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시인하자 -
말씀: 요 7:10-16 요절: 요 7:
주님은 장막절에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을 메시야로 드러내 보일 것을 촉구하는 육신의 동생들과 떨어져 홀로 갈릴리에 계셨습니다. 유대 민족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이며, 모든 남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초막을 짓고 거룩한 집회를 가지며, 즐거워하는 명절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형제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형제들은 주님을 정치적으로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드러나게 할 의도와 목적을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육신의 형제들을 먼저 올라가도록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과 동행하지 않으십니다. 육신의 형제들이라도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주님께서 동행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왕 올라가야 할 예루살렘 행이라면 같이 가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누구와 동행하십니까? 믿는 자들과 동행하십니다. 에녹을 보십시오. [므두셀라를 낳은 뒤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며 아들딸들을 낳았으며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오 년이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창5:22-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신약 성경에 에녹이 어떻게 주님과 동행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사람들이/ 찾지 못하였느니라. 이는 그가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가졌음이니라.](히11:5).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히11:6)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에녹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에녹은 대언자였습니다. 말씀을 증거했고, 주님의 오심을 선포했습니다(유1:14).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창6:9).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자기 세대에서 완전한 자더니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창6:9). 아브라함과 이삭 역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축복하며 이르되,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동행하던 하나님, 이 날까지 나의 전 생애 동안 나를 먹이신 하나님](창48:15).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함께 걸으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사 한 참을 동행하셨습니다(눅24:15). 그러나 자신의 형제들과는 함께 올라가지 않으셨고, 아직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동행하지 않는 인생들을 보십시오. 육신으로는 형제지간이지만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자기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뒤에 올라가시되 드러내지 아니하고 은밀히 가시니라.](10). 이 구절은 8-9절과 연관 지어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는가? 아니면 양동 작전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육신의 형제들이 '세상에 자신을 과시'하라는 제안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사탄이 주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고 한 것이나 육신의 형제들이 자신을 드러내어 인정받아 보라는 것이나 동일한 시험입니다. 주님은 마귀의 제안을 거절했듯이, 육신의 형제들의 제안 역시 거절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려는 욕심 때문에 타락하고 망합니다. 주님은 형제들 앞에서 [너희는 이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완전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은 그때에 올라가지 않으시고 갈릴리에 혼자 계셨습니다. 형제들의 강력한 권고와 불평을 들으면서도 주님은 ‘내 때가 아직 완전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형제들의 제안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일은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 때입니다. 주님은 그 동안 세 차례의 유월절을 모두 유대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올라가신 적은 없습니다. 주님은 율법 아래에서 나셔서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유대에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올라 가셨습니다. 내 때가 완전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말씀이 주님께서 장막절에 예루살렘을 향해 공개적으로 입성하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만약 이 때에 나귀를 타고 '호산나...' 찬송을 받으면서 입성하시면 성경의 예언은 모두 깨지고 맙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이 아직 올라가시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신들만 먼저 올라갔고, 주님은 후에 따로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말은 요즘 상황으로 알기 쉽게 바꾸면, “이번 명절에는 헬기 한 대 타고 비서들을 데리고 형님이 얼마나 출세했는지 고향 사람들에게 보여 줍시다.”고 제안할 때, “나는 그렇게는 안 간다. 너희나 가라.” 한 다음에 나중에 혼자 버스타고 조용히 내려오는 형님의 모습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잘못 읽고, 주님께서 왜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꾸시는가? 거짓말을 하셨는가? 의아해하는 분들이 없기 바랍니다.
