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뜻을 아는 법 -
말씀: 요 7:17-24
요절: 요 7:17,24
주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것임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성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주님 자신의 독창적인 내용이요, 주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걸출한 석학이요, 종교 창시자요, 위대한 사상가요, 불세출의 영웅은 될 수 있을지언정 생명의 말씀이 아니며, 진리의 말씀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자신의 말이라면 그 가르침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하늘의 하나님의 말씀인지 단지 위대한 종교 예언가의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 메시야로 자처하는 자칭 메시야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구약에는 대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하는지 스스로 지어내어서 하는 말인지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신명기 18:20-22을 보십시오. [그러나 만일 어떤 대언자가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자기 뜻대로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혹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대언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주]께서 이르시지 않은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니 만일 대언자가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그 일이 뒤따라 일어나지도 않고 성취되지도 않으면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대언자가 자기 뜻대로 말한 것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신18:20~22).
거짓 대언자는 첫째, 자기 뜻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명령하지 않는 말을 합니다. 이런 자는 자신들의 사상이나 의견을 마치 신적 권위를 부여 받아 하는 말인 것처럼 태연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강단에서 행해지는 많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구분하고자 한다면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속기 쉽습니다.
둘째,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가르침이 성경이 아니라 어떤 학자의 말이나 전통이나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마치 성경 말씀인 것처럼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음에도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보다 어떤 사람들, 학자들의 이름이 훨씬 많이 나오는 것을 듣고 아연실색(啞然失色)한 적이 있습니다.
셋째, 말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의 증거가 대언의 영이기 때문이라, 하더라.](계19:10b)고 했듯이 주님의 모든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오늘날 흔히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 투시의 은사를 받았다는 등의 은사론을 들먹이며 말을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이 하나도 제 때에 성취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들은 점치는 영에 사로잡힌 것이지 결코 예언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위의 세 가지 방법으로 주님을 시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주님이 자기 뜻대로 하는 말을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먹는 것인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인지, 하신 말씀이 전혀 성취되지 않는지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주님은 ‘겉모양이 아닌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주님을 판단해 보면 주님은 구약에서 거룩한 대언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이 틀림없습니다.
17절입니다. [사람이 그분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하리라(X).-알리라,KJV](17). 주님은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스스로 하는 말인지 구분하는 간단한 시험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if any man...)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는 주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진 것입니다. 병아리 감별사가 병아리의 암수를 구분하듯이 여러분은 쉽게 주님의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주님 스스로 하는 말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의 의지가 주님의 뜻을 행하려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영적 조명을 주시는 일이 거의 없으며, 진리로 가르치시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고, 주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를 지닌 혼들에게는 주님께서 풍성한 말씀의 조명과 계시를 허락하십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한다면 주님께서 주님은 자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할텐데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몰라서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등의 설교를 하기도 하고 그런 책자들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모르겠다, 상담을 한 후에도 모르겠다...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를 한 후에도 모르겠다. 온통 모르겠다 뿐입니다. 왜 모릅니까? 주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서 주님의 뜻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뜻은 자신이 스스로 알 수 있는 일인데,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구합니다. ‘주님, 이번에 상가를 분양받아 곰탕집을 차리려고 합니다. 성공할 수 있을까요?’이런 질문을 ‘하나님, 제가 곰탕집을 차리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이렇게 돌려서 기도합니다. 자신이 세운 뜻을 주님의 뜻이냐고 묻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하소연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기꺼이 말씀의 조명을 주시고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지만 자신의 뜻을 세워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며 나아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계획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구분할 분별력이 생깁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리니 온유한 자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시리로다.](시25:9). 온유한 자란 자기 고집, 자기 주장을 꺾고 성경에 굴복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온유한 자란 의미는 뼈가 없는 연체 동물처럼 흐느적 거리는 사람,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아무 것이나 O.K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주님께 기꺼이 순종하는 자들이 온유한 자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공의로 지도하시고, 자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를 훈계하며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가르치고 내 눈으로 너를 지도하리로다.](시32:8). 주님의 뜻을 행할 의지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영적 분별력이 생기며,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18절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자 곧 그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를 통해 우리는 그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그 자신에게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기 영광을 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분의 말을 해야하며,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먼 나라에 보냄을 받은 사신이 자기를 보낸 왕의 말은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면 듣는 사람도 황당하고, 보낸 사람도 황당합니다. 아브라함의 보냄을 받았던 엘리에셀을 보십시오. 그는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단 한 마디도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의 주인 아브라함의 말만 했습니다. 이것이 종의 자세요, 보냄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이는 오늘날 설교자들이나 주의 사역자들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준엄한 경고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기의 영광만 구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백성들은 예수님이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가? 보내신 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가를 잘 살펴 봄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의 진위(眞僞)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가 볼 때 진실로 크고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바울은 자신의 영광을 단 한번도 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내가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이기 때문이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치 못한 자로되](고전15:9). 사도 바울은 자신을 낮추었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사도들 가운데 자신을 가장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보다 자신을 더 낮추었습니다. [모든 성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富饒)함을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하게 하시고] (엡3:8). 침례인 요한 역시 그렇습니다.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어떤 사역자가 진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인가의 여부는 그가 자신을 높이는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가? 등을 살펴 보면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판별할 수 있습니다.
