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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Pastor. Yoon

뜨레스 디아스 대점검 -[월간교회와 신앙]


뜨레스 디아스 대점검

현재 한국 교회는 '뜨레스 디아스'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다. 양분된 평가가 병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 프로그램이 성경적으로 잘못이 없는 것으로 교회에 유익하다고 보는 긍정적 평가요, 다른 하나는 성경적으로도 잘못되었고 교회에도 해를 끼치는 것으로 보는 부정적인 평가이다. 어떤 이는 교회를 위한 절대적인 프로그램으로 여기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단적인 프로그램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 와중에 혼란에 빠지는 자들은 바로 교인들이다.

이제 잘못이 있다면 무엇이 잘못인지 밝혀야 할 때가 되었고 혹 좋은 프로그램이라면 그 근거를 객관적으로 밝혀야 할 때이다. 아니 어떤 점에서 늦은 감마저 들고 있지만 본지가 이제 뜨레스 디아스의 긍정적, 부정적 요소를 객관적으로 밝히는 데 작으나마 도움을 주고자 이 란을 마련한다. 본지는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누구든지 찬반 양론을 개진할 수 있도록 지상토론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본 기획을 진행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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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교회적 성격규정 없이 확산일로에 선 영성운동

K장로는 최근 어느 모임에 참석한 뒤 교인들로부터 변해도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느냐는 말을 들었다. 그전에는 근엄한 얼굴을 하고 고개와 허리는 그야말로 뻣뻣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웃기도 잘하고, 조금만 감동되는 일이 있으면 눈물도 잘 흘리는, 정이 많은 사람으로 변했다. 유년주일학교 교사를 자청하는 등 한마디로 '열성파'가 된 것이다. 교회 사찰이 있기 때문에 청소나 이곳 저곳 보수해야 되는 일 등을 굳이 교인들이 안해도 되는데 그는 종탑부터 화장실까지 도맡아서 앞장을 선다. 더욱이 한 달에 20명이 넘는 사람들을 전도해 교회 1년 동안 등록하는 숫자보다 더 많은 기록 갱신을 하여 성도들을 놀라게 했다.

R목사는 K장로의 변화에 겉으로는 반가워하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K장로는 교회 행정에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일등공신인데다가 교회의 터줏대감으로 불릴 만큼 세도를 부렸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겸손과 순종으로 신앙생활을 하니 R목사로서는 혹시 다른 저의가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K장로가 그를 찾아와 자초지정을 세세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R목사는 K장로로부터 '뜨레스 디아스'라는 영성훈련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그도 K장로가 저렇게 변하는 훈련 프로그램이라면 자신도 한 번 참석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뜨레스 디아스(Tres Dias. 이하 T.D.)에 대한 긍정적인 사례 중의 하나이다.

반면, 교회 중진 몇명이 T.D.에 갔다온 뒤로 당회가 시끄러워 지면서 자칫 교회가 두동강날 위기에 처해 있는 경기도 성남시의 모 교회의 사례, 아내가 T.D. 프로그램에서 이상한 경험을 했다는 이유로 가정불화가 심화되더니 급기야 이혼까지 고려하고 있는 서울 모 교회의 김 집사의 경우 등 T.D.에 의한 부정적인 현상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회는 T.D.에 대한 교회적인 개념이나 입장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논의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근간에 일부 기독교 언론에서도 다룬 적이 있었으나 대체로 비판적인 시각에서 감정적인 글을 다루었다는 것이 T.D.관계자들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미운 털 박힌 T.D.

한국교회의 T.D.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기보다는 아직까지는 부정적인 경향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D.에 대한 세력은 점점 더 늘어 나고 있어 이것이 단순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T.D.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우선 미국 한인교회들이 T.D.에 대해 사이비로 규정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에 있어서의 T.D.는 1972년 11월 2일에서 5일까지 뉴욕 뉴버그에서 T.D.가 초교파적으로 실시된 이래 1980년 경부터 미국 전역에 조직화되어 퍼져 나갔다. 이 T.D.에 미국 한인교회 교인들이 참석하면서 T.D.가 교포 사회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론이 정립되지 않은 미국 한인교회에서의 T.D.는 교회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즉, 개교회에서 실시한 T.D.에 다른 교회 교인들이 참석하면서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T.D.에 참석한 교인들이 자신이 섬기던 교회를 나와 T.D.를 운영하는 교회에 등록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T.D.가 교인 빼앗아 가는 프로그램으로 인식되기 마련이었고 교인을 잃은 교회는 T.D.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을 수밖에 없었다. 신학적 검증이 없는 데다가 가톨릭에서 시작됐다는 T.D.를 미국 한인교회들은 교회 분열을 가져오는 사이비로 규정, 결의하게 이른다. 이런 와중에 T.D.가 한국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 미국에서 좋지 않은 평을 받았던 T.D.가 국내에서도 문제의 단체로 낙인이 찍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T.D.를 연구하는 예장 통합측 한 관계자는 "국내에 들어온 T.D.의 문제점은 먼저 초창기의 T.D.를 받아들인 단체와 사람이 한국교회 내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거나 또는 그러한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에 의해 보급되었다는 것이 T.D.의 첫 단추를 잘못 끼게 된 원인이다. 따라서 T.D.의 순수성이 적지 않게 가려지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도입, 운영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두 갈래로 들어온 T.D.

T.D.는 두 갈래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두 갈래 모두가 한국교회에서 달가워하지 않은 인물에 의한 유입채널이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1982년 미국 뉴욕에 있는 미드 허드슨 T.D.에 현지 한인교회 교인 여러 명이 참석했다. 여기에 참석했던 교인들은 이 프로그램을 한국 교회에 널리 보급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당시 다른 한편에서는 미 8군 내에 영어 T.D.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한인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레마선교회 이명범 씨가 미드 허드슨 T.D.에 참석했다가 미 8군 내에 영어 T.D.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이들과 함께 자신이 운영하는 선교 프로그램에 적용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이것이 이명범 씨가 운영했던 한국 T.D. 이다. 레마선교회의 레마(렘)T.D.는 빠르게 확장되어 갔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주로 이명범 씨가 중심이 되었다.

