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막을 만들되

말씀: 출애굽기 26:1-6
요절: 출애굽기 26:5-6


오늘은 성막의 외형 즉 성막의 천정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해 주신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건축물을 만드는 방법은 일단 외곽 골조를 세우고, 거기에 뭔가로 벽을 만듭니다. 그리고 천정을 만들고, 외형이 갖추어지면 마지막으로 가구를 들여다 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사 방법은 정 반대로 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정반대입니다. [이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주]가 말하노라. 이는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기 때문이니라.](사55:8-9)란 말씀대로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너무나 달라서 우리는 때로 당황하기도 하고 불신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고 체험하게 됩니다.

성막의 천정 커튼을 우리말로는 앙장(仰帳)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25장에서 언약궤, 긍휼의 자리, 전시하는 빵을 두는 상과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게 하셨는데,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성소 맨 앞에 위치해 있는 향을 태우는 제단(분향단)이 나오지 않습니다.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를 예표하며, 성령의 사역을 예표하는 것인데 주님은 아무 언급없이 바로 앙장을 만드는 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분향단은 30장에 가서야 나옵니다. 분향단, 등대, 전시하는 빵은 모두 성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성막 제작 순서에 대해서 모세가 뭔가를 빠뜨리고 쓴 것이 아닌가 근거없는 의심을 하기도 했는데, 성경을 믿는 성도들은 성경에 기록된 순서에 영적 의미와 진리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향을 태우는 제단은 기도로써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기도하는 중보 사역을 예표하는 단입니다. 주님은 28-29장에서 대제사장직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30장에서 향을 태우는 제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이는 정확한 순서입니다.

성경에는 여덟 번의 성전이 나옵니다. 1. 모세의 성막 2. 솔로몬의 성전 3. 스룹바벨의 성전 4. 헤롯의 성전 5. 그리스도의 몸(요2:21) 6.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현재 교회 시대-고전6:19). 7. 환란 성전 8. 새 성전-에스겔의 성전. 8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7진법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우주의 모형을 본 딴 것인데 이렇게 본다면 성막의 천정은 하늘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절입니다. [너는 또한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아마 /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로 짠 열 개의 앙장(仰帳)으로 만들며 정교한 솜씨로 만든 그룹들을 /수놓아/ 앙장들을 만들지니](1). 여기서 매우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은 커튼이 곧 바로 성막이란 말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15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너는 성막에 쓰기 위해 시팀나무로 널빤지들을 만들어 세우되](출26:15). 여기서 나오는 널빤지들은 앙장을 위한 것들인데 주님은 앙장을 성막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매우 놀라운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주님 안에는 신격의 충만함이 모두 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으신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막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외관(천)을 성막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막 휘장을 만드는데 사용된 재료를 보십시오. '가늘게 꼰 아마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로 짠 천입니다. 이 천은 대제사장들이 입는 속옷이며, 모자에 사용된 것들입니다. [거룩한 아마 속옷을 입고 그 살 위에 아마 반바지를 입으며 아마 허리띠를 띠며 아마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의복이라. 그러므로 그가 물로 몸을 씻고 그것들을 입을 것이며](레16:4). 만약 이렇게 만든 옷을 입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너는 고운 아마로 속옷을 수놓아 만들고 고운 아마로 관을 만들고 바느질로 허리띠를 만들지니라.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고 그들을 위하여 허리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모자를 만들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그것들을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그들을 거룩히 구분하고 거룩히 구별하여 그들로 하여금 제사장 직분으로 나를 섬기게 할 것이며 또 그들을 위하여 아마로 반바지를 만들되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에까지 이르게 하여 그들의 벌거벗음을 덮게 할지니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나아와 성소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만 할지니 그리하여야 그들이 불법을 담당한 채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그와 그의 뒤를 이을 그의 씨에게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출28:39~43). 이는 우리가 의의 옷을 입어야 함을 말해 줍니다.

고운 아마포는 성경 전체에서 성도들의 의를 예표합니다. [또 그녀에게 깨끗하고 희고 고운 아마포 /옷/을 차려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는 이 고운 아마포가 성도들의 의(義)이기 때문이라, 하더니](계19:8). 이 옷은 저 하늘에서 입는 옷이며, 하늘의 군대들이 입고 주님을 따릅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따르더라.](계19:14). 고운 아마포가 상징하는 깨끗함, 순결한 의는 육신을 인간의 상태와 너무나 비교되는 그런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 (사64:6). 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의 죄를 자신이 다 담당하시고 깨끗하게 하사 자신의 의로 옷입혀 주십니다. 고름이 나고 냄새나는 몸에 고운 아마포 옷을 입힐 수 없듯이 죄로 가득 찬 우리를 깨끗케 하지 않고서는 고운 아마포 옷을 입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받고 말씀의 물로 씻음받은 성도들에게 주님은 고운 아마포 옷을 입히시는 것입니다.