다시 18절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자 곧 그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 주님은 백성들에게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란 사실을 선포하면서 스스로 백성들이 판단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판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자 곧 그는 참되니’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영광을 구할 때 죄에 빠지고, 거짓되고, 왜곡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그는 참됩니다. 그 속에는 불의가 없습니다. 자고로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 주님이 주실 영광의 왕관에 관심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되어야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아니하노라.](요5:41).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영광을/ 구하고 심판하시는 이가 계시느니라.](요8:50). 주님께서 단 한 차례라도 자신의 영광을 구하신 적이 있습니까?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자신의 영광을 구했던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어김없이 패배했고, 수치를 맛보았습니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한 것같이 사람들이 자기 영광만을 구하는 것은 영광이 아니니라.](잠25:27). 우리는 아무도 자기 영광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19절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느냐? 하시니](19). 주님은 모세의 제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의 죄악을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욕하며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요9:28). 모세의 제자라면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과 같이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모세의 제자라고 자랑했지만 아브라함과도 모세와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어김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2:23). 주님은 이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율법대로 판단해 보면 주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율법을 사정없이 파괴했고, 어겼습니다. 간단한 예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또한 어찌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느냐?](마15:3). 그들은 율법대신 조상들이 묶어 놓은 탈무드를 신봉했습니다. 성경이 최종 권위가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지만 이들은 교묘하게 율법을 어기는 장치를 마련했는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아도 /의무를/ 면제받으리라, 하여 너희 전통으로 이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가 되게 하였음이로다.](마15:6). 이런 예는 허다합니다. 모세가 율법을 주었지만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 이들이 얼마나 말씀과 동떨어진 가치관을 가지고 삶을 살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종교 행위가 헛된 경배요, 하나님의 명령을 버린 것이요,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임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십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에 대하여 잘 대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 곧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너희가 행하는 바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이라.] (막7:6~8). 율법사들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을 얻는 길이요, 진리의 지식이 가득 찬 보화를 여는 열쇠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반성경적인 전통들을 폐지하고, 그런 관습들을 성경에 맞게 확립하는 대신 자신들의 전통으로 성경을 폐지해 버린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들이여! 이는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가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또 들어가는 자들도 막았음이라, 하시니라.](눅11:52). 모세가 준 율법은 생명을 살리는 주님의 법도입니다. 그러나 이들인 한 일이 무엇입니까?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개종자(改宗者)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만들면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기 때문이라.](마23:15). 사람을 죽이고 지옥 자식을 만들었습니다. 유대교는 지옥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교는 개종자를 모두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이들이 살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7:1에 이미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5절에 따르면 백성들 사이에서도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란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는 공개적인 비밀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면전에서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느냐? 하시니](19b)고 물으셨습니다. 사람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일은 십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0절입니다. [사람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마귀가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느냐? 하매](20).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명절을 지키러 천하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인지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25). 졸지에 주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은 마귀가 들렸도다’란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는 마귀들렸다는 모욕을 받고, 바리새인들로부터는 바알세붑이란 말을 들었습니다(마10:25).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 자가 마귀들의 통치자 바알세붑을 힘입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내쫓지 못하느니라, 하거늘](마12:24). 주님은 마귀들린 자요, 마귀들의 왕이란 극심한 모욕을 당했습니다. 서기관들은 무엇이라고 증언합니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이르되, 그가 바알세붑에 사로잡혀 마귀들의 통치자를 힘입어 마귀들을 내쫓는다, 하니](막3:22). 바알세붑에 사로잡혔다고 말합니다. 마귀를 쫓아내시던 주님께서 마귀들린 사람, 바알세붑, 바알세붑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인식되고, 그렇게 낙인찍히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는 이 처참한 모습을 여러분은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그마한 모욕에도 참지 못하고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자존심을 무시했다, 밟았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시험에 드는 형제들이 수두룩한 교회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어떤 수치와 모욕도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이렇게 대접했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높여 주고, 대접해 줄 리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기독교는 이미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이 머무는 교회가 아니며, 세상에서 높임받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제자가 자기 스승처럼 되고 종이 자기 주인처럼 되면 족하도다. 