1987년 렘T.D.가 교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자 이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일단 이명범 씨의 선교단체에서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명범 씨와 결별한 이들은 T.D. 프로그램의 유익성을 깨닫고 한국교회에 적용시킬 것을 고민하였다. 그런 후 1988년 6월부터 T.D.에 관해 평신도들과 협력하여 프로그램 연구를 시작, 나름대로 잘못되었다고 보는 상당부분을 수정 보완하여 1889년 1월에 서울 T.D.(아름다운 교회, 김기홍 목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서울, 부산, 대구 등으로 T.D.가 확산하게 된다.

또 다른 갈래는 장광영 목사(금호제일감리교회)를 통해 들어 온 T.D.이다. 80년대 중반 감리교 장광영 목사는 뉴저지 T.D.(영어)를 경험하고 이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고 몇 해 동안 연구를 했다. 그러나 장 목사는 T.D.를 한국교회에 적용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김광신 목사( LA 은혜교회를 담임, 베뢰아 귀신론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음)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래서 골든 T.D.가 1989년에 만들어 지게 된 것이다. 골든 T.D.는 김광신 목사를 중심으로 5회까지 운영되다가 6회부터 장광영 목사가 인수, 운영하게 되었다. 이렇듯 T.D.는 이명범 씨와 김광신 씨를 통해 한국에 보급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 전국적으로 17개 단체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단 시비의 전말

국내에 보급된 T.D.의 문제는 전수자가 한국교회에서 이단시비에 연루되어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미국 한인교회의 T.D.에 대한 잡음과 함께 한국교회에서 T.D.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이단시비 때문에 T.D.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교인들에게 먼저 새겨지게 된 것이다.

현재 국내의 T.D.관계자들은 T.D.가 이명범 씨와 김광신 씨에 의해서 보급됐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T.D.자체를 이단시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서울 T.D.의 한 관계자는 "초창기 이명범 씨로부터 배웠다고 해서 이명범 씨의 사상을 배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배운 것은 프로그램에 국한된 것이며, 현재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역시 이명범 씨의 사상이 아니라 신앙 성장을 위한 영성훈련일 뿐이다."고 주장했다.

대다수의 T.D.관계자들은 이들과의 관계가 사상적 공감이 아니라 단지 기술 전수와 같은 프로그램을 배우기 위한 관계였음을 밝히고 있다.

T.D.에 대한 논쟁이 단지 T.D.의 보급자에 문제가 있다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T.D.가 로마 가톨릭에서 출발된 것이라는 점도 의미 있는 대목이다. 이것은 자칫 신학적인 문제로 발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T.D.의 로마 가톨릭적인 분위기나 용어, 신학적 배경, 그리고 T.D.가 지닌 문화적 배경까지도 충분히 연구, 검토돼야만 할 문제이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실시되는 T.D.의 대부분은 여과되지 않은 채 미국 T.D.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문화의 차이뿐 아니라 프로그램 중 사용되는 로마 가톨릭적 용어에 크게 반감을 사게 된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들의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T.D.의 용어 중 아브라조(Abra Zo)라는 것은 프로그램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아브라조는 문자적으로는 '포옹'이라는 뜻으로 전통적인 기독교인의 인사나 형제간의 우애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프로그램이 진행됨에 따라 참석한 사람들의 우정, 우애와 친밀감이 더해 가고 서로의 긴장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아브라조는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부담없이 받아들여 진다.

서구에서 친한 사람을 만나면 껴안거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는 것 같은 인사 행위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인사는 흔치 않다. 아이들에게나 가능한 표현일 뿐 성인들 사이에 서로 껴안거나 입맞춤을 한다는 것은 특별한 관계가 아닌 이상에는 일어나기 힘든 현상이다. 이것이 한국사회이다.

T.D.에서 아브라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는 시각은 이상할 수밖에 없다. 일부 기독교 언론에서는 아브라조가 섹스교 의식 중의 하나라고 취급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아브라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D집사는 남편을 강제로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담임목사가 추천한 T.D.에 참석하게 했다. D집사는 남편이 이번 훈련으로 신앙이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3박 4일 동안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마중 나온 D집사를 보고 갑자기 "아브라조!"라고 소리치며 껴안았다.

D집사는 순간 당황했다. 남편이 남편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어리둥절해 있는 D집사에게 남편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나, 저 집사랑 이렇게 껴안고 아브라조했다."라고 자랑한 것이다. D집사는 아브라조가 뭔지는 모르지만 남편의 그 말에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목사가 교인을 훈련시킨다고 데리고 가더니, 교회 여자들과 놀아나게 했다는 생각이 앞서 든 것이다. D집사는 그 길로 달려가 목사에게 따졌다. 담임목사는 D집사를 이해시키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T.D.를 모르는 D집사에게 아브라조는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D집사의 가정은 큰 위기 가운데 대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례는 미국 문화가 짙은 T.D.가 한국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면서 발생한 문제의 한 단면이다. 이 점에 대해 '사랑의 동산' 한 관계자는 "T.D.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문제 발생의 요소를 충분히 따져보아야 한다. 일례로 아브라조를 실시할 때 먼저 우리 문화적 정서를 고려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우리의 경우 이런 문제가 발생될 것을 염려, 아예 남녀를 따로 구별해서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T.D.가 이런 문제를 간과하고 있어 개선이 되어야 할 문제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T.D.를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T.D.자체를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사용했다는 지적이다.

