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솔로몬의 아가3:1-4:16
요절: 솔로몬의 아가 4:16
솔로몬의 아가 3장입니다. “나의 어여쁜 자여 일어나서 떠나가자”란 주님의 음성에 머뭇거렸습니다(2:10,13).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사라지자 이제는 평안함을 누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성도가 꾸준히 자라나고, 열매맺는 성숙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이 전부가 아닙니다. 3:1에서 여인은 주님의 부르심에 거절했다가 당황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밤에 내 침상에서 내 혼이 사랑하는 이를 찾았노라. 내가 그분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3:1). 구원은 단절되지 않지만 교제는 얼마든지 단절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좋을 때는 무엇을 해도 은혜요, 감사와 찬양이 흘러 넘치지만 한번 단절된 교제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언제까지 첫사랑의 감격 속에만 두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침상이 아닌 험한 곳으로 인도하시고, 고난 속에 두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부르심을 거부할 때, 기도를 해도, 찬양을 해도 마음은 냉랭하기만 합니다. 여인은 주님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인은 주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도시의 거리와 큰 길을 돌아 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큰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고 광대한 길로서 여인이 영적 분별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음을 엿보게 해 줍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주님 앞에 자백하고, 회개하면 회복될 수 있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거부, 주님의 요청에 대한 거절로 인한 교제의 단절은 성도들이 좀처럼 눈치채지 못한 채 방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여인은 혼자 찾다가 이제 파수꾼들에게 물었습니다. 혼자서 해결하지 못할 때 파수꾼들을 찾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일입니다. 구약에서 파수꾼들은 주로 대언자들이나 설교자들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오늘날 파수꾼들이 파수꾼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에스겔 3:17, 이사야56:9-12참조. 오늘날 파수꾼들은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할 때 사랑과 화평을 외치고, 심판을 이야기해야 할 때 은혜만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을 망하게 합니다. 예레미야13-15 참조.
제대로 된 파수꾼이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 달려가서 조언을 구하고, 그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세우신 파수꾼의 음성을 잘 듣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6:17참조. 솔로몬의 아가에 나오는 이 여인은 파수꾼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파수꾼은 제대로 대답해 주지 못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인이 파수꾼을 지나치자마자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문제를 잘 이해해 주고, 주님을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파수꾼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내 혼이 사랑하는 이를 만나서 그분을 붙잡고 내 어머니의 집 곧 나를 수태한 어머니의 침실로 모셔들이기까지 가지 못하게 하였노라.](4). 주님은 자신을 찾아 나서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주] 네 하나님을 찾게 되리니 만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리라.](신4:29),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사랑하나니 일찍 나를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나리라.](잠8:17)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어머니 집은 갈라디아서 4:26의 참조 구절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갈4:26). 땅에 있는 시내산(아라비아에 있는)은 율법 아래, 속박아래, 종노릇하는 하갈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가리켰듯이(갈4:25),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성령 아래, 약속 아래, 자유 아래 있는 믿음의 여인 사라와 그녀의 아들 이삭을 예표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삭과 같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입니다. 여인은 내 어머니의 집, 곧 나를 수태한 어머니의 침실로 모셔들이기까지 가지 못하게 하였노라고 말함으로 다시는 교제의 단절을 맛보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내게서 떠나고, 성령이 소멸되는 그런 체험을 겪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30:7에서 다윗의 절규를 참고할 것. 욥의 고뇌-욥23:8,9. 이들은 구원받지 못해서 죄로 인해 고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친교의 단절로 인해 고뇌했습니다. 여인은 주님을 다시 만나자 야곱이 얍복강에서 주님과 씨름하며 밤새 붙들 듯이 붙들어 두겠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의 암사슴들을 두고 너희에게 당부하노니 나의 사랑/하는 이/가 기뻐하시기 전에는 그분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지니라.](5). 이 말은 2:7에서 한번 했던 말입니다. 주님과 친교가 깊어지면 주님의 관심과 주님의 일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6절은 재림의 유형을 보여 줍니다.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모든 향가루로 향내를 풍기며 연기 기둥들같이 광야에서 나오시는 이가 누구시냐?](6). 연기 기둥들같이 광야에서 나오시는 이는 바로 재림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신명기 33:2, 민수기 9:15-23 참조. 