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마2-4장
요절: 마3:17
1장에서 우리는 약속된 메시아인 하늘 왕국의 왕의 족보와 탄생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과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2장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태어나셨는가? 누구의 경배를 받으셨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친히 여자의 몸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난 이 사건은 성경 전체의 최대 사건이며, 전 우주적인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입으시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심은 너무나 경이로운 일이라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건을 경건의 신비라 말할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의 성육신에서 승천하시기까지의 일대기를 단 한 줄로 요약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디모데전서 3:16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지사 영접을 받으셨느니라.](딤전3:16). 왕의 탄생은 철저히 미리 기록된 성경의 예언된 그대로였습니다.
헤롯 왕 시대에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곳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에 나신 것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성경의 미리 기록된 예언 때문입니다. 미가 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치리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헤롯이 왕궁에 있는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묻자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을 한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성경의 예언을 아는 것은 역사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이 미래에 있을 일들을 미리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어디로 오시는지 알아야 합니다(행1:11).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알았고, 문자적으로 믿었습니다. 이들은 결코 성경을 비유적으로, 은유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문자적 해석, 영적 적용’이란 성경 공부의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지식이 이들의 삶은 변화시켜 주거나 인격을 변화시켜 주지는 않았습니다. 예언은 역사의 등불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언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나온 것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너희 마음 속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1:18-19). 그러나, 믿고 실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성경 지식은 그 사람에게 유익이 아니라 해악이란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동방의 현자들은 성경을 알았고, 문자적으로 믿었고, 그대로 실행하여 주님의 탄생시간에 맞추어 먼 길을 왔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과 몸으로 표출된 살아 있는 지식이었습니다. 반면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롯의 성경 지식은 악하였습니다. 믿고 실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교리로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처럼 어리석고 의미없는 일은 없습니다. 생활과 동떨어진 진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보다 못한 것이거나 진리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성경적 사실들입니다.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계시된 진리를 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계시는 냉철한 지성으로도 발견해 낼 수 없는 사실들이 대부분입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공부할 때 알 수 있는 영적 진리들이 사람들을 훈계하고, 잘못된 생활방식, 그릇된 가치관을 바로 잡고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생활을 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헤롯의 예를 통해서 보듯이 영적 지식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열매맺게 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아합 역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영적 진리들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적 진리는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을 때 무익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을 충실히 가르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변화가 없고, 성령의 열매가 없다는 사실은 진리를 전파한 후에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방에서 온 현자들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를 찾아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불안해했습니다(2-3). 이들은 메시아를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기뻐해야 할 일에 불안해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신자들에게 주의 재림에 대해서 갖는 반응과 비슷합니다. 주님이 오늘이라도 당장 오신다면 여러분은 기뻐하겠습니까? 불안해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이와 같이 행하리라. 오 이스라엘아,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할 것인즉 /너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암4:12). 지혜자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바로 직행한 것은 예루살렘에 먼저 왕의 탄생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을 비롯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백성들 중 아무도 왕의 탄생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탄생을 기뻐하며, 증인이 된 베들레헴의 목동들과는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메시야의 탄생 소식이 기쁘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미 선민으로서의 특권과 자격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 휴거의 복된 소망이 더 이상 기쁜 소식이 아니라 광신도들의 열정으로 들리는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살인자 헤롯의 능숙한 거짓말입니다. 동방의 현자들은 유대인의 왕이 예루살렘의 왕궁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지혜자라도 성경의 빛을 놓치면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어린 아이이신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고 경배했습니다. 현자들은 예수님에게만 경배를 했지 결코 마리아에게 경배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 언급된 3가지 보물은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황금은 세계 만국의 공통 화폐입니다. 어디서나 황금은 최고의 가치로서 유통됩니다. 황금은 왕에게 바쳐지는 선물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이는 물질적으로 영적으로나 최고의 가치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선물입니다. 유향은 제사장직과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유향입니다(계8:3-5).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쉼없이 기도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몰약은 본래 관에 넣는 방부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가 일어나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문을 열어 주니 몰약이 내 손에서, 달콤한 냄새를 내는 몰약이 내 손가락에서 자물쇠 손잡이로 떨어지는도다.](아5:5). 몰약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처음받는 선물인 동시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받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합니다(막15:23). 여기서 ‘어리 아이’(young child)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결코 아기(baby)가 아닙니다. 현자들은 마굿간이 아니라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는 누가복음의 탄생시점이 아니라 이미 아이가 많이 자란 뒤의 상태입니다. 흔히 전해 내려오는 3명의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보물을 드리는 것은 우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발걸음을 예수님을 만나러 올 때까지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만난 뒤의 걸음 역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꿈에 하나님으로부터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떠나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가니라.](12). 예수를 만난 사람은 누구나 왔던 길을 돌아가지 않습니다. 에수를 만난 사람은 이전의 행실대로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주님이 지시하신 새롭고 산 길, 다른 길로 가야 합니다. 2장에서는 무려 세 번이나 구약이 인용되고 그것이 정확히 성취된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24:17, 미가5:2, 호세아 11:1.
