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구약 개론 -열왕기하 전체 요약

말씀: 열왕기하 1-25장

요절: 열왕기하


열왕기하는 열왕기상과 조금의 단절도 없이 그대로 연속된 한 권의 책이란 사실을 기억하시고 읽어야 합니다. 열왕기상이 다윗 왕으로 시작했으나 열왕기하는 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바빌론 왕으로 끝이 납니다. 솔로몬의 영광으로 시작된 여호야긴의 수치로 끝을 맺습니다. 믿음과 순종으로 축복을 받았던 다윗 왕조는 불신과 배교로 저주로 몰락합니다. 성전을 건축함으로 시작되었으나 성전이 불탐으로써 끝을 맺습니다. 열왕기상은 배교의 과정이 그려진 책이라면 열왕기하는 배교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열왕기상에서 왕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실패했는가에 대한 실록이라면 열왕기하는 그 실패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의 주된 하나님의 대언자는 엘리야였습니다. 열왕기하에서 주로 활동하는 대언자는 엘리사입니다. 열왕기상은 거듭되는 타락과 배교에도 오래참으시는 주님의 인내와 긍휼, 은혜를 기술하는데 비해 열왕기하는 주님께서 죄에 대해 어떻게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때 주로 활동했던 대언자들은 북왕국의 호세아, 아모스 남왕국 유다의 요엘, 미가, 이사야, 오바댜, 나훔, 하박국, 스바냐, 예레미야입니다.(남북 왕조의 관한 표를 참고할 것). 열왕기하의 전체 개요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1:1-2:11까지 엘리야의 마지막 사역과 승천에 대한 기사가 나오고, 2:12-9:10까지는 엘리사의 사역에 관한 기사입니다. 9:11-17:41까지는 예후로부터 북왕국 사마리아(BC.722)의 멸망을 다루며, 18:1-25:30까지는 B.C722년부터의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멸망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1장입니다. 아합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 못지 않는 우상 숭배자요, 악정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2년간을 재임했는데 어느날 자기 다락방의 격자창에서 떨어져 몸을 다쳤습니다(2). 그는 자신의 병이 나을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신하들을 블레셋의 신전으로 보내 그들의 신인 바알세붑에게 묻게 했습니다(2). 이 일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바알세붑을 이스라엘의 대·소사를 물을 신으로 인정하는 공표요, 주 하나님을 이스라엘 땅과 백성들로부터 완전히 몰아내는 죄악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몸이 아플 때 또는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닌 무당이나 불당에 가서 치유를 비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하시야에게 이 죄를 물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3,4).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가장 불쾌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존재를 불신하고, 무시하여 다른 신들을 찾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일 조건이 “반드시 그가 살아 계시는 것을 믿을 것”(히11:6)으로 정의했습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불신하는 만큼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통해 경고를 받았지만 회개하기는 고사하고 엘리야를 잡아 죽이기 위해 3차례나 오십인 대장과 군대를 보내었습니다. 그는 엘리야를 죽임으로써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낸 군대는 두 차례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 타 죽었습니다(10,12). 그는 병상에서 누워 자신의 살아온 인생과 생명에 대해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함으로 죄를 회개할 시간과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그 귀한 시간을 헛되이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심판을 앞당기는 죄악과 주님의 진노를 쌓아 나갔습니다. 요한복음 12:35-36에서 주님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은 빛이 너희와 함께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게 하라. 이는 어둠 가운데 다니는 자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자녀들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하시고 그들에게서 떠나 몸을 피하시니라.](요12:35:36). 신약에서 제자들은 엘리야의 이런 행동을 흉내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9:51-56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엄히 꾸짖으시며,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음이라, 하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눅9:55-56). 우리는 지금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런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와 죽음으로 인해 살고 있음을 감사,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2 장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죽음을 맛보지 않은 채 곧 바로 하늘로 불러 올리셨습니다. 불수레와 불말들이 내려 왔고,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성경에서 회오리 바람은 언제나 주의 재림과 연관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엘리야는 환란 때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받을 환란 성도들의 휴거를 예표합니다. 에녹이 주님과 동행하다 들림받아 환란 전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 성도들의 들림에 대한 모형이요, 모세가 죽음으로 부활하여 하늘로 들림받아 죽은 성도들의 부활의 모형으로 각각 제시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부름을 받아 신실하게 그를 섬겼습니다. 그는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부어 주던 물당번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3:11). 심지어 엘리야가 따라 오지 말란 말을 몇 차례나 했지만 그는 줄기차게 따라 다녔습니다(4,6). 그는 엘리야에게는 미움받는 종과 같았지만 자기의 부르심에 신실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가기 전 엘리사에게 구할 것을 말해 보라고 하자 엘리야의 영의 두 배를 구했습니다(9). 그는 솔로몬과 같이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고, 합당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마 신명기 21:17 말씀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맏/아들/로 인정하여 자기의 모든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지니 이는 그 아들이 그의 힘의 시작이기 때문이라. 맏/아들/의 권리가 그에게 있느니라.](신21:17). 엘리야의 겉옷을 주워든 엘리사는 그가 구한 대로 2배의 영을 받아 요단강을 갈랐고(14), 여리고의 물들을 고쳤으며(22), 바알들을 섬기던 청년들을 저주함으로 그들을 심판했습니다(24). 성경을 대충 읽는 사람들 가운데 엘리사의 저주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3절을 보면 도시에서 나온 아이들은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개인적인 모욕을 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서 올라갈 때에 어린아이들이 도시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므로](23). 