광야에서 연기 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움직이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이방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의 침상은 주님의 침상을 예표합니다. 솔로몬의 침상을 호위하는 병사가 60명이었는데, 이는 다윗 때에 30명보다 두 배나 많습니다. 우리 주님이 침상을 가진 것처럼 마귀 역시 침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잠언 7:6, 계17:2을 참조할 것. 8절은 용사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모두 칼을 들고 전쟁에 능숙한 자들이라. 그들이 밤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저마다 넓적다리에 칼을 찼느니라.](8). 용사들은 당연히 칼을 들어야 합니다. 이들은 전쟁 전문가들이며, 밤에 경비를 서기 위해 넓적 다리에 칼을 찼습니다. 이는 전쟁의 사람이신 우리 주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오 지극히 능하신 이여, 왕의 검을 넓적다리에 차시고 왕의 영광과 위엄을 두르소서.](시45:3). 칼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언제나 무사가 칼을 지니고 다니듯이 성경을 지니고 다녀야 합니다. 전쟁에 능숙해 지는 것은 반복적인 훈련과 실전의 경험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다루기 위해 성경 책을 가지고 씨름하는 훈련과 구령이란 실전전 경험을 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밤의 두려움으로 인해 저마다 넓적다리에 칼을 찼느니라”고 했는데, 이는 교회 시대가 밤인 우리에게는 더욱 깊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밤을 잘 보내기 위해서 늘 칼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며, 전쟁에 능한 전사(戰士)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성경 안에는 온갖 악한 영적 군대들을 물리치고, 내 생각의 영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이길 수 있는 약속들과 능력과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은 침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이 수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9), 예루살렘의 딸들을 위하여(10) 만들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역사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정혼하던 날 밧세바가 왕관을 씌워 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언적 의미로 본다면 솔로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신부는 교회를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약간의 문제가 터집니다. 영적으로 억지를 부려서 말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본문을 훼손하는 해석은 하지 않겠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스도와 교회의 완전한 연합 등으로 해석하는 식이 있다).
4장입니다. 1-5절은 한편의 연애시 같은 내용입니다. 다만 그 비유법이 오늘날 우리의 정서에 와닿지 않습니다. 한국식 표현법으로는 주로 삼단같은 머리결, 앵두같은 입술, 아미같은 눈썹, 백옥같은 피부란 식으로 미인을 표현하지만 솔로몬은 길르앗 산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염소떼같은 머리 털(1), 비둘기 눈(1), 털을 가지런히 깍은 양떼같은 이(2), 주홍색 실같은 입술(3), 석류 조각같은 관자놀이(3), 다윗의 망대같은 목(4), 백합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둥이 노루새끼 같은 젖가슴(5)으로 신부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저는 이것만 읽고는 어떤 모습의 미인인지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묘사한 신부의 미, 아름다움에는 순결한 아름다움, 열매맺는 건강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둘기 같은 눈은 한번에 하나만 바라보는 단일한 눈(single eye)이며,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눈입니다. 2절에서 양떼같은 이는 하얀 미백의 이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맺는 이입니다. 서로 물고 뜯어 같이 망하는 늑대같은 이가 아니라 쌍둥이를 낳는 양떼같은 이를 말합니다. 주홍색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합니다. 우리 입술의 모습은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입술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운 말이 나옵니다. 3절에 [네 말은 고우며](3)라고 했는데, 이는 아름다운 여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입술에서 나올 말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남자의 입보다 여자의 입에서 욕이나 험담이 나오면 우리는 더욱 놀랍니다. 여자의 입에서 음담패설이 나오고, 험한 소리가 나오면 뭔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자의 말투는 남자의 말투와 다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에 합당한 말투(말씨)를 가져야 합니다. 골로새서4:6참조. 에베소서5:12참조. 목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마음이 완악하면 목이 곧다고 표현합니다(출32:9). 신부의 목을 다윗의 망대같은 목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악을 향해서는 단호하게 전쟁을 벌이고, 주님을 향해서는 겸손하게 순종하는 의지의 소유자란 의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번에는 가슴을 두 마리 쌍둥이 노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마 한국이나 미국의 처녀들에게 이런 비유를 쓰면 좋아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쌍둥이 노루에 대해서 다양한 영적 적용을 합니다. 이것은 말씀과 기도다. 이것은 주의 만찬과 침례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자라지 않습니다. 쌍둥이 노루 새끼는 자라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믿음과 사랑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마치 양 젖가슴처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자라납니다. 골로새서1:3-4,에베소서6:23, 살전5:8--믿음과 사랑의 흉배(**주목하라-흉배는 가슴이다). 살후1:3, 딤전1:14, 2:15, 딤후1:13, 딛3:15을 참고할 것. 우리의 가슴은 점점 넓어져야 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점점 채워지고, 자라나야 합니다.
