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이사야 2:1-5:10
요절: 이사야 4:2-3
이사야 2장입니다. 2:1은 1:1과 비교해 볼 때 그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이사야는 주님이 주신 환상을 보았는데(1:1), 이번에는 주님이 보여 주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말씀과 환상은 같은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환상이 없습니다. 사무엘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주]를 섬기더니 그때에는 [주]의 말씀이 희귀하여 열린 환상이 전혀 없었더라.](삼상3:1).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시대보다 주의 말씀이 희귀하여 열린 환상이 없던 그런 시대가 정말 두려운 시대입니다. [환상이 없는 곳에서는 백성이 망하려니와 법을 지키는 자는 행복하니라.](잠29:18). 물질 문명이 발달한 이 시대에 우리 교회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각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풍성이 거하는 것이며, 젊은이들이 성경을 통해 주의 환상(Vision)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가 본 말씀은 마지막 날들에 관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마지막 날들, 주의 날, 그날 이란 표현이 나올 때면 그것이 지금 교회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환란 시대, 천년 왕국 시대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2, 11, 17절을 보시면 ‘마지막 날들에’, ‘그 날에’라고 그 시점을 못박아 두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이 날이 바로 ‘주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2:1-5절은 바로 천년 왕국 때의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년이란 말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만 여섯 번이나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예언의 말씀을 공부할 때 그 시기와 대상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천년 왕국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은 지상의 모든 민족의 머리가 됩니다(신28:13).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지상의 모든 민족들과 백성들은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2-3). 이 때 주님께 경배하러 올라오지 않는 자들은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땅의 모든 가족들 중에서 그 왕 곧 만군의 [주]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주께서/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 즉 만일 이집트 가족이 올라가서 그/곳에/ 이르지 아니하면 비를 받지 못하리니 곧 [주]께서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교도들을 치시는 재앙을 거기에 내리시리라.](슥14:17-18). 역사상 유다와 예루살렘이 이런 위치를 차지해 본 적이 없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정치인들이 만들겠다고 공언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은 주님이 오셔서 세우는 그 왕국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4절 후반부는 이사야의 벽이라고 불리는 U.N 빌딩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세상에 이런 평화는 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가능합니다. 의는 평화보다 앞섭니다. (약3:17, 롬14:17, 히7:2, 사32:17을 참고할 것.-의의 도래없는 평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천년 왕국 때 세상은 완벽한 평화가 오며, 전쟁대신 주님을 향한 예배만이 있을 것입니다. (5절 참고할 것).
6-9절은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미래가 아닌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죄로 인해 버림을 받았습니다. ① 그 땅에는 우상들이 가득했습니다. 이들 우상은 ‘동방에서 온 것들’로 지금 말로 하면 저질 외래 문화의 수입입니다. 유다는 이방 종교를 수입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의 대언자 대신 점쟁이들이 가득했습니다(6). ②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한 이방 민족들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7). ③ 그들이 도움을 구하는 나라에는 우상 숭배로 가득 찬 나라였습니다(8). 주님의 백성이 주께서 주신 땅에 살면서 주를 버리고 이방 신들과 이방 민족들과 연합할 때 심판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10-22절은 환란 때의 예언입니다. 11,17절은 천년 왕국 때의 일입니다. 11절의 ‘그 날에’, 12절의 ‘주의 날에’, 17절의 ‘그 날에’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말에 특별히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교회의 휴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고전1:8,빌1:6,10; 2:16; 살후2:2). 이 날은 성도들이 주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반면 ‘[주]의 날’은 환란, 지상 재림, 천년 왕국까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사야13:6,34:8, 렘46:10, 겔14:5, 벧후3:8참조할 것.
