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대
요절: 출애굽기 25:37
성소에서 두 번째
제작해야 할 것은 등불을 피울 등잔대였습니다. 아마
그림이나 사진으로 보신 분은 오늘 말씀을 한결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성소에는 지성소와 바로 맞은 편, 즉 베일이
있는 그곳에 ‘향을 태울 제단’이 있고(출30:1), 왼쪽에는
등불을 밝히는 등잔대가 있고, 오른 쪽에는 빵을 두는 상이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제사장이 들어가서 주님을 섬기는
곳인데 이 세 가지는 각각 기도와 성령과 말씀을 상징하는
것들이어서 매우 영적 의미가 깊습니다. 제사장들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 날마다 성소에 들어가 향을 태울 제단에서 향을
태워야 했습니다. [또 아론이 저녁에 등잔들에 불을 붙일
때에 그 위에 향을 태울지니 이것은 너희 대대로 [주] 앞에
드려야 할 영속하는 향이니라.](출30:8). 등잔들에 불을
불일 때에 향을 태웠는데, 이는 우리의 기도 생활이 매일
지속되어야 함을 예표해 줍니다. 여러분들은 매일
기도합니까? 성경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명령합니다. 이는 영적 제사장의 의무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기도 생활의 실천에 본을 보여 준 사람입니다. [우리가
밤낮으로 매우 넘치게 기도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의
믿음에서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살전3:10).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빵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시간에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이 명하신 등잔대 제작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등잔대’는 성소 안에 있었는데 불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등잔대와 등불은 성경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데, 테이블의 위의 전시하는 빵이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면 등잔대는 참 빛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등잔대에 타는 기름은 성령을
예표합니다. 성소에는 창문이 없었고 다른 인공 조명이
없었기 때문에 불을 밝히는 등잔대가 유일한 빛이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영적 조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73:17)고 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성소에서 영적 조명을 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테이블 위에 전시하는
빵은 영적 양식인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등잔대에서
켜진 불을 통해 말씀의 조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등불이
없으면 말씀을 볼 수 없습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이 점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요셉은 말하기를,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것을 해석할 자가 없도다,
하거늘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그 꿈들을 고하소서, 하니](창40:8).
주님은 어둠과 빛이 매 한 가지이시며, 어둠을 밝히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어두운 곳에 있는 물건을 찾을 때
여러분의 손에는 등잔불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조명, 등불이 없다면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어둠
속에서 깊은 것들을 밝혀내시고 사망의 그늘을 빛으로
끌어내시며](욥12:12)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어둠이
주를 떠나 숨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빛을 내나니 주께는
어둠과 빛이 다 같으니이다.](시139:12). 등잔대를 만들어
불을 붙이는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불은 언제 켜져 있습니까?
밤에 켜집니다. 그러나 성소에 있는 등잔대는 늘 켜져
있었습니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등불에
쓰기 위해 올리브로 찧어 만든 순수한 기름을 네게 가져오게
하고 항상 등불이 타게 할지니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회중의 성막에서, 증거/판/ 앞에 있는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서 그 등불을 점검할지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그들의 대대로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출27:20-21). 제사장들은 등불을 점검하고 그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교회
시대는 밤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샛별이시며, 의의 해이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등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현재는 성도들의 몸이 바로 성전입니다. [오 [주]여, 주는
내 등불이시오니 [주]께서 내 어둠을 밝히시리이다.](삼하22:29)는
말씀대로 등불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어둠을 밝히시는
것을 예표 합니다.
등잔대의 등불은 하나님의
등불이라고 불렸습니다. [[주]의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더니 그곳에
하나님의 궤가 있더라. 사무엘이 잠자려고 누웠는데](삼상3:3).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와
돌보심이 계속되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말씀의 조명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주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환상도 계시도
없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주]를 섬기더니
그때에는 [주]의 말씀이 희귀하여 열린 환상이 전혀
없었더라.](삼상3:1). 말씀이 없는 시대는 빛이 없는
시대이며, 열린 환상 즉 계시가 없는 시대입니다. [이때에
사무엘은 아직 [주]를 알지 못하고 [주]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계시되지 아니하였더라.](삼상3:7).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곁에서 성전에서 잡무를 보면서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의 말씀이 아직 그에게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없으면 결코 주를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계시되는 것입니다. 등잔대의 등불은 그 역할을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1:17).
