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말씀: 요 5:43-47 요절: 요 5:43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신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이란 뜻으로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입니다. 구약에서는 왕이나 제사장, 대언자가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는 다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대언자들과 동일한 직무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세우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고후1:21). 사무엘이 다윗에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 그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하여야 하리라.](요일2:27). 이 시간 주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름 부으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았습니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을 주에게 부어 주의 동료들보다 높이셨나이다, 하시고](히1: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름 부으심을 받은 메시야입니다. 그리스도는 칭호이고 예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다른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 함을 너희가 들은 것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으니 이로써 우리가 지금이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루시퍼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었습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 역시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모방함으로써 사람들을 속입니다. 의의 사역자로 가장(假裝)합니다(I고후11:15).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고후11:14). 남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남의 타이틀을 사칭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마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43절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 여기서 자기 이름으로 오는 다른 자란 누구입니까? 신, 구약은 모두 마지막 때에 나타날 “신비하고도 무서운 이 존재”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그의 이름은 “루시퍼”(사14:12), 앗시리아인(사10:5,12,24, 30:27-33), 작은 뿔(단7:8,8:9), 무서운 용모를 한 왕(단8:23), 장차 올 통치자(단9:26), 자기 마음대로 하는 왕(willful king-단11:36)입니다. 신약에 예언된 그의 이름은 “죄의 사람”이요, “멸망의 아들”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불법의 신비”, “저 사악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요 “짐승”(Beast-계13:1-8)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영접합니다. 이는 동일한 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는 속임수의 대가이기 때문에 속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속이는 자가 세상에 많이 들어왔음이니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라. 이런 자가 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요이1:7). 이미 이런 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에 그 큰 용이 내쫓기니 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천사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12:9). “온 세상을 속이는 자”가 바로 마귀입니다. 이들은 학교에서 철학, 과학이란 학문의 이름으로 학생들을 속입니다. 때로 교회나 신학교에 들어와 성도들과 신학생들을 속여 버립니다. T.V나 신문, 잡지, 책과 같은 언론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을 주입하기도 합니다. Hollywood의 영화들을 보십시오. 거기에 적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자기들의 가치관이 전환되고 속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종교란 이름으로 속입니다. 세상에서는 수 만개가 넘는 셀 수 없는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의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종교적 차별과 구분을 없애려고 하는 자들이 모두 마귀의 사역자들이며, 속이는 자들입니다. 지금 각 교회는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거짓 일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 내에 있는 사탄의 사역자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이는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사탄의 사역자들도 의의 사역자로 가장한다 하여도 결코 큰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주님은 사람들이 이런 자들을 영접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배척한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사탄은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빛을 본 사람들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빛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았습니다. 반면 마호메트는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빛을 보았습니다. 몰몬교를 창시한 요셉 스미스도 빛을 보았습니다. 이교도의 창시자 가운데 빛을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빛을 보았다는 사실 하나에 너무나 쉽게 속아 버렸습니다. 그 빛의 근원을 살펴 볼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빛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마귀를 분별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고소하고 죽이려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인 것을 선포하셨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선포하셨습니다. 간단한 예로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시니](요10:30),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매](요8:58)와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한 이름이신 I am(출3:14)이란 칭호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기에 자신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신 것은 자신이 아버지와 동등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인하여 더욱더 그분을 죽이고자 하니 그 까닭은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셨기 때문이더라.](요5:18).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면 자기 역시 하나님이란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자기 이름으로 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영접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던 것은 아버지께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기도할 때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들어 주십니다(요16:23-24). 모일 때 자신의 이름으로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한 가운데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그 이름으로 침례를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6).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이름 외에 다른 누구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기도하기를, [주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또 표적과 이적이 {주}의 거룩한 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허락하옵소서, 하더라.](행4:30)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은 구원자의 이름이요, 하나님의 이름이요, 우리가 그 이름으로 인해 박해를 받아야 할 이름이며(행9:16) 선포해야 할 이름입니다(행9:27).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말을 하고 일을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일입니다. 