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구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왕이든 관청이든 법원에 무엇을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또는 정치인들에게 요구합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들에게 요구합니다. 정말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카톨릭 성도들은 묵주를 돌리며 마리아에게 빌기도 하고 성인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공양을 드리며 적게는 세 번 많게는 수 천 번 몸을 굽혔다가 일어나면서 기도합니다. 삼천 배를 드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은 온 몸으로 기도합니다. 회교도들은 하루에 세 번씩 온 몸을 다해 기도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설, 추석, 제사 때 조상들에게 음식을 차려두고 절을 하며 기도합니다. 문제는 기도의 대상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세상의 악한 아버지들도 자녀들이 자기에게 구하는 것은 들어줍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영들의 아버지인 마귀는 자기 자녀들의 기도를 많이 응답해 줍니다(마7:11). 잘못된 동기로 잘못된 대상에게 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응답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신자들이 기도에 대해 가지는 큰 오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이며, 좋은 것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기도에 Yes로만 응답하는 하나님은 나의 종이지 결코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구하는 것에 대해서 늘 “Yes”로 응답한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일 수는 있어도 지각과 판단력이 전혀 없는 멍청이 일뿐이며,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나오는 ‘지니’만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동시에 선악간에 판단하시며,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유익에 따라서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로 악한 동기로 구할 때 주님은 거절하십니다. 때로 주님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주님은 악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응답해 주시는데 악한 영을 보내 주시기도 하고, 거짓말을 보내시기도 하시며, 자기 꾀에 빠지게도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열심히 하는 기도에 못지 않게 올바른 기도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된 기도는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성경을 통해 “기도에 관한 모든 것”[All about the Prayer]이란 제목으로 올바른 기도 생활에 대한 조명을 얻고, 효과적이고도 열렬한 기도의 영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그렇듯이 저 역시 처음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기도를 잘 하고 싶었고,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 할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기도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또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했는지 명문의 기도문들을 조사해서 연구해 보기도 했습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을 배우고 싶은 것은 성도들의 공통적인 열망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대부분의 육신적인 성도가 그러했듯이 기도의 능력을 믿고 그것에 관하여 듣기를 좋아하지만 실제로 기도하는 시간은 아주 적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떤 믿음의 선배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나는 열 사람에게 설교를 가르치기보다는 한 사람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싶다.” 이는 기도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중요한 것인가를 간략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사람의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이 복음 전파라면, 하나님께 사람의 사정을 증거하는 일이 기도입니다. 이 둘은 하늘과 땅의 연관 관계처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E.M 바운즈 목사님은 “하나님을 위해 사람에게 말하는 일은 위대한 일(great thing)이지만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말하는 일은 더욱더 위대한 일(greater thing)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항상 설교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라이스). 주님은 성전을 일컬어 내 집은 설교하는 집이라고 하지 않으셨지만 ‘내 집은 기도하는 집’(눅19:46)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명령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구하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의 범주밖에 있는 것을 구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언제라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주님이 구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요,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에 근거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요, 약속을 믿지 않는 불신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만 단지 기도를 쉼으로써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산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너는/ 구하라](왕상3:5) 말씀하셨습니다. 구하지 않아도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실 수 있지만 주님은 구하라고 먼저 기도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이교도들을 네게 상속으로 주고 땅의 맨 끝 지역들을 네게 소유로 주리라.](시2:8). 구하지 않고서는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승천하기 전 엘리사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구하라](왕하2:9)고 했습니다. 기도의 첫 단계는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산에서 말씀을 전하시면서 기도에 대한 강력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는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자는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임이니라.](마7:7-8). 이 보다 더 복스런 약속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의 어떤 권세자가 이런 약속을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런 약속을 했다고 해도 아무 것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내게 돈을 줄 수 있겠지만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직장을 줄 수 있겠지만 일하는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여자를 줄 수 있겠지만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침대를 줄 수 있겠지만 단잠을 줄 수 없습니다. 의사와 약을 보내 줄 수 있겠지만 건강을 줄 수는 없습니다. 