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전도서 6:1-10:20
요절: 잠언 7:29
전도서 6장입니다. 6:1을 보십시오.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악이 있음을 보았나니 이것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라.](전6:1). 해 아래에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닥치는 악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보살핌이 없다면 누구나 한 번은 사기를 당하고, 자신의 수고를 남이 가로채는 불행을 겪어 보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말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악은 첫째, 하나님께서 부와 재물과 명예를 주셨음에도 자신이 그것을 먹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현상입니다(2). 시편 기자가 [이는 네 손이 수고한 것을 네가 먹을 것임이라. 네가 행복하고 형통하리로다.](시128:2)고 말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어리석은 부자는 대표적인 예입니다(눅12:20). [그들의 밥상이 그들 앞에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에게 행복이 되었어야 했을 것이 함정이 되게 하소서.](시69:22). 둘째, 자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혼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못한 경우입니다(3). 이 일도 해 아래서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야곱은 12명의 사내 자식을 두었지만 그의 생은 온통 슬픔과 고통이었습니다. 그의 말년 잠깐을 제외하면 자식들로 인해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양육받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식이 아니라면 헛된 일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식이 많은 것을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127:5, [자기 화살통에 이것이 가득한 자는 행복하도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성문에서 원수들을 마주 대하여 말하리로다.](시127:5). 그냥 숫자만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성경적으로 양육받을 때 헛되지 않고 행복한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반면 엘리 제사장의 자식같은 경우에는 집안을 멸문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자식들이라면 차라리 유산하는 것이 부모나 자신에게도 낳을 뻔했습니다. 셋째, 장수가 헛된 경우입니다(6). 장수는 누구나 육신을 입은 인간이라면 본능입니다. 그러나 평강이 없는 장수는 단명한 것보다 못합니다. 넷째, 명예의 헛됨입니다(8,9). 사람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바라도록 하는 것이 T.V, 신문, 잡지의 기능입니다. 광고는 우리의 욕망, 바라는 것들을 자극하는 매체인데, 사실 이런 것은 허무를 더 쌓아가게 하는 것들입니다.
10절은 인식론을 정확히 갈파한 최고의 명언입니다. [지금까지 존재한 것에는 이미 이름이 붙어 있으니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도 알려졌나니 그가 자기보다 강하신 이와는 다투지 못하느니라.](10).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을 아담이 다 이름지은 이후로 모든 것에는 다 이름이 있습니다. 학문의 영역은 바로 이름을 알아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이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다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을 지으시고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에게로 이끌어 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바가 그대로 그것의 이름이 되었더라.](창2:19). 사람이라 불리는 피조물은 결코 자기보다 강하신 이와 다투지 못합니다. 이사야 45:9, [화 있을진저, 자기를 만드신 이와 다투는 자여! 질그릇 조각은 땅의 질그릇 조각들과 다툴지니 진흙이 자기를 빚는 자에게, 네가 무엇을 만드느냐? 말할 수 있으며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45:9).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주}의 질투를 일으키겠느냐? 우리가 그분보다 강하냐?](고전10:22).
11절은 주님없는 인생이 느끼는 허무의 극치입니다. 12절은 불가지론자들의 허무입니다. 사람은 앞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허무합니다. [...누가 알리요?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12).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악입니다. 하지만 신약의 조명 아래에 사는 성도들은 결코 이런 허무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성령이 내주하시며, 진리의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있을 일들을 다 압니다.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압니다. 예언의 파노라마를 보기 때문입니다.
* NOTE- 공통적으로 있는 것
· 공통된 믿음(롬1:12, 딛1:4) - [이것은 곧 너희와 나 사이의 공통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와 함께 위로를 받고자 함이라.](롬1:12). [공통된 믿음을 따라 나의 친아들 된 디도에게 내가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구원자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딛1:4).
· 공통된 시험(고전10:13) -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 공통으로 얻은 구원(유1:3)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공통으로 얻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를 쓰려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고 편지하여 너희에게 권고할 필요를 느꼈노니](유1:3).