누가 구제 헌금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없고, 자기 이름만 나옵니다. 그것은 주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 내기를 좋아합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의 근거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이어야 합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교회, 자기 자신의 이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 널리 퍼졌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하셔서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2:7,8). 우리의 대장이시며, 구원의 근원이신 주님이 자신을 낮추었다면 그의 제자들의 삶의 자세는 너무나 자명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낮게 여기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적그리스도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높입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를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4). 이 세상에서 자기를 과시하고 뽐내는 사람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육은 자기를 드러내도록 부추기는데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교단을 장악한 결과이며, 이 시대의 문화가 적그리스도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내려오셨습니다. [이는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내려 왔음이니라.](요6:38). 내려오심 자체가 낮추시는 것입니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아래로부터, 바닥없는 구렁에서부터 올라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증거를 마칠 때에 바닥 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죽일 터인즉](계11:7).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바닥없는 구렁에서 올라오는 짐승 적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높아지려고 합니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영이 득세한 결과입니다. 성도들은 늘 자신을 더 숙이고 낮추어야 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고 배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결코 영광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영광을 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는 멸시를 당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니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강도 바라바를 예수보다 더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 십자가, 피의 속죄, 자기 부인과 같은 주님의 가르침을 빼 버리고 평화, 사랑, 영광, 축복을 설교하면 됩니다. 앞으로 성경에서 이런 것만 설교하는 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싫어하신 바 되고, 배척과 멸시를 받았지만 아버지 하나님께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주사]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가장 큰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지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가장 높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을 낮춤으로써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은혜를 기다릴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양식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자랑하고, 광고하며, 개성을 중시하고, 표현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지금의 시대 정신에서도 변함없이 존귀한 가치는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되<대적하시되-resisteth>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하시느니라.](약4:6). [주의 눈 앞에서 너희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겸손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시기 바랍니다(빌2:3-4).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빌2:5).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적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셔서 아버지께서 주신 양떼들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시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요10:14-15). 목자는 중동 지역에서 결코 환영받는 최고의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목자는 매우 천하고 힘들며, 위험한 직업이었습니다. 목자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현대인들은 목자라는 직업을 한가로운 목장에 양들을 풀어 두고, 풀피리나 불면서 한가하게 초원을 거니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직업인 줄 압니다. 양떼들이 있는 목초지에는 항상 야수들이 몰려들었고, 양들을 훔쳐가려는 도적과 강도들이 출몰했습니다. 풀이 부족할 때면 목자들은 적게는 수십 마일 많게는 몇 백마일 까지 여행하며 양들을 먹여야 했고, 밤에는 서리와 이슬을 맞아가며 양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는 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목자들은 모두 들에서 양떼를 지켰지 화로가 있는 실내에 있지 않았습니다(눅2:8). 목자는 집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양떼가 있는 그곳이 바로 자기가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노략질하기 위해 들끓는 험하고 거친 세상의 야수들과 도적들로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지금 바로 이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and, lo, I am with you always, even unto the end of the world. Amen.] (마28:20). 시제를 주목해서 보라. I am with you alway,- 현재형이다. 주님은 목자로서 지금도 저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는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진리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주님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절대 진리이십니다. 유교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공자는 평생 동안 이 진리를 듣고 싶어 소원했지만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 “朝楣면 夕死라도 可也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그는 일생동안 道를 찾아 나섰지만 정녕 도(道)를 듣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제자 중에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묻자, “산 것도 다 알지 못하는데 죽은 이후의 세계를 어찌 알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거리낌 없이 진리를 선포했으며, 이 생의 삶과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불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석가모니는 평생 도(道)를 찾아 수행에 수행을 거듭했지만 그가 안 것은 진리는 “없다(無)”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인 불교의 승려들은 항상 “無라, 無라”를 외치고 다닙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만약 이사야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면 진리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승려로 존경을 받고, 성인의 반열로 추앙을 받은 성철 스님은 죽기 전 “임종계”를 남기셨는데 그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그는 평생을 수행했지만 “진리”는 고사하고 자신이 죽어 지옥에 간다는 사실만 알고 간 것입니다.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고려 팔만대장경은 불교 철학의 핵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라마다경 38:8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荷時 爺素來 吾道 由無之燈也”(하시 야소래 오도 유무지등야). 그 뜻인즉 “언제가 예수님이 오시면 나의 가르침은 기름없는 등과 같으니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진리란 없다거나,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니...]