이들은 엘리야의 승천을 두고 너도 올라가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우상 숭배에 젖어 있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하나님의 대언자를 조롱하는 일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이는 지금의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살펴보면 목사나 선교사, 교회에 대해서, 주님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모독하고 욕하는지를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그들의 이런 행동에 엄히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3장입니다. 아하시야가 죽었으나 그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형제였던 여호람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악을 행했지만 아버지 아합과 달리 바알의 형상을 제거했습니다(2). 그는 이스라엘에게 공물을 바치던 모압이 배반하자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과 3국 연합으로 모압을 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군대가 일주일간의 행군을 하는 동안 물이 없어 전쟁도 하기 전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9-10). 그 때 여호사밧은 주의 대언자를 찾았습니다(10). 위기의 때에 주의 말씀을 찾는 것은 분명 현명하고도 위대한 일입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냉정한 답을 했습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아버지의 대언자들과 당신의 어머니의 대언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이는 [주]께서 이 세 왕을 함께 불러 모압의 손에 넘겨주려 하셨음이니이다, 하매](13). 하나님은 악인들이 평소에 우상에게 묻다가 위기의 순간에 달려 오면 언제나 대답해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왕에게 평소 네가 믿고 따르던 당신의 대언자들에게 가 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말씀과 경고, 책망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계속 거부할 때, 언젠가 그들이 가장 위급한 순간에 응답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잠언 1:24-30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거절하였고 내 손을 내밀었으나 중시하는 자가 없었으며 도리어 너희가 내 모든 권고를 무시하고 내 책망을 원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네 재난을 보고 웃을 것이며 네 두려움이 이를 때에 조롱하리라. 네 두려움이 황폐함같이 이르겠고 네 멸망이 회오리바람같이 이르겠으며 네게 근심과 걱정이 이르리니 그때에 그들이 나를 부를 터이나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아침 일찍 나를 찾을 터이나 그래도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고 [주] 두려워하기를 택하지 아니하며 내 권고를 원치 아니하고 내 모든 책망을 멸시하였음이니라.](잠1:24-30). 그러나 주님은 경건한 유다의 왕 여호사밧으로 인해 말씀을 주시고, 필요한 물을 주시고, 전쟁의 승리를 주셨습니다(16-19). 나라를 구한 것은 왕들도, 군대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였습니다. 승리는 결코 말과 병거의 많음에 있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찾고 물을 경건한 사람 여호사밧과 주의 말씀을 대언할 엘리사가 이 땅에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4장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와는 달리 엘리사는 백성들을 섬기고 돕는 목자같은 대언자였습니다. 그는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1절은 가난한 대언자 과부의 호소입니다. 주를 두려워 하였던 경건한 젊은 대언자의 죽음은 그의 가정을 파산시켰고, 아들 둘까지 노예로 잡혀갈 정도였습니다(1). 이것은 겪어 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해하거나 동정할 수 없는 절박함입니다. 젊은 나이에 목회 일선에서 빚도 보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빚만 남겨 두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엘리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었습니까? 그는 과부로 하여금 동네에서 빈 그릇을 가능한 많이 빌려 오게 하여 거기에 기름을 가득채워 주었습니다. 과부는 자신의 믿음만큼, 빌려온 대로 채움을 받았습니다(6). 궁핍할수록 주님께 많은 것을 기대하십시오. 8-37절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그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엘리사를 잘 공양하고, 엘리사를 위해 따로 방을 만들어 기거할 곳을 마련해 줄만큼 신실한 수넴 여인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이 여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기를 원해서 필요를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자기의 종 게하시를 통해 이 집에 가장 필요한 것이 아이가 없는 문제인 줄 알고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16-17). 그러나 아이는 어려서 머리가 아파 죽었습니다. 여인은 즉시 갈멜산으로 달려가 엘리사를 찾았습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지팡이를 주며 그 아이의 얼굴에 두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엘리사의 지팡이를 가지고도 아이를 살리는데 실패했습니다(31). 이는 주님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이 마귀들린 아이를 고치는데 실패한 것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행치않는 어떤 일도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엘리사는 직접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내려갔습니다. 이는 한 명의 혼을 이겨오려는 구령자의 모습입니다. 엘리사의 이런 모습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장 잘 예표해 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믿음만 있다면 누구나 엘리사와 같은 능력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38-41절은 독성이 있는 야생박으로 죽을 끓여 먹었다가 죽음의 위기에 처한 대언자의 아들들을 살린 기사입니다.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이 있나이다.](40).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내에 흔히 있는 일이요, 신학교에서도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양식인 줄 알고 먹었다가 독을 먹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독성이 있는 음식을 먹은 사람들과 그 음식을 치유하는 길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 뿐입니다. 잘못된 교리, 잘못된 신학, 악한 양심과 거짓된 신앙이 넘실 거리는 솥에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넣음으로써 죽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야 합니다. 42-44절은 오병이어를 연상케 하는 기적입니다. 혼자 먹기에 딱 맞은 양식이었지만 돌려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주님은 모두가 먹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이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필요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넉넉히 채우고도 남는다는 진리를 말해 줍니다(마14:13-21, 15:32-38).