7장입니다. 7장부터 12장까지는 지혜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반복됩니다. 무려 35회나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은 솔로몬의 글의 특징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을 모두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배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도록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고 절망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주님을 의뢰하고, 도우심을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좋은 이름이 귀한 향유보다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나으니라.](1). 인생이 고통과 허무로 가득 차 있다면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지만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사도 바울은 죽는 날을 매우 사모했는데, 자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모두 포함시켰습니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이는 내가 /이/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니 내가 원하는 바는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빌1:23). 사람이 죽는 날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2,4). 슬픔이 웃음보다 낫고,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습니다(3,5). 이는 모두 이 생의 날이 아닌 죽음을 통해 심판자이신 주님을 생각해 주기 때문입니다. 악한 현 세상의 실체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주기 때문입니다.
7-10절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악으로 인하여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미치는 세상이요, 뇌물로 일이 처리되는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조급하게 분노하여 시위하고, 혁명을 꿈꾸고, 개혁을 외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옛날에는 이보다는 나았는데...!”라고 말합니다(10). 11-12절은 지혜의 유익함입니다. 이것은 잠언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지혜는 그것을 소유한 자들에게 생명 나무입니다. [지혜는 그것을 붙잡는 자들에게 생명나무라. 그것을 간직하는 자마다 행복하도다.](전3:18).
13-14절은 전도자의 권고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깊이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하는 날에는 기뻐하되 역경을 당하는 날에는 깊이 생각하라. 또 하나님께서 이것과 저것을 마주보게 두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뒤에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로다.](13-14). 생각해 보라. 생각하라. 주님의 행하신 일을 인간이 control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생각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 뜻을 거슬러서 살 수 없다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헐면 우리는 세울 수 없고, 주님이 사람을 가두시면 열지 못합니다. [보라, 그분께서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열지 못하느니라.](욥12:14). 주님이 구부리시면 우리는 곧게 할 수 없습니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으며 모자라는 것도 셀 수 없도다.](전1:15). 주님의 계획은 취소시키거나 연기시킬 수도 없습니다. [만군의 [주]께서 계획하셨은즉 누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으며 /그분께서/ 자신의 손을 펼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14:27). 주님이 열면 닫을 수 없고, 닫으면 열 수 없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며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계3:7).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하심입니다(14). 사람은 예언의 능력이 없습니다(8:7). 마귀 역시 예언의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이 만약 성령의 도우심과 성경의 계시없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안다면 그는 신(神)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도전하셨습니다. “한번 보여 보라. 그러면 우리(삼위일체의 하나님)가 놀라리라.” [그들은 그 이유들을 가져오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일 것이며 또 이전 일들이 어떠했는지도 보일지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들의 결말을 알아보리라. 또는 앞으로 있을 일들을 우리에게 밝히 보이며 이 후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어 우리로 하여금 너희가 신들인 줄 알게 하라. 참으로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놀라서 그것을 함께 바라보리라.](사41:22-23).
15절은 현 세상이 악한 세상임을 입증하는 말씀입니다. 현 세상은 공의와 진리가 없는 세상입니다. 8:12-14절을 참고하십시오.
16-17절은 동양의 사상 중 중용(中庸)의 도를 가르치는 듯 착각할 정도로 비슷합니다. [/너는/ 지나치게 의로운 자가 되지도 말며 스스로 지나치게 지혜로운 자가 되지도 말라. 어찌하여 네가 네 자신을 멸하려 하느냐? 너는 지나치게 사악한 자가 되지도 말며 어리석은 자가 되지도 말라. 어찌하여 네가 네 때가 이르기도 전에 죽으려 하느냐?](16-17). 이 말씀은 중간만 되라, 다수의 편에 서라는 말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기 의에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의(義)는 아무리 좋아 보여도 모두 걸레입니다. 누더기끼리 누가 더 잘났다고 우기며, 다투고 싸우는 것은 정말 꼴 불견입니다.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사64:6). 20절에도, [이는 선을 행하고 범죄하지 않는 의인이 땅 위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20)고 말합니다.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스스로 지나치게 지혜로운 자가 되지 말라는 말 역시 신약적인 가르침입니다.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며 높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자기를 낮추어 낮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롬12:16).
