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우림과 둠밈

말씀: 출애굽기 28:30
요절: 출애굽기 28:30

우리는 지난 시간에 판결의 흉패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대제사장의 의복 중 가슴 부위에 12개의 보석이 있고, 각 보석마다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판결의 흉패라고 불리는 이 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을 넣어 두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석류인지 아니면 모양은 어떠한지, 어떻게 제작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림이란 말은 '빛'을 뜻하는 '우르'의 복수로 '빛들'이란 말입니다. '둠밈'은 '온전함'을 뜻하는 톰의 복수형으로 '완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를 '빛과 공의'라고 번역했는데, 현대 대부분의 번역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해서 '우림과 둠밈'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번역이 아니라 음역인데 우리 성경에서도 동일합니다. 이 물건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의해 비추어진다는 의미를 지닌 모든 인간사의 결정 도구였습니다 즉 인간의 모든 시각과 판단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결정해야 하며 이러한 결정이야말로 옳은 판단이라는 점입니다. 우림의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하나님이 비추어 주시는 계시라는 것으로 바로 인간을 진리로 인도하는 빛임을 나타냅니다. 우림을 통해 주님의 뜻이 빛으로 계시되었습니다. 둠밈 역시 불완전한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여 판결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를 나타내는데 진리 한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우림과 둠밈”이란 말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을 빛 가운데서 완전한 길로 인도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진리이신 하나님이십니다.

30절입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의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주]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 위에 있게 할지니라. 또한 아론은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판결을 항상 자기 가슴 위에 둘지니라.](30). 성경에 기록된 고대의 숱한 의문점들 가운데 하나가 우림과 둠밈의 정체입니다 고고학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으며 어떠한 방식에 의해 쓰였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다만 매끈한 돌이나 혹은 금속으로 만든 주사위 모양 같았던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명확히 밝힐 수 없는 여러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용도는 명확합니다. 대제사장을 통해서 뜻을 공개적으로 백성들 앞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도구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들은 대제사장의 흉패 안에 넣어져 보관되다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 지을 때에 제비 뽑는 형식으로 뽑아 문제를 판결 짓는 역할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할 때 물으면 우림은 빛을 발하며 응답을 해 주었는데, 오늘날 만화 영화에서 마법의 구슬에게 무엇을 물으면 답을 주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만화나 공상 영화는 실제로 성경에 있던 역사적 사실이나 예언적 사실에 미치지 못합니다. 우림과 둠밈은 마법의 구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시는 진정한 판결의 흉패였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들어가야 가슴에 있는 12개의 흉패가 판결의 흉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우림을 통해 하나님 앞에 뜻을 구하고자 했으나 하나님은 우림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주]께 여쭈었으나 [주]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대언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삼상28:6). 여기서 구약의 계시 방법이 잘 나옵니다. “꿈, 우림, 대언자” 이 셋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꿈은 개인적으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우림은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판결할 때 주님이 주시는 방법입니다. 대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면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우림과 둠밈이 흑과 백의 돌로 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판결을 내릴 때에 이 돌로 제비를 뽑아 결정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신빙성이 좀 떨어집니다. 아무 돌이나 집으면 50%의 확률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입니다. 그랬다면 사울은 우림으로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대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흉패에는 12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으로 된 판결의 흉패에 새겨진 지파별 이름이 있는데,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문의할 때에, 이 보석에 새겨진 알파벳이 빛을 내면서 질문에 대한 응답이 계시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계시되었다면 하나님의 뜻은 글자로 계시된 것이나 다름없고 명확합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물었을 때 우림에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고 빛이 비치지도 않았다면 사울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견해는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중요한 판결이 있을 때 우림과 둠밈이 들어 있는 흉패를 입고 그곳에 참석하여 가부(可否)를 제비 뽑는 형식으로 뽑아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우림과 둠밈의 뜻인 '빛과 완전'은 하나님의 성품과도 상통하는데 두 단어의 첫 자가 각각 히브리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자라는 점은 하나님이 자신을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 (계 1:8,17;21:6;22:13)이라고 계시하신 사실과 관련해 볼 때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계시를 주신다는 점에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계적인 방법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우림과 둠밈의 사용은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출애굽 초기 역사와 이스라엘 왕조의 기틀이 세워질 때는 대언자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이스라엘 전역에 말씀을 받은 대언자들의 활동이 증대됨에 따라 점차 우림과 둠밈을 통해 주님의 뜻을 알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주의 대언자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또한 율법 교육이 시행됨으로써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 교육을 받은 장로들에 의해서 판단하면 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행하면 우리는 표적이나 다른 방법으로 주님의 뜻을 구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우림과 둠밈은 신약의 교회 시대에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성경을 통해 계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우림과 둠밈에 해당하는 성령과 성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듣는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요16:13). 만약 저와 여러분이 교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비를 뽑는다면 그다지 성경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목사를 초빙하는데 제비 뽑기로 결정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를 옮기거나 어떤 문제를 결정할 때 우리는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으로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해야 합니다.

