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제임스 성경도 원어 성경에서 번역된 성경이다.
한글도 당연히 원어 성경에서 번역해야 한다. 왜 번역된 성경에서 또 번역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매우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구약 성경의 경우 히브리 맛소라 원문에서 번역하고, 신약 성경의 경우 T.R에서 번역해야 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번역한 성경이 많이 있습니다. 각국마다 바른 원문에서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믿음을 지킨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자국어로 된 성경의 절대 필요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도들이 히브리어로만 전파한 것이 아니란 사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주의하십시요. 그런데, 사도들은 히브리어로 말씀을 전했으면서도, 기록은 헬라어로 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지역에서든지 기록은 헬라어로 했습니다.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기록은 헬라어 였습니다.
팟모 섬에 홀로 유배를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기록한 요한도 능통한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버리고 헬라어로 기록했으며, 유다이즘이 골수에 뿌리박힌 야고보도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각국마다 고유의 언어로 기록하도록 명령한 성경 구절은 없습니다. 복음 전파는 성경 기록보다 앞선다는 사실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바울도 복음을 전파하고 강론한 후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치부하더라도, 말씀 전파는 항상 성경 기록보다 앞섭니다. 그것은 선교 역사의 필연입니다. 먼저 성경을 번역해서 그 성경을 가지고 원어민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한 후 성도들의 양육과 교회를 위해 성경 번역이 필요해 진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현지 언어를 배워서 선교를 하며, 밤에는 자기 나라 말로 된 성경을 읽고, 그것을 현지어로 배워서 가르치고....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의 역사가 동일하게 있습니다. 문제는 정확도입니다. 항상 문제는 여기에 귀결됩니다.
예전에 성경을 번역했다는 한 분이 자신의 교회를 한국 최초의 신약 교회라고 얼마나 열을 올리시던지...이유인즉 신,구약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전에는 신약 교회가 아니었더나... 참으로 우스운 것은 자기 교회는 신,구약이 나오기 전에 이미 창립 예배를 보았으면서 말입니다. 말씀을 경히 여기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앗아가 나귀로 만들어 버리신다더니, 나귀가 아니라 타조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 복음 마지막 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분명히 천하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가르치라는 지상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만약 인도에 간 사도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인도어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전승에 따르면 도마가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도마가 인도어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았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확실합니다.
바울 사도는 분명히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했지만 스페인어로 된 서신서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번역은 사도들이 아닌 교회에 맡겨졌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형제들은 선교지로 떠나 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성을 차후로 하고도 어쨌든 성경 번역은 줄기차게 진행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부족에게로 선교사로 간다해도 제일 먼저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성경이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성경을 번역하는 선교사가 바른 원문을 가지고 있는 식견과 지혜가 있다해도 그 번역이 절대 무오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교회를 세워 나가셨으며, 기타 말할 수 없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저는 고기나 과일을 사러 갈 때 항상 저울을 유심히 봅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물어 봅니다. 이 저울 정확해요? 그럼, 전부 하나같이 정확하다고 우깁니다. 아저씨 이 저울 어디가서 정확도를 검사해요? 물으면, 공업 진흥청 산하에 검사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일년에두번씩 그 저울에 맞추어 검사를 받고 딱지를 붙인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을 맞추는 저울이라!
내 집에 있지도 않는 보지도, 쓰지도 못하는 저울!! 그게 무슨 소용이람? 이것은 가게 주인의 마음입니다. 소비자의 마음은 자주 가서 정확히 맞추어 오라는 것입니다.
모국어 성경 최종 권위를 운운하는 사람도 이와같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을 번역하고 팔아먹는 말보회란 가게 주인과 종업원의 마음입니다. 읽는 독자들은 한번이라도 더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맞추어서 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주 이런 것을 따지는 손님이 오면 화를 버럭 내는 주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싸가지가 없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동일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런 역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초신자 시절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험하시지 않는 분이라고 했는데, 어떤 곳에는 시험하신다고 되어 있느냐? 그랬더니 저의 목자가 이렇게 답하더군요. 옆에 있는 영어를 봐라. 네가 말한 시험이 서로 틀리지 않니? 하나는 tempt이고 하나는 try이고...
여기서 한 초신자는 한글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의미를 영어로 파악된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시험이란 단어는 tempt, try, prove, examine, test...수두룩하였습니다. 왜 우리말로는 따로 따로 번역해 주지 않았을까? 단어가 다르면 의미도 다를 터인데 ...