단절인가 연속인가

T.D.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부터 한국 개신교는 제자 훈련, 혹은 영성훈련이란 이름으로 중고등부나 청년회에서 부분적인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는 가톨릭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가톨릭은 1967년 5월 4일 국내의 14개 교구에 일제히 '꾸르시요'라는 이름으로 T.D.를 실시했다. 서울 교구의 경우, 1년에 20차례씩 약 3백회를 넘게 이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개신교에 T.D.가 실시되기 전에도 T.D.의 프로그램 일부인 애찬식이나 세족식 같은 내용의 영성훈련은 주일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다.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T.D.를 생소하게 느끼지 않았던 이유도 수련회에서 이미 학생들에게 실시해 보았던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실시되는 T.D.가 가톨릭에서 실시하는 꾸르시요의 연장선이냐 아니면 단절이냐에 관에서 T.D.의 관계자들은 가톨릭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이 가톨릭과의 연장선에서 T.D.를 보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T.D.와 가톨릭과의 단절을 위한 용어 변경이나 의식 변화가 그들의 주장에 비해 미흡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T.D.의 용어가 가톨릭과 흡사하거나 그대로 이며, 프로그램 내용이 가톨릭의 의식과 비슷한 것들이 있어 신학자들로부터 지적을 받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T.D.를 시작할 때에 촛불을 점화하고 끝나면 촛불을 끄는 의식이 있다. 이것은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T.D.의 의식인데, 개신교에는 없고 가톨릭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T.D.의 한 관계자는 "촛불을 켜고 끄는 행위가 비록 성령이 임재한다는 상징적인 행위일지 모르지만 개신교의 신학에서 보면 촛불이 꺼지면 성령께서 사라진다는 논리가 성립되어 문제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이 의식을 중요시하는 것처럼 T.D.가 의식이나 격식에 묻힌다면 가톨릭과 다를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사랑의 동산'의 한 관계자는 "꾸르시요가 1세대라면 T.D.는 2세대, 사랑의 영성훈련이 3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T.D.가 비천주교라면 사랑의 영성훈련은 한국 전통적 개신교의 T.D.라고 말할 수 있다. T.D.가 꾸르시요의 틀을 유지하는 연장선상에 있다면 사랑의 영성훈련은 개신교의 전통 신학으로 바꾸려는 단절의 의지라고 말하고 싶다."며 기존의 T.D.와 차이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국내의 T.D. 중에 T.D.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영성훈련'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가톨릭과의 단절과 독자적인 영성훈련의 체계를 정립하고자 하는 T.D.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보인다.

이밖에 T.D.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을 보면, 성경을 못 보게 한다, 돈 많은 사람들의 특수 집단화된 모임이다, 교회와 가정을 등한히 한다, 평신도들이 성경 없이 설교하여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등이다.

그러나 이같은 지적은 T.D.에 대한 단편적인 것일 뿐이라고 T.D.의 관계자들은 말한다. 기자가 취재한 T.D. 중에는 평신도가 인도하는 경우 설교가 아니었으며 간증 형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또한 평신도의 발표를 뒷받침하는 목회자의 답변 형식의 설교를 통해 참석자들의 이해를 돕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성경에 대한 문제는, 굳이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는 프로그램 진행 방식이 아니였으며, 강요에 의해 성경 지참을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취침 시간에 개인적으로 성경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T.D.의 특징은 프로그램 내용보다는 프로그램 준비를 하는 데부터 있는 것 같다. 매회 실시하는 프로그램임에도 사전 준비하는 것이 철저하여 참석자들이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두가 이미 T.D.를 경험한 자들로, 관계자들은 참여하는 사람들보다 준비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이곳을 거쳐 나가는 사람들의 모임이 따로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자가 참석한 T.D.의 경우, 교회를 우선 순위로 모든 활동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당수의 T.D.가 이렇게 교회 중심과 개신교의 신학을 배경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T.D.의 관계자들은 앞에서 지적했던 잡음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자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신앙 활력을 위한 T.D.

기자가 경험한 바에 한정해서는 T.D.에 참석한 사람들의 거의가 교회에서 별탈 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랑의 동산의 R목사는 "교회에서 어느 정도 믿음이 성숙한 사람을 추천 받아 신앙의 재충전을 하게 한다. 이 프로그램 자체가 초보 신앙인보다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잘하는 사람들 중에 자칫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T.D.의 전신인 가톨릭의 꾸르시요의 태동을 살펴보면 T.D.의 성격을 쉽게 알 수 있다. 꾸르시요는 스페인의 '성 야고보의 무덤'에서 종사하는 안내자들에 의해 시작된다. 초기 순례를 오는 사람들을 위해 안내를 하던 안내자들은 그 일을 즐겁게 기쁨으로 잘 감당했다. 그러나 각자가 맡은 일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일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순례자 안내 담당자들은 문제 의식을 느끼고 안내담당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1947년 1월 7일 최초로 시작, 33차에 걸쳐 검증한 꾸르시요는 1951년에 완성되었으며 철저히 평신도들에 의해 진행되어 왔었다. 1966년 로마 교황이 참석, 이를 경험하고 가톨릭을 부흥시키는 데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격찬, 전 세계의 교구에 실시하도록 지시하게 된다. 이렇듯 T.D.의 성격은 신앙의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한 목적임을 그 태동에서 잘 알 수 있다.

국내에서 운영되고 있는 T.D.는 그 성격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원래는 평신도를 주축으로 한 평신도 운동이었다. 그러나 영적 운동이기에 목회자들의 참여를 허용, 평신도와 목회자들의 영적 충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사랑의 동산의 R목사는 "우리의 경우 담임목사의 추천을 받아야만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이 원칙은 담임목사가 먼저 참석을 하고 그 다음에 사모가 받고, 일정 기간 평가를 통해 그 목회자의 교인들을 참여시키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목회자들의 사역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질의 제자 훈련을 시켜 교회로 보내 더 충성스런 일꾼이 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고 밝혔다.

국내 T.D.의 계보

T.D.의 운영 실태를 보면서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은 프로그램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불건전한 집단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 한인교회에서 문제시된 T.D.가 개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시작됐지만 결과적으로는 다른 교회의 교인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한 것같이 한국교회 내의 T.D. 역시 이런 것과 유사한 성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형편이다.

국내 T.D.의 현황을 보면, 선교 단체가 주관하는 T.D., 독립지국에 의해 운영되는 T.D., 주관 교회가 있고 평신도 운동을 목회적 프로그램으로 변형시켜 목회자가 인도하는 T.D., 뜨레스 디아스로부터 프로그램을 배웠으나 T.D.라는 이름을 쓰지 않으며 교회 제자 훈련이나 영성훈련으로 활용하는 훈련 프로그램 등 크게 4분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중에 선교 단체가 주관하는 T.D.는 한국 T.D.(레마선교회), 레인보우 T.D.(감림산기도원), 한사랑 T.D. 등이다. 한국 T.D.는 이미 한국교회에서 이단이라고 문제시한 이명범 씨에 의해 운영돼 불건전성이 있어 교단적으로 참석을 금하는 쪽이며, 레인보우 T.D.는 부산지역에서 감림산기도원 원장 이옥란 씨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 원장의 출신이 용문산(나운몽 계열)이라 하여 예장 통합측에 의해 연구대상이 된 바 있으나 공식적으로 이단성에 대해 규정되지는 않았다. 한사랑 T.D.(김한식 씨) 역시 통합측으로부터 달갑지 않은 단체로 분류되고 있다.