그들이 그 집 주인을 바알세붑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안 사람들이랴?](마10:25). 주님은 제자들이 모욕을 받을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받는 수치와 모욕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며](벧전2:22-23). 주님께서 보이신 본을 따라 모든 성도들은 주를 위해 당하는 모욕과 수치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였는데 너희가 다 놀라워 하는도다.](21). 주님께서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였는데’란 말씀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말합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일 가운데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 자체가 ‘Wonderful’(놀라운)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병을 고친 일에 관심이 있고, 병이 나은 일에 놀랐지만 그 병을 고치신 주님이 누구신가를 탐구하고, 그 정체를 규명하였더라면 더욱 놀랐을 것입니다. 주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은 그 일 자체에 우리의 관심을 묶어 두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22절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나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22). 할례는 모세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 제정되었습니다(창17:9-11). 문제는 난지 8일만에 사내 아이에게 할례를 주는 법을 준수하기 위해서 그 날이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안식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법은 행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은 수행되어야 합니다. 할례는 안식일 법보다 상위법입니다.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듯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23절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거늘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 몸을 온전하게 한 것으로 인해 너희가 내게 화를 내느냐?](23). 안식일에 할례를 받는 것은 일종의 수술이며, 멀쩡한 사람의 포피(包皮)를 베어냄으로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안식일에라도 행했다면 반대로 병든 사람을 멀쩡하게 하는 일은 더욱 행해야 하는 일인데 왜 너희는 내게 화를 내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매우 논리정연하게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과 잘못된 성경 적용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도 살펴보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갈6:1). 여러분들은 여러분을 마귀들렸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여러분이 한 일에 대해서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향해 이런 온유의 영으로 그런 자들을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 적용을 잘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무조건 믿음, 믿음만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믿는 바를 알아야 하고, 아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와 유사한 장면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 악을 행하는 것이 맞느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맞느냐, 죽이는 것이 맞느냐? 하시거늘 그들이 잠잠하매 그들의 마음이 완악(頑惡)하므로 그분께서 근심하사 분노하시며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앞으로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다른 손과 같이 온전하게 회복되니라.] (막3:4~5).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율법 준수라고 믿었지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율법에 맞는 일임을 주님을 그들에게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이런 진리를 행하기 위해서는 거짓과 오류를 대항하여 단호히 일어서야 하며, 때로는 생명의 위협이 뒤따릅니다.
24절입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24). 주님은 자신의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겉모습은 상해 있습니다. 주님은 얼마나 상해 있던지 나이 30을 갓 넘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50세 정도로 보았습니다(요8:57). 주님의 외모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카리스마가 넘치거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임이라. 그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53:2). 겉모양으로 판단한다면 주님은 영락없는 시골 촌뜨기인지도 모릅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독성이 강한 버섯일수록 아름다운 색을 띠고 있습니다. 거짓 대언자일수록 화려한 언변과 사람을 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육신, 주님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했기 때문에 주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요8:15). 사람들은 일단 눈에 보이는대로, 들리는대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속 중심을 보십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이런 잘못을 질책했습니다. [너희는 겉모습대로 사물을 보느냐?](고후10:7a). 겉모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며, 중심이며, 동기이며, 그 사람의 됨됨이입니다. 주님을 육신으로 알아서는 유대의 젊은 청년이요, 당시의 기득권층에 반발하다 뜻을 펼치지 못한 채 3년 반 만에 죽은 사람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니 참으로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분을 더 이상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주님은 무리들을 향해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의로운 판단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들을 배울 때에는 올바른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119: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들로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시119:62),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들을 지키리라 맹세하였사오니 그것을 이행하리이다.](시119:106), [주의 의로운 판단들로 인하여 내가 하루에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시119:164).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판단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24)는 말씀은 나의 외모, 학력, 가문, 출신 지역, 함께 다니는 제자들 등으로 나를 판단하지 말고 성경을 찾아보고, 성경의 말씀을 통해 나를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며, 성경을 통해 판단한다면 너희는 내가 메시야요, 구약에서 예언되어 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행하는 이적이 마귀들의 통치자 바알세붑을 힘입어서 행한 것인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행한 것인지, 지금 하는 말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지 아니면 스스로 하는 말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탐구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니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하느니라.](요5:39). 성경을 통해서 아는 주님만이 바르게 아는 것이며, 바른 판단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며, 예수님은 성경을 증거합니다.
**성경과 예수의 관계 증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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