주님께서 말씀을 사무엘에게 계시하셨을 때 사무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었습니다. [[주]께서
다시 실로에서 나타나시니 이는 [주]께서 실로에서 [주]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계시(啓示)하셨음이더라.](삼상3:21).
주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과 성령의
관계는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빛 자체이시기에 어떤
발광체나 조명이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소에 하나님의 등불을 켜 두신 것은 저 하늘에서
우리 주님이 등잔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주님은 등잔대 사이에 서 계셨습니다. [이에
내가 돌아서서 나와 말씀하신 그 음성을 알아보려 하니라.
돌아설 때에 내가 일곱 금 등잔대를 보았더니 이 일곱
등잔대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으신 이가 발까지
내려온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시는데](계1:12-13).
주님이 성소에 두게 하신
등잔대는 참으로 많은 진리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주의 말씀을 통해 등잔대의 진리를 밝히 보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31절입니다.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되 두들겨서 만들고 그 대와
가지들과 잔들과 둥근 꽃받침들과 꽃들을 하나로 만들고](31).
등잔대의 재질은 순금입니다. 모양이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게 대와 가지들, 둥근 꽃받침들과 꽃들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언약궤와 상은 싯팀 나무로 만든 다음에
금으로 입혔지만 등잔대는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을 녹이거나 깎아서 만드는 세공품이 아니라 순전히
두들겨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두들겨서 만드는 것과 녹여서
부어 만든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떠나 우상을 만들 때는 언제나 녹여서 부어
만든 형상이었지 두들겨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간단한 예로
아론이 백성들로부터 금을 받아서 만든 금송아지의 형상을
보십시오. [그가 그들의 손에서 그것들을 받아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새기는 도구로 모양을 내니 그들이 이르되, 오
이스라엘아, 이것들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신들이로다, 하므로](출32:4). 아론은 부어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빠르고 쉽게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순금 한 달란트를 오직 두들겨서 등잔대와 가지들과
잔들을 만드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주님은 그룹들을
만들 때도 두들겨서 만들게 하셨는데, 인공적으로 깎고
녹이고 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예표 하는 어떤
것에도 주님은 사람들이 깎고 다듬게 하지 않으셨는데,
제단에 쓰이는 돌도 자연석 그대로였지 벽돌은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도시를 만들 때,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돌 대신 벽돌을
취하고 회반죽 대신 진흙을 취하며](창11:3)라고 했습니다.
인공이 가미된 것은 주님을 예표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손을 타는 것, 사람의 연장이 댄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거나 돕거나 무엇을
공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만들고자 하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이는
네가 돌 위에 네 연장을 들면 그것을 이미 더럽게 한 것이기
때문이니라.](출20:25).
금을 두들긴다는 것은
고난 받은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순금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금 등잔대는 고통스런 두들김으로 인해
생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고통스런 매질로 온 몸이
상하시고 영광스런 몸을 입으셨습니다. 39절에 보면 순금의
양은 일 달란트입니다. [그가 이 모든 기구와 함께
등잔대를 순금 일 달란트로 만들되](39). 금 일 달란트는
이곳 미국 단위로는 120파운드 정도의 금입니다.
모양에 대한 묘사는 매우
자세하게 나오는데 반해 크기나 길이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고 다만 모세가 산에서 본 모양대로 주의 깊게
만들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빛을 비추려면 등잔대는
테이블이나 향을 태우는 제단보다는 높았을 것입니다.