주님은 잎이 아니라 열매를 보시며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보시며, 결과 이전에 과정과 동기를 보십니다. 주님은 행동 이전에 마음을 보십니다. 주님은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11절입니다. [그 뒤 유대인들이 그 명절에 그분을 찾으며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11). 유대인들은 명절에 예수님이 올라 와 있을 것이라고 믿고 바로 찾고 있습니다. 유대 남자라면 누구나 올라오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당대에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었는지 확연히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말 육신의 형제들 말대로 이런 곳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병자를 살린다면 주님은 단번에 일약 스타로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시골 구석에서도 주님을 강제로 왕으로 삼겠다고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판국에 예루살렘에서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부지런히 주님을 찾습니다. 기대감도 있고, 호기심도 있지만 믿음은 없습니다. 이들의 물음은 ‘동방 박사들’이 주님을 찾듯이 찾는 그런 물음이 아닙니다. [이르되, 유대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2:2). 이 물음은 구도자의 물음입니다. 이들은 경배하기 위해 주님을 찾았습니다. 믿고, 경배하기 위해 주님을 찾는다면 주님은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주] 네 하나님을 찾게 되리니 만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리라.](신4:29). [또 너희가 마음을 다하여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날 것이라.](렘29:13). 그러나 유대의 명절에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경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경거리로 생각하여 찾습니다. 소문을 확인할 겸 직접 얼굴이라도 한 번 보자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그분에 대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수군거림이 많으니 이는 어떤 이들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이들은, 아니라. 그가 사람들을 속인다, 하였음이라.](12). 군중들이 아는 주님의 모습은 언제나 부정확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의 조명과 계시를 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아는 것은 계시로 말미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나니 그 까닭은 이것을 네게 계시한 이가 혈과 육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마16:17). 이 지식은 모든 사람들이 아무 때나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말하는 자는 아무도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님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이 두 구절을 볼 때 예수님을 주님으로 아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요, 성령님을 힘은 결과란 사실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당시 사람들과 똑같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니, 이스라엘의 민족 종교를 세계 종교로 전환시킨 사람이니, 민중의 혁명가라느니...하면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니라. 그가 사람들을 속인다.’고 말합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아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평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한 민중들의 이런 왜곡된 평가와 지식, 수군거림을 일거에 고쳐 주시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으셨으며,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극단적인 사람들의 비난과 욕설과 저주가 쏟아질 때나, 그와는 반대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라는 찬송이나 주님에게는 매 한 가지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의 비난에 마음 상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만을 구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자세요,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13절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그분에 대하여 드러나게 말하는 자가 없더라.](13). 여기서 유대인들이란 종교 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들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 하에서도 자치권을 인정받아 입법, 사법, 행정을 총괄할 뿐 아니라 종교적 독점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는 출회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회당에서 내쫓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두려워하였음이더라.](요9:22). 유대인들은 마치 종교 경찰과 같았습니다. 당시 통치자들까지도 이들을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두머리 치리자들 중에서도 그분을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로 인하여 그분을 시인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회당에서 쫓겨날까 염려하였음이요,](요12:42). 우두머리 치리자들이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할 정도였으니 일반 평민들은 달리 말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리새인들이 출회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믿는 자는’이 아니라 ‘시인하는 자는’입니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는 데는 희생이 따르지 않을지라도 입으로 시인하는 데는 반드시 희생이 따릅니다. 우리는 침례를 받음으로 주님을 공개적으로 시인할 수 있습니다. 간증을 함으로써 주님을 시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주님을 시인할 수 있습니다. 나의 행위를 통해서 주님을 공개적으로 시인할 수 있습니다. 시인한다는 것은 고백(confess)한다는 말입니다. 시인(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과 시인하는 것은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 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니라.](롬10:9-10).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10:32~33). 마음으로는 믿지만 입으로는 시인하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세 차례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로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사랑을 다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세 차례 시인해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히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했습니다. 성도가 성령 충만하게 되면 주님을 시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위로를 받고 사랑 안에서 서로 결합하여 전적으로 충만하고 확실한 깨달음에 이르고 하나님과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신비를 시인하게 하려 함이라.](골2:2). 믿음은 우리 안에 주어진 주님의 은혜와 은사들을 서로 시인할 때 효력 있게 됩니다. [이것은 너의 믿음을 나누는 일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 안에 있게 된 모든 선한 것을 시인함으로 효력 있게 하려 함이라.](몬1:6).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방법 역시 시인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그것이 오리라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2-3). 믿는 것이 아니라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4:15). 입으로 주님을 시인하십시오. 감사와 찬양, 예배는 모두 고백(시인)의 형태를 띠어야 합니다. 주님이 사역하시던 당대에 마음으로 주님을 믿었지만 바리새인들이 두려워서 시인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서나 언제나 주님을 시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립니다(잠29:25).
