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구약개론- 잠언(5)

말씀: 잠언 13:1-25
요절: 잠언 13:25


잠언 13장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에 관한 잠언입니다. 1절, [지혜로운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나...](1a).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는 작금의 세대에 이 말씀이야말로 가장 귀한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지혜로운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말에 그대로 순종한 지혜로운 아들이었습니다. 요셉 역시 아버지 야곱의 말에 순종하여 멀리 형제들이 양치는 곳으로 심부름을 떠났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말에 따라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말대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엘리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길과는 정반대로 걸었습니다(삼상1-3). 사무엘의 아들들 역시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한 아들들이었습니다(삼상2-4). 삼손 역시 아버지를 우습게 알았던 아들이었습니다. 에서 역시 이삭이나 리브가의 뜻과는 달리 이방 여인을 아내로 두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비웃는 자들이요, 책망을 듣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1b).

2절을 보십시오. [사람은 자기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선을 먹으려니와...]. 구원받지 못한 혼들의 입은 열린 돌무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입은 그 배에서 넘쳐나는 생수의 물을 넘치게 하는 출구가 됩니다. 성도들의 배는 생명의 샘물이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은 그것을 건져내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요7:38). 잠언12:18에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3절 역시 혀에 관한 잠언입니다. 잠언 12:13,18:21을 참조하십시오. [자기 입을 지키는 자와 자기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 대한 말씀인데, 입을 크게 벌렸다가 망한 사람은 시므이, 헤롯(행12:22-23)입니다. 계시록의 적그리스도 역시 입을 크게 벌려 모독하는 말을 합니다(계13:3-8). [그가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모독하되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계13:6).

성도들이 입을 넓게 벌리는 경우는 기도할 때입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주님 앞에서 입을 크게 열면 그 입에서 말씀이 쏟아져 나옵니다. 주님 앞에서 입을 크게 열면 성령으로 충만해 집니다. 주님 앞에서 입을 크게 열면 말씀으로 채워지며, 주님이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좋은 것으로 네 입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5). 주님은 에스겔에게 입을 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오직 너는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반역하는 집같이 반역하지 말며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니라.](겔2:8). 주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의 입을 여셔서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입을 열어 책을 먹게 하셨습니다.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이르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이르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는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계10:9). 우리 안에 생수의 성령이 가득차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찰 때 우리 입은 그것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입을 열어야 하는가?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입을 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8:35, [이에 빌립이 입을 열어 바로 그 성경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에게 예수님을 선포하니라.](행8:35). 목소리를 아끼지 말고, 외쳐야 합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위해 입을 열어야 합니다. 잠언 31:8-9, [/너는/ 멸망 받기로 작정된 모든 자들의 소송에서 말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네 입을 열지니라. 네 입을 열어 의롭게 재판하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사정을 변호할지니라.](잠1:8-9).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입을 닫아야 합니다.

4절은 게으른 자와 부자의 대조입니다. 잠언은 게으른 자에 대한 교훈으로 넘쳐납니다. 직접적으로 언급한 구절만 16구절이며,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까지 하면 매 장마다 다 들어 있습니다. 6:6,9, 10:26, 12:24,27, 13:4, 15:19, 19:2421:25, 22:13, 24:30,26:13,15,16입니다. 영적으로 게으른 자들 역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꿈꾸고, 거대한 건물, 학교, 출판업, 기독교 방송국 등을 운영하고 싶어하면서 구령하는 일과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삶입니다. [게으른 자의 혼(魂)은 원하여도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혼은 풍부하게 되느니라.](4). 부지런한 자의 참조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7:15, 10:4, 11:27, 12:24,27, 13:4, 21:5, 22:29, 23:1, 27:23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주님을 부지런히 찾고, 자기 앞길을 부지런히 찾고,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핍니다(7:15, 27:23을 읽을 것).

5절의 사악한 자는 적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든 인물들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사악한 자로 불립니다. 역겹다고 번역된 loathsome은 흉물스런 동물을 보았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옛 뱀, 용, 짐승으로 나타나는 마귀의 모습은 정말 역겨운 모습입니다.