32-33절입니다. [여섯
가지가 등잔대 옆에서 나오게 하되 세 가지는 이쪽에서
나오게 하고 세 가지는 저쪽에서 나오게 하며 이 가지
하나에 둥근 꽃받침과 꽃이 있는 아몬드 모양의 잔 세 개가
있게 하고 저 가지 하나에도 둥근 꽃받침과 꽃이 있는
아몬드 모양의 잔 세 개가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에 다 그와 같이 할지니라.](32-33). 모양을 보면
중간에 줄기처럼 주 막대기가 있고 양편으로 세 가지씩
나오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섯 개의 가지가 되고 그
위에 꽃받침과 꽃이 있는 아몬드 모양의 잔 세 개를 두어
거기에 기름을 보관하여 대 위의 등에 기름이 계속
공급되도록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곱 개의 등불이 탈
수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일곱 개의 등잔대는 등잔대
맞은편으로 비추게 되어 있습니다. [아론에게 말하고
그에게 이르라. 네가 등잔들에 불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이
등잔대 맞은편으로 비추게 할지니라, 하시매 아론이 그와
같이 하여 등잔들에 불을 켜서 등잔대 맞은편으로 비추게
하였으니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민8:2-3).
이것을 현 세상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등불은 교회입니다.
주님은 본래 유대인들을 세상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빛되신 주님을 거부함으로써 빛을 잃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상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곧
네가 본바 내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등잔대의
신비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보는 일곱
금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 교회는 끊임없이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밤에 십자가의
형상에 네온 싸인만 번쩍이는 것이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말과 행실로서 본이 되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교인들은 모두 한 개의 등불입니다. [이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걸으라.](엡5:8). [너희는 다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5:5).
등불은 등잔대 위에 있어야 하며, 끊임없이 기름의 공급이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속적인 성령의 충만을
덧입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속에 말씀으로 채움 받아야
합니다.
다시 성소의 등잔대를
보십시오. 이 모습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비추는 그런 모습입니다.[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 그분께서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드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등잔대 위에서 일곱 개의 등잔불이 비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일곱 개의 빛은 주님이 노아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 무지개를 세우신 것과 같습니다. 일곱 개의
가지에서 나오는 일곱 등불은 요한계시록 4:5에 나오는 일곱
영과 같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일곱 등불이 일곱 영이라고
말합니다. [그 왕좌로부터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고 왕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으니 이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4:5). 일곱 영은 주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왕좌 앞에 계신 일곱 영과](계1:4). 이 일곱 영은
이사야 11:1-3에 나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요,[주]의 영
곧 지혜와 명철(明哲)의 영이요, 모략과 능력의 영이요,
지식과 [주]를 두려워하는 영께서 그 위에 머무시며 그로
하여금 [주]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속히 깨닫게 하시리니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책망하지 아니하며](사11:1-3). 주님은 일곱 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시며, 일곱 영은 온 세상을 감찰합니다.
금 등잔대는 각각
만들어서 붙인 것이 아니라 한 개의 금 덩어리를 두들겨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 몸의 구조와 같이 유기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 몸과 같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매 내가 이르되, 내가
보니, 보소서, 전부 금으로 된 등잔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잔이 하나 있고 그 /등잔대/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일곱
등잔과 연결된 일곱 관이 그 /등잔대/ 꼭대기에 있고](슥4:2).
연결된 일곱 관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각각 분리된
개체의 연합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인 유기체적인
연합입니다. 등잔대에 사용되는 기름은 올리브기름입니다.
올리브 나무는 생명 나무입니다. 이스라엘은 참 올리브 나무,
이방인은 돌 올리브 나무라고 했으며, 주님께서 올리브
나무의 뿌리가 되십니다(롬11:16). 올리브 나무에서 짠
기름에서 나는 등불이 우리 몸 안을 구석 구석 비치는
것입니다. 전시하는 빵이 성경을 나타내고, 제단이 기도를
나타내고, 등잔대의 등불이 안을 비추는데, 만약 이 불이
꺼지면 성경에 대한 조명이나 빛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34-36절은 모양에 대한
묘사인데 그림이나 사진으로 한 번 보면 간단히 이해될 듯한
그런 모습입니다. [등잔대에는 둥근 꽃받침들과 꽃들이
있는 아몬드 모양의 잔 네 개가 있게 하고 등잔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에 따라 하나로 된 두 개의 가지 밑에 둥근 꽃받침
하나가 있게 하고 또 하나로 된 두 개의 가지 밑에 둥근
꽃받침 하나가 있게 하며 또 하나로 된 두 개의 가지 밑에
둥근 꽃받침 하나가 있게 할지니라. 이 둥근 꽃받침들과
가지들을 하나로 만들되 순금으로 두들겨서 하나로
만들지니라.](34-36). 아몬드의 모양의 잔 네게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아몬드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에서 부활한
대제사장(민17:8)을 예표하는데 우리 주님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롬1:4). 꽃 받침, 꽃들 역시
이런 식으로 맞추자면 신앙 고백, 성령의 열매들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말씀은
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15:5)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가지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생명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성소의 등잔대의 불을 꺼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는 결코
성령을 소멸시켜서는 안 됩니다. 등잔대의 불이 없다면
성소는 깜깜해지고 맙니다. 그 안에 있는 빵도 볼 수
없습니다.