스스로 지혜있다 여긴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또 스스로 지혜 있다 선언하나 어리석은 자가 되어](롬1:22). 성도들 가운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된다는 것이라.](롬11:25).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지혜로왔던 결과 어리석은 자들을 기꺼이 용납했습니다. [이는 너희가 스스로 지혜로우므로 어리석은 자들을 기꺼이 용납하며](고후11:19). 스스로 지혜로운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을 지혜로 삼고, 성령 충만함으로 믿음과 지혜가 충만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악과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은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18). 둘째,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20).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모든 일에서 벗어납니다. 재앙과 화에서 벗어나며,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허무에서 벗어납니다.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때, 음녀에게서 벗어납니다. 에녹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사람들이/ 찾지 못하였느니라. 이는 그가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가졌음이니라.](히11:5).
·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즉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 주의 사역자들을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종교행위입니다. [유대인들은 {주} 예수님과 자기들의 대언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어](살전2:15).
·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니라.](히11:6).
· 성경대로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복음을 위탁받은 대로 우리가 말하노니 이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
· 주의 오심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님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걸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받았은즉 넘치도록 더욱더 그와 같이 하라.](살전4:1).
7장은 유난히 솔로몬의 구도자적 자세, 진리를 향한 그의 열정이 많이 드러나 있습니다. 25절과 27절은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28절은 남녀 차별적인 발언처럼 보이는 구절입니다. 솔로몬은 왕비 칠백 명과 후궁 삼백 명이 있었는데, 이 중 한명도 지혜롭고, 덕이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왕상11:3). 남자 중의 한명이란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으로 예표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욥기 33:23, [그럴 때에 만일 천명 가운데 하나 곧 해석하는 자요 그의 사자(使者)인 /사람/ 하나가 그와 함께 있어서 그분의 곧바름을 사람에게 보일진대]
29절은 성선악설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입니다. 사람을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후에 죄를 범함으로 모두 아담의 형상, 즉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8장입니다. 1-5절은 왕과 신하의 관계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왕입니다. 2-5절은 솔로몬 왕 앞에선 신하들의 예인데, 이는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선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6-11절은 앞날을 알지 못함으로, 때와 판단을 아는 지혜가 없어서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언제 죽을지, 언제 재앙을 당할지 모르는데다, 막상 죽음이 찾아오면 영을 다스릴 능력조차 없기 때문에 허무하게 죽거나, 죽지 않기를 발버둥치다 죽습니다. 11절은 때와 판단에 대한 지혜가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때와 판단’을 모르고 악을 행하는 장면입니다.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집행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오래참으심, 회개의 풍성함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으로 결론을 짓고, 마음대로 죄를 짓습니다. [네가 이 일들을 행하였을지라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도 전적으로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고 그것들을 네 눈앞에 차례대로 놓으리라, 하시는도다.](사50:21). [사악한 자는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려 하지 아니하고 곧바른 땅에서 불의하게 행하며 [주]의 위엄을 바라보지 아니하나이다.](사26:10). 바울 사도는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2:4)고 엄히 책망했습니다.
12-13절은 성경의 일관된 진리입니다. 14절은 전도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진리로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현상입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땅에서 일어나는 헛된 일이라고 말합니다(7:15참조). 현대의 지성인들은 이런 문제로 고뇌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비웃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나찌의 죽음의 수용소 앞에서 절규한 크리스찬들, 지성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의 광주 사태 때, 군부 독재 시절에 고문당하고 죽어간 사람들을 보면서 울부짖던 성도들이 모두 14절로 인해 고뇌한 것입니다. 욥기의 주제이기도 한 이 세상의 모순된 현상은 오늘날 우리들의 고뇌만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사악한 자가 살아남고 늙도록 지내며 게다가 권세도 강하냐?](욥21:7). 대언자 예레미야의 고뇌에 찬 부르짖음을 들어보십시오. [오 [주]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하오나 내가 주의 심판들에 대하여 주께 아뢰고자 하오니 어찌하여 사악한 자들의 길이 형통하니이까? 어찌하여 심히 반역하는 자들이 다 행복하니이까?](렘12:1). 대언자 하박국 역시 이 문제로 주님께 따졌습니다. [오 [주]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들으려 하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 부르짖으리이까! /내가/ 폭력으로 말미암아 주께 외쳐도 주께서는 구원하려 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주께서 내게 불법을 보이시며 나로 하여금 학대를 보게 하시나이까? 이는 노략과 폭력이 내 앞에 있기 때문이오니 곧 불화와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 있나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오니 이는 사악한 자가 의로운 자를 에워싸므로 부당한 판단이 나아가기 때문이니이다.](합1:2-4). 17절은 솔로몬이 다시 한번 자기 지혜의 한계를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특별 계시없이 얻을 수 있는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9장입니다. 9:2-3절은 현 세상의 이야기이지 다가올 세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5,10절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혼의 수면, 영혼 멸절, 지옥이 없다는 교리를 확증하는데 자주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죽은 자들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란 말은 누가복음 16장의 지옥간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와는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솔로몬이 한 말은 이 세상의 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 죽은 자들입니다. 7-10절은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것들을 잘 향유하라는 말씀으로 디모데전서 6:17절과 일맥상통합니다.