환란 때 일어날 세 가지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① 주의 두려움과 영화로움으로 두려워 숨게 됩니다(9,19,21). 주님은 무섭게 땅을 흔드십니다. 이 때 당할 사람들의 두려움이 어떠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말씀을 믿음으로 주님을 알든지,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든지 둘 중에 한 가지입니다.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고, 그분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무서운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호10:8, 계6:15,16). ② 사람들의 교만과 거만함이 철저히 낮추어질 것입니다(11-12). 교만은 주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 가운데 으뜸입니다(잠6:17, 8:13, 15:21참조). 이 땅에서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들은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③ 우상들이 철저히 제거될 것입니다(18). 주님이 심판을 내리시고, 철저히 부수시는 것 가운데 주목할 한 가지는 그림입니다(16). 한 장의 그림은 천 마디의 단어보다 더 위력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그림들은 오늘날 말로 하면 영화, 잡지, 사진, 만화 등이 해당됩니다. 영화와 연극을 비롯해 수많은 볼거리들이 눈을 통해 들어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주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해야 할 임무 중에 하나가 바로 그림을 파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땅의 모든 거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며 그들의 그림과 부어 만든 형상을 다 멸하고 그들의 산당을 다 허물며](민33:52).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 죄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롯을 보십시오. 베드로후서 2:8, [(이는 이 의로운 사람이 그들 가운데 거하여 그들의 불법 행위를 보고 들으면서 날마다 자기의 의로운 혼을 괴롭게 하였음이라.)](벧후2:8). 롯은 차라리 눈이 먼 맹인이었다면 그의 혼이 덜 타락했을 것이고, 덜 괴로웠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파괴해야 할 그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서점, 상점, 인터넷, 잡지, 소설, 캐털록, 캘린더에 이르기까지 혼을 괴롭히는 그림들이 널려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우상들을 철저히 제거하십니다. 신약 성도들 역시 우상 숭배를 철저히 피해야 합니다. 고전10:7,14참조. 신약 성도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우상은 탐욕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사도 요한은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들을 멀리하라. 아멘.](요일5:21)고 권면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배하려고 만든 우상들을 그것도 비싼 금과 은으로 만든 것들을 두더쥐와 박쥐들에게 던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오랫동안 창조주이신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섬기고 경배해 왔습니다. 오늘날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Spider Man, Bat man, Super man, 닌자 거북이, ...등 비참하고 보잘 것 없는 동물들에 신성을 부여해 숭배하는 버릇은 여전합니다. 한국에는 10장생1)이라고 해서 동식물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가 있습니다. 금으로 거북이를 만들거나 송아지를 만드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22절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구절입니다. 하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은 계속해서 하나님대신 사람을 의지함으로써 멸망했습니다.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통치자들을 신뢰하지 말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의 아들도 신뢰하지 말지니](시146:3)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신뢰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를 신뢰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시118:8),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사람을 신뢰하며 육체를 자기 무기로 삼고 마음이 [주]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렘17:5).
이사야 3장입니다. 3장 역시 ‘그날에’(7)라고 말함으로써 환란 때에 관련된 예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과 유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웃 나라들을 의지하고, 우상을 의지하고, 사람들의 힘을 의지하고, 군대를 의지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3:1-3절은 유다가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것들입니다. ① 양식입니다. -모든 빵과 모든 물(1). 사람들은 흔히 양식만 풍부하면 별 걱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② 군대입니다. -용사와 전사. ③ 사람들(정치, 종교 지도자들)- 대언자와 분별있는 자와 원로와 오십인 대장과 귀인과 모사와 노련한 장인과 달변의 연설가. 양식과 군대와 지도자들이 충분히 있다면 하나님이 없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내리실 재앙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들의 의지하고 의뢰하던 것들을 제거해 버리십니다. 첫째, 나이 어린 통치자를 주십니다. [또 내가 아이들을 주어 그들의 통치자가 되게 하며 아기들로 하여금 그들을 다스리게 하리니 백성이 학대를 받되 각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각 사람이 자기 이웃에게 학대를 받으며 아이가 원로들에게 교만히 행하고 천한 자도 존귀한 자에게 그리하리라.](4-5). 아이가 통치자가 되는 것은 New Leadership이 아니라 바로 주의 심판의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40대 지도자, 30대 지도자가 등장하는 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오 땅이여, 네 왕이 어린아이이며 네 통치자들이 아침에 먹으면 네게 화가 있으리로다!](전10:16)고 말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오늘날 세상과 비슷합니다.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이 지도자가 되는 세상입니다. 나라의 정치는 물론이고 교회에도 여자 집사, 여자 장로, 여자 목사를 세우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을 탄력있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지혜인줄 압니다. 이것은 주님이 교회에 주는 심판이요, 징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양식을 없애버리십니다(7). 경제를 부흥시켜 줄 지도자를 찾지만 얼마나 난국인지 아무도 지도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사람의 힘으로 회생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6:26, 에스겔4:16, 5:16참조할 것. 사람들은 먹고 마실 것만 있으면 마음이 교만해 집니다. 빵과 물은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지만 주님은 이것을 치워 버리십니다.