5장입니다. 시리아 왕의 군대 대장 나아만은 강한 용사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시리아를 구원하셨으나 나병 환자였습니다. 나병은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들의 상태, 즉 죄인의 상태를 나타내는 병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소녀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대언자가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3). 그는 은 십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벌을 가지고(5)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시리아 왕이 보낸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달라는 시리아 왕의 편지를 받고 절망했습니다(7). 왕은 아직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소녀보다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 지식은 지위에서 오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자기 집 앞에 당도한 나아만 장군에게 종을 보내 요르단 강에 들어가 일곱 번을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0). 나아만은 자신을 대하는 엘리사의 태도에 분노했습니다. 구원은 자기 방식대로, 자기가 기대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아만은 안수와 기름부음, 상처를 어루만지며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 주기를 바랐지만(11) 엘리사는 한 마디 말을 주었고, 믿음으로 순종을 요구했습니다. 주님의 역사는 나의 기대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과 순종으로 일어납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음과 순종으로 성경이란 말씀의 물로 일곱 번씩 씻는다면 누구라도 속 사람은 순결해 질 것이며, 치유받지 못하는 병이 없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결국 순종을 통해 병을 고침받고(14), 이 땅의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15). 주님은 이 사건을 신약에서 직접 인용하시므로 나아만이 구원받은 이방인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눅4:25-27). 그는 육신의 병만 고침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며, 주님만 섬길 것을 결단하였습니다(17-18).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순간에 게하시는 엘리사 몰래 나아만의 일행을 따라가 거짓말을 하여 은 이 달란트와 옷 두벌을 취했습니다. 이 사건은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몸은 멀쩡하지만 혼은 나병환자처럼 병들었음을 입증해 주었습니다(27). 이 사건은 주님과 그토록 멀리 있던 나아만과 같은 불치의 병을 앓는 이방인들이 어린 소녀가 전해 주는 말을 통해 주님께 나아와 믿음으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반면 주님과 그토록 가깝게 지내던 유대인들이 오히려 구원에서 떨어져 진노와 형벌을 받는 것을 봅니다. 게하시는 탐욕으로 인해 병들었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곁에 있으면서도 엘리사로부터 영적 감화를 받거나, 주님을 경배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2-3절에 어린 소녀는 노예이면서도 주님을 증거했지만 게하시는 엘리사의 종이면서도 주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6-7장입니다. 대언자들의 아들들이 거할 집을 짓기 위해 벌목을 했습니다. 요르단으로 가서 집을 짓는 일에 엘리사도 함께 했습니다. 그는 제자 양육에 상당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일을 하던 한 사람이 재목을 베다가 도끼 자루에서 도끼 머리가 물에 빠졌습니다(5). 그것은 빌려 온 것이어서 변상해 주어야 할 처지에 놓였는데, 엘리사는 그것을 도로 뜨게 만들었습니다(7). 8-23절은 시리아 왕이 엘리사를 잡기 위해 대군을 파견한 기사입니다. 시리아 왕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 작전을 세워도 번번히 엘리사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예 엘리사를 먼저 처리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인 군대가 이들을 보호했습니다(16). 엘리사의 종이 두려움에 빠졌을 때 엘리사는 주께 기도하여 눈을 들어 영적인 군대를 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17). 엘리사는 자기의 종의 눈을 열어 주는 대신 시리아 군대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18).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늘의 정사들과 권세들을 물리치는 영적 전쟁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으며, 노략질 할 수 없습니다. 6:24-7:20은 사마리아의 기근과 시리아의 공격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근으로 양식이 없는데 시리아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함으로써 성내에서는 아이를 잡아먹는 일로 왕에게 재판을 청할 지경이었습니다(28-29). 엘리사는 단 하룻만에 기근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것을 예언했습니다(7:1). 그러나 이 말을 들은 귀족 하나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2). 성문 어귀에 있던 네명의 나병 환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자유 가운데 굶어 죽느니 포로가 되더라도 먹고 살자는 결단을 내려 시리아 군대로 들어갔습니다. 항복하려고 가보니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버려두고 도망한 뒤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은 단지 소음하나로 쫓아내셨습니다. 4명의 나병 환자들은 막사를 돌며 금은을 챙기다 위대한 선교사로 변신을 해 이스라엘 성내로 들어가 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시리아 군대가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몸만 빠져나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기근이 일시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말을 불신했던 왕의 신하는 그 광경을 보기만 하고, 먹지 못한 채 백성들의 발에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는 불신은 치유책이 없습니다.