다시 30절입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의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주]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 위에 있게 할지니라. 또한 아론은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판결을 항상 자기 가슴 위에 둘지니라.](30). ‘우림과 둠밈’이 있어야 할 위치는 가슴입니다. 우리는 머리로 판단하는 것 같지만 실상 가슴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성이 아니라 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성도는 옳고 그름 그 이상의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많은 말씀은 법률적으로, 사회적으로, 교육적으로,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누가 나의 오른 뺨을 때리면 못 때리게 하든지, 맞서 싸우든지, 왜 때리느냐고 따지든지, 손해 배상을 청구하든지, 사과를 받아내든지 등이 합리적이고 법적으로도 옳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말고 “왼뺨을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이는 법과 상식을 무너뜨리는 말씀 같습니다. 이성적인 처신이 아닙니다. 이런 판단은 머리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내리는 판단입니다. 크리스천은 두 종류의 생활 원칙이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읽은 책 내용을 기억합니다. 중국의 워치만 니 형제가 자신의 책에 소개한 내용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원칙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잘 보여 줍니다.

나는 벼 농사를 하고 있는 두 형제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논은 산 중턱에 있었고 다른 사람의 논은 산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더울 때 낮에 논에 물을 대고 밤에는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 논의 사람은 그들이 잠자는 틈을 타서 그들의 논둑에 고랑을 파서 자기 논에 물을 다 빼 가버렸습니다. 양수기로 겨우 퍼 올려 논에 물을 대면 아래 논 주인이 교묘하게 물을 빼 가버리니 황당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참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래 논 주인은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자기가 했다고 시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원칙대로라면 따지거나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각서를 받거나 경찰에 고발을 하거나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옳고 그름, 이성적 판단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판단입니다. 세상과 다른 성도들의 삶의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참고 용서했을 때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은혜가 넘치고 승리가 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날마다 물을 채우고 남이 물을 훔쳐간 것을 허락하면서도 마음에 평강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사역자에게 와서 이 일에 대해서 상담을 했습니다. “나는 세상 법정에 고소하지도 않았고, 남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동네에서 그 사람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제 마음 속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 방면에 체험이 많았던 사역자는 “그렇게 해서는 부족합니다. 인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형제님은 가서 형제의 물을 훔친 사람의 논에 먼저 물을 채우고 그 다음에 형제의 논에 물을 채우십시오. 그리고 나서 속에 평강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형제는 그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아래 논에 먼저 물을 채워 준 다음 자신의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의 논에 물을 채우는 반나절 동안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차 올랐습니다. 아래 논의 사람이 물을 훔치든 훔치지 않든 자신의 마음 속이 아주 평안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틀이 지나지 않아서 아래 논의 주인이 와서 자신이 지금까지 물을 훔쳤다며 잘못을 고백하고, “당신이 믿는 기독교는 참 놀랍습니다. 나도 가서 복음을 들어 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옳고 그름의 원칙을 넘어서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것을 은밀히 훔쳐가는 사람을 그냥 두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아닙니다. 죄의 대가를 지불하게 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인내하고 참는 일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마음 속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선악으로 말한다고 해도 이들은 매우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타당하고 족하면 옳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만으로 부족하고 생명의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 안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습니다. 결코 세상 법, 세상의 이치, 옳고 그름이 잣대가 아닙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 충족된 삶을 사는 것이 바른 삶입니다. 우림과 둠밈이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머리가 아닌 가슴이어야 하며,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0절입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의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주]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 위에 있게 할지니라. 또한 아론은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판결을 항상 자기 가슴 위에 둘지니라.](30). 데이빗 베런(David Baron)의 저서 「고대의 성경과 현대의 유대인(The Ancient Scriptures and Modern Jew)」에는 우림과 둠밈에 관한 글을 담고 있는 부록이 있습니다. 이 글에 의하면 흉패 위에 있는 열 두 이름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스물 두 자 가운데 열여덟 자를 포함하였습니다. 나머지 네 자는 둠밈이라 부르는 부분품에 부착되었습니다. 히브리어 단어 둠밈은 [완전케 하는 자들], 또는 [온전케 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둠밈이라 부르는 추가적인 부분품을 지닌 흉패 위에서 모두 스물 두 자의 히브리어 알파벳을 볼 수 있습니다. 타자기 키위에 있는 스물 여섯 자의 영어 알파벳이 단어나 구절이나 문장이나 단락을 형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듯이 흉패와 둠밈 위에 있는 스물 두 자의 히브리어 알파벳은 단어들이나 문장들을 판독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글에 의하면 우림은 열 두 보석 아래 있는 흉패 안으로 삽입된 조명기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우림이라는 단어는 빛을 뜻합니다. 데이빗 베런의 책에 있는 글은 우림이 연소를 위한 기름을 담을 수 있었다는 것과 이 기름을 태우는 데 사용된 불이 제단으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글을 쓴 권위 있는 그 히브리 학자는 또한 흉패 위에 있는 각 보석 조각을 비추기 위하여 각 보석마다 하나씩, 열 두개의 조명기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 투명한 보석들은 빛을 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흉패에 더해질 때 가슴에 있는 보석들은 판결 흉패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없다면 가슴의 12개의 보석은 단지 아름다운 기념품이요 장식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을 때 모세를 통하여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방법인 직접적인 말씀하심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입은 흉패 위의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책무를 주고 네 존귀 중 얼마를 그에게 주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에 따라 [주] 앞에서 조언을 구할 것이며 그와 및 그와 함께한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에 따라 나가고 들어올 것이니라.] (민27:19~21). 하나님은 “우림의 판결에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림을 통해 판결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움직임에 관한 인도가 필요할 때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를 받는 대제사장에게 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조언을 주셨습니다.

