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이사야 5:11-8:22
요절: 이사야 7:14-16

이사야 5장에는 여섯 번에 걸쳐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8절입니다. 주님은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이은 도시 주거 형태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주거 형태는 말세를 갈수록 더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은 주님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살기 위해서이며, 주님을 배척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벨 탑을 쌓아 모두가 모여 살기를 원했던 것은 주님에 대한 공개적인 반역이었습니다. 오늘날 고층 아파트, 빌딩, 건물들은 모두 작은 바벨탑들입니다. 인간 중심의 삶은 화를 불러 옵니다.

두 번째는 11절입니다. 이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에 대한 화입니다. 주님은 아침부터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될 때까지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을 마실 일은 대부분 잔치 때입니다. 12절에 보면 ‘자기 잔치’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술도 있고, 음악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을 누립니다. 주님은 왜 이들에게 화를 선포하십니까? [그들이 자기 잔치에는 하프와 비올라와 작은 북과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주]의 일은 중히 여기지 아니하며 그분의 손으로 행하시는 것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12). 이들이 누리는 모든 풍요로움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주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행하시는 것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러하듯이 성도들 역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추구하다 주님의 일을 가벼이 여기고, 주님의 손으로 행하시는 것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배부름은 굶주림으로 변하고, 그들의 쾌락은 갈증으로 변하며, 향유하던 자유는 박탈되어 포로로 사로잡혀 갑니다(13).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포로로 잡혀갈 것이요, 그들의 존귀한 자들은 굶주릴 것이며 그들의 큰 무리는 갈증으로 목마를 것이라](13).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영적 지식은 가장 고상한 것이며, 가장 존귀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빌3:8)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손실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단지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조차 주의 일은 중히 여기지 않고, 주의 손으로 행하시는 것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채 물질과 쾌락을 더 사랑하고 추구합니다. 주를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거부하여 나를 위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은즉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호4:6).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첫째, 포로로 잡히는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지만 오늘날 신약 교회의 성도들은 누구의 포로가 됩니까? 죄의 포로가 됩니다. 죄의 속임수로 인해 마음이 완악하게 되고, 부패의 종이 됩니다. [그들이 자유를 약속하나 정작 자기 자신은 부패의 종이 되었으니 이는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라.](벧후2:19). 이들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회복시켜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려 함이라.](딤후2:26). 재물의 속임수에 당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마13:22, 막4:19). 열매를 맺는 것, 더 많이 맺는 것이 주님의 뜻인데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은 누구의 뜻이겠습니까? 돈을 추구하는 마음은 부메랑처럼 자기에게 돌아 옵니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둘째, 굶주림과 갈증으로 목마를 것입니다. 양식 걱정이 없는 나라는 전 세계에 1/3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가라 해도 여전히 말씀의 기갈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세가 다가올수록 더 심화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떠돌아다니며 [주]의 말씀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달음질하여도 그것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氣盡)하리라.](암8:12). 교회는 많은데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교양 설교, 훈화 설교는 있어도 죄에 대한 책망과 지옥에 대한 심판, 하늘에 대한 소망, 믿는 자들이 겪는 고난, 십자가의 길과 같은 설교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에 대한 설교의 부재는 다른 어떤 멋진 설교로도 결코 채울 수 없는 영적인 힘의 결핍을 가져옵니다.

14절입니다. 지옥은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려 땅위의 죄인들을 받아들입니다.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한 지옥이 사람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어떤 불경건한 죄인들처럼 지옥은 이제 만원이 되어 더 이상 받을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지옥과 멸망이 결코 가득 차지 아니하는 것같이 사람의 눈도 결코 만족하지 아니하느니라.](잠27:20). 통계에 따르면 지금도 전세계에는 일분에 83명씩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18절입니다. 죄의 끈을 붙들고 끄는 사람들에 대한 화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공개적으로 반역합니다(19). 하나님께서 속히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 보라!고 외칩니다. “도대체 신이 어디 있다고 그래, 예수, 그래 좋아, 휴거가 있으면 빨리 빨리 휴거 시켜 봐!, 지옥이 있으면 지옥 보내봐!” 라는 식입니다. ‘당신 말대로 한 번 해 봐!’ 하는 냉소와 조롱을 뿜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얼마나 당당히 죄를 짓고 부끄러워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가증한 짓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그들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얼굴을 붉히지도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그들이 쓰러지는 자들 사이에서 쓰러질 것이요, 내가 그들을 징벌할 때에 그들이 내던져지리라. [주]가 말하노라.](렘6:15, 8:12). 죄의 줄을 끌고, 죄의 수레를 끄는 자들은 결국 자신이 끄는 그 줄에 자신에 메이고 걸립니다. [사악한 자는 스스로 자기 불법들에 걸리며 자기 죄들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가 없으므로 죽을 것이요, 어리석음이 크므로 길을 잃으리로다.](잠5:22-23).