많은 것을 줄 수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돈을 안 주셔도 평안을 줄 수 있고, 고난 가운데서 확신과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주실 수 있으며, 아무 것도 없지만 만족을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비가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 주님은 비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늦은 비가 내리는 때에 [주]께 비를 구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빛나는 구름들을 일으키사 사람들에게 소낙비를 주시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들의 풀을 주시리니](슥10:1). 주님이 언제 구하라고 하십니까? “늦은 비가 내리는 때에”입니다. 비가 내리는 철에 비를 구하는 것은 이상한 말 같지만 주님은 그것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작물의 파종 시기에, 뜨거운 가뭄에 가끔 비가 내리는 것은 기도할 일이 아닌 자연 현상 같지만 그런 일상적인 일이 바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며,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게에 손님이 오는 것은 자연스런 일 같아도 그 점이 바로 기도해야 하는 기도 제목입니다. 여러분이 일상사에서 특별히 따로 기도하지 않아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누리는 은혜들이 사실 모두 우리의 기도 제목입니다. 오늘 출근했다가 저녁에 다시 보는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 올께”라며 가지만 그 말을 지키지 못하고 병원으로, 경찰서로 가 버립니다. “다녀 올께” 하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셔서 정말로 저녁 때에 무사히 집으로 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께 비를 구하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2:2). 여러분은 설교를 들을 때 설교를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한 시간을 듣고도 한 마디를 건지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주님께 말씀을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오랫동안 책장은 넘겼지만 말씀은 하나도 취하지 못합니다. "[주]께 비를 구하라." 그렇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다. 비를 구하면 비를 주십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내리는 비이며, 이슬이며, 가는 비요, 소나기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단비를 듬뿍 내려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인생은 다 마른 풀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이 주시는 비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청하노니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라....](말1:9).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기도할 때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구하십시오. 이사야 역시 이것을 구했습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니 주는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오며 고난의 때에 또한 우리의 구원이 되시옵소서.](사33:2). 은혜를 얻기를 원하시면 겸손해야 합니다. 동시에 구해야 합니다. 은혜의 성령, 은혜의 말씀, 은혜의 보좌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더 많이 넘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은혜의 보좌로 나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은혜의 말씀을 멀리한다면 어떻게 은혜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은혜의 영을 제한하고 슬프시게 하고 소멸한다면 어떻게 은혜를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 말씀 충만, 은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주님은 부족함이 없으시며,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성도들은 궁핍을 느끼고, 부족함을 느낍니까?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입니다(벧전4:10).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고, 은혜를 힘입어 살며, 은혜의 다스림을 받고(롬5:21), 은혜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야 합니다(딛2:12-13). 은혜가 없으면 구원도 없지만 주님을 섬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움직일 수 없는 왕국을 받을진대 은혜를 소유하자. 이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공경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도록 섬길지니](히12:28). 우리를 받으시는 예배의 근거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은혜를 베푸소서”하고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해 먼저 우리에게 필요를 구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교회가 말씀을 능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성도들이 아침 일찍, 저녁 늦게,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선교 현장에서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것 역시 구하지 않는데 가장 큰 원인이 있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세상의 운명은 우리들의 기도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기도없는 하루는 축복없는 하루이며, 기도없는 일생은 능력없는 일생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하나님과 보낸 한 시간은, 인간과 보낸 일생만큼의 가치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깊은 기도의 세계를 가져 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근대 물리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뉴튼은 “나는 망원경으로 몇 천만 미터 떨어져 있는 먼 곳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망원경보다도 훨씬 뚜렷이 천국을 보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라고 자신의 기도 생활을 소개했습니다. 망원경이 공간을 초월하여 사물을 보는 것이라면 기도는 공간과 시간의 너머에 있는 실체를 보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구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억울한 일이 없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요14:13, 14, 15:7,16, 16:7,23,24). 주님의 반복적인 명령은 “구하라. 구하라” 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이제 구하십시오.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심오한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라면 당연 구하는 것입니다. 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교제입니다. 기도란 사랑의 고백이며 하나님께 나가는 통로입니다. 기도란 성령 충만을 받는 길이며 생활 속에 하나님을 모시는 길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초청이며 하나님을 찾는 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목마름입니다. 만인의 주석가로 불렸던 영국의 매튜 헨리는 말하기를, “숨쉬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지 않고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팬스하우는 말하기를 “시작이 반이다. 