6절은 신약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의를 전가받아 삽니다. 주님의 의로 옷입지 않는 어떤 성도라도 죄를 피할 수없고, 죄의 저주와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7절은 오늘날 부자들에게도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백만장자, 억만장자라는 사람들이 가난한 구두쇠처럼 살아 갑니다. 반대로 외제 고급 승용차에 명품(名品)으로만 치장하는 사람 가운데 파산 직전에 몰려 있거나 알거지들이 수두룩합니다. 이 구절을 영적으로 적용하자면, 주님을 잘 섬긴다는 소문이 요란하고, 직분을 몇 개씩 맡고 있으며, 혼자 영적인체 다 하는 사람들이 저 하늘에는 아무 것도 쌓아 놓은 보화가 없는 사람들이 있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는 엄청난 보화를 쌓아 놓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2:42의 두렙돈을 연보함에 넣은 과부는 많은 돈을 넣은 바리새인보다 분명히 더 부자였습니다. 계시록 2:9의 서머나 교회 역시 이 구절의 완벽한 실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난했지만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라오디케아 교회는 부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가난한 교회였습니다(계3:17).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8절은 신약 교회 교리와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사람의 구속의 몸값은 주님의 보혈입니다(벧전1:19, 사44:22, 시49:8). 본문이 말하는 것은 육신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돈으로 군대를 빠지고, 위험한 일들을 모면합니다. 부자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돈으로 다 해결합니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명을 건졌습니다. 부(富)를 부정과 불법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아예 그런 유혹 자체를 받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는 꾸짖음을 듣지 아니하느니라.](8b).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가난한 자는 꾸중을 들을 일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4:1-4에 나오는 부자들은 엄중한 경고를 받습니다. 가난한 자는 그런 경고를 받지 않습니다.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의미는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가난한 자는 성경의 책망을 듣지 않음으로서 헐벗고 가난한 자가 된 자들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은혜로 충만하고, 말씀으로 채워진 삶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삶은 분명히 주님의 책망과 조언과 권고와 훈계를 무시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영이 가난한 자는 채움을 받기 때문에 복이 있습니다. 채움을 입지 못하는 가난은 재앙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 가난해 지셨기 때문입니다(고후8:9, 9:8참조).

9절입니다. 의로운 자의 빛은 세상에 비췹니다(마5:15). 집안 구석구석에 비취며, 감춰지지 않습니다(막4:21). 사악한 자의 등불은 열은 있지만 빛이 없습니다(욥41:19). 그러다가 언젠가는 꺼질 것입니다(잠20:20). [참으로 사악한 자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을 내지 아니할 것이요,](욥18:5)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등불은 사람의 영을 말합니다.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이니 뱃속의 모든 부분을 살피느니라.](잠20:27). 성도들은 자신의 영을 등불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등불로 삼기 때문에 절대 꺼지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그분의 등불이 내 머리를 비추었으며 내가 그분의 빛을 힘입어 어둠 사이를 걸어다녔느니라.](욥29: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는 주님이 주신 성령이 있습니다. 우리 손에는 주님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 주셔서 이 빛을 따라 걷게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10절은 교만한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주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 중에 으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누구나 다 교만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교만은 마귀를 타락하게 한 죄였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가증스러워 하는 죄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교만할 때 주님은 그를 대적하십니다(벧전5:5, 약4:6). 교만은 잠언의 중요 주제 중 한 가지입니다.

· 주님은 싫어하시고,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목록에서 첫 번째에 올라 있는 것이 교만입니다. [곧 교만한 눈빛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손과](잠6:17). 교만은 죄입니다. [거만한 눈빛과 교만한 마음과 사악한 자의 쟁기질은 죄니라.](잠21:4).

·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 중에 첫 번째 위치에 올라 있는 것 역시 교만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곧 악을 미워하는 것이니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길과 비뚤어진 입을 미워하느니라.](잠8:13).

· 교만의 동반자는 수치입니다. [교만이 오면 수치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교만은 멸망의 앞잡이입니다. 성공을 꿈꾸는 분들, 인생 역전을 노리는 분들이 필히 먼저 해야 할 일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것입니다. [멸망에 앞서 교만이 있으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잠16:18),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체면과 예의를 중시하시는 분들 역시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멸망에 앞서 사람의 교만한 마음이 있고 명예에 앞서 겸손이 있느니라.](잠18:12).

· 교만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교만으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나 충고를 잘 받는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3:10). 다툼의 소리가 나는 곳에는 항상 교만한 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거니와 [주]를 신뢰하는 자는 기름지게 되리라.](잠21:4).

