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돈
요절: 출애굽기 30:12 오늘은 속죄 돈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속죄 헌물로 양, 염소, 소 등은 자주 나오지만 속죄 헌물로 돈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입니다. 돈으로 혼을 속죄한다는 사실은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과는 매우 상이(相異)하게 느껴집니다. 돈과 혼의 속죄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고 와서 포도즙과 젖을 사라.](사55:1). 주님은 돈도 내지 말고, 값없이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또 내게 이르시되, 다 이루어졌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의 샘에서 값없이 주리라.](계21:6).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하시더라.](계22:17). 주님은 언제나 ‘값없이’(freely)라고 말씀하시지 적은 돈이라도 가져 오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대속(代贖)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벧전1:18). 여기서도 주님은 돈은 구원과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돈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거나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돈과 함께 망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돈과 함께 네가 망할지어다.](행8:20).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요, 우리가 지불해야 할 값이라고는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혼의 구속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지 우리의 땀이나 수고, 돈 등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음은 분명한 성경적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대속(代贖)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롬3:24). 이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성경은 대속은 값없이 주어진 것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은사 역시 값없이 주어집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주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은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 우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이기도 하거니와 사도 바울이 보여 준 본이기도 합니다. [그런즉 나의 보상이 무엇이냐? 진실로 내가 복음을 선포할 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값없이 선포하고 복음 안에서 내가 가진 권리를 남용하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9:18). 이것이 성경의 일관적인 증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성막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속죄 돈(속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혼의 속죄를 위한 헌물’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비록 은 반세겔이란 매우 적은 돈이긴 하지만 ‘돈과 속죄’는 도무지 짝이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당황해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을 얼버무리고 말거나 그냥 통과시켜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대로 말씀을 읽고 믿고자 성경을 공부합니다. 주의 영께서 지혜와 명철을 주셔서 말씀의 조명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11-12절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그들을 계수(計數)하여 총수를 조사할 때에 각 사람은 자기 혼(魂)을 위하여 [주]께 대속물(代贖物)을 드릴지니 이것은 네가 그들을 계수할 때에 그들 가운데 재앙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11-12). 혼을 위한 속죄 돈은 인구 계수와 연관이 있습니다. 인구를 계수할 때, 지금으로 말하면 인구 센서스를 할 때 각 사람은 자기 혼을 위하여 주께 대속물을 드려야 합니다. 인구 조사와 속죄을 위한 돈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수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주]의 천사가 또 그녀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창16:10).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시겠다는 말씀은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의 인구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현재 전 세계의 유대인은 약 1300만에 불과합니다. 이는 서울 시의 인구보다 적은 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손의 수에 대해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창22:17).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네게 선을 베풀어 네 씨로 하여금 바다의 모래같이 곧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모래같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32:12). 이는 무슨 말입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된 사람들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유대인들은 바다의 모래나 하늘의 별에 비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씨란 정의를 보십시오. [그런즉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인 줄 알지어다.](갈3:7).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갈3:29). 이로써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육신적 유대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인구 조사를 할 때 각 사람은 자기 혼을 위하여 주께 대속물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각 사람이란 여자와 어린애는 빠집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혼들을 말합니다. 