앙장에 사용된 아마포의 색깔을 보십시오. 청색, 자주색, 주홍색 실로 짰습니다. 청색은 하늘의 실체를 나타내는 색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분의 발 밑은 마치 사파이어 보석으로 포장(鋪裝)한 듯하고 그 청명함은 하늘의 실체(實體) 같더라.](출24:10). 흰색 바탕에 청색 실로 수 놓여진 앙장은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자주색은 고귀함을 나타내는 색입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게 한 다음 주님에게 자주색 옷을 입혀서 조롱했습니다(요19:2). 자주색 옷은 왕이나 귀족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 왕조에서 나신 왕이십니다.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은 [이르되, 유대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마2:2a)고 하시며 주님을 찾아와 경배했고, 마지막 십자가를 앞두고 빌라도는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시매 총독이 그분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들의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고 있다, 하시고](마27:11).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 위에 씌어진 명패는 이렇습니다. [그분의 머리 위에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 라고 쓴 죄명을 붙였더라.](마27:37).

주홍색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주홍색은 피를 상징하기도 하고 우리의 죄의 색깔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辯論)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지리라/.](사1:18). 주님은 자신의 피로 우리가 흘릴 피를 대신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 죄가 되시고(고후 5:21), 저주가 되셨습니다(갈3:13).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밤새도록 채찍에 맞으심으로 온 몸을 피로 덮었으며, 그 전에는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피가 흘렀습니다.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눅22:44).

주님은 앙장을 만들면서 거기에 수를 놓게 하셨는데 그룹들의 모양이 새겨졌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장들이 성소로 들어갔는데 지성소를 가로 막는 휘장과 천장에 있는 앙장에 모두 그룹들이 보입니다. 주님은 그룹들 사이에 거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거기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처소란 사실을 즉각적으로 알게 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주의 날개]란 표현을 자주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이 날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룹들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을 표현한 말입니다.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밑에 숨기사](시17:8). 다윗의 이 기도는 주님이 거하시는 그룹들 사이 아래에 자신을 숨겨 달라는 말씀이며, 동시에 주님과 함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뛰어나신지요! 그런즉 사람들의 자녀들이 주의 날개 밑에서 /주를/ 신뢰하나이다.](시36:7). 이 기도 역시 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장들은 실제적으로 경험되는 그런 기도입니다. 그룹들이 수 놓여진 앙장 아래에서 서서 섬기는 제사장들은 주의 날개 밑에 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의 날개 밑에 있다고 고백한다면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임재 앞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신 그곳에 그룹들이 주의 둘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혼이 주를 신뢰하오니 내게 긍휼을 베푸시고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참으로 이 재난들이 지나갈 때까지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 내 피난처를 두리이다.](시57:1). 이런 기도는 모두 주님의 성막의 앙장에 놓여진 그룹들의 날개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들입니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주의 날개 밑 숨는 곳을 신뢰하리이다. 셀라.](시61:4). 성막에 있는 주의 날개 밑이란 바로 성소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앙장에 그룹들을 새기게 하심으로서 자신이 그곳에 거하심을 증거합니다.

주의 날개 아래에 거하십시오. 주님의 날개는 독수리 날개와 어미 닭의 날개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행한 것과 또 내가 독수리 날개에 너희를 실어 내게로 인도한 것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 독수리는 새끼를 나를 때 발로 집어서 날지 않고 등에 태워서 납니다. 그래서 사냥꾼이 활을 쏘면 어미를 맞추지 않고는 새끼를 잡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이방 민족도 하나님을 이기지 않고는 이스라엘을 삼킬 수 없습니다. 이는 완전한 보호를 의미하는 날개입니다. 신약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병아리를 자기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이 역시 보호를 의미하는 날개입니다. 어미 닭은 새끼들을 날개 밑에 품는데 개나 고양이의 공격을 받거나 하늘을 나는 매의 공격을 받을 때면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날개 밑에 있는 새끼를 내어 놓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을 이길 수 없다면 주님의 날개 밑은 영원히 안전한 곳이 됩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날개는 성소의 휘장과 앙장에 그려진 그룹들을 의식한 주의 날개입니다.

2절입니다. [각 앙장의 길이는 이십팔 큐빗, 넓이는 사 큐빗으로 하고 각 앙장의 치수를 같게 할지니라.](2). 길이는 7 X 4큐빗이고, 높이는 사 큐빗인데 7과 4는 성경에서 의미 깊은 수입니다. 7은 하나님이 일하는 하나님의 수입니다. 인간은 십진법을 쓰고 하나님은 칠진법을 쓰십니다. 우리는 하나, 둘, 셋...열 한 후에 다시 열 하나가 시작되지만 주님은 하나, 둘... 일곱하신 다음에 다시 하나가 됩니다. 4는 이 땅에서 세상 전체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동서남북이라고 하면 4개의 방향이 아니라 모든 방향을 말합니다. 사 계절이라고 하면 역시 일년 전체를 다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막의 크기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일하는 방법을 상징합니다.