6절입니다. [날이 새고 그림자들이 달아나기 전에 내가 몰약의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6). 이 표현은 이미 2:17에 나온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같은 표현이 반복될 때는 영적인 교훈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여인은 주님의 요청과 제안에 올바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올바른 반응을 보입니다. 2:17에서 여인은 혼자 침실에 머물며 주님께 ‘날이 새고 그림자들이 달아나기 전까지 돌이키소서(돌아오서)’라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내가...가리라’고 말합니다. [내가 몰약의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6)는 것은 훌륭한 결단입니다. 몰약은 성경에서 고난을 예표하며, 유향은 기도를 예표합니다. 여인은 몰약의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겠다고 함으로써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며, 기도하겠다는 바른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전에 여인이 자신의 처소에 만족해서 머물겠다고 했을 때 떠나셨지만 여인이 부지런히 주님을 찾아 나서자 만나 주시고 새롭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이 여인과 같이 [내가 몰약의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6)는 결단을 하기를 원하시며, 행동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로써 여인은 한 단계 믿음이 성장했으며 주님의 칭찬을 듣게 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 사랑아, 네가 참으로 어여쁘니 아무 흠이 없구나.](7). 주님은 여인이 올바른 믿음의 결단을 했을 때 칭찬해 주셨고,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 주님이 주신 의로 인해 흠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시기 때문에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이런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9:24과 민수기 23:21을 비교할 것. [그분께서는 야곱의 불법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잘못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주]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의 외치는 소리가 그들 가운데 있도다.](민23:21).
8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다시 한번 ‘...가자’라며 초청하십니다. [내 정혼자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의 꼭대기에서, 스닐과 헤르몬의 꼭대기에서, 사자의 굴들과 표범의 산들에서 바라보아라.](8). 아마나의 꼭대기, 스닐과 헤르몬의 꼭대기는 모두 높은 곳들입니다. 주님은 더 높은 곳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산들은 정상이 높아서 늘 눈이 있는 곳입니다(렘18). 주님과 함께 더 높은 곳으로 가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마냥 꿈과 행복과 낭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자의 굴들과 표범의 산들을 보게 됩니다. 사자는 울부짖는 사자로 마귀를 예표합니다. 표범 역시 적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렘13:23, 호13:7, 계13:2).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영적인 위험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더욱 많은 영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면서, ‘나와 함께 가는 그곳에는 사자와 표범들이 있는 곳이다’라고 경고를 주십니다. 이런 곳으로 주님이 부르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9절입니다. [내 누이, 내 정혼자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한쪽 눈과 네 목의 목걸이 하나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9). 여기서 내 누이와 내 정혼자는 동격입니다. 누이가 바로 정혼자인데 이는 고린도전서 9:5에서 바울이 말한대로입니다(자매된 아내란 표현에 주목할 것). 바울 사도가 이 땅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사모했듯이(고후5:8, 빌1:23), 주님 역시 신부와 결합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주님은 우리 전체가 아니라 우리의 작은 부분만 보시고도 마음이 빼앗길 정도로 신부를 사랑하십니다. 한쪽 눈과 네 목의 목걸이 하나는 전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측면에서 본 모습입니다. 우리는 곧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10-11절은 신부를 즐기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내 누이, 내 정혼자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어여쁘냐! 네 사랑이 포도즙보다 훨씬 낫구나! 네 향유 냄새가 모든 향료보다 낫구나! 오 내 정혼자야, 네 입술에서는 벌집같이 꿀이 떨어지며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옷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10-11). 주님을 향한 성도들의 사랑은 포도즙보다 사람을 훨씬 더 기분좋게, 흥분하게 만듭니다. 성도들이 내 뿜는 향유 냄새는 모든 향료보다 낫고, 옷에서 나는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같다고 합니다. 사업가들은 돈 냄새를 잘 맡습니다. 수사관들 역시 냄새를 잘 맡습니다. 어딘가에 냄새가 난다고 하면 거기서부터 파헤치고 듭니다. 