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균형잡힌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언에 기록되기를, [거짓된 저울(false balance)은 주께서 가증히 여기시나 꼭 맞는 추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느니라.](잠언 11:1)고 합니다. 균형이 맞지 않는 추가 거짓된 저울인 것처럼 균형이 잡히지 않는 신앙 생활은 거짓 신앙입니다. 신체와 정신이 균형적으로 자라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비정상이라고 부르듯이 영적 지식과 삶이 균형적으로 자라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비정상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맺는 삶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균형 잡힌 신앙 생활을 하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호수아에게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매우 담대히 하여 내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모든 율법대로 지켜 행하고 그것을 떠나 오른 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수1:7). 균형 잡힌 삶의 필수 요건은 첫째 말씀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호수아라 할지라도 말씀을 떠나는 순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듯이,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이, 몸으로 옮겨지지 않는 말씀은 신자들을 치우치게 합니다. [그런즉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대로 너희는 지켜 행하여 오른 쪽이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길로 걸을 지니라....](신5:32,33a).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은 절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경에서 기도에 관해 배운 것은 기도할 때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기도에 관한 구절들을 많이 공부하고 외웠다 할지라도 실제로 기도를 생활화하지 않는 사람이 기도에 대해 갖는 지식은 매우 피상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기도에 대한 성경적 지식이 없이 온통 기도에만 매달리는 것 역시 허공을 치거나 주님께 가증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균형잡힌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잘못된 저울 추는 죄이며 가증스런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에 대해 배운 영적 지식은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통해 세상에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삶이 거룩하지 않고, 생각이 거룩하지 않고, 말이 거룩하지 않는데 그의 믿음과 종교가 거룩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령에 대해 배운 것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 오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어라](마 10:28). 구령에 대해 배운 모든 지식은 구령을 하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균형잡힌 신앙 생활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성경 연구에만 보냄으로써, 배운 진리들이 내 몸안에서 형성되지 못하도록 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의 원칙은 공부는 일꾼이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여기서 주님은 공부하는 주체가 학생이 아니라 일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부하지 않는 일꾼은 무식합니다. 공부하지 않는 일꾼은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일꾼이 공부를 하는 것은 지식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일꾼이 공부하는 것은 일을 제대로, 더 익숙하게, 만족스럽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하면서 배운 지식이야 말로 산지식입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무엇 때문에 배우십니까? 자랑하고 뽐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연히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 학교를 통해, 신학교에서 말씀을 배우고, 연구합니다. 이런 공부는 매우 유익하고 큰 기쁨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와 그 진리를 반영하는 우리의 삶 사이에 있어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설교했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거울로 자기의 본래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으니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보고 떠나가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곧 잊어버리거니와](약 1:22-24).
성경을 공부하는 첫 번째 목적은 디모데후서 2:15에 두 가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a.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b.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유능한 사역자로 쓰임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은 교단이나 학술 단체나, 동료들이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대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면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기 보다 신학이나 철학, 세상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전에 신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목사님과 동료들, 선배들이나 후배들, 일반 교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언제나 부지런히 공부하는 일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두 번째 목적은 로마서 15:14입니다. [내 형제들아, 내가 또한 너희에 대하여 확신하노니 너희 역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충만하여 능히 서로를 훈계할 수 있느니라.](롬15:14). 이번에는 형제들과 나와의 관계 때문에 성경을 공부합니다. 자식이 많은 집 아이들은 형제, 자매들이 서로 서로 돕고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이 동생에게 노는 것을 가르치고,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형이 잘못을 하면 동생이 그렇게 하면 아빠에게 혼난다고 형을 훈계합니다. 이것이 자식들의 세계입니다. 오늘날처럼 아이가 없거나 하나 밖에 없는 가정에서는 이런 것들을 잘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형제들이 둘만 되어도 둘은 서로가 서로를 훈계하며 자랍니다. 부모님이 자식들을 꾸중할 때, 잘못한 한 아이만 혼내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한 아이의 형이나 동생, 누나를 같이 혼냅니다. ‘너는 그 애가 그것을 할 때 왜 가만히 있었느냐? 왜 도와주지 않았느냐? 왜 못하게 막지 않았느냐?’며 꾸중을 합니다.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들이 잘못을 하면 훈계하고, 꾸짖고, 위로하고, 덮어 줍니다. 