독립 지국으로 운영되는 T.D.에는 서울 T.D., 유럽 서울T.D., 지저스 T.D.가 있다. 이 중에 유럽 서울T.D.는 김광신 목사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김 목사는 미국 한인교회에서 베뢰아 귀신론을 가르쳐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인물이다. 지저스 T.D. 역시 부활의 교회 이태화 목사가 베뢰아 귀신론 문제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으나 예장 합동측 교단이 논란 끝에 지난해 이 목사를 조건부로 받아들인 바 있는 곳이다.

주관 교회가 있고 평신도 운동을 목회적 프로그램으로 변형하여 목회자가 인도하는 T.D.가 한국에는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골든 T.D.(금호제일감리교회), 청주 T.D., 여의도 T.D.(여의도 침례교회) 등 7개 정도가 있으며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이다.

마지막으로 기존 T.D.와 별개의 이름으로 한국적 영성 프로그램화 시키려는 모임으로 이들 대부분이 예장 통합측 교회가 중심이 된 것이 특징이다. 승복교회가 중심이 된 아가페 교실과, 예인교회, 빛된교회, 한소망교회 등 20개 교회가 참여하는 사랑의 동산, 그리고 동촌제일교회 중심의 영남 사랑의 동산 등이 여기에 속한다.

성격규정이 시급한 T.D.

T.D.를 연구한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T.D.가 교회 밖에서 운영될 때의 돌출 행위라고 말한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단계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느냐에 따라 상황은 180도로 달라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선교 단체가 인도하는 T.D.의 경우, 인도자가 프로그램의 절정 단계에서 선교 단체에 헌신해야 한다고 유도하면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를 벗어나 선교 단체 활동에 전념하고 교회를 등한히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영성훈련을 통해 양질의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교 단체나 자신들의 집단에 대한 전적인 헌신만을 요구하는 비정상적인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결국 T.D.의 목적이 교인의 영성훈련이냐 아니면 개인이나 단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는 말이다.

예인교회의 B목사는 이와 관련, "그 동안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많은 목회자들이 참석하여 프로그램의 내용에 대한 검증을 해온 셈이다. 참석한 목회자들은 나중에 교인들을 적극적으로 보내 양질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드는 데 후원을 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한국교회를 위해 운영되어져야 한다고 보는데 몇몇 단체에서 T.D.의 목적을 변질시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T.D.에 대한 한국교회들의 시시비비는 T.D.의 국내 토착화에 대한 요구인지도 모른다. 가톨릭 성향의 내용을 철저한 연구로 개신교 신학에 맞추고, 교회 중심으로 프로그램화하면 T.D.의 불건전성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식시킬 것으로 보인다. T.D.가 교회 성장과 교인의 신앙 성장을 위한 완벽한 모델은 아니지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것만은 사실이다. 나아가 무한한 가능성의 여지가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T.D.의 현상학적 부작용을 제외하더라도, 뜨레스 디아스 프로그램 그 자체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분석과 합의가 전 교회적으로 아직 내려져 있지 않다는 대목이다.

어찌됐든 T.D.는 한국교회에서 적지 않은 경계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확산 일로에 있다. 얼마 가지 않아 한국교회의 커다란 신앙운동이 될 전망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론의 정립과, 신학적 연구 및 성격규정은 T.D.에 대한 한국교회의 시급한 현안이 이미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총회로 예상되는 예장 통합측의 T.D.에 대한 연구 결과가 크게 주목되고 있다. (월간 <교회와신앙>

<2> 뜨레스디아스와 한국교회 영성훈련의 과제

류영모 - 월간 <교회와신앙> 편집위원, 한소망교회 목사

한국교회는 100주년이 지나면서 정체성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이유는 세계 교회가 놀랄만큼 양적 성장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으나 한국교회가 이러한 성장에 대처하기 위한 신학적, 실천적 준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이는 마치 몸집은 어른의 수준에 도달했으나 정신적으로는 자기 정립이 되지 못하여 정신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청소년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미성숙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한국교회는 복음을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해왔고 윤리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적 구원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외면한 채 화해 대신 분열을, 용서 대신 미움을 사랑 대신 이기심만을 조장해 왔다.

이러한 갈등과 혼란을 부정적인 의미로서보다는 긍정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려는 노력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한국교회가 과거 아동기적인 신앙의 자세를 포기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탈바꿈하려는 몸부림을 낳게 된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등장한 단어가 영성(Spirituality) 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었고 희망적인 조짐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영성이라는 문제는 개념정립조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적인 검증도 진지하게 거치지 못한 채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영성, 영성신학, 영성훈련에 대한 상이한, 아니 양극단적인 이해와 평가가 상종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발을 맞추어 오랜 영성훈련의 전통을 가진 천주교의 터전에서 준비되고 검증되고 실시되고 있던 꾸르시오(Currssillo)라는 프로그램으로 전해지게 되었고, 그것이 개신교 전통신학에 근거한 성서적, 신학적 검증이나 목회적, 교회론적 거름도 없이 한국교회에 전해지게 되었다.

때문에 본 <교회와신앙>지에서도 '뜨레스디아스 대점검'이라는 주제 아래 한국교회 안에 조용히 영성훈련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음을 해 가고 있는 뜨레스디아스에 대한 바른 평가와 분석 및 논의를 통하여 무엇이 한국교회를 유익하게 하며 무엇이 한국교회를 해롭게 하는가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본 주제는 세 가지 가설을 가능케 한다.

첫째, 뜨레스디아스 운동은 그 원리와 목적 및 진행 방법이 복음적이지 못하여 한국교회를 해치고 있는 것인가.

둘째, 과연 이 운동은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프로그램으로 한국교회 2세기를 섬길 수 있는 훌륭한 영성훈련, 제지훈련 프로그램인가.

셋째, 이 운동은 단순한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이 운동을 추진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신학과 영성 여하에 따라 한국교회를 해칠 수도 있고 유익하게도 할 수도 있는 열려진 프로그램인가.