아주 간단한 예가 있습니다. peace란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리말로는 평화,화평, 평안, 평강, 화목, ...수도 없이 다르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물론 기계적 번역이 아닌 의미의 전달을 중시했다고 하지만 설득력이 약하지요. 이미 번역자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되어 버렸으니까요.
seal이라고 하면 우리말 성경에 '봉인'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봉인이라는 의미는 ...막다, 덮다란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성경에서 seal이란 도장을 찍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은 돌에도 빌라도의 도장이 찍혔습니다. 다니엘을 사자굴로 밀어 넣고서 왕의 도장이 찍혔습니다. 도장--아시아권에서는 너무나 상식적인 신분 증명 도구요, 서류에서 효력을 발생하는 권위입니다. 물론 인장이라고 번역해도 되겠지요. 문제는 봉인이란 의미와는 틀리다는 것입니다. 봉인--봉해서 찍음. 중요한 서류에는 밀봉한 다음 그 위에 도장을 찍습니다. 밀봉을 풀지 못하게...영어로 보면 뜻이 쉽게 정확하게 파악됩니다. 천년 동안 마귀를 가둘 때도 주님은 마귀 위에다 도장을 찍습니다. 성도들에겐 모두 성령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관계로 쉽게 뜻이 파악되지 않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파악이 되지 않아도 신실한 믿음의 형제들은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다는 이유만으로 그 구절이나 어휘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정확히 알기 위해 애쓰고 연구합니다.
번역된 자국어로 된 성경은 유용성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압도합니다. 읽기 쉽고,전도할 수 있고, 설교할 수 있고...하지만 이런 유용성을 잣대로 판단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실용주의(pragmatism)이라고 합니다. 유용이 곧 정확은 아니며, 유용이 곧 선악의 잣대도 아닙니다. 근대 실용주의 노선에선 유용한 것만이 선이라고 주창하기도 했지만, 성경적 가치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유용성으로 치자면 living bible이 킹제임스 성경보다 훨씬 쉽고 편합니다. 초등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너는 킹제임스 성경은 읽기 어려우니 Children's Bible을 최종 권위로 하렴!! 하고 권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초등 학생들에게도 킹제임스 성경을 읽으라고 말합니다. 차마 리더스 다이제스트 성서를 권할 수는 없으며, 디킨스의 성서 이야기를 최종 권위라고 권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에겐 그것이 훨씬 더 유용하며, 창세기의 이야기나출애굽기의 역사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사용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영킹주의자들은 없습니다. 문제는 정확도입니다.
정확도를 무시한 채, 유용성만을 잣대로 모국어 최종권위를 운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국산품 애용 운동할 때 처럼 애국심에 호소할 수는 없습니다. 정확하지 않으면, 정확한 것을 소개하고 계속해서 겸허하게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정확할 때 까지 최종 권위란 말은 입밖에도 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했다고 인정한다 해도(물론 그것도 반은 거짓말이지만), 번역자인 이 송오 목사의 translation을 믿으라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송오 목사님이 한 translation만 한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어딘가 자가당착인 것 같습니다. 이 분은 한글도 영어도 능통하지 못한 분임을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요, 개역성경을 곁에 두고 베끼는 것을 본 사람은 이미 다 보았으며, 현재 킹제임스 성경과 틀린 부분을 개역 성경과 맞추면 어김없이 맞아 들어가는 절묘한 우연의 일치가 연속적으로 터지는 상황에서 우격다짐 식으로 고유 언어를 논하는 것은 자기 교회 교인들을 우민화 하고, 한국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우습게 본 까닭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은 최종 권위로써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누구나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저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누구나 전도할 수 있는 것처럼 번역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목사나 집사는 누구나 할 수 없습니다. 자격 조건이 있으며, 제한 사항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번역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버어마의 선교사 져드슨은 선교를 목적으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는 현재 몽고에 선교사로 가서 몽고어 성경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물론 완전 무오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번역자들 가운데 완전무오를 자신있게 주장한 사람은 아마 이 송오 목사님이 유일무이하신 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본은 많아도 원본은 하나이며, 시계는 많아도 표준 시는 하나이며, 성경은 많아도 기준 성경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믿음이며, 건전한 생각입니다.
건전한 생각의 영이 없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그렇게도 헷갈려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각 나라마다 절대 기준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상 국가에서도 한 나라의 법전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다민족 다 언어 사회이지만 북경어로 된 법전이외에 광동어 법전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번역본은 법률 지식과 언어적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누구나 번역해서 팔아 먹을 수 있습니다. 물론 광동어를 쓰는 시민들에겐 읽기 쉽고, 이해되는 광동어 법전이 유용하고 좋겠지만 최종권위는 아닙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단일 민족인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습니다. 필리핀 목사들에게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실제로 4 종류나 번역되어 있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을 들고 따갈로그어로 말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따갈로그어를 쓰는 원어민들에게도 최종 권위는 영어 성경이어야 했습니다.
한국에는 여러 사람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 중 킹제임스 성경 계열에서 현재 번역 진행 중인 사람들까지 합하면 8곳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성경들이 다 나와도 무오한 최종 권위는 없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돕는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권위를 주시고, 그 권위에 기초해서 주어지는 권위들을 인정하십니다. 이는 왕이 한명이지만 각 지방의 도백들에게 권위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권위가 상충될 때는 상위법 우선입니다.
최종 권위를 바탕으로 한 파생 권위는 수없이 주어집니다. 그 파생 권위가 최종 권위는 아닙니다. 한글 성경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바탕으로 했을 때 그에 합당한 권위가 주어집니다. 심지어 복음 전도지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이 실린 경우 그에 합당한 말씀의 힘과 권위가있습니다. 하지만 틀릴 경우에는 그 부분에서 권위가 무너지고 맙니다.
고유언어를 주장하기에 앞서 최종 권위란 말 뜻부터 제대로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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