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구약개론-이사야(01)

말씀: 이사야 개론, 1장
요절: 이사야 1:16-18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를 대언서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을 대선지서라고 하고 나머지를 소선지서라고 합니다. 연대기적으로 대언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북왕국이 망하기 전에 이스라엘에 대언자로 활동했던 대언자들로는 엘리야, 엘리사, 요엘, 요나, 아모스, 호세아, 나훔입니다.

성경을 기록했던 대언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완악한 죄에 대한 심판을 경고했고, 호세아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회개를 촉구했고,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 기울어가는 남왕국 유다의 대언자들로는 요엘, 오뱌다, 이사야, 미가 등이었습니다. 요엘은 주의 날과 민족들의 심판에 대해서, 오바댜는 에돔의 운명에 대해서, 이사야는 구원자의 오심과 천년 왕국에 대해서 전했고, 미가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주님과 그의 왕국에 대해 대언했습니다.

◆ 유다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기 직전에 활동했던 대언자는 예레미야, 나훔, 하박국, 스바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회복, 먼 훗날의 영광에 대해 대언했고, 나훔은 니느웨와 앗시리아의 심판에 대해 대언했으며, 하박국은 주의 왕국과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대언했으며, 스바냐는 남은 자들의 구원과 복에 대해서 노래했습니다.

◆ 포로기간 중의 대언자로는 다니엘과 에스겔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이방인의 때와 마지막 날 세워질 왕국에 대해서 기록했고,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복, 약속의 땅에 세워질 왕국, 천년 왕국의 성전, 백성들의 회복 등에 대해서 대언했습니다.

◆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활동했던 대언자로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입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대언자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성전 재건을 주도하며 이스라엘의 미래를 대언했습니다. 학개는 성전 재건과 다가올 왕국에 대해서, 스가랴는 가지로서의 메시야와 왕과 제사장을 겸직한 주님에 대해 대언했고, 말라기는 민족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과 경고를 담고 있으며 의의 태양으로서 오실 주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연대기적으로 배열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계시의 점진적 발전과 확대에 따라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총 66장이며 킹제임스 성경 기준으로 1,292절, 37,044단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4대에 걸쳐 대언자의 직분을 수행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쓴 책입니다. 이사야는 대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였습니다(사26:22,32:32). 이사야는 웃시야(787-758 B.C.), 요담(758-743 B.C.), 아하스(743-726 B.C.), 히스기야(726-698 B.C.)로 이어지는 남왕국 유다의 4대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당시 활동하던 대언자로는 아모스, 호세아, 미가 등입니다. 이사야는 무려 5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로 활동했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가 죽던 해에(6:1) 대언자의 사역을 시작해서 히스기야가 죽은 후에 자신의 사역을 마쳤습니다. ISAIAH는 구약의 이름이고 헬라어로는 ESAIAS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는 모두 이렇게 씌었습니다.

이사야란 이름은 ‘주는 나의 구원이시다.’란 의미입니다. 이 말은 여호수아란 이름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물론이려니와 침례인 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사역, 십자가의 죽으심 등에 관련된 그분의 사역과 더불어 천년 왕국과 그 이후까지 인류의 전 미래에 걸친 광범위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침례인 요한은 이사야 40:3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야를 거부할 것에 대해 주님은 마태복음 15:7,8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롬10:16참고-사53:1 인용). 이사야는 주님이 세우실 천년 왕국에 대해서 많이 썼는데 예를 들면 11:1-9, 29:17-24, 30:18-24, 32:1-20, 35:1-10, 54:1-8, 60-62장, 66:5-13등입니다. 그리고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는 65:17, 66:22등에서 기록했습니다./찾아서 읽어 볼 것.

이사야가 대언자로 활동할 당시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앗시리아가 세력을 팽창했고, 강력한 정복전쟁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나 도적적으로도 극도로 타락했습니다. 결국 이사야 대언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북 왕국은 멸망했고(721B.C), 이사야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왕국 유다 역시 멸망했습니다. 이런 때에 주님이 주신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멸망하지 않은 왕국입니다.