우리 가운데 형제, 자매들이 지치고 낙담할 때 아무도 돕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함께 꾸중하실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잘못을 범하는 형제, 자매들을 가만 두고 막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꾸중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적 지식은 교회에서 형제들을 서로 돕는데 사용됩니다. 형제들을 돕고 훈계하는데 사용되지 않는 지식은 잘못된 저울추요,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세 번째 목적은 잠언 22:17-21입니다. [네 귀를 기울여 지혜로운 자의 말씀들을 들으며 네 마음을 내 지식에 쏟을지어다. 네가 만일 이것들을 네 속에 간직하면 그것이 즐거운 일이니 그것들이 어울려서 네 입술에 꼭 맞게 되리라. 내가 너로 하여금 주를 신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이날 네게 곧 네게 알게 하였느니라. 내가 모략과 지식에서 심히 뛰어난 것들을 네게 기록함은 너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들로 답변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잠22:17-21). 잠언 기자 역시 두 가지를 말합니다. 성경을 공부시키는 목적은 주를 신뢰하게 하려 함입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 믿음이 형성되고, 주님을 신뢰하게 되지 않는다면 그 공부는 무익한 공부입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 믿음이 자라지 않고 지식만 자랐다면 그는 우쭐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은 손을 내밀어 형제를 포옹하지만 머리가 뜨거워진 사람은 주먹을 내밀어 형제를 친다고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신 주님은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셨으며, 그들의 마음의 불신을 돌이켜 주님을 신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그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눅24:32,33a). 우리가 배우는 성경 공부는 머리 속에서 지식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주님 한 분을 신뢰하도록 만드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을 하면서 믿음에서 떠난 수많은 이웃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몸만 왔다 갔다하는 교인들을 부지기수로 널려 있습니다. 우리가 배운 영적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다시 주를 신뢰하게 만드는데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지식은 잘못된 저울추요, 가증한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성경 기록의 목적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모략과 지식에서 심히 뛰어난 것들을 네게 기록함은 너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들로 답변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잠22:21). 우리는 성경을 읽고 공부함으로써 진리의 말씀들로 답변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아닌 개똥 철학으로 답변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지식이나 연륜, 경험, 주워들은 이야기, 자기 생각으로 답변하려면 성경을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어떻게 진리의 말씀들로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큼 공부한 사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나기 위해 공부한 일꾼만이 진리의 말씀들로 답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질문은 단지 입으로 간단히 답변할 수 있지만 어떤 질문은 삶으로, 행동으로, 열매로 보여 주어야 하는 답변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이 과연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이는 단지 입으로만 예하고 말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답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진리의 말씀들을 몸소 실천하는 선한 간증과 열매맺는 삶을 통해 답변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네 번째 목적은 디모데후서 3:16-17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 지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단지 지적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우리를 위선자로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지혜만 있다면 정말 나무랄데 없는 사람인데...” 그렇다면 그는 성경을 통해 전혀 나무랄 것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둔한 자에게 명철을 줍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미련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119:130). “저 사람은 조급증만 고치면 흠잡을데 없는 사람인데...”라고 한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능히 그 사람의 조급증을 고쳐 놓습니다. 성경은 인내를 주는 책입니다.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말씀해 보십시오. 참 좋은 사람인데 술만 들어가면 개가 되는 사람이라면 성경은 그의 술을 끊어줍니다. 성경을 통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면 누가 그 사람을 불완전하다고 흠잡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 공부를 통해 저와 여러분은 완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여전히 조급하고, 술을 마시고, 지혜가 없다면 이는 잘못된 저울추에 불과합니다. 베드로는 매우 조급하며, 다혈질적이고, 육신을 신뢰하며, 배움이 짧은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용감무쌍한 척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은 겁많고 소심하고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구제불능의 사람도 성경을 통해 오래 참고, 온유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누구보다 지혜가 출중한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그들이 본래 학문없는 무식한 사람들인 줄로 알았으므로 이상히 여기며 또 그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줄도 알게 되고](행4:13). 성경은 베드로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 지게 합니다. 유능한 일꾼의 손에는 항상 손에 길들여진 좋은 연장이 있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하는데 필요한 좋은 연장입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얼마나 이 연장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가?입니다. 반복적으로 성경을 읽고, 규칙적으로 공부하고, 그것을 묵상한 후에 실제 삶에서 그것을 직접 사용해 본다면 여러분은 어느 분야에서든지 장족의 발전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는 말하기를, “성경에 정통한 사람은 모든 일에 정통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모든 선한 일을 하는데 필요한 유용한 도구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공구 상자와 같습니다. 나의 얼굴과 옷 매무새를 살피기 위해 거울이 필요하다면 성경의 거울을 펼쳐 보십시오. 형제들을 섬기는데 필요한 음식을 장만하고 싶습니까? 성경을 열어 보십시오. 필요한 모든 음식이 거기에 있습니다. 수고하는 일꾼들에게 필요한 물이 거기에 있습니다. 전투하는 군사들에게 필요한 칼이 거기에 있습니다. 집을 짓는데 필요한 망치와 단단한 못이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불이 거기에 있습니다. 지혜와 명철이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 지십시오. 주의해서 읽으십시오. 성경은 모든 선한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배우는 것은 항상 일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단지 지식에만 철저히 갖추어지면 그것은 잘못된 저울 추입니다.