그러나 기도 없이 시작된 일은 결코 좋은 시작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무슨 일에든지 주님께 구하는 일의 출발점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기도란 영원을 향한 마음의 창문이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때로 기도는 입이 아니라 귀로 하는 것이며, 혀가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서명하신 보증 수표입니다. 저 하늘에는 발송을 앞둔 많은 은혜의 선물들이 요청하지 않음으로써 수년 째 그냥 쌓여 있는 창고가 가득합니다. 기도는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자녀의 의무이며 권리입니다. 기도는 태양을 머물게 하는 힘이요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마귀를 쫓아내며 질병을 치유케 하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참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부어주는 하늘의 신령한 힘입니다. 기도는 영적 투쟁이며 거룩한 씨름입니다. 기도는 자아가 죽고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내적 투쟁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는 인내와 절제의 훈련장입니다. 기도는 구하는 자, 찾는 자, 두드리는 자에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순종을 배우는 헌신입니다. 기도는 나의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몸과 마음을 바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바라는 진정한 소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원하는 바를 청구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바를 청구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경건의 연습입니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금 향로에 가득한 향으로 성도들의 간절한 헌신입니다. 기도는 일의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활양식이며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저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기도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일이다. 만일 하루라도 기도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정열을 잃게 된다.”며 자신의 영적 경험을 간증했습니다. 그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기도의 시간을 늘려 나갔다고 했습니다.
제대로 영적인 삶을 살아 보지 못한 성도는 간절한 기도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영적 전투를 경험해 보지도 못했고, 잃어버린 혼들에 대한 관심도 없는 성도는 먹고 살 것이 있고, 집안에 별 문제가 없으면 무릎을 꿇어도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른 채 일어나고 맙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15:32,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새 힘을 얻게 하시기를 구하라.](롬15:32). 바울은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늘 목자를 위해 구해야 합니다. 목자와 성도가 함께 새 힘을 얻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7:7).
우리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대신 남을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기 것을 구하지 말고 각각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구하라.](고전10:24). 주님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불행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잘되기를 구하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고 슬퍼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 말씀을 거꾸로 읽는지 ‘아무 것도 남을 위해 구하지 말고, 자기가 잘 되기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습니다. 성경대로 순종해서 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구합시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7:7).
우리는 자신이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도록 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영적인 은사들에 열심이 있은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하라.](고전14:12). 오늘날 지적인 자부심이 있다는 성도들 가운데 지역 교회를 멸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를 멸시하면서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을 구하지 않으면서 교회를 욕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모든 성도는 지역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지 교회의 종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역자이지 교회의 사역자는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지 교회의 일꾼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분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인정하시는 기구입니다. 바울은 뵈베를 일컬어 교회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롬16:1,27). 디도와 동료들을 교회의 사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고후8:23). [디도에 대하여 누가 묻는다면 그는 나의 동반자요, 너희를 위한 동료 협력자요, 또 우리 형제들에 대하여 묻는다면 그들은 여러 교회의 사자(使者)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8:23). 바울은 자신을 일컬어 교회의 사역자라고 했습니다. [내가 교회의 사역자가 된 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經綸)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자 함이니](골1:25). 믿음이나 지식이나 덕이나 어떤 은사도 교회를 세우는데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해악입니다. 그런데 한 개인을 세우는데는 온 힘을 쏟으면서 정작 교회를 세우는데는 무관심한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가출한 친구를 돕는 일이 그 집안을 불화케 하고, 해악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나는 친구랍시고 우리 집에서 재워도 주고, 돈도 주고, 먹여도 주면서 자기 집 욕하는 것을 말리는 대신 동조하고, 위로해 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매우 선한 의도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 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미친 짓입니다. 지역 교회란 것은 그와 같습니다. 가정과 집, 몸된 교회와 지역 교회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7:7).
다음으로 우리는 복음 전파를 할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말씀 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또한 이것을 위하여 결박당하였나니](골4:3). 여러분의 기도 제목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복음 전파여야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전도를 못할까? 나는 왜 열매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성도들은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하는 대신 어느덧 복음 전파를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도라면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는 바울 사도조차 자신이 전도할 수 있도록 기도부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이것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7:7).