인구 조사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세 오경 중의 네 번째 책은 책 제목이 ‘민수기’(Numbers)입니다. 수를 조사한 책이란 말입니다. 민수기에서는 2번의 인구 조사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 집대로 조사하되 이스라엘 안에서 스무 살이 넘어 능히 싸움에 나갈 수 있는 모든 자들의 수를 조사하라, 하시니](민26:2).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란 생명의 담보를 맡겨 놓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소유권’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자기가 가진 자녀의 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농부가 자신이 가진 소나 양의 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수를 센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점호를 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출결 상황을 체크합니다. 어느 회사이든 수를 세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오면 누가 왔는지, 이번 주에는 누가 빠졌는지를 보게 됩니다. 수를 세는 일은 ‘소속’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세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수를 세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였나 보라. 그분께서 수효대로 그들의 무리를 이끌어 내시고 자신의 크신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름대로 부르셨으니 이는 그분의 권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기 때문이니라.](사40:26). 하나님은 자신이 친히 창조하신 것들이 몇 개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이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다 수를 세시고 각각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하늘의 별 무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것들을 다 철저히 세어가며, 이름을 불러가며 관리하십니다. [그분께서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그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시147:4). 주님은 수(數)의 하나님이십니다. 수학자들이 수(數)를 아무리 능란하게 다룬다 해도 주님 앞에서는 감히 수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모두 세시며, 머리카락의 갯수까지 다 세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수를 세시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독하다보면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수를 세어 칼에 넘길 것인즉 너희가 다 몸을 구부리고 살육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부를 때에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할 때에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 눈앞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사65:12).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수들의 손에 넘길 때도 정확히 수를 세셔서 그 수만큼 죽임을 당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무차별 살육과 같은 전쟁터에서 주님은 살릴 사람을 살리시고, 죽일 사람은 죽이시는데 그 수를 정확히 세어서 넘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날수를 세시며, 우리의 심중의 모든 것을 달아 보시고,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필요가 얼마인지를 세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대는 모든 것이 숫자화되고 있습니다. 전화번호, 우편번호, Social Card number 등 숫자로 표시되지 않는 것이 없는 시대입니다. 무엇이든지 수치화하고, 계량화하는 것을 표준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다니엘서를 보십시오. [이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께서 이미 왕의 왕국을 세시사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단5:26). 주님은 왕국을 세셨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세셨다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소유요, 권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국은 모두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권한 하에 있습니다. 마치 기상청에서 온도를 재고, 풍향과 풍속을 재고, 강우량을 재고, 지진의 강도를 재어서 예보를 하고, 주의보를 내리듯이 주님은 무엇이든 재어 보시고 넘치든 모자라든 거기에 알맞게 조처를 취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요, 종이며, 상속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수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화재가 나거나 도둑을 맞거나 전시 체제를 갖추어도 손실이 얼마인지, 몇 명이 죽었고, 몇 명을 더 동원할 수 있는지 정확히 셉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정확히 세십니다. 주님은 전쟁의 사람이시며, 전투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주는 전사(戰士)시요, 주가 그분의 이름이시로다.](출15:3),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하신 주시요, 전투에 능하신 주시로다](시24:8). 전쟁의 주님께서 하나님의 군대, 특히 20세 이상의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을 세시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세시지만 특히 자신의 군대를 정확히 세십니다. 이는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전쟁을 치르는 자는 아무도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기를 군사로 택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 디도를 동료 군사라고 했습니다. 아깁보를 동료 군사라고 불렀습니다. 전쟁에서 함께 싸워온 전우(戰友)들이란 말입니다. 군대에서 점호 보고를 할 때면 언제나 총원 **명, 현재 **명, 사고 **명, 사고 이유-외출 몇 명, 휴가 몇 명하며 정확하게 인원과 사유를 보고하는데 지휘자들은 무엇보다 보고 받은 내용을 늘 파악하고 있으며, 약간의 변동 상황도 놓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파악하고 계십니다. 