· 교만은 어리석은 자의 입에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대적으로, 원수로 돌리는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입에는 교만의 막대기가 있으나 지혜로운 자들의 입술은 그들을 보존하느니라.](잠14:3).

· 교만한 자의 집은 주께서 허무십니다. [[주]께서 교만한 자의 집은 허무시되 과부의 땅의 경계는 세우시느니라.](잠15:25). 가업을 일으키든지, 가문을 일으키고 싶다면 가장 먼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 교만한 자는 주께 가증한 자입니다. 아무리 힘을 합쳐도 주님의 벌을 면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는 다 [주]께 가증한 자니 그가 손에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16:5). 원수 마귀는 교만한 자들의 왕입니다. [그는 모든 높은 것을 바라보는 자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이니라.](욥41:34).

· 교만은 사람을 낮춥니다. 겸손은 사람을 높입니다. [사람의 교만은 그를 낮추려니와 명예는 영이 겸손한 자를 들어올리리라.](잠29:23).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11절은 재물에 관한 귀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사에서 재물은 너무나 소중하고,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져서 오늘날 성도들은 재물의 신 맘몬을 주님보다 더 귀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바른 신앙관이 없이 영적 성장이나 열매맺는 성도의 삶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헛되이 얻은 재물이란 불로소득이나 의가 없는 재물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재물을 얻어야 하는가? 자기 손으로 땀을 흘려 수고해야 합니다. [헛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들 것이나 수고하여 모으는 자는 /재물을/ 늘리리라.](11). 주님은 노동의 대가로 얻어지는 재물에 복을 주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재물은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첫째, 겸손히 행하고 주를 두려워함으로 얻어야 합니다. [겸손히 행하고 [주]를 두려워하면 재물과 명예와 생명이 오느니라.](잠22:4). 둘째, 불의한 방법이 아닌 합법적인 방법으로 얻어야 합니다. [적게 가지고도 의가 있는 것이 많은 소득을 가지고도 의가 없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6:8). 의가 없는 재물에는 속임수가 있으며, 믿음을 파선시킵니다. 의가 없는 재물은 근심과 염려, 탐욕으로 인해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어 자라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사악한 보물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됩니다. 잠언 10:2에 말하기를, [사악한 보물은 아무런 유익도 끼치지 못하나 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10:2). 거짓말하는 혀로 돈을 벌어서도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사기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세일즈맨들은 사실보다 더 과장된 광고를 하거나 부풀린 말을 함으로써 수입을 올립니다. 장사꾼들은 대부분 이런 유혹에서 잘 이겨내지 못합니다. 오늘날 광고는 거의 100%가 거짓말하는 혀로 보물을 얻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합니다. [거짓말하는 혀로 보물을 얻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자들이 이리저리 내던지는 헛된 것이니라.](잠21:6). 사채 놀이나 기타 불의한 이익을 통해 부를 얻는 것 역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 좋은 일 시키고 말 것입니다. [이자 놀이와 불의한 이익으로 자기 재물을 늘리는 자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길 자를 위하여 그것을 모으는 것이니라.](잠28:8). 재물을 얻기 위해 가난한 자를 학대하거나 부자에게 뇌물을 쓰는 일 역시 패가망신의 지름길입니다. [자기 재물을 늘리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반드시 궁핍하게 되리라.](잠22:16). 신약 성경은 이 지상의 재화보다 저 하늘의 보화를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드러나게 될 금, 은, 보화 등은 영원한 것들이며, 아름다운 재물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부자가 될 것인가?”를 가르치기 보다 “어떻게 만족스럽게 사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성도들은 적게 가지고도 만족하며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대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애를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급히 부자가 되려 하는 자는 악한 눈을 가졌나니 그는 궁핍이 자기 위에 임할 줄을 깊이 생각하지도 못하느니라.](잠28:22). 복권을 사는 것, 카지노를 가는 것, 투기적인 주식 투자 등은 급히 부자가 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적게 일하고, 편하고, 쉽고, 빠르게 부자가 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 지혜이며, 사악한 지혜입니다. 부자가 되려한다면 신실하게 일해서, 신실하게 벌면 됩니다. [신실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무죄하지 아니하리라.](잠28:20).