셋째, 멸망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는 파멸하고, 몰락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군대가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울 것입니다(8). [이는 예루살렘이 파멸 당하고 유다가 몰락하였음이니 그 까닭은 그들의 혀와 그들의 행위가 [주]를 대적하며 그분의 영광의 눈을 자극하여 격노를 일으키기 때문이라](8). 주님은 이들의 구체적인 죄목으로 그들의 혀와 그들의 행위를 지적하셨습니다. 혀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혀를 지적하신 것은 마음과 행위를 문제삼으신 것입니다.
9-11절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가 음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돔은 동성연애로 멸망했던 도시입니다. 성범죄는 멸망의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성범죄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동성 연애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합법화 시켜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9절의 말씀대로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부끄러워 하지 않고,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마지막 날들에 동성연애는 보편적인 현상이 될 것입니다. 10절은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11절에서 주님은 다시 한번 사악한 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기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좋은 것으로 만족할 것이요, 사람의 손의 보답이 그에게 돌아가리라.](잠12:14).
12-15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이들에게 다시 한번 회개와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13). [주께서 변론하시고자 일어서시며....](13a). 주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이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이유를 제시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4-9절 참조. 16-26절은 시온의 딸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별칭입니다. 창녀같은 여자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타락상을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현대 여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들은 오만하고 늘인 목과 음탕한 눈으로 걸으며, 나다닐 때에 점잔을 빼고 걸으며 발로는 딸그랑 소리를 냅니다. 이들의 옷차림과 치장은 23절까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날에’ 이런 것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것들을 다 제거하시면 살 맛이 나지 않는 여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외출도 못하는 여자들도 있습니다. 24-26절은 환란 때에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4장입니다. 4장 역시 ‘그날에’(1) 있을 예언입니다. 1절 말씀은 환란 때에 있게 될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 남자들이 전쟁에서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3:24-25), 결혼을 못한 여자들이 수두룩할 것입니다.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말하기를...”(1). 이는 여자와 남자의 성비가 7:1정도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몰몬교도들은 1절 말씀을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자신들의 교리를 주장할 때 사용합니다.
1절의 여자들은 현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빵을 먹으며 우리의 옷을 입으리니](1). 이 말은 창조 질서에 어긋난 말입니다. 주님은 남자들이 땀을 흘려서 일을 하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도움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스스로 일하고, 생활력이 있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남자 없이도 잘 삽니다. 환란 때에 이 여자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이름”입니다. [다만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하여 우리의 수치를 없애게 하라, 하리라.](1). 성경에서 여자들의 수치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창30:23, 삼상1:6, 눅1:25).
2절입니다. [그 날에 [주]의 가지가 아름답고 영화롭게 될 것이요, 땅의 열매는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들을 위하여 심히 좋고 아름답게 될 것이며](2). 여기서 주의 가지란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4가지 가지가 나옵니다. 지금 본문에는 주의 가지라고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가지, 즉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분이시오, 하나님이심을 말해 줍니다. 11:1을 참고할 것.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요,](사11:1). 이는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심을 기록한 요한 복음의 증언 내용과 같습니다.
예레미야 23:5을 보십시오. 여기는 다윗에게서 난 의로운 가지라고 말합니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요, 한 왕이 통치하고 형통하여 땅에서 공의와 정의를 집행할 것이며](렘23:5).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왕으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스가랴 3:8을 보십시오. 여기는 내 종 가지라고 말합니다. [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이제 들을지니 이는 그들이 기이(奇異)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이니라. 보라, 내가 내 종 곧 [가지]를 내리라.](슥3:8). 이것은 주의 종으로서 섬기고 일하신 모습을 기록한 마가복음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스가랴 6:12을 보십시오.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르시되, 그 이름이 [가지]인 이 사람을 보라. 그가 자기 처소에서부터 자라나 [주]의 /성/전을 건축하리니](슥6:12). 이것은 완전한 사람, 사람의 아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누가복음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다시 본문인 이사야 4:2을 보십시오. ‘그 날에 주의 가지가 아름답고 영화롭게 될 것이며...’(4:2). 주님은 초림 때에 보잘 것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상하셨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셨습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임이라. 그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53:2)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날에’ 즉 재림 때에, 천년 왕국 때에 주님은 아름답고 영화롭게 되실 것입니다. ‘땅의 열매는 ...심히 좋고 아름답게 될 것이며’(2b)라고 말했는데, 이는 저주받은 땅이 완전히 풀리게 될 것임을 말해 줍니다. 천년 왕국 때의 땅은 완전히 회복됩니다. 그 날에 태양은 지금보다 일곱 배나 되어, 일년에 사모작 이상이 가능할 것입니다. 햇볕은 열매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또 [주]께서 자신의 백성의 터진 곳을 싸매시고 그들의 맞은 곳을 치유(治癒)하시는 날에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나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사30:26).