이사야에 관련된 외경으로는 ‘이사야의 승천’(Ascention of Isaiah)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승천하신지 약 150년이 지난 뒤 씌어졌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이사야는 톱에 켜져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히11:37).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사실처럼 유포하여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저자는 대언자 이사야입니다(1:1,21:,13:114:28,15:1,17:1,19:1,21:1, 11,13, 22:1,23:1). 이는 주님이 직접 확인하신 내용이며, 사도 바울 역시 그렇게 인정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이사야의 단일 저작설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1-39장까지는 이사야가 썼지만 40-66장은 정체 불명의 제2 이사야가 썼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론이 나온 배경에는 첫째, 문체상의 커다란 차이 때문입니다. 1-39장과 40-66장의 문체는 누가 읽어보아도 문체의 차이를 인정하는데, 이는 기록 목적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읽어본 사람들은 문체의 차이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란 표현은 1-39장까지 12번이 나오며, 40-66장까지 13번이 나옵니다. 이사야를 제외하고는 성경 전체에 6번 밖에 없습니다. 이는 동일 저자임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불을 자주 언급했는데 이는 이사야의 전반부만 아니라 후반부에도 많이 나옵니다(1:31, 10:17, 26:11, 33:11-14, 34:9-10, 66:24). 또 자주 등장하는 어휘는 ‘주의 산’이란 표현인데 이 역시 전, 후반부에 골고루 나옵니다(11:9,27:13, 56:7, 57:13, 65:25, 66:20). 문체의 문제를 삼는 사람들은 성경을 깊이 있게, 반복적으로 많이 읽어 보지 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라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다음 구절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문체가 얼마나 일치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1 vs 66:24-They have rebelled(transgressed) against me. 1:5-6 vs 53:4-5- 죄악으로 인해 얻은 죄인들의 상처 vs 죄를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 5:27 vs 40:30- 읽어 보라. 동일한 문체이다. 6:1 vs 52:13; 57:15-높이 들린, 나는 높고 거룩한...역시 동일 어휘, 동일 문체이다. 6:11-12 vs 62:4- 황폐한 땅, 버림 받은...역시 동일 어휘임. 11:1 vs 53:2, 11:6-9 vs 65:25, 11:12 vs 49:22, 35:10 vs 51:11 절 등은 놀라울 정도의 같은 문체입니다. 이로써 문체로서 저자를 의심하는 일은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둘째, 역사적인 문제입니다. 앞 부분에는 앗시리아의 왕 산헤드립이 등장합니다(36:1 참조). 히스기야 왕이 산헤드립에 의해 포위를 당한 때는 715 B.C 경이었습니다. 반면 44:28절에 다른 이방 왕이 등장하는데 ‘고레스’입니다. 고레스는 이사야가 씌여진 시점과는 약 150년 후의 인물입니다. 고레스는 다니엘 말년에 등장하는 인물이며, 에스라 1:1에 이스라엘의 귀환 칙령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1-39장과 40-66장은 다른 시기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고레스에 관한 이야기가 성경의 예언임을 무시한 해석입니다. 사람들은 예언의 정확도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사야가 고레스가 태어나기 150년 전에 고레스란 왕의 이름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장에 일고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미리 씌어진 역사책입니다.

셋째,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이사야 9:6에는 ‘화평의 통치자’로서의 메시야가 등장합니다. 반면 43:16-17, 44:24, 45:7-8 등에는 진노하는 메시야가 나옵니다. 앞 부분에는 화평의 통치자가 나오는데 뒷부분에는 심판하는 메시야가 나오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람이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이사야 앞부분 역시 철장으로 다스리는 메시야가 주류를 이룹니다(11:4 참조).