8장입니다. 1-6절의 사건은 4장의 연속선에 있습니다. 엘리사는 기근을 예언하면서 수넴 여인이 살만한 곳으로 찾아 가라고 했는데, 이들은 블레셋 땅에서 7년을 머물다 왔습니다. 7년이 지나 돌아와 보니 자기들의 땅을 잃어 버린 상태여서 왕에게 나아가 그 땅을 찾고자 했습니다. 마치 왕은 엘리사의 종 게하시와 함께 엘리사가 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중이었고, 그 때 수넴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왕은 수넴 여인의 땅과 그동안 거기서 난 소출을 모두 돌려 주도록 병사를 보내었습니다. 이는 신약 성도들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과 유업의 상급이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예표해 줍니다. 7-15절은 엘리사가 벤하닷 왕의 죽음과 하사엘의 등극에 대해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하사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주님이 택하신 그릇입니다. 엘리사는 하사엘을 바라보며 그가 이스라엘을 향해 행할 악을 내다보고 울었습니다(11,12 참조 왕상19:15-16). 16-29절은 다시 남왕국의 이야기로 넘어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악행에 대해 기술합니다. 여호람, 아하시야는 모두 아합의 딸들과 결혼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악행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다를 멸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전적으로 다윗의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19). 국가는 점차 타락과 배교로 치닫는 가운데 엘리사와 대언자들의 아들들 일부만이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교회사는 바로 이런 남은 자들의 역사입니다.