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거짓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고자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8:44). 진리가 아닌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슬픔의 사람입니다. 이사야 53:3에 [그는 멸시를 당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애 동안 울었다는 구절은 찾아 볼 수 있어도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어떤 신앙 서적에서 예수님이 유머 감각이 많으셨다고 기술한 것을 보았지만 성경의 증거는 정반대로 “슬픔의 사람”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인생들의 수고와 비참함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들이 받게 될 엄중한 심판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들의 연약함을 보고 우셨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짧은 구절은 요한복음 11:35인데 [예수님께서 우시더라](Jesus wept)입니다. 성도들에게 기쁨의 면류관을 씌워주시기 위해 주님은 고통의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 주님은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우리를 왕으로 삼으시기 위해 주님은 종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주님은 죄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주님은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8:9).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저주가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하늘에 앉히기 위해 주님은 지옥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행한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슬픔의 사람으로 오신 주님을 싫어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채찍에 맞고, 수치스럽게 죽음을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는데, 주님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신비였습니다. [오직 신비에 쌓인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2:7~8).
예수 그리스도는 경건의 신비입니다.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말합니다.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딤전3:16). 기독교와 유대교, 회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기독교의 이름 아래 많은 종파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경건의 신비를 부정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성경에는 경건의 신비에 대한 교리가 가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란 선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확증해 주지만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란 단어 대신 “그”(he)란 대명사를 사용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불법의 신비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7에 [이는 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라. 다만 지금은 막고 있는 이가 있어 그 길에서 옮겨지기까지 막으리라.]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씨와 뱀의 씨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여자의 씨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뱀의 씨는 당연히 적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6:70에서 “너희 중의 하나는 마귀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형상이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란 것을 입증하는 말입니다.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나신 분이시니](골1:15).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눈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누구든지 죽기 때문입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임이니라.](출33:20). 주님 역시 증거하시기를,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에 대하여 증거하셨기 때문이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분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으며](요5:37)라고 합니다. 바울은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전6:16)했습니다. 사도 요한 역시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되 ....](요일4:12a)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일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요1:18).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빌립이 주님께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니](요14:8). 빌립의 이런 질문은 그리스도인이든 불신자이든 한 번은 해 보았을 질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싶은 욕망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심리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1:26,27).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아담은 자기 형상에 따라 아들을 낳았습니다(창5:3).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됩니다. 적그리스도은 짐승의 형상입니다(계13:15).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을 내게 주셨느니라.](마28:18).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권능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요5:19). 이는 예수님의 겸손을 드러낸 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는 일을 할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합니다. 말을 하든지, 감사를 하든지, 찬양을 하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의 권세는 용으로부터 옵니다.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으며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 권능과 자기 자리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계13:2). 하나님께서 의의 일군들을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시듯이, 용은 자기 일군들을 세우고, 자기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이상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차이점을 살펴보았습니다.<다른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그리스도 I,II 참조할 것>
우리는 이런 지식을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하는 것인지,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인지, 아니면 적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림을 받아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고 있지 않는지 잘 분별하고 힘써 의를 행하도록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4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 이 말씀은 다수가 진리가 아니란 평범한 진리를 깨우쳐 줍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이 받아 들였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받아 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좁은 문, 좁은 길을 걷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44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받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44). 사람들은 서로 인정해주고, 서로 칭찬해 주고 그렇게 삽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자들을 지혜가 없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자들과 감히 한 패가 되거나 혹은 그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오직 그들은 자기들을 기준으로 자기들을 판단하며 자기들 가운데서 자기들을 비교하니 지혜가 없는 자들이로다.](고후10:12). 조폭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칭찬합니다. “쟤는 마음이 너무 여려, 너무 착해! 