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글자 그대로 성경을 읽어나갈 때 사랑하는 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남자는 왕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여인은 교회를 예표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혼인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의 남편에게 신실하지 못하고, 세상의 우상들과 음행을 일삼았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에게서 등을 돌렸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어느 날 모든 것이 전처럼 회복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다시 회심하고 돌아올 때 [네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니 당황하지 말라. 네가 젊은 시절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54:4) 하십니다. 교리적으로 적용할 때,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묘사합니다(엡5:23-33). 그런데 교회는 사탄과 세상에 의해서 미혹될 수 있는 위험에 항상 놓여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현재 우리를 양육하시고 돌보아 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앞으로는 우리를 영광 가운데 영접하시고, 자신이 받을 영광의 상속을 함께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실 것입니다. 솔로몬의 노래에서 나오는 결혼식은 장차 있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입니다(계19:7-9).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깊이 있는 사랑의 교제입니다. 남녀가 결혼하면 그들의 모든 것이 서로에게 속하듯이,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몸도 그리스도께 속합니다(롬12:1-2).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 들여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에 대한 화답이 바로 몸과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 우리의 영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결혼한 영적 부부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주}와 결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우리의 몸 역시 가벼이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성전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지만 결혼의 지속은 신실함(faithful)에 달려 있습니다. 영적인 간음은 매우 중대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신부의 영적 성숙과 사랑의 깊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 2:16-6:3-7:10을 비교해 볼 것. 자기 중심적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변하고, 마침 그분만이 모든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 사랑이요, 영적 성숙입니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 결혼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신랑은 그의 사랑으로 신부의 모든 흠을 덮습니다(솔4:7). 신랑은 신부를 기뻐합니다(사62:5). 신랑은 신부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었습니다(엡5:25). 신부 역시 신랑을 사랑합니다(솔2:16). 신부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낍니다(솔1:5). 하지만 깨끗하고 점없는 옷을 입게 됩니다(계19:8). 하나님의 은혜의 보석으로 입혀 집니다(사61:10). 이 결혼식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준비하십니다(마22:2). 결혼식은 성대하고 화려하게 준비됩니다(마22:4). 1:1을 보십시오. [노래 중의 노래 곧 솔로몬의 노래라](1). 책제목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은 유난히 노래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노래하는 인생들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찬양을 위해 존재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한 일이 바로 찬양입니다(행16:25). 저 하늘에서도 끝없이 울려 퍼지는 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에베소서 5:19,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에게 화답(和答)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주}께 아름다운 가락을 만들어 노래하며](엡5:19).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인생은 즐거워도, 고달파도 노래하며 삽니다. 하나님없는 인생들이 노래에 얼마나 매진하고 미쳐있는지 보십시오. 우리는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에 미쳐 있어야 합니다. 2-7절은 여인의 사랑 고백입니다. 특별히 단락 구분에 유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포도즙보다 낫습니다(2). 포도즙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하지만 사랑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좋은 향유 냄새를 맡습니다(3). 주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에게 생명의 향기를 내뿜습니다(고후2:14-16). 예수란 이름은 넘쳐나는 향유 냄새와 같습니다(3).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내쫓고,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의 위협을 무릅씁니다. 예수의 이름은 귀한 이름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일컬어짐을 받아서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귀한 이름의 향기를 쏟아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너희를 부를 때 쓰는 그 귀한 이름을 모독하지 아니하느냐?](약2:7)는 경고를 받습니다. 4절은 영적 친교의 핵심입니다. “나를 이끄소서”(4). 이 말은 주님의 핵심 사역입니다. 요한복음 12:32을 보십시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이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침실은 사랑의 친교가 있는 곳입니다. 깊은 연합과 앎이 있는 곳입니다. 고전 2:9-13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다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29:29절을 보십시오. [은밀한 일들은 주 우리 하나님께 속하거니와 계시된 일들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속하나니...]라고 합니다. 묵상과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사람만이 주님의 깊은 것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5절은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말하는데 이는 총 7번 등장합니다(1:5, 2:7, 3:5, 3:11, 5:8, 5:16, 8:4). 이들은 의심할 바 없이 유대인들입니다. 이 중에서 세 번은 [나의 사랑/하는 이/가 기뻐하시기 전에는 그분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지니라.]라고 말합니다(2:7,3:5,8:4).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잠에서 깬 모습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시78:65). 