영성훈련

어떤 문제든지 그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고자 할 때에 하나의 과제가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가치 중립성'의 문제이다. 주어진 문제에 대한 편견이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다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 중립성의 가능성 여부를 논하기 전에 본 논제를 접근함에 있어 최대한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판단하는 준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준거를 영성신학, 영성훈련에서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뜨레스디아스는 이론신학이나 교리신학이 아니요, 생활훈련이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첫째, 영성이라고 할 때 한자어로 품성 성(性)자를 쓰기 때문에 영적인 품성을 개발하는 것이 영성훈련이라고 쉽게 오해를 한다. 물론, 동양 종교의 영성들은 자기를 비우고 내면의 어떤 품성을 개발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그러나 성경이나 기독교적인 전통은 다르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생활이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이요,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실천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영성훈련은 아래와 같은 세 단계의 통합과 조화를 이룰 때 참된 영성훈려이라고 말한다.

첫째 단계, 초월적인 전재인 하나님을 만나는 것.

둘째 단계, 그분을 만나므로 내 존재가 거듭나고 변화되는 것.

셋째 단계,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세상으로 파송받아 거기서 헌신하고 봉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훈련이다.

그래서 오성춘 교수는 영성훈련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정의했고, 박홍 교수는 "믿는 신앙을 실천하는 실천적 영적 지혜"라고 말한다

둘째, 영성훈련이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장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성전 중심으로, 모든 훈련이 이루어져 왔다. 예배, 교육, 선교, 봉사, 선교 등 모든 활동이 교회 중심이었다. 그것은 강력한 장점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한계점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영성훈련의 다른 장으로 일상생활을 떠나 산이나 기도원 등에 들어가 훈련하는 퇴수회 중심의 훈련이 있어왔다. 이것 또한 그 나름대로 공헌점이 있었지만 이런 운동은 교회를 돕고 섬기는 보완이 되어야지 독자적 운동으로 흐를 때 한국교회를 유익하게 하지 못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근간 영성훈련의 새로운 장으로 가정이 부각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사회 전반이 영성훈련의 실천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들 한다.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야할 영역이라고 생각된다.

셋째는, 영성훈련의 영역의 문제이다. 사람에 따라 달리 나눌 수 있겠으나 리챠드소스터는 영성훈련을 묵상과 기도와 공부 등으로 분류되는 내면 훈련, 순종과 섬김 등으로 분류되는 외면 훈련, 고백과 예배와 경축 등으로 분류되는 공동훈련으로 나누었다. 영성훈련의 장의 문제든, 영역의 문제든, 심지어 원리의 문제까지도 한국교회의 허점은 그 통합성의 결여에 있다. 통전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기도와 삶이 통합되고, 교회와 사회가 통합되고, 예배와 인격이 통합되고, 개인과 공동체가, 개인 구원과 사회구원이 통합되어질 때 온전한 기독교적 영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는 것이 감격으로 이어지고, 느끼고 체험한 것들이 인격과 삶으로 이어지고 그 체험과 삶이 다시 신학화되고 체계화되어지는 순환과 조화를 이루어갈 때 온전한 기독교적 영성으로 발전해 갈 수 있게 된다.

뜨레스 디아스의 기원

뜨레스디아스는 천주교회의 꾸르시오 운동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 운동은 1949년 1월 7일 스페인 마조르카의 헤르바스주교와 보닌주교,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순례자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는 천주교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개발한 제자훈련의 한 모델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33차의 훈련을 거치는 동안 여러 시도 끝에 대략 오늘날과 같은 꾸르시오 운동이 1951년 3월에 완성이 되었다.

1966년 교황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이 운동을 격찬함으로 이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세계 천주교회에 번져갔다. 한국천주교회에는 1967년 5월 4일 필리핀 남자 성도들이 와서 처음 실시하게 되었고 1971년 8월 12일에는 필리핀 여성도들이 와서 시행을 함으로 도입되게 된다. 현재 한국천주교 14개 교구 전체에서 이 꾸르시오 운동은 실시되고 있으며 서울 교구에서만 1년에 20차례씩 지금까지 약 300회 정도 실시했다고 이 운동을 맡고 있는 어느 주임신부는 말한다. 이만큼 꾸르시오 운동은 천주교회 영성운동으로 활발히 시행되고 있다. 이 운동이 최근 천주교 성령운동의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신부는 귀뜸해 주었다.

오늘날의 뜨레스디아스인 당시의 꾸르시오 운동은 1950년대 말까지 스페인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꾸르시요를 경험하고 미국 텍사스에서 훈련 중이던 스페인에 공군 몇몇 사람이 기도회를 갖던 중 미국에서 처음으로 꾸르시오 행사를 거행하게 되었다. 스페인어로 실시한 이 꾸르시오 운동은 미국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60년 초기에 처음으로 영어로 실시한 꾸르시오 행사가 거행되었다.

개신교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자 로마가톨릭은 이 행사가 신교들에게도 제도적으로 가능한 행사가 되게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급기야 이 운동은 초교파적인 뜨레스디아스가 된 것이다. 초교파적으로 실시된 최초의 뜨레스디아스는 1972년 11월 2일-5일 뉴욕 뉴버그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뜨레스디아스는 뉴잉글랜드 뉴저지, 그리고 펜실베니아로 퍼져 나갔다. 1980년 7월 11일 미국 전역의 뜨레스디아스 공동체는 전체 뜨레스디아스 조직을 구성하기 위하여 연합하였다.

뜨레스디아스 목적과 단계

목적

꾸르시오 운동은 그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꾸르시오 운동은 크리스천 생활을 쇄신하고 세상을 그리스도화 하기 위한 교회 운동이며 3일간의 꾸르시요를 통해 참된 크리스천이 되는 기본적인 것을 생활화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이고 능동적인 방법을 체험하게 한다."

여기서 두 가지의 큰 목적을 말하고 있는데, 첫째는 내면생활의 갱신이며, 둘째는 이웃을 섬기는 훈련이다. 그런 점에서 뜨레스디아스 운동은 서술용어나 문잔상 차이는 있을 지 모르나 꾸르시오 운동의 목적과 정신을 받아들이고 있다.

뜨레스디아스와 꾸르시요로부터 프로그램을 배워 비천주교적, 한국적 개신교 정통신학에 적합한 영성훈련으로 자리잡았다고 자처하는 한 운영당국은 그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운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한 한국교회의 영성훈련이며, 삼일간의 사랑의 영성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 앞에서 철저한 자기 변화를 경험하며 교회와 세상으로 파송받아 헌신하고 봉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필요한 실질적이고 능동적인 방법을 체험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꾸르시요와 뜨레스디아스는 이러한 동일한 목적이데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그 강조점이 다르다. 꾸르시요는 주관적이고 내면적 체험을 위한 묵상을 중시하는 반면에 뜨레스디아스는 예배와 찬양을 중시하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말씀에 강조점을 둔다.