9장입니다. 엘리사는 대언자들의 자녀 중 하나를 보내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게 했습니다. 이는 이미 엘리야를 통해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예후는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을 치기 위해 세운 왕이었습니다(7). 예후는 아합의 집을 완전히 말살시켰고, 이세벨을 심판했는데, 그녀의 시체는 개들이 먹어 치웠습니다(왕상16:8-12참조). 심판은 더딘 것 같지만 반드시 임합니다. 엘리야를 통해 선포된 심판은 무려 17년이 지나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녀는 아마 엘리야의 말을 모두 잊어버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죽기는커녕 여전히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호의호식하며 살았고, 왕들이 바뀌어도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예후는 그녀가 왕이라고(34)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임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심판에 대해 경각심과 두려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10장입니다. 예후는 아합의 남은 자식들까지 모조리 다 죽였습니다. 모든 것은 주의 종 엘리야를 통해 하신 말씀대로였습니다(10-11). 예후는 바알의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였고, 바알의 집에서 형상들을 가져다가 불태우고, 바알 형상을 부수고, 바알의 신당을 변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16-28). 주님은 이 일로 예후의 4대 자손까지 왕위를 보장받았습니다(30). 그러나 그는 완전한 율법 가운데 걸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중간한 노선을 택해서 자기 방식의 신앙을 고수했습니다. 예후는 바알 숭배자의 원흉인 아합과 그의 일족을 심판하고 처단하는데 선봉을 섰지만 정작 자신은 주의 말씀대로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데 실패했습니다. 남의 죄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쉽지만 자신의 허물과 죄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후같은 사람이 아닌지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타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했다면 마땅히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걸어야 할 것입니다.

11장입니다. 다시 남왕국 이야기입니다. 북왕국은 바알 산당과 제사장들이 제거되는 시점에 남왕국은 바알 숭배로 가득차고 있었습니다. 아하시야 재위 1년만에 죽고 그의 어머니 아달랴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녀는 여인의 몸으로 왕이 되자 자신에게 도전이 될 만한 왕의 씨를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1). 다행히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는 가까스로 건짐을 받아 주의 집에서 6년을 숨어 지냈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7년째 되는 해 요아스에게 기름을 붓고, 수백명의 치리자들과 호위 대장들을 불러 일곱 살의 어린 요아스를 왕으로 등극시켰습니다(12). 여호야다는 어린 왕을 잘 지도하여 왕과 백성과 주님 사이에 언약을 맺게 하였고(17), 바알 숭배를 발본색원했습니다(18). 영적 부흥은 주의 말씀과 언약에 기초해 먼저 죄를 척결하고, 죄에 연루된 모든 것을 정결케 한 후에 일어납니다. 바알 신당을 부수지 않고 주의 성전으로만 달려가는 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바알 신당을 부수는 일과 주의 말씀을 찾는 일은 동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12장입니다. 여호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지도를 받을 때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2). 이는 목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줍니다. 지도하는 선생이 없으면 누구도 영적으로 바르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혼자 수행해서 도(道)를 깨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을 통해 말씀을 주시고, 양들은 그를 통해 배우게 하십니다. 바른 목양없이는 바른 영적 생활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여호야다가 130세의 나이로 죽은 후에 여호아스는 급격히 타락하였습니다(대하24:15-22). 다시 우상 숭배로 돌아갔습니다(대하24:18). 주님은 여호아스의 타락을 보시고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보내셔서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대하24:19).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음모를 꾸며 성전 제단 사이에서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대하24:20). 주님은 여호아스가 범한 이 죄를 신약 성경에서 그대로 인용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마23:34-35). 그의 이 죄는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와 그 역시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20-21). 목자와 양의 바른 관계야말로 영적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장이 주는 교훈입니다.

13장입니다. 북왕국으로 넘어 옵니다. 여기 나오는 여호아하스와 11,12장에 나오는 남왕국의 여호아스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아하스는 주님 앞에서 악을 행한 왕입니다(2). 그의 뒤를 이은 여호아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11). 이 때 엘리사 대언자가 늙어 병들어 죽었습니다. 엘리사는 죽기 전에 여호아스 왕에게 시리아 왕을 이길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동쪽으로 화살을 쏘게 하고 땅을 치게 했습니다(18). 왕은 엘리야가 땅을 치라는 말을 했을 때 세 번만 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시리아를 세 번 밖에 이기지 못했습니다(25). 그는 주님이 주신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했습니다. 그가 다섯 번이나 여섯 번을 쳤더라면 시리아를 완전히 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잘못된 결정이나 실수가 바로 내일의 패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죽어 무덤에 묻혔으나 그의 무덤에서 조차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21-22). 그의 대언자 사역은 온통 기적들을 행하는 능력의 사역이었습니다.