우리는 이사야의 저작설을 의심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사실은 하나님도 성경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오해에서 빚어진 것입니다.(참고: 마13:14-사6:10인용, 눅4:17-61:1, 행8:28-33 -사53:7,8인용, 롬10:20,21-사65:1,2, 눅3:4,5-사40:4인용. 이런 구절들은 이사야 전반부, 후반부를 넘나들며 인용되었으며, 신약에서 대언자 이사야라고 인용된 것을 볼 때 우리는 이사야의 저자는 이사야 한 명 뿐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사야 전체 개요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1-35장은 이사야의 시대에서 본 예언들입니다. 1-12장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련된 예언들입니다. 13-23장은 이스라엘을 대적한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과 관련된 예언입니다. 24-27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의 영광을 노래했는데 왕국의 예언입니다. 28-35장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시고, 앗시리아에 대한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36-39장은 삽입 부분으로 역사적인 내용으로, 히스기야 왕에 관한 것입니다. 36-37 두 장은 믿음으로 앗시리아를 물리친 히스기야의 승리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록이며, 38-39장은 승리 이후에 실족한 히스기야 왕의 실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바빌론 사신들에게 왕의 보고를 보여 줌).

40-66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예언입니다. 40-48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하며 참 하나님과 이방인들의 우상의 대조를 보여 줌으로써 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조명입니다(41;14,16; 43:3, 44:6. etc. 이스라엘, 야곱...이란 말에 주목할 것).

49-57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여 줌으로써 아들이신 하나님이신 주님에 대한 조명입니다(사53:5).

58-66장은 미래 왕국의 영광에 대한 것인데 성령에 대한 조명입니다(59:19,21; 61:1, 63:10,11,14).

주님은 40:1에서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0-66장은 위로의 말씀입니다. 신약 성경 역시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40장은 구속의 위로(40:9-11), 41장은 변호자 되신 주님으로 인한 위로(41:1), 42장은 주의 종으로 인한 위로(42:1), 43-45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으로 인한 위로(43:1), 46-48장은 우상들의 무너짐으로 인한 위로(46:1,47:1,48:14), 49-57장은 메시야-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인한 위로, 58-66장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회복될 영광의 왕국으로 인한 위로입니다. 이런 모든 위로는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사야서의 구성은 성경 전체의 구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사야 66장은 성경 66권과 연관이 있습니다. 1-39장의 전반부와 40-66장의 후반부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의 나누어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이사야 1장을 보시면 창세기와 유사점이 있습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입니다. 이사야 1:2은 하늘들과 땅들이 나옵니다. 이사야 2장은 출애굽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고,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3을 보십시오. 이사야 3장은 레위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레위기는 율법 가운데서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고, 각종 음식과 위생 규례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특히 문둥병에 대한 규례가 엄하게 나옵니다. 이사야3:17을 보십시오. “정수리를 치사 상처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란 부분을 보십시오. 이것은 제사장들이 문둥병의 발병 유부를 감별하는 법입니다. 이사야 4장은 성경의 4번째 책인 민수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민수기는 출애굽한 사람들의 명단이 각 지파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란 뜻이 바로 수(numbers)란 말입니다. 이는 인구 조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사야 4:3을 주목해서 읽어 보십시오(기록된...). 이사야 5장은 신명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신명기는 제2의 계명이란 뜻이며, 책 전체가 노래란 뜻입니다. 신명기 31:30을 보십시오. 모세는 자신이 기록한 성경을 이 노래의 말씀들이라고 했는데, 이사야 5:1 역시 ‘노래를 부르되...이 노래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성경 각권이 이사야의 각장과 연관시킬 수 있습니다. 40장을 보십시오. 40장은 갑자기 내용이 바뀝니다. 이는 말라기 이후 마태복음의 내용이 확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40:3을 보십시오. 성경의 40권째 책인 마태복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3:3을 보십시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은 성경 속에 자체적으로 이런 진리들을 내포시켜 놓으심으로 성경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의 41번째 책인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종으로 묘사한 책입니다. 이사야 41:8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의 나의 벗 아브라함의 씨야](사41:8)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로 묘사합니다. 이사야 42:13을 보십시오. 여기서 주님은 ‘용사’(mighty man-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43번째 책인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주님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11절을 보십시오. [나 곧 나는 주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43:11). 성경의 마흔 네 번째 책인 사도행전의 핵심은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증거와 증인이 핵심 단어입니다. 이사야 44:7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해야 할 일이며,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의 마흔 다섯 번째 책인 로마서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의(롬1:17)이며, 하나님의 의(롬10:1-5)이십니다. 이사야 45:8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신약 성경 역시 이사야의 각 장과 연관 지을 수 있음을 배웁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기사입니다. 이사야의 마지막 장인 66장 역시 새 하늘들과 새 땅에 대해 말합니다(사66:22). 우리는 성경 자체 내에 숨겨진 이런 진리를 일컬어 성경 ‘자체 내장 사전’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스스로 성경을 정의하며, 주석하고, 설명합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조명해 주시고, 자신이 세우신 합당한 목자(렘3:15)와 교사들을 통해 이런 것들로 먹이십니다.