그리고 꾸르시요는 미사와 그 해설이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반면 뜨레스디아스는 영감 있는 찬양과 토의 및 발표 그리고 섬김을 위한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 훈련에는 어떤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가? 꾸르시요는 수강자의 자격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첫째, 장차 크리스천 지도자로서 사도적 활동에 헌신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

둘째, 영세한 지 3년 이상 지났고 견진을 받은 사람.

셋째,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

넷째, 나이가 남녀30-60세인 사람.

그러나 인격적 결함이 있거나 질병으로 인해 집중적 교육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나 고질화된 악습(노름 등)에 젖어 있는 사람 등은 지교회에서 치료와 변화를 체험한 후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뜨레스디아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꾸르시요처럼 까다로운 규정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세례받은 장년 그리스도인으로, 교회 지도자로 봉사할 수 있는, 담임목사의 추천을 받은 사람으로 제한하고 있다(담임목사의 추천을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고 있는 운영국들도 많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운동은 중생체험 운동이나 신유 등을 위한 기도원 운동이 아니라 제자훈련의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계

뜨레스디아스는 보통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 수련회를 준비하는 퇴수회 이전 단계

* 3박 4일 간의 퇴수회

* 퇴수회 이후의 단계

첫째, 수련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보통 8주 정도를 요한다. 이 기간 동안 3박 4일을 봉사하게 될 팀멤버를 구성하고 3박 4일을 경험하게 될 후보자(케디데이트 혹은 주바라기 등으로 불려진다)들을 지원받고 선정한다. 이 8주 동안 주 1회 정도 모여 기도회를 가지며 프로그램을 점검하고 퇴수회 기간 동안 필요한 각종 준비물 등을 각 파트별로 나누어 준비하기도 한다.

둘째, 3박 4일 간의 퇴수회는 양질의 한국교회 제자를 양성하기 위한 사랑의 영성훈련으로서 현대인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 복음적인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마련된 집중적인 교육과정이며 이 운동의 핵심이다. 다시 이 3박 4일은 아래와 같이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셋째, 퇴수회 이후의 격려 단계이다. 삼일간의 퇴수회를 마치고 벅찬 감격과 굳은 결심을 하고 돌아온 뻬스카로르(퇴수회를 마친 사람을 지칭하는 말)들은 계속되는 제 4일의 삶을 승리의 생활로, 즉 참된 은혜의 생활을 영원히 계속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퇴수회 이후는 바로 뻬스카도르(스페인어 '어부'라는 뜻)로서의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마련된 단계이다.

뜨레스디아스 교육과정

뜨레스디아스의 교육과정은 마치 한 사람이 믿음의 집을 짓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반석 같은 주춧돌이 있어야 하고 그 위에 기둥과 뼈대를 세운 다음 살을 붙이고 장식을 함으로써 집을 완성하게 되는 것과 같다.

첫째는 반석이다. 이 반석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첫째날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인데, 그 대답을 성부 하나님의 속성에서 찾는다. 둘째날 주제는 '은혜의 생활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인데, 그 대답을 성자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찾는다. 셋째날 주제는 '주님의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인데, 그 대답은 성령의 도우심과 성령의 열매 안에서 찾고 있다.

둘째는 기둥과 뼈대이다. 이 뼈대를 세우는 일은 강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뜨레스디아스에서는 이 강의들을 로요(Rollo)라고 하는데, 이 말은 스페인어로 통나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영성훈련의 기둥 뼈대라는 뜻이 되기도 하고, '굴러간다'라는 동사형으로 쓰일 때는 지루하게 매시간 쉬임없이 굴러가는 강의, 그러나 믿음의 뼈대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 강의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제자들의 사랑과 섬김의 삶'을 중심으로 다루어지며 평신도와 목사가 번갈아가며 맡게 된다. 평신도 로요는 질문적 성격을 띠며, 목사 로요는 대답적 성격을 띤다. 평신도 로요가 간증적 이라면 목사 로요는 신학적이다.

셋째는 살을 붙이는 작업이다. 이는 주로 예배와 묵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넷째는 장식하는 일인데 각종 기도 프로그램, 영감있는 찬양 수련장의 구석구석 잘 준비된 의미를 지닌 장식을 통해 시청각적 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뜨레스디아스 평가

컬리 교수는 그의 책 '영적 성장을 위한 교육'에서 "영성훈련은 명상과 묵상과 기도와 예식과 성경공부와 영성자료 등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깊이 있게 영적인 삶을 개발하는 것이요, 그 영성을 표현하여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며 실천하는 삶이다"라고 했다.

컬리 교수는 영성개발과 영성의 표현으로서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웃에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뜨레스디아스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묵상과 기도와 성례전, 그리고 섬김의 훈련을 구체화한 프로그램이요, 이 찬양의 삶과 섬김의 삶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지속케 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이다.

뜨레스디아스 운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신앙인으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친밀하게 하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교회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사명을 일깨워주고 세상에 보냄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운동이다.

뜨레스디아스는 하나의 도구이며 하나의 방법이며 하나의 기술이다. 뜨레스디아스는 신앙생활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 운동은 신앙생활을 돕는 하나의 도구요, 영성훈련의 하나의 방법니요, 제자훈련의 하나의 기술이다. 신앙인이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시도하고 때로는 실패하고 또 훈련하고 노력하는 존재이지 한두 가지의 경험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경험의 덩어리인 동시에 무한하고 풍요로운 미래의 경험으로 초대된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뜨레스디아스는 신앙인에게 하나의 신앙적 경험을 제공해주나 이 한 번의 경험으로 모든 것을 기대하면 무리다.

뜨레스디아스는 로마가톨릭에서 시작된 꾸르시오 운동의 원칙과 방법과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출발했으나 이미 개신교 영성훈련으로 자리잡았고 좀더 확실히 개신교 전통과 신학에 적합하도록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 있다. 뜨레스디아스에서 행해지는 강의 내용이나 신학은 복음적이고 성경적이다. 설사 그 속에 신학적 문제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 참여하는 영적 지도자(뜨레스디아스에서는 신학적 문제를 책임지고 인도하는 목사를 영적지도자라고 부른다)가 바른 신학과 신앙과 영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잘잘못을 가려 바른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런데 왜 뜨레스디아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뜨레스디아스는 신학적으로 건전하고 영적 훈련 차원에서 거의 완벽하게 준비된 영성수련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적지 않은 거부감과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열매가 좋지 않다면 나무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니냐하는 강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 이처럼 원리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겼는가?

