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주의 만찬에 대해서 함께 공부해 보겠습니다. 주의 만찬은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나 상징을 넘어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 매우 중요한 요소를 차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생각없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거나 자신을 분별하지 못한 채 주의 만찬에 참여함으로 스스로 죄를 먹고 마시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우리는 매월 첫 주에 주의 만찬을 통해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열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15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어린양 먹기를 바라고 또 바랐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주의 만찬을 하시면서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고,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만찬은 그냥 단순히 친교와 즐거움을 위해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자리가 아니라 인류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유대인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고기를 잡아먹고, 그 피를 양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날은 400년간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영광스런 자유와 해방에 이르는 날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그 날에 죽음을 피하게 해 주는 유일한 피난처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빵에 자신의 피를 포도즙에 비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19,20을 보십시오. [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나누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도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new testament)이라.](눅22:19,20). 주님이 지상에서 3년 반 동안 하신 모든 사역의 결론이 바로 이 빵과 잔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 제자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피흘림에 대해서 강론하시는 주님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죽음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그 죽음이 제자들과 인류에 미칠 영향과 결과에 대해서 미리 말씀해 주며 죽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당당히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주님은 자신이 바로 사람들에게 주어 먹게 할 수 있는 생명의 빵이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을 먹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먹는 자는 살리라.” 주님이 우리를 식인종으로 만드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누구도 사람의 살이나 피를 마실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율법으로 엄히 금지하고 있습니다(레17:11,12). 로마 캐톨릭은 화체설이라고 하여 아직도 실제로 자신들이 먹는 성병과 포도주를 주님의 실제 살과 피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왜곡하여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영적으로 적용해야 할 성경을 정반대로 영적으로 해석하고 문자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다 보니 이상한 교리가 생긴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주님이 친히 사람들 앞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설파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6:48-50, 58을 보겠습니다.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니 사람이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요6:40-50). 주님의 이 말씀은 듣는 사람들에게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즉시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6:52)고 다투며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언제나 난해한 이야기요, 수수께끼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이 말씀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읽고도 이해할 수 없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58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빵이니 이것은 너희 조상들이 먹고 죽은 만나와 같지 아니하여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시니라.](요6:58). 이 빵의 이름은 생명의 빵입니다. 이 빵은 하늘로부터 내려 왔습니다. 이 빵을 먹는 자는 주리지 않습니다.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삽니다. 이 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이 세상에 불로초는 없습니다. 몇 천년을 살게 해 주는 천도(天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생명의 빵”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이 말을 가르치실 때에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그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말씀을 깨닫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말씀을 육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6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분의 제자들 중 여럿이 이것을 듣고 이르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으리요.] 우리는 많은 경우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제자들과 같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를 외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영적인 말씀을 육적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마음을 아시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6:63을 보십시오. 말씀의 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 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그렇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십니다. 주님이 하신 생명의 빵, 내 살은 모두 영적인 말씀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 육신의 생명, 육신의 몸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의 영과 생명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이 거듭남에 대해서 말하자, “어찌 이런 일들이 있을 수있나이까?”하며 반문했습니다. 그는 영이요, 생명인 말씀을 육적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은 생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우물물을 가리키는 줄로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빵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모두 육신이 먹는 빵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여러분에게 이 말씀이 어렵습니까? 