14장입니다. 다시 남왕국의 기사입니다. 아하스는 훌륭한 왕이었으나 주님 앞에서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3). 5-6절은 그가 상당히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켰음을 보여 줍니다(신24:16). 그래서 주님은 에돔에 대해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는 에돔의 신들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다시 화를 불러 들였습니다. 마음은 교만해지고 이로 인해 그는 이스라엘의 왕 아마샤에게 패하여 왕이 사로잡히는 큰 치욕을 당하였고, 주의 집과 왕의 보고에서 보물들을 빼앗겼습니다(13-14). 그의 말년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축출당하여 타향에서 타살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승리에 대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취함으로 교만해진 결과 주님은 그를 대적하였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멸망에 앞서 있다(잠언16:18)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15장입니다. 아하스의 아들 아사랴(웃시야)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매우 위대한 왕이었습니다(3). 역대기하 26장은 훨씬 더 상세한 기사가 나옵니다. 그는 대언자 스가랴의 지도를 받아 영적으로 깨어 있는 왕이었습니다. 역대기하 26:4-5, [웃시야가 자기 아버지 아마샤가 행한 모든 것에 따라 [주]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며 하나님의 환상에 관하여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그가 [주]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더라.](대하26:4-5). 그는 솔로몬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왕처럼 보일만큼 유다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마음이 교만하여졌습니다. 역대기하 26:16, [그러나 그가 강하게 되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파멸에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주] 자기 하나님께 범죄하되 곧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焚香) 제단에 분향하려 하였음이더라.] 그는 주제넘게도 제사장이 드려야 할 분향을 자신이 직접 드리고자 나섰다가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북왕국은 급격히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예후의 아들들은 주의 말씀대로 4대까지 왕이 되었는데(15:8), 모두 주앞에 범죄하는 악한 왕들이었습니다(15:8,13,17,27). 주의 눈 앞에서 악한 것을 행할 때마다 앗시리아의 침략은 심해졌고,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고, 결국 베가의 시대에 앗시리아의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북왕국의 마지막 왕은 호세아였는데 그는 반역을 일으켜 베가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지만 그의 시대에 북왕국은 역사에서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반면 유다는 웃시야가 52년이란 긴 시간을 통치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고, 그의 아들 요담 역시 주의 눈 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했습니다(34).

16장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웃시야, 요담이란 훌륭한 왕 다음에 아하스란 악한 왕이 등장했습니다. 2-4절을 보면 그가 유다 왕인지 이방나라의 왕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아이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인신 공양을 서슴지 않았습니다(3). 그는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을 방어하기 위해 앗시리아 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손을 잡았습니다. 앗시리아 왕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었지만 이런 정치적 동맹은 유다를 더욱 깊은 죄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는 정치적 동맹 뿐만 아니라 앗시리아의 종교까지 유다로 가져왔습니다. 그는 앗시리아의 제단을 보고 그대로 만들어 주의 제단을 옮기고 거기다 열심히 분향했습니다(11-13). 역대기하 28:22-25, [¶ 그가 고난 당할 때에 더욱 [주]께 범법하였으니 이 사람은 곧 아하스 왕이더라. 이는 그가 자기를 친 다마스커스의 신들에게 희생물을 드리며 이르되, 시리아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들에게 희생물을 드려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오히려 그 신들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음이더라. 아하스가 하나님의 집 기구들을 함께 모으고 하나님의 집 기구들을 산산조각 내고 또 [주]의 집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유다의 모든 도시에 산당들을 세우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여 [주] 자기 조상의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니라.](대하28:22-25).