다시 12절을 보십시오.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그들을 계수(計數)하여 총수를 조사할 때에 각 사람은 자기 혼(魂)을 위하여 [주]께 대속물(代贖物)을 드릴지니 이것은 네가 그들을 계수할 때에 그들 가운데 재앙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출30:12). 주님은 인구의 총수를 조사할 때에 ‘자기 혼을 위하여 주께 대속물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대속물을 드리지 않고 인구 조사를 하면 백성들 가운데 재앙이 일어납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임의로 인구 조사를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수를 의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 없이 인구 조사를 명한 적이 있습니다. [또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불같이/ 타오르매 그분께서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움직이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 하시니라. 이는 왕이 자기와 함께한 군대 대장 요압에게 이르되,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백성을 계수(計數)하여 나로 하여금 백성의 수를 알게 하라, 하였음이라. 요압이 왕께 이르되, 이 백성이 얼마나 많든지 이제 [주] 왕의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백 배나 더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하오나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말이 요압과 군대의 대장들의 말을 이겼으므로 요압과 군대의 대장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세려고 왕의 눈앞에서 물러나니라.] (삼하24:1~4). 다윗의 부하 장수 요압은 매우 육신적인 사람이요,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다윗이 명한 인구 조사는 잘못된 일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다윗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한 후에 자신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다윗이 백성의 수를 센 뒤에 그의 마음이 찔렸으므로 다윗이 [주]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하여 크게 범죄하였나이다. 오 [주]여, 이제 간청하옵나니 주의 종의 불법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이는 내가 매우 어리석게 행하였음이니이다, 하니라.] (삼하24:10). 그가 인구 조사를 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 대신 자신의 치적에 대한 영광과 과시욕, 자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에는 역병이 일어 7만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무작정 인구 조사만 하고, 자기 혼을 위한 대속물을 주님께 바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수를 의지합니다. 수가 많으면 환호하고 힘이 생깁니다. 극장 영화를 개봉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표가 몇 장 팔렸는가? 입니다. 몇 사람이 왔는가? 책이 출간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수입니다. 수에 울고 웃습니다. 무슨 공연을 하든, 잔치를 하든 항상 수를 세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T.V를 보아도 몇 사람이 그 프로그램을 보았는가? 란 시청률 조사를 합니다. 다수결의 시대이다 보니 수가 많으면 무조건 이깁니다. 여론도 수의 싸움이고, 투표도 수의 싸움입니다. 교회도 머리 수를 따지고, 헌금 수를 따집니다. 어디에나 수를 세어 보고, 수에 따라 성공과 승패를 판단하고 결정짓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한 가지 진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 한 사람이 다수이다.”(One man with God is a majority- BobJones Sr.). 이스라엘은 수를 앞세운 전쟁에서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수를 줄이고 줄인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사사기 7:2 보십시오. [[주]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와 함께한 백성이 너무 많으므로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족속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대적하고 자기를 치켜세우며 말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염려함이니라.] (삿7:2). 하나님은 수가 많으면 힘이 나고, 마음이 안정되는 사람들을 쓰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모두 돌려 보내고 삼백명으로 미디안과 싸우게 하셨습니다. 아사 왕의 예를 보십시오. 이디오피아의 세라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어떻게 이겼습니까? [아사가 [주] 자기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많은 사람들로 돕든지 능력이 없는 자들로 돕든지 주께는 문제가 되지 아니하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는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으로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음이니이다. 오 [주]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대하14:11). 주님은 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조차 우리 나라에 기독교 인구가 몇이니, 우리 교인 수가 몇 명이니 하면서 수를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200만의 정예 육군이 있고, 20만의 특수 부대가 있고, 몇 척의 항공 모함이 있고, 몇 개의 핵 무기가 있고...이런 숫자 놀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3차 중동 전쟁이 났을 때 이스라엘은 사면초가에 몰렸습니다. 중동의 모든 군대가 연합군으로 참전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의 모세 다얀 장군은 우리에게는 필승의 신무기가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기자들은 이스라엘이 이번 전쟁에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수소 폭탄을 제조해 둔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모세 다얀 장군이 말한 승리 비결은 시편 121편이었습니다. 