37절입니다. [너는 그 /등잔대/의
등잔 일곱 개를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등잔들에 불을
붙여 그 맞은편으로 빛을 발하게 할지니라.](37). 등불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향한 주님의 긍휼의 상징입니다. 유다가
범죄함으로 남북 왕국으로 갈라졌습니다. 솔로몬이 죽자
유다 지파는 완전히 망할 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심판하시는
중에도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 내가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11:36).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위하여
[주] 그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등불을 주시되 그의
뒤를 이을 아들을 세우사 예루살렘을 굳게 세우셨으니](왕상15:4).
주님은 등불을 끄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품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주님을 일컬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진리를
위하여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42:3)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먼저 죄인을 포기하는 법이 없으며,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유다가 얼마나 자주, 심하게 주님을
배반하고 더럽혔습니까? 당장 멸해도 시원치 않을 그런 죄악
가운데 살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자신의 종 다윗으로 인하여 유다를
멸하려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음이더라.](왕하8:19).
이것이 바로 등잔불이 성소를 비추는 영적 의미입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등불은 우리 안에 있는 영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이니 뱃속의 모든 부분을
살피느니라.](잠20:27). 성소의 등불을 하나님의
등불이라고 했는데, 사람의 영 역시 주의 등잔불이라고
불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등잔불을
밝히십니다. [주께서 내 등잔불을 밝히시리니 [주] 내
하나님께서 내 어둠을 밝히시리이다.](시18:28). 우리의
영은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성령의 기름을 통해 밝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 감각이 예민합니다. 말씀으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감각을 단련하여 아주 사소한 일에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배움을 얻고,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매
순간에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그분의 길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작은 먼지에도 더러움을 느끼듯이 작은 실수나
허물도 금방 알아내고, 주님께 고백하고 보혈로 씻어냅니다.
반면 악한 자는 어떻게
됩니까? [이는 악한 자에게는 보상이 없으며 사악한 자의
등잔불은 꺼질 것임이니라.](잠24:20). 등잔불이 꺼진
사람은 어둠에 있어도 어둠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들은
물기로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좀처럼 등불이
밝혀지지 않고 금방 꺼지고 맙니다. [사악한 자의 등불이
얼마나 자주 꺼지는가! 멸망이 그들에게 얼마나 자주
닥치는가! 하나님께서 친히 분노하사 슬픔을 나눠
주시는구나.](욥21:17). 죄인들은 안에 등불이 꺼진
상태에서 살기 때문에 인생의 방향도 목적도 없습니다.
등불이 있으면 어둠 사이도 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성 상실과 더불어 영적 감각의
상실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안에 등불이 꺼져 있는 상태로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런즉 네 눈이 단일(單一)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요,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리니 그런즉 네 안에 있는 등불이 어둡게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6:22-23)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몸이 어둡게 됩니다. 눈이 악하면 몸이
어두워질 뿐 아니라 네 안에 있는 등불(영)이 더욱 어둡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신없이
쳐다보는 사람들은 그 안에 등불이 꺼집니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더러운 영화를 보든지, 멍하니 T.V를 쳐다보든지,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여자를
쳐다보든지, 탐욕으로 어떤 것들을 쳐다보는 그런 행위들은
자기 안에 있는 등불을 모두 꺼버리는 행위입니다. 주님은
성소에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등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1:34-35을
보십시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단일(單一)하면
네 온 몸도 빛으로 가득할 것이로되 네 눈이 악하면 네 몸도
어둠으로 가득하리니 그런즉 주의하여 네 안에 있는 등불이
어둡게 되지 않도록 하라.](눅11:34-35). 제사장들이 성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특히 눈을 주의하여 여러분
안에 있는 등불이 어둡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속에 있는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12:35).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시편 119:105에 이르기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 명령이 등불이요, 그 법이 빛이요, 훈계하는 책망들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니라.](잠6:23). 우리 눈이 성경
말씀을 늘 주목하고 거기에 가 있다면 여러분의 속에 있는
등불은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반면 술을 마시든가 욕설을
한다든가 사람들을 헐뜯고 비판한다든가 마음이 교만해지면
등불은 여지없이 꺼지고 맙니다. [의로운 자의 빛은
기뻐하나 사악한 자의 등불은 꺼지리라.](잠13:9)
말씀합니다. 특히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의 등불은 완전히
꺼지고 맙니다.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면 그 사람의 등불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꺼지리라.](잠20:20).