17장입니다. 북왕국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었지만 그는 앗시리아의 속국이 되어 매년 공물을 바쳐야 했습니다(3). 그러나 그는 앗시리아로부터 독립하고자 이집트에 공물을 보내고 외교를 강화했습니다(4). 앗시리아는 즉각 군대를 보내어 호세아 왕을 감금하고, 사마리아를 3년 6개월 동안 에워쌌습니다. 앗시리아는 호세아 제위 9년에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가 강제 이주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로써 사마리아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6). 이제 이스라엘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기운마저 잃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더욱 악하여져 갔습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7-8절,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사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 밑에서 벗어나게 하신 [주] 자기들의 하나님께 범죄하고 또 다른 신들을 두려워하며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교도들의 법규와 이스라엘 왕들이 세운 법규를 행하였음이라.](7,8).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을 우상 숭배와 주의 말씀을 떠난 것으로 규정지으셨습니다. 역사가들은 무엇이라고 진단할지 몰라도 우리는 그들의 멸망이 하나님의 법을 버린 불신앙이란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7-23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들의 멸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을 긴긴 장문으로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배교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경고요, 훈계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 이들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은 은밀히 불순종했습니다(8-10). 셋째, 이스라엘은 공개적으로 반역했습니다(10-12). 넷째, 이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부했습니다(13-15). 다섯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팔아 악을 행했습니다(16-17). 그 결과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이방인들의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북 왕국은 지금의 중남미처럼 이웃 민족들과 완전히 혼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자(lion)들을 보내 물어 뜯게 하심으로 이들에게 주님을 두려워하게 하셨는데, 주 하나님을 이방 신의 하나같이 섬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범신론적으로 섬겼습니다(33,41절 참조).

18장입니다. 북왕국이 무너졌으나 남왕국에는 히스기야라는 걸출한 왕이 등장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신앙적으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3-6).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앗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했고, 블레셋을 쳐 영토를 확장했습니다(7-8). 이에 앗시리아는 대군을 보내 유다를 위협했습니다. 히스기야 14년 때의 일로서 유다 역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왕은 일단 나라에 있는 금과 은을 다 벗겨 앗시리아 왕에게 주었습니다(15-16). 그러나 앗시리아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군대를 보내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에는 세 가지 의견이 있었습니다. 앗시리아에게 항복하자는 화친파와 이집트에 원조를 구하여 저항하자는 화전파, 이사야를 중심으로 주님께 의지하여 독자적인 승리를 쟁취하자는 경건한 무리들이 하나였습니다. 앗시리아 왕은 3명의 장수를 보내었는데 그중에 랍사게란 사람은 끊임없이 유다 백성들의 신앙을 뒤흔들었습니다(19-35). 그의 혀는 뱀의 혀같았습니다. [민족들의 신들 중에 자기 땅을 아시리아 왕의 손에서 건져 낸 자가 있느냐?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과 헤나와 이바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져 내었느냐? /이/ 나라들의 모든 신들 중에서 누가 자기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 내었기에 [주]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져 낸단 말이냐? 하셨느니라.](33-35). 이런 위기 상황을 히스기야는 어떻게 이겼습니까?

19장입니다. 히스기야는 자기 옷을 찢고 스스로 굵은 베를 입고 주의 집에 들어갔고, 신하들을 보내 대언자 이사야에게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1,4). 랍사게는 항복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었는데,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들고 주의 집에 올라가 주 앞에 그것을 펼쳐 놓고 기도했습니다. 14-19절은 그의 애통하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이 기도에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응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날 밤에 천사를 보내어 앗시리아 군대 18만 5천명을 쳐서 죽여 버렸습니다(35). 이 전쟁을 주도한 앗시리아 왕 산헤립은 그의 아들에게 암살당하였습니다. 시편 46:5, [하나님께서 그 /도시/ 한가운데 계시매 그 /도시/가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도우시되 이른 새벽에 도우시리로다.](시46:5). 생각해 보십시오. 히스기야와 백성들이 얼마나 긴 밤을 지새우며, 가슴을 졸였겠습니까? 성밖의 군대들은 최후 통첩을 했고, 내일이면 유다 왕국 역시 북왕국 이스라엘처럼 앗시리아의 종이 되어서 멀리 이국 땅으로 끌려갈지 모를 그런 위기 속에서 밤을 하얗게 세웠을 것입니다. 어떤 인간적인 방법도, 지혜도, 능력도 소용이 없고, 어디에도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함으로 새벽을 깨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주님은 이미 전쟁을 소리없이 완벽하게 끝내 놓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이요, 보상입니다.