그는 6일 만에 전쟁을 끝내 버렸는데, 전쟁사에 남을 기록적인 일이었습니다.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가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늘 숫자를 높이고, 부풀리려는 시험에 빠집니다. 성적이든, 수입이든, 그 무엇이든 숫자를 부풀리려는 수를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을 위한 대속물]이란 이들이 군인들이기에 전쟁에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완벽한 설명은 민수기 31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얻은 금 패물 곧 사슬과 팔찌와 반지와 귀고리와 납작한 보석들을 [주]께 드리는 봉헌물로 우리의 혼을 위하여 [주]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 하니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그들에게서 금으로 만든 패물을 다 취한즉 천인대장들과 백인대장들이 [주]께 드린 헌물의 금이 모두 만 육천칠백오십 세겔이니 (이는 군사들이 각각 자기를 위하여 노략하였음이더라.)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천인대장들과 백인대장들에게서 금을 취하여 회중의 성막에 드려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기념으로 삼았더라.] (민31:50~54). 군인들이 전쟁에서 부정한 가운데,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에 대한 속죄 헌물이 ‘반 세겔’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기도로(출17:12)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속죄 헌물을 드리게 한 것은 주로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그들이 전쟁에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을 위해 속죄 헌물을 드림으로 전쟁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전쟁에 참여한 군사는 죽는 것이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순교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미 나의 혼을 위해 속죄 헌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이 주님의 전쟁을 수행할만한 군사들이 되지 못할 가능성 때문입니다. 주님은 범죄한 백성들을 자기 군대로 사용해서 승리를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들은 속죄 헌물을 통해 주님 앞에 속죄함으로써, 성결의 능력을 가지고 자신들이 주의 군사로 부르심에 합당한 전사(戰士)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죄의 회개와 말씀을 믿는 믿음,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고 무작정 전쟁을 벌이다 사정없이 패배 당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자기 혼을 위한 속죄 헌물을 드림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숫자의 힘을 의지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머리 수를 믿고 싸우는 것은 육신의 전쟁이지 영적 전쟁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영적 의무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구원받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몸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으니 너희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출애굽한 백성들은 이미 구속을 받았는데 다시 구속을 위한 몸값을 내게 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인간의 의무입니다. 복음은 전적인 은혜요, 선물이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의지적 선택, 반응, 결단, 믿음 등과 같은 인간의 의무가 있습니다. 인구 조사에 포함된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서 성소에 반 세겔을 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상태에서 반 세겔을 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로서 복음에 합당한 행위를 해야 합니다. 반 세겔을 내는 것은 주님 앞에서 우리가 우리 혼을 위해 드려야 할 영적 의무입니다. 기도의 의무, 말씀 읽기의 의무 등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이런 것들의 소홀로 말미암아 전쟁에서 패하는 것은 주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반 세겔은 큰 돈이 아닙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누구나 낼 수 있는 돈이며, 내어야 하는 돈인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수행해야 할 기초적인 영적 의무와 특권을 말합니다. 13-14절입니다. [계수된 자들 가운데 속하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에 따라 반 세겔을 바칠지니 (일 세겔은 이십 게라라.) 이 반 세겔은 [주]의 헌물이 될지니 계수된 자들 가운데 속하는 자 곧 스무 살이 넘는 자는 [주]께 헌물을 드릴지니라.](13-14). 주님은 계수된 사람들이 반 세겔을 성소에 바치게 했습니다. 반 세겔은 [주]의 헌물이 됩니다. 스무 살이 넘는 자란 주님의 군대로 징병될 대상자들입니다. 여기서 ‘성소의 세겔에 따라’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기준은 언제나 성소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저울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성소의 세겔에 따라 바쳐야 합니다. 자기 멋대로 바쳐서는 안됩니다. 기준에 맞게 정확하게 바쳐야 합니다. 반 세겔이란 돈은 현재 달러화로 얼마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60센트 정도로 추산합니다. 이는 인간의 몸 속에 있는 32가지 화학 물질을 합한 금액 정도입니다. 여러분의 몸 안에 있는 원소로 칼슘(Ca)· 인(P)· 칼륨(K)· 나트륨(Na)· 염소(Cl)· 마그네슘(Mg)· 철(Fe)· 요오드(I)· 구리(Cu)· 아연(Zn)· 코발트(Co)· 망간(Mn) 등의 원소들을 모두 합쳐서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60 센트 정도가 나옵니다. 아무리 부자이든 아무리 가난한 자이든 몸뚱아리는 1불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너희 혼의 속죄를 위하여 [주]께 헌물을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보다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니라.](15). 