주님은 지금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실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믿고 시인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란 바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사 저주가 되심으로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런 영적 진리와 사실을 함축한 것이 바로 주의 만찬에서 우리가 먹는 빵인 것입니다.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빵을 먹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창세기에서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음으로써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 왔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제 우리는 마땅히 먹어야 할 것을 먹음으로써 죄가 제거되고, 생명을 얻습니다. 주의 만찬에서 빵을 먹는 것은 바로 이런 영적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며, 주님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좀 더 묵상하면, 첫째, 먹는 것은 개인적인 행위입니다. 먹는 것은 누가 대신 먹어 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빵은 누가 대신 먹어 줄 수 없습니다. 둘째, 먹는 것은 생존의 필수 요건입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음으로써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거나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이 먹어야 산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잡담을 한다고 배부르지 않습니다. 음식의 성분을 분석하고, 음식의 효능에 대해서 모든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입에 넣고 씹어서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빵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한다고 우리의 영적 생명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이요, 생명인 말씀을 매일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필수 요건이란 사실입니다. 셋째, 먹는 것은 나의 필요에 대한 반응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찾습니다. 배고픔을 못 느끼거나, 기력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은 음식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영혼이 갈급하고 허기지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먹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넷째, 먹는 것은 밖에 있는 것이 내 안에서 필요한 에너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종 다양한 음식을 먹습니다. 먹을 때, 접시에 있는 음식물이 내 안에서 영양과 에너지로 변화되듯이 영적 양식도 먹을 때 내 안에서 경건과 능력과 거룩함등 각종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영양과 에너지로 변화됩니다. 충분한 양식을 먹지 않는 사람이 건강을 유지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충분히 먹지 않는 누구도 영적 건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다음은 주님의 만찬에서 마신 잔에 대해서 상고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27,28을 보겠습니다.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그 까닭은 이것이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를 곧 잔에다 비유하셨습니다. 이 피는 죄 사함을 위해 흘리는 피입니다. 이 피로 인해 신약이 체결되었고, 누구든지 죄 사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주님의 피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6:53-55에서 자신의 살을 참된 양식이요, 자신의 피가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피요,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의 피란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피는 입으로 마셔서 나의 위장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의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신 몸이란 사실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피는 하나님의 피란 사실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다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부인하는 어떤 사람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부인하는 누구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피를 마셨습니까? 주님은 잔을 드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십자가에 높이 달려서 흘리신 그 귀한 보혈이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도록 마음 문을 여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시간 마음 문을 여십시오. 주님은 지금 이 시간 여러분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히9:22). 누가 여러분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셨습니까?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 지도자나 창시자도 누구를 위해 피를 흘린 적이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해 피 흘려 돌아 가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피를 통하여 대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엡1:7).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대속의 피요, 죄들을 용서하는 사면의 피인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받는 근거는 내가 잘못을 빌고, 고행을 했고, 하나님 앞에서 선행을 쌓음으로, 평생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피 때문에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아침에, 아니면 지난 몇 주 동안 죄와 허물로 가득찬 삶을 사셨다면 이 피를 근거로 용서를 구하십시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는 남김없이 용서될 것입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cleanseth).](요일1:7).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원수를 화목하게 하는 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서먹서먹하거나 거리낌이 있거나 함께 하고 싶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시간 그리스도의 피를 적용해 보십시오.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물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사람은 이 피가 결여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피를 잊고 지내지 않았습니까? 그 피를 마시는 생활에 게으르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온 몸에 피가 부족하다면 우리는 빈혈을 일으키거나 손 발이 저리거나 머리가 어지러워 제대로 생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믿음의 부족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넘어지고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만들고 맙니다. 주님은 만찬의 의식을 통해 잔을 마실 때마다 이 피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시며, 상기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이 매월 첫 주에 마시는 잔은 종교 의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잔을 마시면서 이 피를 기억하고, 교회의 모든 지체들과 더욱 가까워지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음이니라.](골1:20).