3-6절은 천년 왕국에서의 유다와 예루살렘이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4절 말씀은 주님의 선하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죄를 다 정결케 하시고, 친히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정결한 물을 너희 위에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되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모든 우상으로부터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육신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같이 /연한/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하여금 내 법규 안에서 걷게 하리니 너희가 내 법도를 지켜 행하리라. 그리한즉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36:25-28).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는 방법이 오늘날 신약 교회의 성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말씀의 물이 아닙니다. 심판하는 영과 불태우는 영으로 하십니다. 물로 씻을 수 있는 더러움이 있고, 불로 태워서 깨끗하게 해야하는 더러움이 있습니다. 죄인이 깨끗해지는 비결은 ‘다시 태어남의 씻음’(딛3:5), ‘성령의 새롭게 함’, ‘말씀의 물’, ‘예수 그리스도의 피’(요일1:7)입니다. 이런 것들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은 대환란이란 정결케 하는 불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피를 그 가운데서 깨끗하게 하시리라”란 말씀은 그동안 무고하게 흘린 순교자들의 피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대언자들의 피가 흘렀습니다. 침례인 요한, 예수 그리스도, 스데반의 피가 그곳에서 흘렀습니다. 민수기 35:33에, [이와 같이 너희는 너희가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가 흘려진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깨끗하게 할 수 없느니라.](민35:33)고 말한 바 있습니다. 주님은 이 피를 깨끗하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5-6절은 예전에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5장입니다. 1-7절은 솔로몬의 노래와 비슷합니다. 여기서 노래하는 사람은 이사야입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의 집이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초목은 유다 사람들입니다(7). 이 구절들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최선을 다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이상하게 행했습니다. 마치 자식을 위해 모든 좋은 것을 주며 키웠지만 엇나간 것과 비슷합니다. 시편 80:8-16절을 읽어보십시오. 이 구절과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를 귀한 포도나무 곧 온전히 올바른 씨로 심었거늘 네가 내게 이방 포도나무 곧 변질된 초목이 됨은 어찌된 까닭이냐?](렘2:21). 입력과 출력이 다를 때 우리가 당황하듯이, 주님 역시 크게 실망하십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주님은 포도원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33, 마가복음 12:1을 참고할 것.
주님께서 이들에게 내리신 심판을 보십시오. 첫째, 울타리를 헐고 담을 헐어 버리십니다(5). -이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지 않으시고, 외적들의 침입을 허락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열매맺지 못하는 성도는 주의 보호하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둘째, 땅을 황폐하게 내 버려 두십니다(6). 우리는 늘 주님의 손길과 도움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 사실을 잊고 지내거나, 당연하게 여기지만 주님의 손길이 끊어지면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은혜와 선하신 손길 아래 있었는지 절감하게 됩니다. 셋째, 비를 주지 아니하십니다(6). 홍수도 큰 재앙이지만 한해는 더 큰 재앙입니다. 비가 없다는 것은 땅을 황폐케 할 뿐만 아니라 인심을 황폐하게 합니다. 홍수는 사람을 물에 죽게 하지만 한해는 한 모금의 물을 위해 사람을 죽이게 합니다.
8-10절은 주님이 저주를 선포하신 장면입니다. 8절은 오늘날 삶의 거주 형태를 보여 줍니다. 아파트, 연립주택 등의 모습이 그대로 나옵니다. 이런 집단 거주 형태와 도시 문화는 주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흩어져 살기를 원하십니다. 자연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배울 수 있고, 조명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 문화는 인간을 찬양하고, 인간을 서로 묶어서 하나님을 찾지 않게 합니다. 도시 문화의 창시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카인입니다. 도시로 들어간 롯과 들에 있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을 찾고 의지하는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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