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육신의 형제들 -
말씀: 요 7:1-9
요절: 요 7:8
요한복음 7장은 장막절에 행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성전에 모여든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자신이 누구인지와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생수의 강이신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같이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막절은 구약에서 초막절이라고 불리며 유월절, 오순절(칠칠절)과 함께 유대인들의 3대 절기였습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예외 없이 이 날에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올라와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주님 역시 구약의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수여자요, 완성자로서 율법에 어긋나게 행하신 일이 단 한 차례도 없으셨습니다.
1-9절은 주님이 육신의 형제들과의 대화를 나누신 장면입니다. 주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마리아에게서 난 육신의 형제들이 네 명이었습니다. 마리아는 5남 몇 녀를 둔 어머니였습니다. 유교 영향권에서 자란 한국인들에게 피붙이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우선합니다. 그러나 이런 육신적, 혈연적 인간 관계는 영적, 성경적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을 때 주님을 따르는데 치명적인 독소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영적 관계와 혈육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인들의 거주지에서 다니려 하지 아니하시더니 이는 유대인들이 그분을 죽이려 하였음이더라.](1). 주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아무 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을 때 많은 제자들이 떠났습니다. 주님께 우호적이었던 사람들도 등을 돌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이유로 이들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율법을 범한 범법자로 고소했습니다. 이미 지난 유월절에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에서 고치신 사건으로 인해 주님은 죽음을 당할 뻔 하셨습니다(요5:16). 주님은 계속해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십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란 단지 유대에 사는 주민들이 아니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 경찰 노릇을 했는데 누구든지 예수를 인정하고 믿으면 출회시켜 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회당에서 내쫓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두려워하였음이더라.](요9:22). 아리마대 요셉은 바리새인이었으면서도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요19:38).
2절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의 명절인 장막절이 가까우므로](2). 장막절은 유대 종교력으로 7월 15일에 시작됩니다. 오늘날 우리 달력으로는 9월입니다. 모든 절기는 ‘주의 명절들’인데, 성경은 유난히 ‘유대인들의 명절’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이들이 지키는 명절은 그만큼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장막절은 주님의 재림을 예표하는 절기입니다. 첫째 날에 집회를 열고 일주일 동안 불로 예비한 헌물을 드리며, 8일째 다시 한 번 집회를 엽니다. [첫째 날에는 거룩한 집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너희는 그 이레 동안 주께 불로 예비하는 헌물을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도 너희에게 거룩한 집회가 되리라. 너희는 주께 불로 예비하는 헌물을 드릴지니 이 날은 엄숙한 집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것들은 주의 명절들이니 너희는 이 명절들을 선포하여 거룩한 집회로 삼고 주께 불로 예비하는 헌물을 드리되 번제 헌물과 음식 헌물과 희생물과 음료 헌물을 각각 그 해당하는 날에 드릴지니](레23:35-37). 이 기간 동안에 사람들은 즐거워하며 초막에 거해야 합니다. 이 명절은 광야에서 이들이 초막에 거했음을 알게 하신데 주된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절기는 주님께서 이 땅에 장막을 치러 오시는 성육신을 예표하기도 하며 재림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유대인 남자들이 반드시 올라가야 하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3절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이르되, 여기를 떠나 유대로 들어가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하소서](3). 예수님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매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많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니냐? 그의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실족하니라.](막6:3). 캐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리아는 영원한 동정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갈릴리 촌구석에서 활동할 것이 아니라 유대로 들어가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만 천하에 공개해서 인정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논점은 이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도 사람들은 떠났는데 왜 이런데서 일을 하느냐? 는 것입니다. 마침 장막절이 다가오니 모든 사람들이 모일 때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한번만 일으키면 일약 스타가 될 것이란 주장입니다. 큰 사람은 큰일을 하기 위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세상 논리를 주님 앞에 설파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형제가 영적인 형제로 변화되지 않을 경우 형제의 관계는 더 이상 형제의 관계가 아니라 원수의 관계와 같이 됩니다. 이는 부모, 아내, 자식 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형제나 자매나 참으로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이것이 진리입니다. 혈육의 부모가 주 안에서 부모가 되고, 육신의 아내가 주 안에서 아내가 되고,혈육의 자녀가 영 안에서 자녀가 되고, 혈연의 형제지간이 주 안에서 형제가 되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그다지 의미 있는 관계라 할 수 없습니다.