23절에 나사렛과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리라는 말은 구약의 예언이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록된 바가(written) 아니라' 대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Spoken)라고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성경의 저자가 실수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나사렛은 Netzer(가지)란 말과 음이 비슷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주의 의로운 가지요, 다윗의 가지요, 가지인 사람, 내 종 가지”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어느 여관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날 밤 목동들이 찾아왔습니다. 40일 후에 성전으로 가서 마리아는 정결례를 드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으로 와서 집에 거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난 후에 동방의 현자들이 찾아 왔습니다. 헤롯이 아이의 생명을 찾았으므로 이집트로 피난갔다가 다시 돌아와 나사렛에 정착했습니다.
3장입니다. 3장은 왕의 선구자 침례인 요한이 하늘의 왕국을 선포합니다. 1-6절은 침례 요한이 왔고, 7-12절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왔고, 13-17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침례 요한의 사역은 회개와 왕국의 선포였습니다.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2). 이는 이사야를 통해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사40:3). 4절의 요한의 모습은 엘리야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으로 왔기 때문입니다(왕하1:8, 말4:5-6). 바리새인들은 침례인 요한에게 엘리야인지 물었을 때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요1:21).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했다면 요한은 엘리야가 되었을 것입니다(마17:9-13, 눅11:14).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왔기 때문에 엘리야의 사역을 할 수 있었으며, 엘리야가 될 수 있었습니다(눅1:17, 말3:1을 볼 것).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한 요한의 질책을 들어 보십시오(7-10). 요한은 이들의 죄악에 대해서 날카롭게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들어야 할 설교는 죄가 아니라 돌이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요한의 침례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구절은 콤마(,) 하나로 주님의 사역이 2000년 이상의 간격으로 나누어집니다. 초림 때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주셨습니다. 재림 때에 주님은 사람들에게 불로 침례를 주십니다(3:11). 12절 역시 심판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성도들이 ‘성령과 불로’ 침례를 받는 줄로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3, [또 불의 혀같이 갈라진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 앉더니](행2:3). 오순절에 제자들은 불의 혀같이 임한 성령 침례를 받았지, 불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오셔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모든 의를 이루고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요한이 소개한 메시아요, 요한 역시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주의 대언자로 공식적으로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16절은 침례는 결코 세례가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해 줍니다. 주님은 물 속에서 올라 오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작은 것들에서부터 철저히 주님께 따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침례를 받는 장면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난 중요한 장면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17), 성령이 내려 오고(16), 예수님은 물 속에서 올라 오셨습니다(16).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부음 받음이 필요했듯이, 성령으로 거듭났지만 성령의 충만함이 늘 필요합니다. [또,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17). 예수님은 지상 사역 동안 하늘에서 세 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마3:17,17:5, 요12:28). 3장에서 얻을수 있는 교훈을 정리하면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침례 요한에게 순종한 예수님은 바로 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종교와 복음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육신적인 관계성, 기독교인이란 외적 형식보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내적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란 점입니다. 침례인 요한이 증거했고, 성령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증거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교사들이 이 점을 부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상숭배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4장입니다. 4장은 왕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보여 주는 중요한 장입니다. 왕으로서 남을 다스리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분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다스리지도 못한 채 남을 다스리려고 합니다. SELF DENIAL, SELF CROSS란 기본적인 훈련도 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4장에서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자신을 낮추시고, 부인함으로써 이 세상의 통치자(요14:30)인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마귀의 광야 시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2 가지를 시험한 것입니다. 첫째, 너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둘째, 너는 다윗의 아들인가? 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셨습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주님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이 주신 보좌만을 얻고자 하셨습니다. 아담은 아름다운 동산에서 시험받았습니다. 주님은 황량한 광야에서 시험받으셨습니다. 아담은 최상의 상태에서 시험받았지만 주님은 최악의 상황에서 시험받으셨습니다. 아담은 옛 창조의 중심이었습니다. 주님은 새 창조의 중심입니다. 아담은 범죄하고 불순종함으로써 통치권을 잃어버렸습니다(히2:6-9). 주님은 순종함으로써 아담이 잃어 버린 통치권을 되찾으셨습니다(롬5:12-21). 아담은 인류에 사망을 가져왔지만 주님은 인류에 생명을 가져 왔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 주린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하라, 하거늘](마4:3). 이는 육신의 정욕을 시험한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의 모든 풍요 가운데서도 먹는 시험에서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육신을 먹이는 일보다 속 사람을 먹이는 일에 더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 다윗 역시 그러했습니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영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32,34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하시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끝마치는 것이니라.](요4:32,34). 주님이 어떻게 이 시험을 이겼습니까? 4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4). 주님은 신명기 8:3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이기셨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한 한 마디의 말씀은 양날선 검으로서 마귀를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마귀만 우리에게 먹을 것으로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먹는 것으로 시험하십니다(신8:1-6)1). 