11절 말씀은 불공평한 것 같은 세상에서도 일말의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 예를 너무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에서 보니 경주가 빠른 자들에게 돌아가지 아니하고 전투가 강한 자들에게 돌아가지 아니하며 빵이 지혜로운 자들에게 돌아가지 아니하고 재물이 명철(明哲)한 자들에게 돌아가지 아니하며 은총이 재능 있는 자들에게 돌아가지 아니하고 오직 때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생기느니라.](11). 우리는 고학력 실업자들을 보는 동시에, 무식한 부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압도적 전력을 지니고도 번번이 역전패 하는 것은 sports 게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때와 기회를 주십니다. 때와 기회를 포착할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12절이 되면 곤란합니다. [이는 사람 또한 자기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같이 사람들의 아들들도 재난의 때에 일이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면 올무에 걸리느니라.](12). 우리 모두 잇사갈 자손들처럼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10장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비교입니다. 어리석음은 약제사의 향유에 붙은 죽은 파리들과 같습니다(1). 작은 어리석음이 지혜와 명예로 얻은 명성을 허물어 버립니다. 우리는 신문 사회면을 펼칠 때마다 그런 예를 봅니다. 평생을 존경받은 목회자, 학자, 예술가, 정치인 등이 어느날 scandal 하나로 똥오줌을 뒤집어씁니다. 3-4절은 처세술입니다. 치리자가 격노할 때 도망갈 것이 아니라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도망가면 평생 저주와 오해를 뒤집어쓰지만 가만히 담당하면 영을 진정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들이요, 부활이 없다 하는 자들이며, 주의 말씀을 믿기를 더디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 중에는 학술원, 예술원, 대학교, 정치, 종교, 문화계에 명사로 자리잡고 있으며 크게 존경을 받습니다. 부자들이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영적인 부자들을 말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교리적으로 볼 때 환란 때의 부자들이라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환란 때는 적그리스도의 정책에 호응하지 않고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낮은 자리에 앉게 됩니다. 7절은 압살롬은 말을 타고 다윗은 걸었던 장면(삼하15:30), 하만은 말에 타고 모르드개는 걸었던 장면(스6:8)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8-9절은 인과응보에 관한 말씀입니다. 10-15절은 지혜의 지도를 받으라는 권면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연장을 갈지 않음으로 더 많은 힘을 들입니다(10). 어리석은 자는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끝날 때 해를 끼칩니다(13). 어리석은 자들은 어린 아이를 지도자로 뽑습니다(16). 지금 전 세계는 고령화 추세인데, 지도자는 40대 연령으로 내려 가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말을 넘치게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수고하여도 자신을 다치게 합니다(16). 어리석은 자는 심한 게으름을 피웁니다(18). 어리석은 자는 탐식합니다(17). 어리석은 자는 왕을 저주합니다(20).
19절에 [...돈은 모든 것에 쓸모가 있느니라](Money answerth all things)란 말은 성경에서 나온 영어의 관용구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 평범한 생활 영어로 만인에게 통용되고 있는데, 이는 성경의 말씀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살아있는 말씀이란 증거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고어(古語)가 아닙니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화투판에서, 정책의 결정이 오가는 장소에서 언제나 통하는 한 마디는 “Money answerth all things”입니다. 그렇다고 돈을 사랑하지는 마십시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11-12장은 전도서의 결론입니다. 다음 시간에 결론을 맺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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