형제란 어려운 때를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친구는 언제나 사랑하며 형제는 어려운 때를 위하여 태어났느니라.](잠17:17). 그러나 실상 살아보면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습니다. 형제보다 나은 이웃이 있고, 남보다 형제들이 있습니다. [여러 친구를 두는 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정답게 보여야 하나니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18:24). 어려운 때를 위해 태어난 형제가 재난의 날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네 친구와 네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며 네 재난의 날에 네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니 이는 가까이 있는 이웃이 멀리 있는 형제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잠27:10). 우리는 때로 육신의 형제들로 인해 신앙생활에 고통을 받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면 아무 문제없는데 가까이 붙어서 지내는 경우에 전혀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영적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육신의 형제와 영적인 형제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용사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다윗은 자신의 육신의 형제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지 못했습니다. 위로 일곱 명의 형들이 있었지만(삼상16:10), 다윗을 도왔던 형제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특히 맏형이었던 엘리압은 다윗의 영적 성장을 억누르고 가로막는 걸림돌이었습니다. 다윗이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골리앗을 치려했을 때 그를 격려했던 형제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전쟁터에는 장자 엘리압, 차남 아비나답, 삼남 삼마가 있었지만 이들이 다윗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 그의 맏형 엘리압이 들었으므로 엘리압의 분노가 다윗을 향해 /불같이/ 타오르매 그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안 되는 양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무례함을 아나니 이는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음이로다, 하니](삼상17:28). 싸우러 나가는 다윗을 방해한 사람은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억누른 것은 골리앗이 아닙니다. 다윗을 억누르고, 그를 향해 분노를 발했던 사람은 제일 큰 형이었던 엘리압이었습니다. 다윗은 일찍이 형제들에 대한 육신의 정을 정리한 사람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시133:1)라고 노래했는데 여기서 형제는 ‘영적인 형제들’이지 일곱 형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형제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육신의 형제들은 주님을 돕는 조력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이들은 늘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들이요, 불신자들이었습니다. 이미 시편에 예언되어 있듯이 이들은 주님을 헐뜯고, 주님과는 남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앉아서 네 형제를 비방하고 네 친어머니의 아들을 헐뜯는도다.](시50:20). [내가 내 형제들에게는 낯선 자가 되고 내 어머니의 자녀들에게는 외인이 되었사오니](시69:8). 여러분에게 형제가 많습니까? 형제가 있지만 우애가 없다면 없느니만 못합니다. 형제가 있고, 우애도 있지만 같은 믿음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에 걸림돌만 됩니다. 주님은 사역하면서 육신의 형제들이란 혈육의 정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공개적으로 매듭 지으셨습니다. [이에 한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보소서,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하고자 하여 밖에 서 있나이다, 하거늘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냐? 누가 내 형제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이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이라, 하시더라.] (마12:47~50). 저는 여러분에게 가족은 소중하지만 가족주의는 우상이란 점을 몇 차례 선포했습니다. 주님은 가족주의, 혈연 중심, 육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영적인 관계성(spiritual relationship)을 정립하셨습니다. 주님은 4명이나 되는 남동생들이 있었지만 진정으로 형제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나사렛에 있는 집에 먼저 찾아 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육신의 형제들을 먼저 찾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요셉이나 마리아나 남동생들이나 여동생들을 언급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관심을 가진 대상은 영적인 형제들이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28:10). 한국의 유생들 중에는 주님께, 당신 눈에는 부모 형제도 없느냐? 고 말할지 모르지만 주님의 형제요, 자매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육신의 형제들이 영적인 형제로 전환되지 못하면 우애는 우정만도 못한 법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등은 둘도 없는 형제 지간이어야 할 관계였지만 이들은 실상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보다 못한 사이였습니다. 반면 안드레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등은 육신의 형제로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영적인 형제가 되었기에 인간적으로 영적으로 모두 친함이 있었고, 아름다운 일생을 살았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을 보십시오. 10명이나 되는 그의 형들이 그에게 한 일은 죽이고 팔아먹는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같은 죄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형제들은 여전히 육신 안에 있다면 형제간에 우애가 싹트는 것이 아니라 미움과 살인이 자라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수록 다른 형제들은 나를 죽이려고 함께 모여 의논을 합니다. 이것이 육신으로는 같은 형제이지만 영적으로는 형제가 아닐 때 벌어지는 현실 세계의 냉혹한 진리입니다. 고아가 아니라면 여러분들은 육신의 가족과 영적인 가족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선 순위가 정해져 있습니까? 우선 순위가 분명히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육신의 가족주의로 영적인 형제들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에 가족주의를 빌미로 믿음의 형제들을 비난하고 욕하고 발목을 잡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육신의 형제들 중에 둘은 후에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이들 가운데는 위대한 믿음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와 유다입니다. 주의 형제들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전도 여행을 다녔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사도들이나 {주}의 형제들이나 게바와 같이 자매 곧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5), 사도 바울이 오늘 등장하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후에 예루살렘에서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보지 아니하였노라.](갈1:19). 이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변화되었습니다. 처음에 주님을 육신으로 알았다가 영적으로 알아 본 것입니다. 육신의 주님의 형제 관계와 그들의 영적 가치관에 대해서 가장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 부분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들은 주님과 육신의 관계성에 있을 때는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형제로만 있었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이 영적인 형제가 되었을 때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 믿음의 사도 역할을 담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부모 형제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믿음의 형제들은 더욱 소중합니다.