사람을 잡아도 때리기만 하지 죽이지는 못해” 이러면서 칭찬합니다. 교도소에서 죄수들끼리 하는 말입니다. “나는 너무 순진해, 마음이 착한 것이 문제야” 이러면 상대방이 “맞아, 너는 너무 착한게 문제야!”라고 맞장구를 칩니다. 어느 패거리들도 자기 자신을 추천하고, 자기들을 기준으로 자기들을 비교합니다. 서로 영광을 받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으면 주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광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은 교만을 부추길 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높아지는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일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에 불과합니다. [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기 때문이라.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1:24). 일시적인 것입니다. 인기란 것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는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대언자들에게 이같이 행하였음이라.](눅6:26). “모든 사람이 칭찬하면 그 일은 성공이다, 출세한 것이다”가 아니라 화가 있으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통찰하고 계십니다. [또 그들이 사람들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사랑하였음이더라.](요12:43).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고, 깊은 친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의 영광, 사람의 칭찬을 더 추구하고 목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칭찬과 상급을 다 잃어버립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았으면 이미 자기 보상을 다 받은 것입니다(마6:2,5). [오직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니 이는 자기를 추천하는 자가 인정받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 추천하시는 자가 인정받기 때문이라.](고후10:17~18). 주께서 추천하시는 자, 주께서 칭찬하는 자, 주께서 높이는 자가 진실로 인정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신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더욱 낮추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영광을 받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갈1:10).
사도 바울은 이 점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여 줍니다. [오직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복음을 위탁받은 대로 우리가 말하노니 이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아무 때라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욕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께서 증거하시느니라.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부담을 줄 수도 있었지만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사람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살전2:4~6). 사람에게서는 일체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은밀한 일들, 마음의 의도를 다 살피시고 드러내심으로 칭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칭찬받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분께서 감추어진 어둠의 일들을 빛으로 밝히시고 마음의 의도들을 드러내시리니 그때에야 비로소 각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리라.](고전4:5).
45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신뢰하는 자 모세니라.](45). 모세는 율법의 수여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은 죄인들을 정죄합니다. 율법을 신뢰하지만 그 율법으로 인해 자신들이 죄인으로 정죄를 받고, 저주를 받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우리를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모세/의 말/을 믿었더라면 또 내 /말/을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6).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시편과 선지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아벨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이며, 요셉도 그러합니다. 출애굽기의 유월절 어린 양, 광야의 놋뱀 등은 완벽한 모형입니다. 레위기의 희생 제물들은 모두 주님을 예표합니다. 모세의 말을 믿었다면 주님을 믿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 한가운데서 곧 네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켜 세우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니라.](신18:15). [이에 따라 내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서 너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켜 세우고 내 말들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가 그들에게 다 말하리라. 누구든지 그가 내 이름으로 말하는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그에게 벌을 줄 것이니라.](신18:18,19).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47절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들을 믿겠느냐? 하시니라.](47). 모세의 글을 믿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성령은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서만 옵니다. 구약의 기록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줄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구약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구약으로 자신을 증거했습니다.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 어리석고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겪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대언자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하여 기록된 것들을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시니라.](눅24:25-27). 사마리아 광야에서 빌립은 이사야를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스데반은 구약을 관통하는 말씀으로 복음을 증거했고, 사도들 역시 구약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 때는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도 전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구약으로 얼마든지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옥에 간 부자의 요청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로 하여금 그들에게 증거하게 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받는 장소로 오지 말게 하소서, 하거늘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대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을 것이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들로부터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 하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그들이 모세와 대언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확신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6:28~31). 구약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구약 뿐 아니라 신약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벽한 말씀을 가지고 주님을 믿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증거하는 성도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권별 강해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니 두려워 말라 (0) | 2009.02.05 |
---|---|
오병이어 (0) | 2009.01.29 |
너희에게 없는 것 (0) | 2009.01.29 |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2) (0) | 2009.01.27 |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1) (0) | 2009.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