냄새란 말은 일상 관용어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풋풋한 풀내음 같다고 한다든지, 전쟁이나 큰 다툼을 일컬어 피냄새가 진동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주님은 성도들로부터 모든 향로보다 나은 냄새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의 옷은 레바논의 향기같습니다. 우리 입술에는 벌집같이 꿀이 떨어지고,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접하면서 번뜩 로마서 3:13이 떠오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돌무덤이라. 그들이 자기 혀로 속임수를 쓰나니 그들의 입술 밑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롬3:13). 이것이 전에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벌집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맛입니다(시19:10, 119:103). 주님의 말씀은 순수한 젖입니다(벧전2:2). 성도들의 혀 밑에 꿀과 젖이 있다는 것은 바로 ‘말씀의 교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12절은 주목해야 할 세 단어가 나옵니다. ‘둘러싸인’, ‘닫힌’, ‘봉한’이란 말입니다. [내 누이, 내 정혼자는 둘러싸인 동산이요, 닫힌 옹달샘이요, 봉한 샘이로구나.](12). 탁터진 동산이 아니라 둘러싸인 동산입니다. 이는 개인 별장처럼 은밀한 곳입니다. 열린 샘이 아니라 닫힌 옹달샘입니다.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봉한 샘 역시 아무나 와서 퍼 갈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신의 소유만으로 부르셨고,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매(부인)을 아무나 건드릴 수 없듯이 주님의 신부, 주님의 정혼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인치셨습니다. 아무나 건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창녀일 뿐입니다. 주님의 침상과 달리 마귀의 침상에는 누구나 오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아무나 불러 들여, 음란한 짓을 벌입니다. 13-15절은 우리 성도들이 맺어야 할 열매에 관련한 것들입니다. [네 초목들은 아름다운 열매를 지닌 석류나무와 나드 향을 내는 고벨화와 나드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나무와 모든 유향나무와 몰약과 알로에와 으뜸가는 모든 향료요, 동산들의 샘과 생수의 우물과 레바논에서 흘러나오는 시내들이로구나.](13-15). 주님은 둘러싸인 동산 안에, 닫히 옹달샘, 봉한 샘으로부터 많은 열매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생명의 흐름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으실 것입니다.
16절은 여인의 응답입니다. 주님께서 동산에서 많은 열매를 기대하시자 그에 합당한 열매를 내겠다는 것입니다. 북풍과 남풍은 성령을 예표합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주로 성령을 예표합니다. 성령을 통해 열매를 맺고, 그 열매의 향기를 흘려 보내고, 주님을 초청해서 그 열매를 드시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오 북풍아, 깨어라. 너 남풍아, 오라. 내 동산에 불어서 동산의 향료를 흘려 보내라. 나의 사랑하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동산에 들어오사 자신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드시게 할지니라.](16).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존재 목적을 상실한 나무일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는 비결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므로 이 시간 몇 가지 비결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말씀) 안에 꾸준히 거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둘째, 한 알의 밀 알로써 죽는 것입니다(요12: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셋째,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우리 마음 밭이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100배, 60배, 30배 열매맺는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인내함으로 열매를 거둡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랫동안 인내하느니라.](약5:7).
다섯째, 많이 뿌려야 합니다.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은 종류와 양에서 다 해당됩니다. [씨 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시는 분께서 이제 너희 양식으로 빵도 주시고 너희가 뿌린 씨도 번성하게 하시며 너희의 의의 열매도 늘어나게 하시리니)](고후9:10).
여섯째, 부지런히 나누어 줌으로써 열매를 거둡니다. [또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도 필요한 용도를 /채워 주기/ 위해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 그리하여야 그들이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아니하리라.](딛3:14).
일곱째, 주의 징계를 통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제 징계가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슬픈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주님은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쳐내시고, 가꾸십니다. 징계로 인한 슬픔은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향기를 맡으시고, 열매를 드시도록 초청할 수 있습니다.
열매없는 어둠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의의 열매로 풍성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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