4절입니다. [이는 스스로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은밀히 일을 행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니이다. 이 일들을 행하시려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4).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합니다. “자기들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란 기준으로 남에게 권면하고 강요합니다. 자신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은 명예심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자랑입니다(요일2:16). 마귀 역시 주님을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라고 시험했습니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유혹했습니다. 은밀히 행하지 말고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이 보는데서 기적을 일으키라는 제안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뛰어 내려 단번에 스타가 되고,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주님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보여 주어 믿게 하라”는 것이 육신의 형제들이 주장하는 바이지만 주님은 “말씀을 듣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목회를 하는 사역자들 중에서도 스스로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광고를 하거나 세미나를 개최하거나 여러 가지 기획 행사를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갖은 묘책을 다 짜냅니다. 라디오나 T.V 설교, 신문에 연재 설교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벤트를 자주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이런 자들은 복음을 더 널리 전하겠다는 표면적인 이유 외에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 인생의 자랑이란 우상에 이끌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도 자기를 알리는 알을 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합니다. 신문에 광고를 하자, 세미나를 열어 보자, 책을 찍자는 등의 제안을 합니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소서”와 같은 주문은 육신을 자극하는 마약과 같습니다.
[이는 스스로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은밀히 일을 행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니이다.](4a)란 말은 세상에서는 진리입니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은밀히 일을 행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일이 좀 더 효과적으로 크고 강하고 빠르게 알려 지고 확산되기를 원합니다. 일부러 언론사 기자들을 불러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반대로 일을 하셨습니다. 몇 구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증거로 삼으라, 하시니라.](마8:4). 문둥병을 고치신 후에 주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눈이 열리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엄히 명하여 이르시되, 아무에게도 이것을 알리지 말라, 하시더라.](마9:30). 소경을 고치신 후에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이에 자기 제자들에게 명하사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마16:20).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가르치신 후에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이 사실을 알리고 믿게 하시기 위해서 일하신 주님이신데 정작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전에 주님은 자신이 한 일로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서 천한 만민에게 이것을 증거 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날 때까지는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마17:9). 변화산상의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세 제자는 이 사실을 나머지 동료들에게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소녀의 부모가 놀라더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일어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시니라.](눅8:56). 죽은 사람을 살리신 후에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과 주님의 일은 이렇게 다릅니다.
[이 일들을 행하시려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4b).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불만이었고, 매우 답답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려면 이런 시골 구석에서 은둔자처럼 숨어서 할 것이 아니라 당당히 넓은 세상에 나가서 크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권면했습니다. “일을 하려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라는 말은 일을 하고 인정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은 왜 이런 제안을 했습니까? 주님이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면 자신들도 같이 믿겠다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유대의 주류 측 인사들로부터 공인받지 못하면 자신들도 믿을 수 없다는 어정쩡한 태도입니다. ‘제발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먼저 지도층, 주류층, 대중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오시오.’와 같은 말입니다. 믿고 싶어도 남들이 믿지 않으니 못 믿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자세는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한 교인들의 반응에서 잘 드러납니다. 킹 제임스 성경이 얼마나 큰 교단에 사용되는가? 어떤 신학교에서, 어떤 교회의 목사님들이 사용하는가? 등을 살핍니다. 그런 후에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을 알겠는데, 왜 유명한 목사님들이 안 쓰느냐고 반문합니다. “당신이 쓰는 성경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당신의 교회를 세상에 나타내소서!”와 같은 요구는 모두 불신의 탈을 쓴 자들이 자신들의 불신을 가릴 때 쓰는 기회주의적 태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세상에 알려지기보다 하나님께 알려지기를 원해야 합니다. 세상이 몰라 주더라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그만입니다. 어떤 선교사는 자신이 이름없이 빛도 없이 일하는 모습을 남들이 알아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일한다’는 점을 빛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람들의 특징은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 일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가받지 못하는 일은 무가치하며, 소용이 없고, 헛고생만 하는 쓸데없는 일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과 다른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5절입니다. [이는 그분의 형제들도 그분을 믿지 아니하였음이더라.](5). 예수님의 형제들이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 성경은 한 줄로 요약해 줍니다. 그들이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께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실로 마귀적인 제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고, 기도하며 요구하는 것은 대부분 이런 부류의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한 때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들러 온 적도 있습니다. [그분의 친지들이 이것을 듣고 그분을 붙들러 나오니 이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가 제 정신이 아니다, 하였음이더라.](막3:21). 주님이 설교하시는 곳에 나타난 적도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려고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눅8:19). 남들이 다 믿지 않아도 형제들은 믿어 주어야 힘이 나는 법인데 주님의 육신의 형제들, 친지들은 주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형제들, 친지들을 구령하지 못해 가슴을 졸이고, 나의 믿음을 탓할 때가 있지만 우리 주님조차도 자신의 형제들과 친지들에게 전혀 영적 감화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셨다는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전하는 사람의 문제보다 받아 들이는 쪽에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6절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6). 