성경적인 예를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는 아이 성에서 패배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아간의 죄로 인해 아이에서 패배 당하였습니다(수7장). 어떻게 아간의 죄가 발견되었습니까? 열 두 지파의 각 대표가 성막으로 와서 흉패를 착용하고 있던 대제사장 앞에 섰습니다. 갑자기 흉패 위의 열 두 조각 가운데 하나가 어두워졌고, 그것은 유다 지파의 보석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유다가 뽑혔습니다. 여호수아 7장 16절부터 18절은,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의 가족을 나아오게 하여 세라 족속의 가족을 뽑고 세라 족속의 가족을 각각 남자대로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집안을 각각 남자대로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에 속한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뽑혔더라.] (수7:16~18)고 말합니다. 흉패 위의 어떤 보석이 어두워짐으로 인해서 결국 가족과 그 사람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흉패는 아간의 이름을 찍어 내는 하늘에 속한 영적 타자기와 같은 기능을 하였습니다.

후에 여호수아는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지파들에게 땅을 분배하였습니다(수 18:6-10). 우림과 둠밈을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웠습니다(삿1:1-12, 20:18, 27, 민 27:21). 더 나아가 사울 왕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그에게 대답하려 하시지 않았습니다(삼상 28:6). 제사장들이 사울에게 죽임을 당하였을 때 그 아들들 중 한 사람이 다윗에게로 도망했으며 그때 다윗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주님을 따랐습니다. 다윗은 에봇을 가져와 판결의 흉패를 향해 계속해서 주님께 물었고, 주님은 대답을 주셨습니다. 후에 느헤미야는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의 출현을 기다렸습니다. [디르사다가 그들에게 말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스2:63).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통해 이들은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없었고, 사용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은 오늘날로 말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12개의 보석으로 된 흉패는 우림과 둠밈으로 인해 판결 흉패로 불렸는데, 우림과 둠밈은 제사장들인 레위인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그들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뿐만 아니라 그분의 판결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레위에 관하여는 그가 이르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거룩한 자에게 있으리로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르기를, 내가 그를 보지 못하였다, 하였으며 자기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녀들을 알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주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언약을 지켰음이니이다. 그들이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가르치고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향을 드리고 온전히 번제 헌물을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신33:8~10). 우림과 둠밈을 지닌 자들은 주의 법도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우림과 둠밈을 지닌 자는 주 앞에 향을 드릴 수 있습니다. 향은 기도와 경배를 일컫습니다. 우림과 둠밈을 지닌 자는 온전히 번제 헌물을 주의 제단 위에 드립니다. 우림과 둠밈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림과 둠밈은 판결의 흉패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12가지 보석 즉 열두 지파들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예표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롬8:14).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있는 기록된 말씀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성령은 성경의 글자들을 비추어서 우리로 하여금 읽게 해 줍니다. 성경의 해석자는 성령이십니다. 사울이 우림으로 조명을 받고자 했을 때 우림에는 아무런 빛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 안에 어떤 조명도 없다면 우리는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우리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서신들입니다. 우리 마음 판에는 주님이 글자를 새겨 두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을 추천하기 시작하겠느냐? 혹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너희에게 추천하는 서신을 보내거나 너희로부터 추천하는 편지를 받을 필요가 있겠느냐? 너희는 우리의 서신이니 우리의 마음에 쓰여 있고 모든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이니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후3:1~3).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들인데 저자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보석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야 우림의 조명이 있을 때 글자가 드러나듯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져 있을 때만이 우리가 그분의 살아 있는 편지가 됩니다. 