14절입니다. [이제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14). 주님의 주요 사역은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펼쳐 보십시오. 주님의 사역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쉼없이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장마다 주님이 가르치신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님께서 즉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니 이는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셨음이더라.](막1:21-22). 주님은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고, 광야에서도 가르치시고,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바닷가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그분께로 모여드니 그분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막2:13). 주님은 어디서나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대학이나 단체들을 찾아나셔서 강연회를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서 계신 그곳이 곧 강당이요, 교실이었습니다. 삶의 현장이 주님이 가르치시는 곳이요, 우리는 배움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있는 그곳이 가르침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매 큰 무리가 그분께로 모여들거늘 그분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땅에 있더니 그분께서 비유로 많은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시며 자신의 가르침으로 그들에게 이르시되,](막4:1-2). 대규모 야외 설교는 부흥회가 아니라 성경 강연회(사경회)였습니다. 주님은 성경을 강론하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부흥사가 아니라 성경 교사였습니다. 주님은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한 개인을 향해서도 말씀을 가르치셨고, 광야에서처럼 수만명의 군중들 앞에서도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선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선한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니 너희는 내 법을 버리지 말라.](잠4:2). 안식일에는 동네의 회당에 들어 가셔서 적은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그분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매 많은 사람들이 듣고 깜짝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그가 받은 지혜가 어떠하기에 그의 손으로 이런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느냐?](막6:2). 주님의 가르침은 놀라왔고, 사람들은 경이로워했습니다.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2:2).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는 직접 마을을 순회하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이상히 여기시고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막6:6). 주님의 가르침은 학교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현장 중심, 백성 중심이었습니다. 주님은 단체를 조직하지 않으셨고, 학교를 세우지 않으셨지만 부지런히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오사 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으므로 불쌍히 여기사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더라.](막6:34). 가르쳤다는 말은 성경 교육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전파했다. 외쳤다’의 차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공부해야 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아내와 자식부터 시작해서 누군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크리스천은 예외 없이 왕같은 제사장이듯이 예외 없이 모두 다 전도자이며, 다 교사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네 구속자(救贖者)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는 너를 가르쳐 유익하게 하고 네가 마땅히 갈 길로 너를 인도하는 [주] 네 하나님이라.](사48:17).
다시 14절을 보십시오. [이제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14). 장막절이란 명절은 재림을 예표하는 명절입니다. 일주일간 지속되는 명절은 즐거운 축제였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주님은 성전에 올라오셔서 희생제물을 파는 장사꾼들, 환전상들이 하는 짓을 보고 분노하셨습니다. 그 때 주님은 진정한 성전인 자신의 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요2:19). 두 번째 성전에 올라오셨을 때는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이번에 성전에 올라오셔서는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다음에 성전에 올라오실 때는 죽으십니다.
15절입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매](15). 주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서 배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배우면 사람의 범주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누구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배우셔야 할 일이 없습니다. 사람은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삶의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반복을 통해서 익혀야 합니다. 실수와 실패, 고난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누가 [주]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분의 모사(謀士)가 되어 그분을 가르쳤느냐? 그분께서 누구와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분께 교훈을 주었으며 의의 길로 그분을 가르쳤으며 그분께 지식을 가르치고 명철(明哲)의 길을 보여 주었느냐?](사40:13-14). 주님이 당대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 서기관들에게 성경을 배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12살 때 주님은 성전에 상주하던 율법 박사들을 상대로 자신이 성경의 저자요, 해석자임을 보이신 적이 있습니다. [사흘 뒤에 그분을 /성/전에서 발견한즉 그분께서 박사들 한가운데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분께서 깨닫고 답변하시는 것들로 인하여 깜짝 놀라더라.] (눅2:46~47).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세운 랍비 대학이나 선지자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엄격한 학파의 가말리엘이나 당대의 석학들의 제자로 있던 사람도 아닌 사람이 성경을 권위 있게, 은혜롭게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매](15). 주님보다 성경을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의 입에서는 은혜로운 말씀이 나왔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음이더라.](마7:29). 영적 권위가 있는 가르침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대부분 갈릴리 어부에 촌뜨기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관한한 그들은 어떤 율법 박사들보다 더 능통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그들이 본래 학문 없는 무식한 사람들인 줄로 알았으므로 이상히 여기며 또 그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줄도 알게 되고](행4:13).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한 설교를 보면 구약 성경을 완전히 관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을 보십시오. 창세기부터 구약 전권을 요약하며 메시야를 증거 합니다. 이런 논리력과 해박한 성경 지식은 결코 신학교에서 배울 수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사람들은 견해를 전합니다. 학설을 전합니다. 의견(생각)과 사상을 전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은 견해가 학설이나 사상이 아니라 말씀이요, 확신입니다. 제자들은 어떤 견해를 준 것이 아니라 말씀을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배우고 공부함으로써 어떤 명문 대학이나 최고 학부를 나온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뛰어난 명철을 소유하게 됩니다.
정규 학교에서 신학, 철학, 목회학, 교육학 등을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성도들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19:7-8은 성경의 4대 기능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① 혼을 회심(回心)시키고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② 지혜롭게 하며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③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④ 눈을 밝게 하는도다.] (시19:7~8). 혼의 회심, 지혜롭게 함, 마음을 기쁘게 함, 눈을 밝힘. 이것이 시편 19편에서 언급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4가지 유익이며, 기능입니다.
① 혼을 회심시킨다. 성경은 누구도,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데 ‘혼의 회심’입니다. 말씀 없이는 회심이 없습니다. 말씀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라 후회입니다. 죄가 무엇이며, 죄의 상태, 죄의 결과, 죄의 해결책, 죄인의 종말 등에 대한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으며,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나 구도자나 종교인들이 평생을 수행하고 정진하며 연구해도 결코 알 수 없는 이런 지식들을 학문도 없고, 따로 배운 적도 없는 사람들이 환히 알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통해 지혜를 얻었고 회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혼을 회심시켜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줍니다. [또 어린아이때부터 네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딤후3:15).