주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진실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행10:34)란 말씀을 떠 올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부자의 혼이나 가난한 자의 혼이나 그 가치는 동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똑 같습니다. 보험 회사는 사람들의 직업에 따라서, 가문이나 그 사람의 소속에 따라서 보험료를 달리 책정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가치를 동일하게 취급하시며, 동일하게 받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반 세겔을 낼 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무가치함’을 배우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동등함’을 배웁니다. 사람들은 모두 달라 보여도 주님은 모두 동등하게 대우하시며, 그들을 구속하시는 일에서 차이가 없으십니다. 반 세겔에 불과한 육체지만 주님은 그 혼의 가치를 결코 반 세겔로 매기지는 않으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혼과 바꾸겠느냐?](마16:26). 사람의 혼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보배를 담고 있다면 그 값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성도를 귀하게 여기시며, 존귀한 존재로 대하십니다. 16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죄 돈을 취하여 그 돈을 회중의 성막에서 섬기는 일에 쓰도록 지정할지니 이것이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념이 되어 너희 혼을 속죄하리라.](16). 주님은 이들이 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회중의 성막에 필요한 경비가 어떻게 조달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집이요, 전으로 불리는 성전의 경비는 구원받은 혼들이 내는 적은 돈이 모여서 운영됩니다. 속죄받은 혼들이 내는 헌금을 통해 주의 집에 필요들이 충당됩니다. 이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한 원리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목사들이 타락한 성도들을 데리고 타락한 교회 놀이를 하다 보니 ‘헌금 문제’는 폭약의 뇌관 문제만큼이나 심각합니다. 돈 문제로 빚어지는 갈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들의 관심은 말씀이나 복음이나 성도의 교제, 찬양, 기도, 전도와 같은 영적인 일들이 아니라 교회 행정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바친 이스라엘의 속죄 돈을 성막을 섬기는 일에 쓸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받으시고, 그것을 성막을 섬기는 레위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신약은 어떻습니까? [나를 시험하는 자들에 대한 대답이 이것이니 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에게 다른 사도들이나 {주}의 형제들이나 게바와 같이 자매 곧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은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어느 때고 누가 자기 비용을 들여 전쟁에 나가겠느냐? 누가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양떼를 먹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사람/의 관례/대로 이것들을 말하는 것이냐? 율법도 같은 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고전9:3~8). 구약과 동일합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혼들이 내는 물질을 받으셔서 그것을 사역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교회는 마땅히 ‘섬기는 일에 쓰도록 지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용도를 분명히 밝혀 두셨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쓰도록 지정하지 않고 고아원, 양로원, 방송국이 주최하는 불우이웃 돕기 등 다른 일에 다 쓴 후에 목회자 월급을 떼 놓는 것은 우선 순위가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속죄 돈으로 낸 헌물을 ‘회중의 성막에 섬기는 일에 쓰도록 지정’할 때 이것은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념’이 됩니다. 주님 앞에서 기념이 된다는 말은 얼마나 은혜롭고 복된 일입니까? 유명 인사와 사진을 한 장 찍고, 싸인 한 장 받는 종이를 기념이라고 액자에 넣어 보관하는 세대입니다. 어떤 유명 인사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동상을 세우거나 기념비를 세우고, 전기를 찍어내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합니다.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건물 이름이나 도시 이름, 도로 이름에 그 사람 이름을 넣어서 기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기념비적인 인물이 되려면 얼마나 기부를 해야합니까? 거금을 기부해야 할 것입니다. 건물을 지어 줄 정도의 기부는 해야 건물 이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수된 남자들이 자기 혼을 속죄할 반 세겔을 내고 ‘주 앞에서 기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제대로 하고, 그 헌금을 섬기는 일에 제대로 사용할 때 ‘주 앞에서 기념’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수고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보상을 약속하셨으며 그 일은 곧 자신에게 행한 것과 동일하게 취급하십니다. 어린 소자(小子)에게 물 한 그릇을 떠 주어도 주님의 이름으로 했을 때 주님은 갚으시며, 그 일을 행한 사람은 기념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섬기는 레위인들에게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주님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교회에 하는 모든 일들은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요, 주님을 심히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달콤한 향기(빌4:18)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속죄 돈에서 말씀을 함께 상고해 보았습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성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붓는 기름 (0) | 2005.06.30 |
---|---|
물두멍 (0) | 2005.06.29 |
향기로운 향을 태우되 (0) | 2005.06.28 |
제사장 직분으로 나를 섬기게 하라 (0) | 2005.06.28 |
제사장을 위한 희생제물(II) (0) | 2005.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