이 제외시킨 한 명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였습니다. 마귀 들린 자라면 주님이 마귀를 내 쫓아 주시면 됩니다. 만약 가룟 유다가 마귀들린 자라면 주님은 그토록 많은 마귀들린 사람을 내 쫓아 주시면서 가룟 유다 안에 있는 마귀는 그냥 두셨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너희 가운데 하나는 마귀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친절하고도 상냥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태연스럽게 주님의 오류를 고쳐 주며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 들렸느니라”고 읽어 버립니다. 기록된 말씀대신 ‘너희 중에 하나에게 마귀가 들어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기록된 대로 믿는 대신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12에 따르면 이는 “멸망의 아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멸망의 아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혔는데 그는 다름아닌 적그리스도입니다(살후2:3). 그는 죽었을 때 자기 거처로 갔고(행1:25) 이곳은 다름아닌 끝없이 깊은 구렁입니다(계9:11). 요한계시록 17:8을 보십시오.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앞으로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로부터 그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앞으로 있게 될 그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계17:8). 히브리어로 아바돈, 헬라어로 아폴루온 역시 영어로는 perdition입니다. 주님은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로 정확히 이 자가 누구인지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믿지만 결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궁리만 했고, 결국 죽이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인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죽은 것이었으며,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폐하시고 말았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며, 마귀를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주님의 말씀과 곧 이어진 말씀은 풍성한 영적 조명을 쏟아 부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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