이사야에서만 나오는 특징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문자적인 예언(사7:14)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이름이 루시퍼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사14:12). 이것은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유일한 이름입니다. 이사야에는 구약 속에 있는 신약의 복음이라 일컫는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완벽한 기록이 있습니다(사52:13-53:12). 구약의 모든 대언서에 구원(SALVATION)이란 말이 총 33회 등장하는데 그중 26회가 이사야에 나옵니다. 이사야는 신약 성경에서 시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용된 성경입니다.

1:1을 보십시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상이라.](1). 이사야서는 ‘이사야의 환상’(대하32:32)이라고 불립니다. · 보라, 이제 히스기야의 남은 행적과 그의 모든 선한 일이 아모스의 아들 대언자 이사야의 환상과 유다와 이스라엘의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느니라.(대하32:32). 다니엘이나 에스겔이나 잇도(대하9:29)와 같이 환상들(복수형)이 아니라 환상(단수)입니다. 여기서 환상(vision)이란 곧 말씀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씀은 듣는 것이지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뿐만 아니라 볼 수 있는데 성경은 그것을 일컬어 환상(vision)이라고 합니다(사2:1, 아모스 1:1, 미1:1참조). ·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말씀이라.(사2:1), · 유다 왕 웃시야 시대,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시대 곧 지진이 있기 이 년 전에 드고아의 가축치는 자들 가운데 거하던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본 말씀이라. (암1:1) ·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주]의 말씀 곧 그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말씀이라.(미1:1). 말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말씀을 통해 휴거와 부활을 봅니다. 우리는 지금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천년 왕국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들음으로써 보게 됩니다. 이렇게 보는 것을 바울 사도는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본다’(고전13:12)고 말했습니다. 말씀에 정통하면 할수록 그 빛은 더 강렬하고,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웃시야는 52년간 유다를 다스린 훌륭한 왕이었지만(왕하15:4) 말년에 주의 말씀을 대적함으로써 문둥병이 걸려 죽었습니다(대하26:16-21). 주님은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사6:1). 경건하고 위대한 왕이 마지막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여 문둥병이 걸려 죽었다는 사실은 유다의 시민들이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충격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존경받은 목사나 부흥사가 AIDS나 살인자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일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사야는 높은 곳에 계신 하늘의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1절을 보면 이사야가 영광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음을 암시해 줍니다. 이사야는 영광의 보좌를 보았고, 스랍들을 보았습니다. 6:3을 보면, “온 땅이 그분의 영광으로 충만하도다”라고 찬양하는데 실상 이사야가 본 온 땅은 불의와 폭력으로 가득찬 땅일 뿐입니다(창6:11).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다스릴 때까지 결코 주의 영광으로 충만한 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관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보십니다.

특히 유다와 예루살렘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비해서는 좀 더 나았지만 죄와 불법으로 점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주의 택함을 받은 곳이었습니다. [오직 예루살렘을 택하여 내 이름을 거기에 두고 또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였으므로](대하6:6).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요, 신앙의 중심지였지만 그들이 한 일은 정반대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향해 [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을 씻어 사악함에서 떠나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 네 헛된 생각이 어느 때까지 네 속에 머물겠느냐?](렘4:14)고 권면했습니다(렘6:8, 7:29, 13:27, 15:5참조). 주님은 예루살렘이 한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병아리를 자기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눅13:34참조). 주님은 예루살렘이 회개하기를 원하셨고, 주님을 영접하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버림으로써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버림받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실 것입니다(슥1:17, 2:12참조할 것).