교회론의 문제

뜨레스디아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교회론'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 등 해외오에슨 뜨레스디아스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뜨레스디아스를 실시하는 교회로 옮기게 되고 이 과정에서 감정적인 비판까지 오고 간 것 같다. 이 뜨레스디아스는 세계도처 200여 개 이상의 지국을 통해 실시되고 있는데, 유독 한국교포교회에서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고 그 사람들의 편협된 교회론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운동의 기본 지침이 교회를 섬기는 제자를 양성하여 개교회로 파송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사실을 망각한다면 교회에 유익을 주기보다는 해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뜨레스디아스를 제자훈련의 한 모델로 소개한 R목사는 이 문제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이 훈련은 강력한 능력을 지닌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건전한 영적 지도자를 통해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선교단체(Para-church)들이 교회 멤버들을 모아 훈련하게 되고 거기에 건전한 교회론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교회의 자원을 선교단체에 헌신하게 함으로 교회를 분열시킬 위험이 있다. Para-church는 교회와 선교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라면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교회교육. 1992년 5월호, 장로회신학대학 기독교교육연구원)

목회론적 문제

두 번째는 목회론적 문제로 목사와 평신도와의 문제이다. 뜨레스디아스 운동은 원래부터 성직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수적으로 하고 있으나 분명히 평신도 운동으로 시작이 되었고 지금도 평신도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평신도 운동이 바른 교회론을 전제로 한다면 권장할만하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 특성상 특별히 한국적 상황에서 이 점은 충분히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때문에 일부 뜨레스디아스에서는 뜨레스디아스의 본질을 어기면서까지 이 운동을 교회중심운동으로 전개하고 있다. 평신도를 십분 기동화하되 목사들이 주관하고 계획하고 점검하여 실시한다. 여기 참석하는 모든 교회목사들이 함께 운영하는 공동사역으로 추진하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의 폭을 넓혀주고 협력 목회의 아름다운 면을 과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뜨레스디아스를 목회에 활용하고자 할 때는 먼저 담임목사님과 사모가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 아무리 좋은 훈련프로그램이라고 할지라도 담임목사의 체질이나 목회방향과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담임목사 가정에서 함께 경험을 한 후 이 운동의 효용성을 평가해 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부부가 같은 시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족이 함께 참여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게 되므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시간에 서로 방해를 받게 된다.

평가에서 이 운동이 교회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적합하다고 판단이 되었을 때 교회에서 지도자적 역량을 가진 사람을 차례대로 훈련시켜 교회를 섬기게 하고 계속교육을 위한 모임에도 담임목사가 훈련된 교인들을 함께 인솔하여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프로그램 비공개성의 문제

세 번째 지적하는 문제점은 참여한 사람들이 '쉬쉬'하고 프로그램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비밀스런 단체처럼 오해된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극단적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이 모임을 지도하는 한 목사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찬식 때문에 식인종으로 오해되었던 때를 생각하며 실소를 짓게 된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그는 뜨레스디아스에서 "양념으로 실시되는 프로그램을 Surprising Program이라고 한다. 감격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영적인 각성을 주는 프로그램들이다. 참여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것을 영적인 수수께끼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수수께끼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답을 알려준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재미없는 게임이 되겠는가? 이 프로그램은 영성훈련 이론에 따라 잘 선정되고 준비된 프로그램들이다"라고 말해주었다.

프로그램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모임 외의 다른 곳에서 변질되어 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로그램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충분히 그 근거와 타당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공개하지 못하는 점은 없는지 당사자들에게 묻고 싶다.

뜨레스디아스의 천주교성 문제

일부에서는 '영성'이라는 말 자체가 천주교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영성'이란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성이란 '...누구누구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불교엔 불교의 영성이 있고 무속종교엔 무속의 영성이 있고, 기독교엔 기독교적 영성이 있는 것이다. 영성이란 말은 중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란 말이 성경에 없지만 그 사상과 신학적 내용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고 또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성이란 말이 성경에 없지만 그 정신과 신학은 성경적이고, 천주교에는 천주교적인 영성이 있을 것이고 개신교엔 개신교로서의 영성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레스디아스가 천주교에서 개발된 꾸르시요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 정통신학과 성경에 근거한 검증과 개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천주교적인 흔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천주교적인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이냐? 그렇지는 않다. 천주교로부터 충분히 배워야 할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것과 다른 것들이 천주교 안에는 많이 있다. 그것들이 건전한 평가와 검증의 과정 없이 그냥 뜨레스디아스 안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포기되거나 수정되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가령 많은 강의들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지만 '사도적 행동(The Apostolic Action)'이란 강의가 있다. 이 용어나 이 용어 속에 숨어있는 신학은 천주교적이다. 개신교에서는 '제자의 삶'이란 말로 이미 자리잡음을 하고 있다. 또 '제자의 삶이'이 신학적으로 옳다. 그 외에도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촛불을 밝혀 성령의 임재를 상징한다고 말하다. 개신교도 입장에서는 웬지 어색하고 천주교 냄새가 너무난다. 뿐만 아니라 모든 뜨레스디아스 진행 지국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강의 전후에 성경을 봉독하고 기도하는 아름다운 순서를 생략하는 지국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에 대해 뜨레스디아스란 이름을 쓰지 않은 모 지국에서는 용어 및 강의 내용, 그리고 천주교적 흔적들을 한국적으로 개신교 정통신학적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한다. 뜨레스디아스 각 운영 당국은 섬세한 것 하나까지도 신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하리라고 본다.

결론 및 전망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뜨레스디아스는 영성훈련 차원에서 퇴수회 중심의 잘 준비된 프로그램이다. 뜨레스디아스는 하나의 수단이요 그릇이다. 그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낼 수 있다. 만약 바른 목적, 바른 신학을 갖지 않은 어떤 개인이나 교회가 이 그릇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욕을 담는다면 분명 개인의 영성이나 교회를 해칠 우려가 있다. 경건을 더러운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자들이 오늘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른 목적과 바른 신학을 가진 교회와 목회자들이 이 그릇을 활용한다면 교회에 생명력과 활기를 더해 줄 수 있다. 한국교회가 대형화 되어가고 또 일부에서는 물질주의, 세속주의의 흔적을 보이고 개교회주의와 분열주의의 아픔을 안고 있는 이때에 강력한 영적 능력을 지닌 그룹 제자훈련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한 공현을 감당해 주리라 믿는다.