네 번째는 20절입니다. 가치관이 전도된 자들에 대해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선과 악의 분별이 없고, 옳고 그름의 구분이 없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차이를 두지 않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기준이 없는 현대의 상황 윤리,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진 자들에게 주님은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절대 기준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현대의 교육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유용하냐? 아니냐?는 실용성만을 강조하거나 내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하는 것, 즉 감정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20절 말씀을 주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변호사, 정치인들입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다섯 번째는 21절입니다. ‘자기’를 최종 권위로 자기를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에 대해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마음이 타락하고,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만물의 척도가 자신이며,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신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눈에 옳고, 자기 눈에 지혜로운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보이는 사물도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합니다. 착시 현상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들은 어떻겠습니까? 몇 구절을 보겠습니다. 신명기 12:8, 삿17:6, 21:25, 시36:2, 잠 3:7, 16:2, 21:2, 30;12, 사5:21, 11:3을 모두 참고할 것.1)

여섯 번째는 22절입니다. 용감하게 포도주와 독주를 섞어서 마시는 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술 권하는 사회, 술 마시는 사회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오늘날 술은 남자들의 전용물이 아닙니다. 남녀 노소 구분 없이 마셔댑니다. [포도주는 조롱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날뛰게 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이것들에 속는 자는 지혜롭지 못한 자니라.](잠20:1). 술은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술은 속이는 것이요, 그것을 마시는 자들은 속는 것입니다. 술은 잘못하게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영적 제사장으로서, 말씀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대언자로서, 자신의 마음 판에 말씀을 기록하는 서기관으로서(잠3:3, 7:3) 술을 입에 대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잘못하며 제사장과 대언자도 독주로 인하여 잘못하고 포도주에 잠기며 독주로 인하여 길에서 벗어났도다. 그들이 환상을 볼 때에 잘못하며 재판할 때에 걸려 넘어지나니](사28:7).

이들이 화를 입게 된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멸시함으로써(24)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2,4). 서로 모여 살며 도시를 건설하고 하나님없는 인본주의 세상을 만들고(8),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를 추구하고(11), 끈으로 죄를 끌고(18), 가치관이 전도되어 선악의 분별이 없고(20), 자기 눈에 자기 보기에 지혜로운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되고(21), 용감하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셨기 때문입니다(22). 이들의 뿌리는 썩겠고, 꽃이 먼지처럼 날릴 것입니다.

26-30절은 대환란 때 겪게 될 유대인들의 환란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19,24)란 표현은 이사야에만 27번 등장합니다.