12절은 소망을 생명 나무라고 합니다. 창세기와 계시록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잠언에만 생명 나무가 등장합니다. 잠언11:30은 의로운 자의 열매를 생명 나무라고 합니다. 잠언 3:18에는 “지혜는 그것을 붙잡는 자들에게 생명 나무니라”고 말합니다. 15:40에는 온전한 혀를 생명 나무라고 합니다. 교리적으로 적용할 때, 이스라엘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까닭에 내가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결박되었음이라.](행28:20). 학개 대언자는 온 민족들의 바라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혀 줍니다. [또 내가 모든 민족들을 흔들 터인즉 모든 민족들의 바라는 바가 이르리니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충만하게 채우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학2:7). 성도들의 소망 역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1:27). 주님은 우리의 복된 소망이며, 영광스런 소망이시며, 산 소망이십니다. 성도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이며, 우리 몸의 구속입니다.

13절은 성도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위대한 구절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멸망할 것이나 명령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13). 말씀을 멸시하면 멸망합니다. 민수기 15:31에, [그 사람이 [주]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깨뜨렸은즉 그의 불법이 그에게로 돌아가 그 혼은 완전히 끊어지리라.](민15:31). 말씀을 멸시하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습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느니라.](잠28:9). 말씀을 멸시하면 주님이실지라도 자기 백성을 구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들을 멸시하며 그분의 대언자들을 학대하여 마침내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진노하사 구제할 방법이 없게 되었으니](대하36:16). 말씀을 멸시하면 성도일지라도 간증을 잃어버립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흘려 들음으로써 간증을 잃었습니다(눅23:34). 요나는 말씀을 멸시함으로써 큰 고기의 입에 빠져 죽었습니다(요2:1-6). 시드기야는 말씀을 멸시함으로써 눈이 멀었습니다(렘38:20). 파라오는 말씀을 멸시함으로써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멸시함으로써 세상에 버려짐을 당했습니다. 삼손은 말씀을 멸시함으로써 원수들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말씀을 멸시함으로써 왕국을 잃어 버렸습니다.

말씀을 멸시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는 보상이 없습니다.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습니다. 성도들이 상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주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히11:6). 그 다음은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사66:2).

14절은 ‘생명 샘’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계시와 조명없이도 이런 물이 있다는 신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아득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생명수, 생명의 샘, 생명의 강 등 몇몇 영생의 물이 나옵니다. 잠언 기자는 멀리서 생명의 샘을 찾지 않았습니다. 잠언 10:11에 ‘의로운 자의 입’이 생명 샘이라고 합니다. 이는 의로운 자의 입에서 의(義)이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이신 주님이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인 잠언 13:14에는 “지혜로운 자의 법이 생명 샘”이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주님의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롬8:2). 잠언 14:27에서는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생명 샘’이라고 합니다. 후에 우리는 계시록 7:17에 문자적으로 영생을 주는 생명 샘을 봅니다(계21:16).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생명의 샘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4:14). 우리의 입이 의로운 자의 입이 되고, 지혜로운 자의 법을 베풀고, 주님을 두려워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이 주신 샘물이 넘쳐 날 것입니다.

15절은 선한 명철과 범죄자들의 길에 대해 말합니다. 명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자신의 입에서 내시기 때문이로다.](잠2:6). 범죄자들의 길은 험합니다. 가인의 길은 험했습니다. 다윗을 추적하는 사울의 길은 험했습니다. 삼손의 길은 험했습니다. 멸망의 길은 넓고 그리로 가는 자들이 많지만 험한 길입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하지만 그 길은 평강의 길입니다.

16절은 세상을 조금만 살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진리입니다. 분별이란 행동에 앞선 것입니다.

17절은 사악한 사자와 신실한 대사의 차이입니다. 사악한 사자(messenger)는 주님의 말씀을 더하고, 빼고, 변개시켜서 진리의 길을 왜곡시키는 자들입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그러했고, 발람이 그러했고, 거짓 교사들과 거짓 사도들이 그러합니다. 신실한 대사는 바울 같은 사람입니다. 신실한 대사는 자신의 나라를 대표합니다. 대사는 보냄받은 자입니다(빌3:20). 신실한 대사는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입니다. [그런즉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大使)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너희에게 간청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후5:20). 신실한 대사는 결박을 당하더라도 해야 할 말을 하는 대사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결박당한 대사(大使)가 된 것은 나로 하여금 결박 중에서도 마땅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6:20).