이는 환란 동안에 고난당하는 예루살렘의 딸들이 주님을 흔들어 깨우는 기도를 할 것입니다. 시편59:5을 보십시오. [오 [주] 만군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런즉 주는 모든 이교도를 징벌하시기 위하여 깨소서. 사악한 모든 범죄자에게 긍휼을 베풀지 마옵소서. 셀라.](시59:5). 6절은 영적 의미가 깊습니다. ‘해가 나를 내리쬐어 내가 검을지라도...’라고 말하는데, 주님은 의의 태양이십니다. 내가 검다는 사실은 진리 앞에서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정확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교가 깊어질수록 나 자신이 더 큰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6절 후반부는 우리의 영적 생활을 괴롭게 하는 자들이 누구인가?를 말해 주는데, 내 어머니의 자녀들이 나를 괴롭게 합니다. 경건하고 영적인 신앙인들은 육신적인 성도들에게 질투와 시기와 험담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겪는 영적 어려움의 대부분은 같은 형제들의 입과 행동으로 인해 나옵니다. 이런 결과로 여인은 자신의 ‘나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외적 환경과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나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7절은 여인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안식은 어디에서 얻는가? 우리는 주님 안에서 쉼을 얻습니다(마11:29).이사야 65:9,10을 보십시오. 재림 때에 주님은 양들을 위해 쉼터를 주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여인이 어디서 쉬어야 하는지를 모르겠거든 양떼의 발자국을 따라 나아가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6:16은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길들 가운데 서서 보며 옛 행로들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들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 길로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며](렘6:16). 우리는 사도 바울이 걸었던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고전11:1). 그런데 쉬는 장소에서 하는 일은 드러누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들의 곁에서 네 염소 새끼들을 먹일지니라.](8). 영적인 쉼은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인 기도와 영성 훈련 등을 통해 혼자서만 영적으로 높아지고, 개인적인 이기심만 채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로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일을 할 때 쉼을 얻습니다. 9,10절은 여인의 묘사입니다. 여인은 파라오의 병거를 끄는 말에 비유되었는데 이는 이집트 왕의 병거를 끄는 말이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의 말과 이집트의 말은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명마였습니다. 특히 파라오의 병거를 끄는 말들은 누가 보아도 감탄할만한 말들이었습니다. 10절은 금은 보화로 외모를 치장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3:4,5 [너희가 단장(丹粧)하는 것은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며 옷을 차려 입는 외적인 단장으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으로 하되 썩지 아니하는 것 곧 온유하고 조용한 영(靈)의 장식으로 할지니 이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니라.](벧전3:4,5).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이런 모습으로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나야 합니다. 11절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묘사하는 ‘우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은단추를 박은 금 옷자락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2절은 다시 말하는 사람이 바뀌어 여자가 왕에게 하는 말입니다. 12절은 왕의 식탁에 관한 말씀인데 솔로몬의 식탁이 얼마나 풍성했는지 열왕기상 4:22-23을 보십시오. [솔로몬의 하루 식량은 고운 밀가루가 삼십 고르요, 굵은 가루가 육십 고르요, 살진 소가 열 마리요, 초장(草場)의 소가 스무 마리요, 양이 백 마리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다마사슴과 살진 날짐승이었더니] 왕의 식탁에서 풍성한 음식보다 더 좋은 것은 성도들이 풍기는 향기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가지고 와 깨뜨려 온 집에 향유 냄새를 진동하게 한 것처럼 우리는 마땅히 이런 향기를 풍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정하든 부인하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이미 냄새(향기)를 풍기는 방향제입니다. [이는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나 멸망하는 자들 중에서나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이기 때문이니](고후2:15). 주님 앞에 달콤한 향기를 내고 싶습니까? 비결이 있습니다.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것은 달콤한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요,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하나님은 성도들이 내뿜는 이런 향기를 맡고 싶어합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를 통해 향기를 맡으십니다(계5:8, 8:3,4). 13절을 보십시오. 그냥 읽으면 상당히 야한 이야기나 연애 소설에 나오는 표현법 같습니다. 주님은 온 밤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현재 우리 젖 가슴 사이, 즉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십니다. 주님이 밤새도록 우리 젖가슴 사이에 거하겠다는 것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의미하는 약속입니다. 교회 시대는 역사적으로 밤에 해당합니다. 14절에서 여인은 사랑하는 이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가 되신다고 고백했는데, 엔게디는 유다지파의 유업으로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어 있던 곳입니다. 15절은 ‘비둘기 눈을 가졌구나’라고 말합니다. 눈은 인물의 80%를 좌우합니다. 비둘기 눈은 한 번에 하나만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가 오직 주님의 눈을 바라볼 수 있다면 세상의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 몸에 있는 죄성과 악한 습관을 이기는 법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34,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단일(單一)하면 네 온 몸도 빛으로 가득할 것이로되 네 눈이 악하면 네 몸도 어둠으로 가득하리니](눅11:34).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16절은 ‘우리의 침상’에 대해 말하는데 침상이 푸르다는 것은 아마 거기가 푸른 초장인 것 같습니다(시23). 17절은 여인이 나의 집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집의 건축 재료로 사용된 백향목과 전나무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사용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교회의 주 건축 재료이시며, foundation입니다. 2:1은 왕의 말입니다. 샤론의 장미는 재림 때 오실 주님의 모습입니다(사35:1-2). 