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화평의 피입니다. 세상의 어떤 죄인도 하나님과 화평이 없습니다. 사람들과 사람들 간에는 그지없이 좋은 관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뭔가 껄끄러운 관계이며, 대적하는 관계이며, 원수지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습니다. 친구지간에 화해하기에 앞서, 부자지간에 화해하는 것보다, 부부 싸움을 하고 화해하는 것보다, 노사가 화해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대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인생은 결국 모두 파멸이요, 영원한 지옥일 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주님의 피를 마시는 자마다 하나님과의 원수 맺음은 풀어지고, 각 사람 위에 덮여 있던 저주는 사라집니다. 십자가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면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화평이 자리잡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요14:27). 십자가의 피는 화해의 피요, 화평의 피인 것입니다. 주의 만찬에서 잔을 마실 때마다 여러분은 이 피의 의미를 기억함으로 주님과 모든 사람과의 화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히10:19).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는 주님이 계신 보좌로 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주님의 거처요, 주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보좌 앞으로 곧 바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신분증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김포 국제 공항에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공항에는 승객들이 들어 갈 수 있는 곳, 경찰이 들어 갈 수 있는 곳, 세무 공무원이 들어 갈 수 있는 곳, 법무부 직원이나 출입국 관리 사무소 직원만 이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경찰이라 할지라도 관제소에 들어가려면 관제소에 들어 갈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명찰에 0번이 적혀 있는 사람은 공항 아무 곳이나, 언제나, 어디나 제한 없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0번이 적힌 pass는 각 기관의 장(長)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곧장 들어 갈 수 있는 통행증(passport)과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이나 어제나 아니면 요즘들어 성경을 많이 읽고, 사람들을 구령하고, 기도를 많이 하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주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매 순간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저와 여러분은 예외 없이 나를 위해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매월 하는 주의 만찬에서 마시는 잔은 이 피를 새롭게 기억하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이 피야 말로 얼마나 귀하고, 귀한 피입니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언제나 만나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값없이 주셨습니다. 이 피는 믿음으로 우리 마음 속에 뿌려졌기에 잃어버릴 염려도 없습니다. 다시 발급 받아야 할 유효 기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범법이나 죄로 취소되거나 효력이 소멸되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여러분의 필요를 아뢰십시오.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이끌어 내신 화평의 하나님께서 영존 하는 언약의 피를 통하여 모든 선한 일에서 너희를 완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자신의 눈앞에서 매우 기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 안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13:20,21). 예수님의 피는 영존하는 언약의 피입니다. 이 피는 시대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영존하는 언약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현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렇게 의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피는 영원무궁토록 동일한 효능을 지닌 영존하는 언약의 피입니다. 이 피는 그리스도인들을 모든 선한 일에서 완전하게 하며, 주님의 뜻을 행하게 합니다. 영적으로 강성한 교회와 성도는 언제나 십자가의 피에 대한 믿음과 인식이 강하고 뚜렷합니다. 십자가의 피를 믿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성도는 결코 자신의 뜻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그 뜻에 따라 헌신합니다. 믿음이 약해지고, 세상의 거센 물결에 쓰러지는 것은 언제나 피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고, 흔들릴 때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모든 선한 일에서 완전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는 것도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입니다. 십자가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하는 힘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힘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선한 행실도 그것은 단지 종교일 뿐이며, 육신의 행위일 뿐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의 만찬에서 마시는 잔은 이 피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이 피에 담긴 깊은 영적 진리들을 새롭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성경대로 믿는다고 자부하는 형제, 자매들과 교회들이 엉망진창이 되고, 삶에서 전혀 간증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을 볼 때마다 영적 지식이 성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미미한가를 절감합니다. 영적 지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지식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저희들이 가진 성경 지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깊이 감사하며, 믿음과 덕을 세우며, 형제 우애와 사랑이 넘치는 형제, 자매들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신학적 지식보다 훨씬 더 필요한 것이 바로 주님의 살과 피에 대한 깊은 조명이란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마르고 건조한 교회, 생명력이 없는 교회와 성도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엔 언제나 ‘주님의 살과 피에 대한 인식과 믿음의 결여’란 진단이 내려집니다. 주님은 이 피와 살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것을 지켜야 할 의식으로 정하셨습니다.
너무나 생각없이 행해지는 주의 만찬은 성도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때 반드시 위에서 언급한 영적 의미들을 새롭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만찬은 두렵고 떨림으로 행해야 합니다(고전11:27,29).
●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눅22:25).
● 깨끗한 마음으로 자신을 먼저 살핀 다음 행해야 합니다(고전11: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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