6장은 이사야가 본 환상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가 죽던 해인 735 B.C에 높이 들린 왕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2절에 나오는 여섯 날개가 달린 스랍들은 에스겔에 나오는 그룹들(겔10:21-이들은 날개가 넷이다)과는 다릅니다. 이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라고 주님을 찬양했는데, 이들의 정체는 계시록 4:8에 잘 나옵니다. [네 짐승이 저마다 자기 둘레에 여섯 날개를 가졌고 안쪽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이시라, 하고](계4:8).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 주님을 뵈었는데 그는 주의 거룩하심과 동시에 자신의 죄악상을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접할 때 자신의 죄성을 보게 됩니다. 욥은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을 미워하며 회개했습니다(욥42:6). 베드로는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눅5:8)고 외쳤습니다. 모세는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서 주님의 임재를 접했을 때, 자기 얼굴을 숨기며 두려워했습니다(출3:6). 사도 요한은 주님을 뵈었을 때,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볼 때에 그분의 발 앞에 쓰러져 죽은 자같이 되니 그분께서 오른손을 내 위에 얹으시며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1:17). 다니엘 역시 그러했습니다(단10:17). 누구든지 주님의 임재 앞에 있다면 자신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은사주의자들 가운데 주님을 만났다고 자랑하는 사람들과 성경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지 보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깊이 발견한 사람일수록 주님의 은혜와 영광을 깊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죄를 회개했는데, 특히 자신의 부정한 입술을 언급했습니다. 부정한 입술은 부정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이사야가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말할 때 이것은 레위기 13,14장에 문둥병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문둥병자는 자신이 문둥병이 걸린 것을 알았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합니다. 죄인들의 영혼의 상태는 육신이 문둥병에 걸린 것과 같은 부정한 상태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입술이 정결해지지 않는다면 결코 주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의 보혈과 말씀의 물로 자신을 정결케 하는 작업을 전혀 거치지 않는 채 밖으로 나가 전도를 시도합니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말씀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지만 이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죄의 고백이 있고, 죄 사함이 있고, 사역에 대한 부르심과 임무가 주어집니다. 이 순서는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즉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사야처럼 스랍들이 불타는 숯을 가져 와서 입술에 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흐른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8절은 주님의 부르심과 이사야의 응답입니다. [또 내가 {주}의 음성을 들으니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라.](8). 죄사함을 입고 깨끗해진 혼에게 주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증거의 임무를 주십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응답에 응한다고 해서 많은 열매를 맺거나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9-10절을 보면 그들은 잘 믿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신약 성경에 예수님과 바울 사도에 의해 자주 인용된 구절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며, 마음은 둔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저주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하는 표적을 보아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전파되는 말씀을 들어도 믿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주의 법을 버리고, 주의 일을 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40-41절 참조할 것. they would not believe-37, therefore they could not believe(39). and thus they should not believe(40). 이 일은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환란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야곱의 환란을 거치면서 주님께 속죄하고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이 연한 마음을 주실 때까지입니다. 13절은 6장의 결론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는 아무리 황폐하고 망해도 남는 자가 있을 것이며, 거룩한 씨가 이 땅의 본체가 될 것이란 점입니다. 이것이 남은 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7장입니다. 1-13절은 아하스 왕 때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때 시리아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유다를 치러 올라왔습니다. 베가는 외세를 등에 업고 남왕국 유다를 정복하여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6). 2절에 나오는 에브라임은 단순히 북 왕국의 한 지파가 아니라 북왕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남왕국의 유다, 북왕국의 에브라임 이렇게 나누어집니다. 에브라임과 시리아의 연합군이 공격해 온다는 말에 남왕국의 아하스는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습니다(2). 아하스는 매우 악한 왕으로서 이방 풍속을 따라 자녀들을 불을 통과케 하여 몰렉에게 바치는 인신 공양을 행했던 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들로 인해 유다를 불쌍히 여기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4-9절은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는 이사야의 모습입니다. 8절에 보면 에브라임이 65년 내에 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북왕국은 B.C 721년에 망했습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가 행한 선악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십니다. 9절 하반부에 [만일 너희가 믿고자 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분명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9b)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하스에게 한 가지 표적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11). 그러나 아하스는 표적을 구하지 않았습니다(12). 이에 이사야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예언을 시작했습니다(12). 다윗의 집은 형식적인 종교 생활과 주를 버리고, 악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괴롭혔습니다(1:4). 그래서 주님은 동정녀를 통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표적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4-16절은 성경에서 동정녀 탄생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분명한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버터와 꿀을 먹음으로 악을 거절하며 선을 택할 줄 알게 되리니 이는 이 아이가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몹시 싫어하는 그 땅이 둘 다 자기 왕들에게 버림을 받을 것임이라.](14-16). 이사야는 존경했던 위대한 왕 웃시야가 말년에 타락하여 문둥병이 걸려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하스의 악함과 타락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는 혈통에서 난 유다의 왕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가로서 대언자로서 인간의 악함을 통찰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 때 하늘의 메시야, 처녀에게서 태어날 임마누엘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주님은 버터와 꿀을 먹음으로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게 되셨습니다. 버터는 성령을 예표합니다. 꿀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성령 충만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악을 거절하시고 선을 택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위해서는 주님과 마찬가지로 버터와 꿀을 먹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 악을 버리라(약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 악을 피하라(벧전3:11). · 악을 거절하라. · 악을 생각하지 말라(고전13:5). ·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롬12:17). · 악을 따르지 말라(요삼11). ·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삼가라(살전5:22). ·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선과 악의 문제를 선택하는 것은 인류의 첫 조상이었던 아담과 이브로부터 계속되어온 인류의 문제입니다. 비결은 버터와 꿀을 먹음으로써입니다.

17-25절은 역사적으로 볼 때는 앗시리아가 북왕국을 함몰하고, 유다까지 공격한 사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켰지만 그는 불안한 마음에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앗시리아로 인해 자신이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데 17-20절 말씀입니다. 예언적으로 볼 때 앗시리아 왕은 적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이며, 예표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을 모두 멸하려 할 것입니다. 이 때 당할 고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1-22절은 그 가운데 남은 자들이 천년 왕국 때에 누리는 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22-25절은 환란 때의 황폐함에 관한 말씀입니다.