골짜기의 백합은 주님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수난받으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2절을 보면 교회 역시 백합인데,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입니다. 이는 교회가 이 땅에서 가시나무 가운데서 살아갈 것임을 보여 줍니다. 가시나무는 죄의 결과로 이 땅에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이요, 저주입니다. 주님이 오시기까지, 천년왕국이 세워져 이 땅의 저주가 풀릴 때까지 우리는 세상의 가시 가운데서 자라나는 백합과 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지면 기운이 막혀 자라지 못합니다(마13). 오늘날 복음 전파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절은 여인이 주님께 하는 말인데, 주님을 사과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주님이 맺는 열매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 입에 달콤한 것들입니다. 4절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은밀한 사랑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사랑은 공개적으르 고백되어야 합니다. ‘내 위에 나부끼는 깃발은 사랑이었노라.’(4). 깃발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외적이고, 공개적인 것입니다. 깃발은 전쟁터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깃발은 기도의 응답을 줍니다.[우리가 네 구원을 기뻐하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주]께서 네 모든 청원(請願)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20:5).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깃발을 주셨는데, 그것은 멀리서도 볼 수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높이 들린 깃발은 누구에게나 선포하고 알리는 것입니다. [주께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로 인하여 그것을 펼치게 하셨나이다. 셀라.](시60:4). 전쟁에 승리하면 그 진지 위에 깃발을 세웁니다. 사람을 모을 때도 깃발을 사용합니다. [너희는 높은 산 위에 깃발을 세우고 그들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이며 손을 흔들어 그들로 하여금 존귀한 자들의 문들로 들어가게 하라.](사13:2). 주님과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깃발이 됩니다. 5절은 주님의 사랑으로 병이든 신부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첫 사랑의 기쁨은 매일 기도하고, 성경읽고, 전도하고, 교회에 나가도 피곤함을 모릅니다. 이런 생활은 매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6절은 남녀간에 육체적인 관계를 묘사하는 모습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폭력, 돈, 섹스로 가득한 세상이라, 사랑이라 하면 육체적인 관계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육체적인 관계보다 영적인 사랑, 우리 주님과의 관계가 훨씬 더 크고 깊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이 모습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묘사한 것입니다. 7절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가장 영적이고, 좋은 도시에 살지만 주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부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주님을 깨우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주님의 관심이 바로 자신의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주님이 원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8-13절은 휴거를 묘사하는 가장 유명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10절에 유념해 보십시오. 이것은 분명히 우리를 데려가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9절은 주님이 비밀스럽게 오셔서 은밀히 데려가시는 휴거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10절은 요한계시록 4장에서 “이리 올라오라”하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11-12절은 휴거의 시점입니다. 휴거의 시점은 겨울이 지나고 꽃피는 봄이 완연히 온 오순절 쯤에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순절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기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나오는데 이 역시 휴거의 시점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무화과 나무로서 잎을 내면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운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마24). 14,15절은 다시 왕의 발언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여인이 바위 틈에 있다고 말하십니다. 주님은 전에 모세를 바위틈에 두신 적이 있습니다. 이 바위는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바위틈에 두신다는 것은 안전한 곳에 두신다는 의미입니다. [네 목소리를 듣게하라. 이는 네 목소리가 달콤하며 네 얼굴이 아름답기 때문이로다.](14b). 주님은 우리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기도하는 소리를 달콤한 목소리라고 하십니다. 죄의 고백, 중보 기도, 우리의 찬양하는 소리는 더 없이 귀한 음성입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바빠서 주님 앞에 침묵으로 지나가 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목소리를 듣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 가장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우리는 살인, 간음, 도둑질, 방화 등 사회악을 저지르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들에 걸려 넘어집니다. 작은 여우 한 마리가 포도원을 망치듯이 조그마한 죄와 사소한 죄가 나를 망치고 교회를 망칩니다. 전에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도보로 여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자들이 여행 중에 가장 힘든 때가 언제였느냐?고 물었을 때, 사막이나 높은 산을 넘을 때가 아니라 신발 안에 아주 작은 돌맹이가 박혔을 때, 신발 창에 모래가 스며들어 올 때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문과 잡지, 광고판, T.V, 인터넷 등에서 수많은 유해 환경을 접하고 삽니다. 이런 작은 것들을 다스리지 못함으로써 영적 생활에 패배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6절은 세 번이나 나오는 표현인데 한 번에 한 단계씩 영적 도약을 합니다. 6:3 ==> 7:10 17절은 10절에서 주님이 하신 ‘일어나 떠나자’란 말에 대한 여인의 반응으로서 머뭇거리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이는 교리적 적용이 아님). 베데르란 말은 분리입니다. 성도는 필히 세상과 육신과 주님 외의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일어나 떠나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여인은 머뭇거렸습니다. 성도들은 영적 진보를 거듭하다가 겨울이 지나고 꽃이 피는 봄이 오면 그만 정착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날이 새고 그림자들이 달아나기 전까지는 돌이키시며’라고 한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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