② 지혜롭게 한다.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주의 명령들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주께서 그것들을 통해 나를 내 원수들보다 지혜롭게 하셨나이다. 주의 증거들이 나의 묵상이 되므로 나의 모든 스승보다 더 많은 명철이 내게 있으며](시119:98-99). 다윗은 자신의 지혜와 명철이 오직 주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위대한 장군으로, 통치자로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치리하고 음악과 시에 능통하였으며, 백성들을 공평하게 재판할 수 있었던 것은 카리스마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항상 주의 명령들이 함께 있었고, 주의 증거들을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아무리 무식한 사람도 무식한 상태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말씀은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IQ를 개발하고, EQ를 개발하는 일은 식생활 개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루어집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미련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119:130). 말씀을 내 안에 두면 그 말씀은 명철을 줍니다. [그러나 사람 안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영감(靈感)이 사람들에게 명철(明哲)을 주시나니](욥32:8). 전능자의 영감/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딤후3:16a).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지혜롭게 되고, 명철을 얻는 것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주]께서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자신의 입에서 내시기 때문이로다.](잠2:6). 주님은 자신의 백성을 무지와 무식, 어둠 가운데 두시지 않습니다. 반면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게 됩니다. [지혜로운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놀라며 붙잡히는도다. 보라, 그들이 [주]의 말을 거절하였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겠느냐?] (렘8:9)
③ 마음을 기쁘게 한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고역이 아니라 큰 기쁨입니다.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기 때문이니이다.](렘15:16). 개그 프로그램이나 코메디 프로그램, 썰렁한 유머나 영화, 소설, 만화를 보면서 웃는 것 외에는 웃을 일이 없는 이 시대에 성경 공부는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영원한 유산으로 삼았사오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내 마음의 기쁨이기 때문이니이다.](시119:111). 성경 공부는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최대한 선사합니다. [많은 노략물을 얻은 사람같이 나는 주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나이다.](시119:162). 마음에 근심과 염려가 있을 때에도 말씀을 통해 기쁨이 옵니다. [사람의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그것이 마음을 웅크리게 하나 선한 말은 마음을 기쁘게 하느니라.](잠12:25). 주님의 말씀은 선한 말씀입니다.
④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눈을 밝게 합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지각의 눈입니다. 주님은 눈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어둠에서 빛으로, ....](행26:18). 에덴의 동산에서 여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에야 눈이 밝아졌지만 그들이 본 것은 벌거벗음의 수치뿐이었습니다. 주의 명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와 비교할 수 없는 밝은 눈을 줍니다. 요나단은 벌집에서 꿀을 떠 먹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맹세로 백성에게 명할 때에 듣지 못하였더라. 그러므로 그가 손에 든 막대기 끝을 내밀어 벌집에 담가 자기 손을 가져다가 입에 대니 그 눈이 밝아졌더라.](삼상14:27). 요나단 역시 눈이 밝아졌지만 육신의 눈이었습니다. 엘리사는 기도하여 게하시의 눈을 열어 주었는데 영적인 눈이었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여시사 보게 하옵소서, 하니 [주]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보라,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합니다. [너희의 지각(知覺)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눈이 밝혀진 사람들은 당연히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어디에서 배웠느냐? 고 놀라기만 할 뿐입니다.
1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니라.](16). 주님은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요, 위로부터 난 것입니다. [이는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이를 것과 말할 것을 친히 명령으로 주셨음이니](요12:49).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이 단지 놀라기만 하고,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는 설교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간 듣는 설교는 목사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저의 견해나 생각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이 우리의 말로 들으면 그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 기원을 둔 교리나 학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형제들아, 오직 내가 너희에게 확실히 알게 하노니 내가 선포한 복음은 사람을 따라 난 것이 아니니라.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1:11~12). 이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견해는 또 다른 사람의 견해로 반박될 수 있고, 엎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확신은 그 누구도, 무엇도 바꿀 수 없으며 흔들릴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 점에서 말씀을 어떻게 듣고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림은 너희가 우리에게서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들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느니라.](살전2:13).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말씀의 능력이 내 안에서 살아서 활동력있게 자라나며, 성장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설교자의 말이나 견해로 듣는 사람은 누구도 말씀의 은혜와 권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그 선포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결합되지 아니하였음이라.](히4:2).
주님의 가르침에 놀라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거나 ‘사람들이 모두 나의 설교에 놀라는군!’ 하면서 만족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반응은 거품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람의 가르침이 아니란 사실을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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