다섯 번째, 성경 공부의 목적은 잠언 1:7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영적 지식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를 두려워 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3에 [...이는 주께서 지식의 하나님이신즉 사람의 행동을 달아 보시기 때문이로다.] 주님은 우리의 속 마음을 살피시고, 영을 살피시는 감찰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동을 달아 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단지 믿음만을 자랑하고, 영적 지식만을 자랑한다면 언제나 함량 미달이 되고 말 것입니다. 순금과 합금을 구분할 때 무엇으로 구분하시는지 아십니까? 바로 비중입니다. 무게를 달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인지 아닌지 하나님은 행동으로 달아보십니다. 주를 두려워 할 줄 모른다면 성도들의 영큐(영적 아이큐)는 새 대가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주를 두려워 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입니다. 주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지식의 시작이 없는 것이며, 시작이 없으면 중간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주를 두려워 하는 것은 지혜의 시작입니다. [주를 두려워 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거룩한 것들을 아는 것이 명철이니](잠9:10). 주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당연히 지혜의 시작이 없습니다. 시작이 없으면 중간도 끝도 없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기 전과 공부한 후의 차이는 주님과 성경에 대한 두려움이 내 안에 자리잡기 시작했는지 그렇지 않는지로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안에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고,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지식과 지혜는 지금 자라는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시작도 못한 것입니다. 주님, 이 시간 저희 마음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걷어 주시고, 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없다면 저희의 성경 공부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주님은 주를 두려워 하고 내 말에 두려워 떠는 자들을 보살피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곧 지혜요,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셨느니라.](욥28:28). 내가 정말 주를 두려워하는지, 나의 지식과 지혜가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그것을 보여 주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가? 살펴보십시오. 악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없다면 그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나의 악이든 다른 사람의 악이든, 사회의 악이든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나와 남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회의 부조리, 남이 짓는 죄에 대해서는 엄청난 미움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의 악은 관용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간에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며, 지식과 지혜의 시작점에도 서지 못한 것입니다. 잠언 8:13에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곧 악을 미워하는 것이니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길과 비뚤어진 입을 미워하느니라.] 우리는 늘 공평한 저울추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여섯 번째 목적은 베드로후서 3:18입니다. 지식 안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벧후3:18). 성장이 없는 지식은 거짓된 저울추입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성장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 성장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요,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쉽게 속습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어리기 때문입니다. 왜 흔들립니까? 욕할 것 없습니다. 그는 자라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는 일으킵니까? 자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르쳐도 왜 깨닫지를 못합니까? 자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식 안에서 자라나 성장한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지 못한 사람은 늘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13-15 [이로써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長成)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간교한 술수로 속이고자 하는 자들의 온갖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 안으로 자라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어린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무럭무럭 건강하게 커 달라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의 목적은 영적 성장에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일을 안 한다고 해서, 못한다고 해서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놀고 있다면 그는 욕을 얻어 먹어 마땅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린아이입니까? 성장한 어른입니까? 어려서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백수 건달로 놀고 있습니까?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성장이 없는 성경 공부는 밥은 먹는데 발육이 안되는 지체 장애자와 같습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모두 장성한 분량의 믿음과 지식에서 자라나 하나님의 일을 잘 하기를 바라십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집시 같은 뜨내기들을 이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듯이 집시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역 교회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말씀 공부에 신실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더욱 갈망합니다. 