둘째, 마귀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는 안목의 정욕에 대한 시험입니다. 마귀는 성경을 인용했으나 잘못 인용했습니다.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이는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責務)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음이니라, 하니](6). 마귀는 시편 91:11절의 중요한 몇 단어를 빼 버리고, 본문에 있는 단어를 빼고, 바꾸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지을 때 자신을 합리화할만한 성경 구절들을 생각해 내는데, 이는 마귀가 그런 생각을 넣어 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잘못된 인용, 잘못된 이해, 잘못된 믿음은 반드시 잘못된 행동과 죄를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말씀은 성령의 검이 아니라 죄의 독이 되고 맙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대한 책무(責務)를 주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임이라.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91:11-12). 주님은 주신 책무, 즉 순종의 길에서만 지키십니다. 불순종의 길에서 주님의 지킴과 돌보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이 부분을 빼 버리고 인용해서 시험했습니다. 주님은 다시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7). 주님은 신명기 6:16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 순종의 마음이 없다면 누구도 마귀의 두 번째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마귀의 시험은 왕이 되는 쉬운 길에 대한 제안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의 왕으로서(요14:30;18:36), 이 세상의 신(고후4:4)으로서 자신의 왕국을 예수님에게 줄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하나님은 시편 2:6-7에서 이미 이 왕국을 예수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 후에야 받을 수 있습니다. 마귀는 십자가 없이 쉬운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타협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마귀는 앞으로 언젠가 적그리스도에게 이 세상 왕국을 줄 것입니다(계13). 그러나, 주님은 이 왕국을 빼앗아 천년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주님은 신명기 6:13을 인용해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아, 여기서 물러가라. 이는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음이니라, 하시더라.](10).
광야의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돌아오신 후 바로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17)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약속된 왕으로서 왕위에 오르시기 위해서 백성만 준비되면 끝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사역을 위해서 바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19). 이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제자의 길은 먼저 헌신과 희생, 드림과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22). 주님은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왕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은혜의 복음과는 상당히 성격이 다릅니다. 왕국 복음에는 반드시 이런 표적이 따릅니다. [¶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들에서 가르치시며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온갖 질환과 온갖 질병을 고치시니 그분의 명성이 온 시리아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사람들이 모든 병든 사람 곧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자, 마귀 들린 자, 미친 증세가 있는 자, 마비환자들을 그분께 데려오니 그분께서 그들을 고치시매](23-24). 은혜의 복음에는 이런 표적이 따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하면 왕국 복음과 은혜의 복음을 뒤섞어 버립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철저히 왕국 복음을 증거하셨고, 제자들 역시 그랬습니다.
4장에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람들처럼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겪는 모든 연약함을 다 체험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예수님에 대해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으로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4:15)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 이해하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기록되었으되](4,7,10). 셋째, 사탄은 성경을 압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본문의 첨가, 삭제, 왜곡, 잘못된 적용을 통해 기만합니다. 넷째, 시험을 받는데는 장소의 구애가 없습니다. 광야, 성전 위, 산꼭대기에서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저와 여러분을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가정, 직장 어디에서나 시험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시험은 정도가 각각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논리정연한 합리적인 시험이었습니다. 다음 시험은 의심을 던지는 시험이었습니다. 마지막엔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죄는 점점 깊어집니다. 시험은 다양한 얼굴로 다가옵니다. 여섯째, 그리스도의 승리는 마귀를 대적하는 승리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벧전5:9, 약4:7). 일곱째,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에는 즉각적인 순종과 희생과 대가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시험을 받게 하셨듯이, 주님은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시험이 없는 인생은 영적인 행로에 들어선 인생이 아닙니다. 시험이 없는 신앙은 승리가 없는 신앙입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예수님을 살펴봅시다. 다윗과 예수님은 둘 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다윗과 예수님은 둘 다 택함을 받으셨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해 40일간 대적했듯이, 마귀는 40일간 금식하고 주리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성경에서 40은 시험의 수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해 광야에서 헤맨 시간 역시 40년이었습니다. 다윗이 돌맹이 다섯 개 중 하나로 골리앗을 넘어뜨렸듯이, 예수님은 모세 오경의 다섯 권 중 한 권의 책(신명기)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로 골리앗의 머리를 잘랐습니다. 주님은 성령의 칼로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이상 2-4장까지의 간략한 개요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성경 공부는 영적 지식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빕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사용함으로써 마귀를 이기고,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쫓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으로 자신을 다스렸듯이 우리 역시 먼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맞출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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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주] 네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신 그 모든 길을 기억할지니 이것은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또
너희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 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알고자 하심이라. 3.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