보석들에 글자들이 새겨져있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흉패를 통하여 말씀하실 수 없었듯이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이 그리스도로 새겨져 있지 않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구속된 백성(자신의 편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니님은 사실 우리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편지로서 우리 존재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내용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안에 새겨진 문자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실 길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 마음 판에 기록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긍휼과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들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잠3:3). [그것들을 네 손가락에 묶으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잠7:3). 하나님은 우리 마음 판에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풍성히 기록해 두면 둘수록 성령의 조명을 받을 때 환하게 말씀이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생각 속에 자신이 법을 기록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31:33). 주님은 돌 판에 십계명을 새기셨듯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의 법을 기록하심으로,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날들 이후에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마음 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하신 뒤에](히10:16). 오늘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가? 그 대답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로 새겨진 사람이 극히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 구절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골로새서1:27, 갈라디아서 4:19절입니다. 이 구절들은 병행해서 보아야만 합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전파의 대상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간증이요, 전도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드러내야 합니다. 전도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면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있는 우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골1:27).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산고(産苦)를 겪노라.](갈4:19). 이 말씀에 따르면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어린 자녀들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되시기까지 산고를 겪는다고 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실제 문제는 자신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가 너무나 희미하여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형성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 신성, 인격, 능력, 지혜 등이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만 보여지지 않을 정도라면 문제입니다. 더욱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명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그리스도로 새겨지지도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흉패에 놓인 보석들이 불투명하다면, 우림의 조명이 그것들을 비추지만 그것들은 그러한 불투명한 보석들을 통하여 빛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투명하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하여 빛날 수 있는 길을 얻지 못하십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하고, 투명해야 하며, 우리 안으로 새겨진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빛이 우리를 통해 빛나 다른 사람들이 편지, 즉 우리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내용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경을 읽지만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변화되지 않고 투명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로 새겨짐이 없이, 우리 안에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불투명한 보석들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주목해서 보는 사람들이라 해도 우리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편지를 전혀 보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30절을 보십시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의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주]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 위에 있게 할지니라. 또한 아론은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판결을 항상 자기 가슴 위에 둘지니라.](30). 판결의 흉패는 주님 앞에 기념이었을 뿐만 아니라 판결의 판이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흉패 안으로 더해진 후 그것은 판결 흉패가 되었습니다. 판결은 인도하심이나 안내의 의미보다 말 그대로 판결을 말합니다. 재판, 심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최종 판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규들은 항상 그분의 판결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우리에 대한 많은 것들이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날마다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11:31). 우리의 육신, 우리의 잘못된 행위, 우리의 본성에 속한 일들은 모두 말씀으로 심판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말씀 앞에서 냉철하게 심판함으로써 우림과 둠밈으로 예표되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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