바울이 설교했던 베뢰아의 신실한 사람들(행 17:10,11)은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칭찬 받았습니다 [베레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것들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탐구하므로](행 17:11). 이것은 우리가 모두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한 본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날마다 성경을 탐구하므로]가 아니라 [날마다 성경을 탐구만 하므로] 문제입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는데 헌신하여, 남들이 찾지 못한 새로운 진리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와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진 진리들을 실행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는 목표를 보지 못하게 하는 어떤 주제에 몰두하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연구 속에서 우리는 놀라운 옛 책(성경)에서 크고, 광대한 의미들을 붙잡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의미가 우리를 붙잡지 못한다면 우리의 연구는 그 목표를 상실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그분께서 모든 성경의 중요 주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있는 말씀이신 그분을 기록된 말씀 너머로 보기를 원합니다.](빅스터). 우리는 언제나 균형 잡힌 저울을 필요로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라는 조화를 깨뜨리고, 균형을 잃어버린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탐구하는데만 몰두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 뜻대로 사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데 목적이 있는게 아니라 자신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얼마나 자신들이 공부를 많이 했는지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자랑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무시하며 지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말하고 믿는 교리에 대해서 거의 실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루종일 집에 앉아 성경을 연구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책벌레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구령, 매일의 기도, 깨끗하고 거룩한 생활 - 이러한 노력들 하나 하나는 성경 연구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아는 지식을 경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것을 미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23에 이르시기를,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음이라.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저것도 행하지 않은채 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마23:23). 여러분이 만약 성경을 배우고, 공부하기만 한 채 실천하지 않는다면 거짓 저울 추를 두는 것이며,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지식만 있는 갖춘 종교인들이 얼마나 악하며, 무용한가를 보여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때때로 우리 또한 너무 종교적인데 몰두하는 나머지 사랑, 동정, 긍휼을 보여야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것에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지만 주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모든 비용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필요 보다 남을 앞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데 보낸 시간은 항상 시간을 잘 쓴 것이며, 마땅히 성경의 모든 것을 배우려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대주의, 예언, 대환란, 적그리스도 등에 너무 전념함으로 증거하는 일과 다른 사람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지식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운 요소인 사랑이 결여되어 있을 때 교만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우는 성경 공부와 설교, 독서, 토론 이런 모든 것들이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기를 소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헛된 언쟁이나 말다툼에 빠져 그것을 영적 전쟁인 줄로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믿음이 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인 것처럼 사랑이 없는 모든 것은 NOTHING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잃어버린 혼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강력하게 증거하는 수단이며,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다음으로 각별히 주의 할 것은 반대 현상입니다. 지식을 무시하고 사랑과 감정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역시 거짓된 저울 추입니다. 이들은 성경 지식을 우습게 여기고 은혜와 사랑, 체험만을 강조함으로서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성경 공부가 없다면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없게 됩니다. 지식에 대한 강조는 결여되고 감정과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그러한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으로부터 이단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들은 종종 성경기록을 문맥과는 상관없이 취하며 다른 경륜에 해당하는 교리들을 신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취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지식과 결부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냉혹하고, 지식없는 사랑은 맹목이라고 말했듯이 이 둘의 균형이 깨어지면 거짓된 저울추에 불과합니다. 정확한 교리에 근거하지 않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교리에 근거하지 않는 말은 합당한 말이 못됩니다. [오직 너는 건전한 교리에 합당한 것들을 말하여](딛 2:1).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교리를 가르치는 것에 마음을 쏟으라.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계속해서 이것들을 행하라. 이는 네가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자들을 구원할 것임이라.](딤전 4:13,16).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적당하게 균형 잡힌 교리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에 대해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거짓된 저울(false balance)은 주께서 가증히 여기시나 꼭 맞는 추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느니라.](잠언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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