말씀에 대한 불신과 불순종은 타는 숯불에 물을 끼얹듯이
그렇게 꺼뜨리고 맙니다.
38절입니다. [또한 /너는/
그 /등잔대/의 부집게와 불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지니라.
그가 이 모든 기구와 함께 등잔대를 순금 일 달란트로
만들되](38-39). 주님은 등잔대에 불을 피우고, 청소하는데
필요한 소품들 역시 순금으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부집게와
불똥 그릇은 등잔대에 불을 피우고 청소하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40절입니다. [너는
주의하여 산에서 네게 보여 준바 그것들의 양식대로
그것들을 만들도록 하라.](40). 주님은 산에서 모세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셨는데, 그 모습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주님의 일은 주님의 명령대로, 말씀대로,
규칙대로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또한 우승하려고 애쓰는 자가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월계관을 얻지 못하며](딤후2:5)란 말씀을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잠깐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이
모세에게 주의하여 산에서 본대로 성막을 만들어야 하듯이
우리는 매사에 주의하여 성경에서 본 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15에 [그런즉 너희는 주의하여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로서 조심스럽게 걷고]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주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라. ...](마13:9).[오직
너희는 주의하라. 보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막13:23). 주님이 미리 말씀하신 모든 일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너희는 주의하라. 깨어 기도하라.
이는 그때가 언제인지 너희가 알지 못하며](막13:33).
주님은 주의하라는 명령을 계속 반복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첫째,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듣는가? 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주의하라. 이는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있는 줄로 여기는 그것까지도 빼앗길
것임이라, 하시니라.](눅8:18).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듣는 것에 주의하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듣는 너희가 더
많은 것을 받으리니](막4:24). * what ye hear.
둘째, 형제의 잘못을 볼 때
주의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라.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범법(犯法)하거든 그를 꾸짖고 회개하거든 그를
용서하라.](눅17:3).
셋째,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속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할 것임인즉 너희는
그들을 따르지 말라.](눅21:8).
넷째, 주님의 오시는 때에
대해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날과 시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는 이유로 더 태평하고, 나태하며, 부주의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과식과 술 취함과 이 /세상/
삶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무겁게 되어 그 날이 뜻밖에
너희에게 임하리니](눅21:34).
다섯째,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들을 미리 알았은즉 저 사악한 자의 오류에
이끌려 너희 자신의 굳건함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벧후3:17).
엿섯째, 자기 남편과
아내의 바른 관계성 유지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도 저마다 개별적으로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듯 하고 아내도 주의하여 자기 남편을
존경할지니라.](엡5:33).
일곱째, 경배의 대상이
아닌 것에 경배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네 동료 종이요,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네 형제들 가운데 속한 자니 너는 주의하여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이는 예수님의 증거가 대언의
영이기 때문이라, 하더라.](계19:10). [그때에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는 네 동료 종이요, 대언자들인 네 형제들과 이
책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들 가운데 속한 자니 너는 주의하여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22:9).
여덟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 생활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구제(救濟)하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보상(報償)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덧 하나님 보다 교회 동료들이나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고 일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구제든 선행이든 기도이든 섬기는
일이든 무엇이나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도록 스스로
주의해야 합니다.
아홉째,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너희 마음 속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1:19).
예수님의 증거는 대언의 영입니다(계19:10).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요6:63).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가장 잘 하는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