주님은 몇 십년을 같이 살아온 육신의 형제들을 누구보다 먼저 구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장 먼저 성경을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믿지 않는 형제들을 향하여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때는 무엇입니까? 왕국의 때는 아닙니다. 침례인 요한과 주님은 공히 “때가 찼고 하늘(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15). 추수할 때도 아닙니다. 추수할 때는 이미 찼을 뿐 아니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막4:229). 주님께서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내 때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를 가리킵니다. 육신의 형제들이 이 일들을 행하여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하셨지만 주님은 병자를 일으키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세상에 자신을 밝히 드러내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이어야지 병이 낫고, 빵을 먹은 사건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생각나는 첫 번째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나환자가 나은 것이 아닙니다. 과부의 아들이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달림으로써 세상에 드러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즙으로 바꿈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하시매](요2:4). 육신의 형제들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오병이의 표적을 유대에 올라가서 일으킬 것을 요구했지만 이 역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때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도시로 들어가 이런 사람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네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마26:18).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는 말씀은 너희는 언제든지 너희 방식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기회만 되면 자신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처럼 때에 맞추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일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만 되면 그것이 때인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고 언제나 드러내려 합니다. 반면 주님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시고 숨기십니다. 초림 때 주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드러내는 사역이 아니라 수치를 받으시고, 모욕을 받으시는 그런 사역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실 때는 십자가, 부활, 재림입니다. 세상에 자신을 밝히 드러내 보이는 사건은 지상 재림입니다. 이 때가 되기 전까지 주님은 스스로 자신을 밝히 드러내시지 않으십니다. 부활 역시 제자들에게 은밀히 드러내셨고, 500여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나타나신 것을 제외하고는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공중 재림 역시 은밀합니다. 그러나 지상 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볼 것입니다. 육신의 형제들이 주님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요구한 것에 대한 답변은 ‘먼 훗날 재림 때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7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위들을 악하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라.](7). 주님은 제자들이 아닌 육신의 형제들에게 놀라운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형제들은 주님이 세상에 드러나고, 인정받고, 명성을 떨쳐서 메시야로 인정받기를 요구했지만 주님은 ‘세상이 나를 미워하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주님을 미워합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서 수군거립니다. 육신의 형제들은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인정받고 칭찬받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악하다고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야 할 것들이라고 말씀하시며, 육은 아무 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한다고 증거하시는데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고 또 빛으로 나아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 행위를 책망 받을까 염려함이요,](요3:20).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빛으로 나아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너희가 아느니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하였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다 미워합니다. 성경이든 교회이든 성도이든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들은 미움을 받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미움받을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무릇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지 않는 다는 것은 내가 세상과 동류(同類)임을 세상이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자신을 드러낼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움만 받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사도 바울 등 누구도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열 두 사도 중에 누가 술주정뱅이요, 남색자였던 소크라테스만큼 인정을 받습니까? 오히려 그들을 미워해서 죽여 버렸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니이다.](요17:14).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mark입니다. 세상은 지독히도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행하지 못한 일들을 그들 가운데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다 보았고 또 미워하였느니라.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바,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나이다, 한 말씀이 성취되게 하려 함이라.](요15:23-25). 요한복음에는 주님과 세상의 관계가 원수지간이요, 미움을 발산하는 관계임을 계속적으로 강조합니다.
8절입니다. [너희는 이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완전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 주님은 육신의 형제들에게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아직 올라 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장막절에 예루살렘을 가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들과 이번에 함께 올라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원하는대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 보이려는 목적으로 올라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나하노라’는 말씀은 부주의하게 성경을 읽는 독자들이 흔히 10절 말씀과 오해하여주님이 올라 가지 않는다고 하셨다가 비밀리에 올라가셨느냐? 며 오해를 합니다. 주님은 이번 장막절에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육신의 형제들,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자신을 드러내며 올라갈 때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올라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명절 자체를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신 분이십니다.
9절입니다. [이 말씀들을 하시고 그분께서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9). 이제 주님은 혼자 남으셨습니다. 사람들을 모두 먼저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시고 혼자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다가 후에 혼자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셨습니다. 주님의 모든 일은 하나님과 시간표에 맞추어 차례대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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