3절입니다. [또 앙장 다섯 개를 서로 연결하고 다른 앙장 다섯 개도 서로 연결하며](3). 여기서 앙장은 총 열장이 만들어져서 다섯 장씩 서로 연결해서 사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열은 이방인의 수이며, 세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섯은 죽음의 수입니다. 세상을 예표하는 이집트는 10가지 재앙을 당한 후에도 돌이키지 않고 이스라엘을 추격하다 모두 홍해에 빠져 죽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세상의 왕국을 열개의 왕국으로 나눕니다(계17:12).

4-5절입니다. [그 연결한 것의 가장자리로부터 앙장 끝단에 청색 고리들을 만들고 두번째 연결한 것의 다른 앙장 맨 끝단에도 그리할지니라. 너는 한 앙장에 고리 쉰 개를 만들고 두번째 연결한 것의 앙장 끝단에도 고리 쉰 개를 만들어 그 고리들이 서로를 붙들어 /연결하게/ 할지니라.](4-5). 청색은 하늘의 색입니다. 저는 예전에 건축과 학생들이 자신들이 만든 건축 설계도와 건축 모형물 전시를 하면서 왜 그렇게 만들었고, 거기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문 고리 하나까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철학과 사상이 담기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곡선으로 처리한 것은 왜 곡선으로 처리했고, 왜 재질은 이것을 사용했고, 이 부분은 둥글게 하지 않고 각 지게 했는지 모두 다 깊은 의미들을 다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건축물이야 말로 종합 예술이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인간들이 자신이 설계하는 건축물에 그런 의미들을 부여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성막이나 성전을 만들 때 사용된 재료, 크기, 색깔, 모양 등은 깊은 영적 의미가 없는 것이 없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앙장 맨 끝 단에 청색 고리 쉰 개를 만들어 서로 단단하게 연결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연결되어서 하나의 완전한 성막의 천장이 됩니다. 이를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결합으로 해석하거나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으로 해석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경교사였던 아더 핑크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결합으로 보았는데, 모두 그럴 듯한 해석입니다. 청색 고리를 만들어서 연결했다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앙장에 하나님의 권능과 신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주}와 결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모든 성도는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고 그리스도께 순종할 때 야수 같은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아니라 신의 성품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나니](벧후1:3). 하나님은 청색 고리로 앙장을 연결하시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과 우리를 연결하셨습니다. 청색 고리로 연결되면 둘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장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입니다. 머리와 몸을 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척추를 통해 온 몸에 신경이 손끝, 발끝까지 골고루 전달되듯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독립된 개체의 관계가 아니라 생명의 유기체적인 연합으로 하나 된 관계입니다. 아무리 재주 많은 손이라도 몸에서 떨어져 나가 있으면 그것은 한 점 고기 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열매를 맺는 가지라도 그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지에게 독립이란 존재할 수 없고, 몸의 지체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와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분으로부터 온 몸이 각 마디의 공급하는 것을 받아 서로 꼭 맞게 결합되고 들어차서 각 부분의 분량대로 효력 있게 일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 주느니라.](엡4:16). 여러분은 스스로 힘을 만들어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몸이란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안식하면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힘은 저절로 공급됩니다. 지혜, 능력, 경건, 거룩함 등 우리는 무엇 하나 스스로 만들 수 없고, 스스로 알아서 행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런 모든 것은 전달되며, 우리 몸은 공급된 힘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위로를 받고 사랑 안에서 서로 결합하여 전적으로 충만하고 확실한 깨달음에 이르고 하나님과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신비를 시인하게 하려 함이라.](골2:2). […… 온 몸이 머리로부터 마디와 힘줄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결합하여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느니라.](골2:19b). 이것이 바로 생명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영적 연합이요, 하나 됨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기 쉬운 것은 주님이 공급자이시고, 모든 것을 자라게 한다고 해서 성도들은 수동적으로 완전히 손놓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지방 교회를 비롯해서 Watchman Nee, Witness Lee란 사람의 책에 영향을 받은 분들 가운데 피동성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런 구절만 되뇌이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과 힘의 공급을 받는 자들은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자들이지 가만히 있으면서 놀고 먹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을 따라서 힘써 수고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분의 활동을 따라 힘쓰며 수고하노라.](골1:29). 우리의 손과 발은 어디에서 힘이 공급됩니까? 머리에서 공급됩니다. 그렇다면 손, 발이 가만히 있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못합니다. 머리에서 힘을 공급받은 대로 머리에서 지시하는 대로 일을 할 때 뭔가를 이루어 내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공급받아 그리스도의 뜻대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고, 서로 섬기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열매를 맺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은헤를 베푸시고, 힘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여러분이 믿고 행한다면 무엇이(힘, 지혜, 능력 등) 부족해서 일을 이루지 못하는 법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푸른 고리가 앙장을 연결하듯이 십자가와 성령은 우리를 그렇게 주님과 연결하며, 성도들과 성도들의 관계를 연결합니다. 6절입니다. [너는 금으로 걸쇠 쉰 개를 만들고 그 걸쇠들로 앙장들을 함께 연결하여 한 성막이 되게 할지니라.](6). 푸른 고리를 이을 걸쇠를 50개 만들어서 연결하면 한 성막이 됩니다. 고리와 걸쇠는 연결이외의 다른 뜻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연결과 연합 그리고 하나 됨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음이니라.](골1:20). 주님은 스스로 푸른 고리가 되셨고, 걸쇠가 되셨습니다. 십자가는 둘을 하나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의 피는 화해의 피 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엡2:13-14).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원수 된 자를 친구보다 더 가깝게 만듭니다. 신분의 구분도 외모에 따른 차별도 없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이런 것들로 구별이 지어지고, 분리가 일어난다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피가 없는 탓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인종, 성별, 나이, 학력, 재력, 권력, 주인과 종 등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으니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갈3:28).