뜨레스디아스 당국자들도 이런 차원에서 한국교회를 섬기기 위한 주님의 도구라는 인식과 사명 하에 기도하면서 진실하게 영적훈련을 감당해야 하리라고 본다.

앞으로 이 뜨레스디아스 운동은 교회 밖의 평신도 운동으로, 그리고 교회 내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이름 그대로 불꽃처럼 번져갈 것이다. 때문에 이 운동이 교회간에 선교 및 목회협력적 차원에서 교회 내 운동으로 번져갈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할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뜨레스디아스 자체는 영성훈련 차원에서 하나의 예리한 칼과 같다. 이것을 선하게 사용할 것이냐, 바람직하지 못하게 사용할 것이냐 하는 것은 이것을 활용하는 사람이나 공동체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신학적 문제가 있는 단체에 이것을 맡겨놓고 교회에서 금기시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건전한 교단, 건전한 교회들이 잘 활용해 주었으면 좋겠다.

뜨레스디아스가 하나의 칼이라면 이 칼은 이단성이 있는 사람, 잘못된 목적을 가진 사람, 바른 신학을 갖지 못한 사람이나 공동체에 맡겨둘 수는 없다. 이 칼을 잘 써서 개인의 영성과 교회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나 교회가 이 칼을 맡아야 한다.

뜨레스디아스 운동이 교회에 해를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그 원리를 잘못 이용한 탓이었으며 또한 교회 밖 운동단체들이 개인 이기심 내지는 집단 이기심에 영성 운동을 이용(이것은 악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뜨레스디아스는 목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신학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교회론적이고 목회론적이고 선교론적인 차원에서 검증, 수정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뜨레스디아스는 한국교회를 위해 소중히 봉사하는 사명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지원 자격 가운데 담임목사의 추천을 필수 요건으로 해야 한다.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신앙훈련 모임도 목양적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어떤 성경연구 모임이나 기도회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뜨레스디아스 각 지국은 자신들이 이 훈련을 실시하는 목적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성훈련이요, 제자훈련이다. 그러므로 훈련을 마친 사람들을 교회 밖을 배회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교회를 잘 섬기는 주님의 제자, 교회의 일꾼으로 양육해야 한다.

셋째, 뜨레스디아스는 물론 교파 운동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파간 차이점은 감싸주고 공통점은 서로 격려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공인된 이단 교회들과는 그 단절을 분명히 하고 교류를 삼가는 것이 오염을 막을 수 있다.

넷째, 뜨레스디아스는 영성훈련, 제자훈련 차원에서 끝내야 한다. 그들이 받은 은혜와 감격을 끈으로 하여 선교라는 미명 아래 다시 조직화한다든지 헌금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이 논의가 계기가 되어 맹종적 추종도 아닌, 감정적 비판도 아닌,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논의가 있었으면 한다. 유독 뜨레스디아스 뿐만 아니라 'Para-church'로서의 선교 단체, 성경연구모임, 기도회, 각종 선교회 등도 어떤 경우에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또 유해한가의 문제가 밝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월간 <교회와신앙>

<3> 예장통합측 연구 결과

예장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80회 총회에 제출된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의 연구보고서를 정리하여 소개한다. 안식교의 이단성과 무료로 신학공부를 시켜준다고 현혹하는 무료성경신학원의 교리와 그 정체, 그리고 트레스디아스의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중 뜨레스디아스에 대한 연구보고이다.

트레스디아스

기원과 현황

트레스디아스(Tres Dias)는 가톨릭에서 시작되었으며,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상태에서 3박 4일간 실시되는 훈련으로서 프로그램의 진행 방법과 내용 역시 훈련 효과의 지속성 유지를 위해서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는 것이 그 특색이다. 현재 한국에는 가톨릭의 트레스디아스를 제외하고 각기 다른 15개 이상의 트레스디아스가 있으며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문제점

불건전한 단체들이 트레스디아스를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 이용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본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하였거나, 이단으로 지목 받는 단체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트레스디아스는 반드시 경계하고 교인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훈련의 내용을 비밀로 하는 것은 트레스디아스 자체의 특성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시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상징적이고 시각적인 도구들을 사용하거나, 준비되고 계획된 분위기 등으로 피 훈련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유도하는 것들은 인위적이고 조작적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는데 앞으로 기독교 교육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더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일부에서는 훈련 대상을 노인이나 부부의 동시 참여를 배제하고 남녀 숫자를 맞추어서 운영함으로 이성간에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금지되어야 하며, 또한 이성간에 아브라죠(포옹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볼 때 위험한 일이라 여겨진다.

또 이 훈련을 경험한 사람들이 교회에 서 파당을 형성하거나, 특권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거나, 특히 리유니온(Reunion:이 훈련을 받은 후 재 충전의 목적으로 다시 지속적으로 모이는 것을 말함)을 가짐으로 교회 안팎에서 또 하나의 그룹이 형성되어 가는 것이 트레스디아스를 부정적으로 보는 실질적인 이유라고 사료된다.

이 프로그램을 '오직 유일한 영성 훈련 프로그램'으로 생각하거나, 비록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교인들에게 그렇게 비쳐지고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 이 운동이 타 교회 교인을 끌어오는데 이용되거나, 교회가 트레스디아스 중심으로 운영될 때 이 훈련에 대해서 참여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배타적이고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목회자는 배척될 위험마저도 있다. 따라서 트레스디아스를 '오직 유일한 영성 훈련 프로그램'이 아닌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여기는 확고한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연구결론

트레스디아스에 대한 더 깊은 신학적 교육학적 현상학적 연구의 필요성이 남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선 이단이나 불건전한 단체(교회)에서 운영하는 트레스디아스에 참여하는 것은 철저히 금해야 하며, 남녀를 함께 참여시키거나, 리뉴니온을 실시하여 교회 내외에서 그룹을 만드는 일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하고 또 금해야 할 것이며, 트레스디아스에 교인들이 참가할지의 여부는 각 교회의 목회자의 목회적 판단에 맡기되 반드시 목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