다음으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지혜입니다. 이 악한 현 세상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에게 이런 지혜를 주지 않습니다. 세상 지혜는 땅에 속한 것으로 정욕 적이고 마귀적으로 살아가게 합니다(약3:15). 땅에 속한 지혜를 얻으려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부드럽고 대하기 쉬우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과 위선이 없나니](약3:17). 이런 지혜는 세상 어디에서도, 누구도 줄 수 없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이 얼마나 위대한 약속이며, 영광스런 복입니까?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이제 구하십시오.
이런 것을 구하지 않고 자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을 구한다면 여러분은 설령 받았다고 하더라도 혼이 야위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영적으로는 타락할 것입니다(시106:13-15).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여기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구하는 것을 내포하는 말씀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약속을 믿고 구했지만 얻을 수 없다고 불평하며 기도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내가 구한 것을 주님이 주시지 않았다면 그것은 주님의 큰 은혜입니다. 주시기 전에 주신 후의 결과까지 미리 아시는 하나님이 미리 아심과 돌보심에 대해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도 갖지 못하고 죽여서 갖고자 해도 얻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워도 갖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구하고도 얻지 못한 경우라면 이 것 밖에 없습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을 구하고 즉석에서 응답받은 성도들의 예는 요한과 안드레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요1:38) 물으시자, [랍비여, 어디에 거하시나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님이라.)](요1:38b)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구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잘 구하는 것입니다. 반면 간절히 구했지만 구하는 것을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마20:22a). 이런 예는 우리에게도 흔히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주의 좌, 우편에 앉기를 구했는데, 그것은 곧 주님이 마시는 잔을 마셔야 하는 일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마치 경건하게 살고자 기도했는데 그것이 박해를 받는 길인 줄 모르는 것이나(딤후3:12), 유업의 상급을 받으려면 많은 환란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여 경건하게 살고 싶습니다만 핍박은 없게 하소서! 같은 기도가 바로 자신이 구하는 것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기도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부(副)와 재물을 구하는 것이 믿음을 떠나는 길이며, 해로운 정욕에 사로잡히는 길이며(딤전6:9),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히는 것이며(딤후2:26), 자기를 찔러 많은 슬픔에 이르게 하는 것인 줄 모르고(딤전6:10) 열심히 구할 때 주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한 것을 받은 후에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표적을 구합니다(마12:39).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표적과 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갈보리의 십자가가 하나님이 주신 표적이요(주님은 이들이 요구하는 표적에 요나의 표적을 재현할 것을 말씀하시고 응답하셨다-마12:39), 십자가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지혜였으며,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지혜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와 같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 원하는 대답이 아니면 자신들이 구하는 것의 응답을 보고, 듣고, 받아도 못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분명히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각의 눈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보다 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깊이 명심하되 쉬지 말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대 부흥사였던 토레이 목사님은 “위대한 일을 위하여 기도하라. 위대한 역사를 기대하라. 위대한 것을 위하여 일하라.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라.”고 외쳤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기도보다 더 큰 일,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기도한 다음에는 기도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기까지는 결코 기도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없다"(A.J Gorden). 버마어로 성경을 번역했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은 혹독한 시련 가운데 사역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 생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면 어느 때, 어떻게 해서든지 어떤 형태로든 응답이 온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옵니다. 이제 남자들은 어디서나 손을 들고 기도하십시오. 여자들은 조용한 영으로 어느 때에라도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기도는 하나님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변하게 합니다(피니). 기도는 사람을 깨끗이 하는 자신에게 들려주는 설교입니다(리비텔). 이제 우리는 모두 기도에 매진해야 할 때이며, 구해야 할 때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이 잘되기를 구하십시오. 자기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구하십시오. 위로부터 난 지혜를 구하십시오. 담대히 복음 전파를 위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을 열어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새 힘을 얻도록 구하십시오.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하고 구하십시오. 비를 내려 주소서! 라고 구하십시오. 주님은 구하면 주실 것이며, 구하면 이루어지며, 구하면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진 담대함이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께서 들으시는 것이라.](요일5:14).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기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역 교회와 기도 사역 (0) | 2005.04.29 |
---|---|
주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 (0) | 2005.04.29 |
기도는 먼저 듣는 것부터 (03) (0) | 2005.01.13 |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 (2) | 2005.01.13 |
기도 시리즈 목차입니다. (0) | 2005.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