제자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 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12명 밖에 안 되었지만 모두 개성이 강하고, 자아가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심한 경쟁 관계였고,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였습니다.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셨습니다. [이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이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교회가 하나가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하나 됨을 통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기에 앞서 그들이 하나 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임을 잘 아셨습니다. 하나 됨이 없이는 사역의 어떤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은혜와 각양 다양한 은사를 주신 것은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 교회를 주신 것도 하나가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단연 으뜸은 분열입니다. 왜 그렇게 서로 싸우고, 다투고, 갈라지는지 계속해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는 푸른 고리와 걸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앙장을 아무리 여러 장 예쁘게 많이 만들어도 하나로 연결되지 않으며 성막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적 일치가 없는 교회, 신앙적 일치가 없는 가정이라면 참다운 교회도 가정도 아닙니다.

지역 교회는 하나 됨이 실현되는 실제적인 공간이며,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됨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長成)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엡4:13). 이런 이유로 바울 사도는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킬 것을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성도의 각 사람 안에 푸른 고리와 걸쇠가 있다면 연결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 속에 계시고 또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엡4:3-6).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육신을 죽음에 처하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몸을 통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믿는 자들 안에 내주하신 성령께서 몸을 통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집회를 열고, 함께 식사를 나누고(함께 교제하고), 함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서로 해야 할 일, 함께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해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힘써야 할 일은 반드시 함께 해야만 합니다.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할지니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 대한 일들 곧 내가 너희에게 가서 보든지 떠나 있든지 너희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이 복음의 믿음을 위하여 한 마음으로 함께 힘쓰며](빌1:27). 혼자 기도하고 혼자 찬송하는 일을 할 수 있지만 혼자는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성도와 성도는 서로 결합되어야 하고,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임에 참석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과 함께 기도하는 것은 너부러진 천 조각과 만들어진 옷과의 차이와 같습니다. 천 조각은 실로 박음질해서 연결되어야 온전한 옷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각 성도들은 함께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예배를 드릴 때 영적 유기체의 모습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권면하기를 [너희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일치하여 내 기쁨을 성취하라.](빌2:2)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120명이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성도는 500명이나 되었지만 함께 모여 기도한 사람은 1/4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인 자들은 성령을 받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 때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온 교회가 함께 모여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했지만, 그들이 풀려 난 후에도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사도들이 풀려나매 자기 동료들에게로 가서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말한 것을 다 전하니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 이르되, 주여, 주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시오](행4:23-24). 이렇게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 기도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들이 기도하기를 마치매 함께 모인 곳이 흔들리더니 모두가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니라](행4:31). 저는 교회의 기도 모임과 예배에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성도들을 참다운 성도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성도이기는 하겠지만 연줄 떨어진 연이나 고리와 걸쇠가 없는 앙장처럼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이웃 사랑, 십자가를 통한 형제 사랑, 십자가를 통한 가족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이웃 사랑, 형제 사랑, 가족사랑이란 마치 고리와 걸쇠가 없는 앙장처럼 연결이 되지 않으며, 결합이 되지 않아서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겉 모양을 겨우 배열해서 연결된 것처럼 보여도 바람이 한번만 불어도 다 떨어져 버리듯이 약간의 시련이 와도 다 부숴지고 와해되어 버립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수없이 그런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 됨은 십자가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해체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으로 참 사랑을 실천하며, 십자가를 통한 분리와 하나 됨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이런 하나 됨을 통해 더욱 성장해 나가기를 빕니다.

로마서 15:6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6).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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