잠언은 성도들이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는가?에 대해서 예리한 통찰력을 줍니다. 잠언 3:8, 4:22, 12:18, 13:17, 16:24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자의 혀를 지닌 신실한 대사라면 여러 사람의 병든 마음과 상한 영을 고칠 수 있는 훌륭한 의사의 자격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잘 요리해서 성도들을 먹임으로 영양을 보충해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빵이요, 물이며, 고기요, 우유이며, 사과요, 꿀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훈계를 싫어하는 자와 책망을 중히 여기는 자의 차이입니다. 잠언의 중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책망을 통해 아들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책망은 성경의 기록 목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딤후3:16-교리, 책망, 바로잡음, 의로 훈육). 잠언에는 책망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

· 책망을 거절하는 자(잠10:17)- 잘못행하느니라.

· 책망을 싫어하는 자(12:1,15:10)- 짐승과 같으니라. 죽으리라.

· 책망을 듣지 않는 자(13:1)- 비웃는 자

· 책망을 듣는 자(15:31,32) -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거하느니라. 명철을 얻느니라.

· 책망을 중히 여기는 자(13:18,15:5) - 존경을 받느니라. 분별있는 자니라.

· 책망을 자주 거부하는 자(29:1) - 갑자기 멸망을 당하되 구할 길이 없으리라.

19절은 소원과 혼의 관계입니다. 13:12을 참조하십시오.

20절은 유유상종에 관련된 잠언입니다. 사람은 그 친구를 통해 알 수 있다는 말은 동서 고금의 진리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악한 사귐은 선한 행실을 부패시키느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걸으면 지혜롭게 됩니다. 구령하는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전도하러 함께 나가는 자들은 같이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자는 이미 앞에서 살펴 본 바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과는 함께 걷지도, 앉지도, 서지도 말아야 합니다. 행여 마주치면 돌아서야 하며, 지나가지도 마십시오. [사악한 자들의 행로로 들어가지 말고, 악한 자들을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그것을 피하고 그 곁으로 지나가지 말며 거기서 돌이켜 떠날지어다](잠4:14-15). 죄에 연루되지 않는 방법은 1. Enter not. 2. Go not 3. Avoid it. 4. Pass not by. 5. turn from it. 6. pass away입니다.

21절은 인과응보의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과응보가 실현되지 않았다면 저 하늘에서, 심판석 앞에서 반드시 올바른 보응이 있을 것입니다.

22절은 깊이 음미해 볼 만한 말씀입니다. [선한 사람은 자손의 자손에게 상속을 남기거니와....] 우리 나라에는 요즘 상속 거부 운동을 전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죽을 때 상속을 남기지 말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선한 취지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는 성경과는 약간 다릅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들에게서 상속받거니와...](잠19:14).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상속해야 하겠습니까?

· 잠언 3:35- 영광을 상속할 것이로되,

· 잠언 8:21- 재산을 상속하게 하며, 주님은 성도들에게 유업의 상속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의 상속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의 상속자들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靈)들로서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히1:14). 성경은 우리를 약속의 상속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불변함을 더욱 풍성히 보여 주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써 확증하셨나니](히6:17).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 상속자라고 합니다.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는 것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롬8:17).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상속해 줄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람을 상속하거나(잠11:29), 어리석음을 상속하는(잠14:18)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4절은 자녀 교육에 관한 방법인데, 현대 교육학이나 심리학과는 너무나 달라서 주님보다 더 문명화되고, 세련된 반성경적인 성도들과 비성경적인 성도들, 불신자들이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교육 방법은 쟌 밀이나 스튜어트, 콩트, 루소 등 천재적인 학자들보다 저차원적이고, 원시적이고, 무식하다고 치부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견해를 따라서 자녀 교육을 시키든 전적으로 자유입니다. 하지만 훈계와 권고와 책망을 무시하는 자들이 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할 것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주님의 교육 방법을 몇 구절만 살펴 보겠습니다. 잠언 19:18,22:15,23:13, 29:15,17절입니다.

25절은 이미 다루었습니다.

'Archived(완료) > 구약 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도서(2)  (0) 2005.07.09
전도서(1)  (0) 2005.07.07
잠언(4)  (0) 2005.07.05
잠언(3)  (0) 2005.07.04
잠언(2)  (0) 2005.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