이사야는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1:2부터 이사야의 대언은 시작됩니다. 2-9절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책망입니다. 첫째, 그들은 주님을 거역하였습니다(2). 둘째,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3). 셋째, 그들은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3). 넷째, 그들은 주님을 버렸습니다(4). 다섯째, 그들은 주의 분노를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습니다(5).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땅은 황폐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병들고 죽었습니다(5-8). 범죄한 국가, 범죄한 가정, 범죄한 개인의 종말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이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되었습니다(10). 다만 소수의 남은 자들 덕분에 아직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심판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9).

9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우 소수의 남은 자라도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같이 되고 고모라같이 되었으리로다.](9). 성경에서 “남은 자”란 말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주님은 ‘남은 자’를 통한 역사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또한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쳐 이르되,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으리라.](롬9:27-사10:22인용)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타락하고, 배교해도 남은 자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로마서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은혜의 택하심에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5). 엘리야 시대 때에 이스라엘이 모두 타락하고 배교했지만 7,000명의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남은 자들이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입니다. 주님은 다수의 무리들이 아니라 믿음을 지킨 소수의 남은 자들에게 영광을 베푸시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사야에서 다음 구절들을 참조할 것. - 4:3, 7:22, 10:20-22, 11:11,16; 30:17, 37:31,32.

주님은 이스라엘의 배교와 타락을 눈감고 상관하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첫째,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생제를 받지 않으셨습니다(11-15). 둘째, 기도를 듣지 않으셨습니다(15). 셋째, 복수하시고 심판하십니다(24-25, 28-31). 주님의 심판은 멸망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회복이 목적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1:16-18,26-27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시고 부르십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씻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위를 버리고 악을 행하기를 그치며 선을 행하기를 배우고 공의를 추구하며 학대받는 자들을 구제하고 아버지 없는 자들을 /위하여/ 재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주]께서 이르시되,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辯論)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지리라/.](16-19). 주님은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회복의 길을 열어 주시며, 은혜를 얻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발휘해야 합니다. 순종하며 좋은 것을 주십니다. [너희가 즐거이 순종하면 땅의 좋은 것을 먹을 것이로되](19). 거절하면 망합니다. [너희가 거절하고 거역하면 칼에 삼킴을 당하리니 이는 [주]의 입이 그것을 말씀하셨음이니라.](20).

25-27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강력한 징계의 심판을 통해서 처음처럼 회복시키시고, 구속하실 것입니다. ‘회복’은 소선지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회복은 건강이 나빠졌을 때 다시 건강을 찾을 때 쓰는 말인데 모든 분야에서 기준이 되는 시점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요엘 3장, 아모스 9장, 미가 4장, 스바냐 3장은 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룬 장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듣고,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처음 상태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신약 성도들이 실족했다가 다시 회복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들은 동료 성도들이며 목회자입니다(갈6:1-restore, 딤후2:25,26-recover 찾아 볼 것).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더욱 함께 모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9-30절의 상수리나무는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사44:14, 겔6:13, 27:6참조). 정원들은 groves(숲들)로서 우상을 숭배하던 곳입니다. 작은 숲은 주님이 심지도 말고 베어 버리고, 찍어 버리고, 태워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출34:13, 신7:5, 12:3, 16:21). 이스라엘이 배교할 때면 언제나 이 작은 숲이 등장합니다(삿3:7). 주님은 상수리나무와 동산들과 함께 다 태워 버리십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 우상과 함께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회개함 없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도 타락하고 범죄한 교회를 향해 회개를 명하고 계십니다(계2:5,16,21,22,3:3).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그러하듯이, 범죄한 성도들 역시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게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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