8장입니다. 1-4절은 북왕국의 멸망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는 아들의 이름을 마헬살렐하스바스라고 지었는데 이는 주님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그 의미는 ‘속히 멸망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18절에 따라 ‘이사야 자신과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표적과 이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아이가 태어나 말을 할줄 알기도 전에 자식의 이름대로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정복당해 멸망했습니다(721 B.C). 5-10절은 앗시라아가 유다를 공격할 것이란 예언입니다. 이는 유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입니다(9-12). 주님은 이웃과 연합하고 동맹함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13). [이 백성이 /어떤 사람들에게/, 동맹을 맺자, 할지라도 너희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동맹을 맺자, 하지 말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도 말며 무서워하지도 말고 만군의 [주] 그분을 거룩히 구별하고 그분을 너희가 두려워 할 분으로 삼으며 너희가 무서워 할 분으로 삼으라.](12-13).

14-16절은 주님이 성소가 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두 집은 하나님이 걸림돌과 실족하는 바위가 되셨습니다. 불의와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구원이 아니라 걸림돌이요, 실족케 하는 바위가 됩니다. 세상과 연합하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구원이 아니라 올무와 함정이 되십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주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실족해 넘어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통해 책망을 받고, 바로잡히기를 거부하고 성경을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자신들의 교리에 맞게, 자신들의 취향대로 바로 잡아 보려고 합니다.

17절은 암울한 대언을 하는 이사야의 굳은 결심입니다. [나는 자신의 얼굴을 돌려 야곱의 집에게 숨기시는 [주]를 바라며 그분을 바라보리라.](17). 주님은 얼굴을 돌려 야곱의 집에게 숨기셨습니다. 야곱의 집이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주를 바라보며 그분을 바라보리라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응답이 없고, 버림받은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들은 모두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삭 역시 그러했습니다. 야곱 역시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왕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조급하게 서두르지만 우리는 종이지 주권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얼굴을 숨기셔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회복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기다립니다. [내가 조금 진노하는 중에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숨겼으나 영존하는 친절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사54:8).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범죄했을지라도 영원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은 약속에 대한 믿음이요, 끈질긴 신뢰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숨으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리라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에라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언제 자신의 얼굴을 돌리십니까? 자기 백성들이 먼저 주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리실 때입니다. 평안한 때 성도들은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주님은 자신의 얼굴을 숨기심으로 징계하십니다. [그 날에 내 분노가 그들을 향해 /불같이/ 타올라 내가 그들을 버리고 내 얼굴을 돌려 그들에게 숨길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며 그들에게 많은 재앙과 환난이 닥치리니 그 날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들이 우리에게 닥치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기 때문이 아니냐? 하리라.](신31:17). 우리는 죄로 인해 주님과의 fellowship의 단절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에 변화가 없기 때문에 주님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지 않는 채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얼굴을 숨기십니다. [너희가 손을 내밀 때에 내가 내 눈을 돌려 너희에게 숨기겠으며 참으로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너희 손에는 피가 가득하니라.](사1:15). [그때에 그들이 [주]께 부르짖을지라도 그분께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겠고 그들이 자기 행위로 악하게 행한 것같이 그때에 그분께서 자신의 얼굴을 돌려 그들에게 숨기시리라.](미가3:4).

20절은 8장의 결론입니다. [/그들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까닭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20). 말씀이 바로 빛입니다. 말씀이 없다는 것은 빛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진리의 말씀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 안에 말씀이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이는 그 명령이 등불이요, 그 법이 빛이요, 훈계하는 책망들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니라.](잠6:23). 말씀은 내 손에, 내 책상에만 있으면 안됩니다. 말씀은 내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미련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119:130).

몇 구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그러므로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남아 있으면 너희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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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12:8 또한 너희는 우리가 이 날 여기에서 행하는 모든 것 즉 무엇이든지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본받아 행하지 말지니라. // 삿17:6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삿21:25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시36:2 이는 그가 자기 불법이 가증한 것으로 드러나기까지 자기 눈에서 스스로 우쭐대기 때문이라.// 잠16:2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깨끗하여도 [주]는 영(靈)들을 깊이 살피시느니라. //잠21:2 사람의 길이 자기 눈에는 모두 옳게 보여도 [주]는 마음을 살피시느니라.// 잠30:12 자기 눈에는 순결하여도 여전히 자기의 더러움에서 씻겨지지 않은 세대가 있느니라.// 사5:21 화 있을진저, 자기 눈에 지혜로운 자들과 자기가 보기에 분별 있는 자들이여!// 사11:3 그로 하여금 [주]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속히 깨닫게 하시리니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책망하지 아니하며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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