20장입니다. 히스기야가 병이 들어 죽게되었습니다(1). 히스기야는 이 소식을 듣고 통곡의 기도를 했습니다(2-3).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의 생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6). 그러나 이 기도 응답은 히스기야 자신에게나 민족에게나 그렇게 유익하지 않았습니다. 병이 나은 후 히스기야의 마음은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15절에서 나의 집, 나의 보고라는 말을 볼 때, 자기를 높이는 일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는 이 때 병문안을 온 바빌론의 사신들에게 주의 집과 왕궁 보고를 다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빌론은 유다의 보물들을 보고 난 후 유다의 보물들을 다 빼앗을 궁리를 했고, 후에 느부갓네살에게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사야는 이 사건을 두고 주의 말씀으로 크게 책망했는데(17-18), 히스기야는 자신의 당대에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태평했습니다(19). 그는 늙은 엘리 제사장처럼 회개하는 대신 안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마음을 시험해 보셨던 것입니다. 역대기하 32:31 [¶ 그러나 바빌론의 통치자들이 사신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어 그 땅에서 생긴 이적(異蹟)에 관하여 묻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고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친히 그를 시험하셨더라.](대하32:31).

21장입니다. 히스기야가 죽고 므낫세가 왕이 되었습니다. 므낫세는 아버지와 달리 우상 숭배로 찌든 왕이었습니다. 주님은 솔로몬에게 말씀하신대로 행하실 것입니다(7-8). 주님은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13). 므낫세가 행한 죄악으로 인해 심판의 붉은 전조가 온 땅에 가득할 즈음에 그의 아들 아몬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몬 역시 아버지 못지 않게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20-22). 그는 신하들의 반역으로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죄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이 그 삯을 받게 합니다.

22장입니다. 요시야는 유다 왕국의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는 주의 눈앞에서 올바르게 행하였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2). 요시야는 성전을 보수했고, 그 과정에서 주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 율법책을 읽었습니다. 율법을 듣는 왕의 태도를 보십시오(11). 그는 주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며, 말씀을 통해 민족의 죄를 깨달았고, 주님의 심판을 깨달았습니다(13). 이것이 바로 바른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 주는 효과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전에 기록하신 말씀대로 다 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바르게 행한 요시야에게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19-20). 선대가 아무리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심판이 선포되었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바르게 행하고, 믿음을 지킨다면 그 심판은 나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이는 오늘날 조국에 널리 퍼져 있는 선대의 복이나 선대의 죄가 나에게 임한다는 기복적인 무속 신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23장입니다. 요시야의 개혁 정치는 계속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2), 우상들을 혁파했습니다(5-6). 남색하는 자들의 집을 헐고, 백성들 가운데 있던 이교도들의 풍습을 근절시켰습니다. 그는 이외에도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들을 모두 없애고 제거했습니다(20). 그리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21). 유대 백성들은 재판관 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22-23).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구원자, 그들의 구속하신 주님을 잊어 버린 것과 같습니다. 24-25절은 말씀을 통한 영적 부흥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성경을 통한 개혁, 성경을 통한 부흥, 성경을 통한 영적 각성이 바로 요시야 개혁의 핵심이었습니다. 성경이 없이 일어나는 부흥은 땔감이 없이 일어나는 불길처럼 허무하게 사그러집니다. 말씀의 각성없이 일어나는 회개는 잠시 흐르는 눈물이 마르는 것과 같이 무의미합니다. 31-37절은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의 등극입니다. 여호아하스는 3개월 밖에 왕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유다는 몰락을 걷습니다. 그 뒤에 유대에는 다시 훌륭한 왕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24장입니다. 24장부터 25장은 유다의 멸망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호야김은 이집트에게 공물을 바치고 유대를 강화하여 바빌론에 대적하고자 하였으나 바빌론의 속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3년 후에 독립을 선언했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복속되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여호야 긴은 3개월 만에 폐위되었고, 느부갓네살은 그를 대신해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여호야긴 때에 1차 포로로 유다의 대부분 사람들을 바빌론으로 잡아갔습니다. 다니엘은 이때 바빌론으로 잡혀갔습니다(13-14). 시드기야 역시 바빌론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나 도시가 함락되고 예루살렘은 지상에서 뿌리채 뽑히는 참극을 맞았습니다. 성전은 박살이 났고, 돈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바빌론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로써 70년의 바빌론 포로 생활을 맞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첫째, 약속의 땅을 잃었습니다. 둘째, 그들의 왕국을 잃었습니다. 셋째, 성전을 잃었습니다. 넷째,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숭배하고 싶어했던 우상들의 고향으로 가서 더 이상 율법도 희생제도 필요없이 마음껏 우상을 숭배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70년의 세월 동안 우상 숭배의 허무함과 우상의 실체를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는 중에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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