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솔로몬의 아가 5:1-8:14
요절: 솔로몬의 아가 8:13-14

솔로몬의 아가 5장입니다. 주님은 여자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열매가 가득한 동산에 들어와 아름다운 열매들을 드시라는 여인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미 들어와서 ‘몰약과 향료를 거두고, 내 벌집과 내꿀을 먹으며, 내 포도즙과 내 젖을 마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이미 응답하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주님을 부르지만 이미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심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과 동행하는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자신 혼자만 드시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을 부르셨습니다. ‘오 친구들아, 오 사랑하는 자들아’ 하며 초청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2-8절은 여인의 응답입니다. ‘내가 잘지라도 내 마음은 깨어 있나니’란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가장 잘 묘사한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고, 장사지낸바 되었습니다. ‘내가 잘지라도’란 표현은 우리의 옛 사람, 겉 사람을 묘사한 말입니다. 깨어 있는 것은 우리의 새 사람, 속 사람을 말합니다. 깨어 있는 자만이 사랑하는 이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인은 여러 차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제안을 거절했고(2:10,13), 그 결과 주님과 친교가 끊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에 주님을 부지런히 찾고, 주님과 친교는 회복되었습니다(4:6).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 강도 높은 부르심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여, 문을 열어 다오. 이는 내 머리에 이슬이 가득하며 내 머리채에 밤의 이슬방울이 가득하기 때문이라,](2). 주님은 모든 이름을 다 동원해서 신부를 부르시고, 고통의 친교로 부르십니다. 내 머리에 이슬이 가득하며, 내 머리채에 밤의 이슬 방울이 가득하다는 것은 겟세마네의 고통의 밤을 말합니다. 이는 십자가로의 부르심입니다. 술, 담배를 끊고, 세상의 나쁜 습관을 끊는 일차적인 부르심은 분리의 부르심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정도의 부르심에는 응답합니다. 그러나 고통으로의 부르심에는 대부분 주저하거나 거절합니다. 3절이 바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겉)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으리요?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리요?](3). 이제 성도로서 틀을 잡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나를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대로 사는게 좋습니다. ‘지금 제가 이런 저런 일을 한다면 여러 사람이 욕할 것입니다’라는 그런 답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겉옷을 벗고, 발까지 씻은 뒤에 잠을 청하려는 순간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 어지간한 급한 일이 아니라며,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이 아니라면 그냥 드러눕고 말 것입니다. 여인의 태도는 일신(一身)의 평안을 주님의 부르심보다 더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4절은 주님의 계속적인 부르심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가 문구멍으로 손을 들이미시매 내 속마음이 그분으로 인하여 움직였으므로](4). 이에 대해 여인이 바른 응답을 했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내가 일어나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문을 열어 주니 몰약이 내 손에서, 달콤한 냄새를 내는 몰약이 내 손가락에서 자물쇠 손잡이로 떨어지는도다.](5). 방금까지 주님이 만졌던 손자국의 증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문고리를 잡았던 주님의 손이 향취인 몰약이 떨어집니다. 우리 주위에는 구원받고 주님과의 친교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는 완전히 상관없이 살아가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6절은 그리스도인들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적 고통입니다. 주님을 향해 문을 열었지만 주님은 물러 가셨습니다. 내 혼은 쇠해지고, 찾아도 만날 수 없고, 불러도 응답이 없습니다. 욥이 당했던 고통과 동일한 고통입니다. (욥23:8,9참조).

7절은 다시 한번 주님을 찾아 나선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파수꾼들이 나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성벽을 지키는 자들이 내 너울을 빼앗아 갔습니다. 파수꾼은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주님이 세운 대언자들과 교사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거짓 선지자(대언자)요, 거짓 교사들인지라 오히려 주님을 찾아 나선 사람들을 방해하고 상처를 입힙니다. 주님과의 뜨거웠던 사랑을 잃어버린 성도들 가운데 이전 사랑과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싶어서 부흥회를 찾아 다니고,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떻게 하든지 마음 가운데 다시 열정을 회복하려는 모습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너울(vail)을 빼앗은 것은 그들이 우리의 특징, 구분되는 표시를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너울은 분리와 나눔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출26:33-성소와 지성소를 나눔, 고후3-모세의 얼굴을 가린 너울, 참조>. 이들은 주님을 찾아 나선 성도들의 행동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런 행동을 광신자, 분열주의자, 분리주의자들,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몰아 부치며 상처를 입힙니다. 진리를 찾아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앙 생활하려는 자들을 곱게 보지 않습니다.

8절은 주님으로 인해 병이든 여인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향한 이러한 사랑을 앓아 본 사람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이런 사랑을 이해받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다윗- 시편73:25 참조. 9절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답변입니다. 자신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당신의 교파가 우리 교파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냐? 네가 들고 다니는 성경이 내가 믿는 성경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냐? 구원받으면 되었지 그 이상이 또 있느냐? 는 등의 조롱을 받아 보셨을 것입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질문을 태연하게 합니다.

10-16절은 신랑을 자랑하는 신부의 모습인데, 이것이 바로 우리 입술의 고백이요, 찬양이어야 합니다. 신부는 질문에 즉시 대답을 했는데, 이 모습은 베드로전서 3:15을 생각나게 합니다. 다니엘이 본 주님의 모습과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과 더불어 주님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 가장 완벽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흐고도 불그스레한 모습’은 아담의 모습이나 다윗의 모습과 비슷합니다(삼상17:2참조). 흰 것은 순결함을 말하고, 불그스레한 것은 완전한 인간이 되신 주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11절은 금발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검은 숯을 지닌 주님의 머리 결로서 다윗의 후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12절은 주님의 눈이 순결한 눈이요, 죄악을 보지 못하는 눈임을 말해 줍니다. 계시록에서는 이 눈을 불꽃같은 눈이라고 묘사했는데, 죄인들은 아무도 그 눈을 바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13절은 오늘날 누가 남자의 얼굴에 이런 묘사를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꽃 미남의 얼굴입니다. 주님의 입술은 백합같다고 했는데,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요, 은혜와 진리의 말씀입니다. 14절은 출애굽기 24:10을 참조하십시오. 15절의 대리석 기둥 같은 다리, 레바논 백향목처럼 빼어난 얼굴인데 이는 성전의 모습을 묘사한 것과 비슷합니다. 정금 받침 위에 세운 대리석 기둥은 안정적인 것을 말하는데, 이는 주님을 조금도 주저함없이 신뢰할 수 있는 분이란 말입니다. 16절이 바로 결론입니다. 여자가 주님을 묘사한 것과 주님이 여인에 대해 묘사한 것(4:1-5)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리고 계시록1:13-16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 둘위 묘사에는 상당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눈의 모습이나 입의 모습이나 음성이 다 다릅니다. 이는 초림 때의 인자의 모습과 재림 때의 심판주의 모습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6장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마치자 마자 예루살렘의 딸들은 같이 예수님을 찾아 나서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증거의 핵심이요, 복음 전파의 열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증거는 영적 생명력이 있습니다. 2절은 놀라운 구절입니다. 얼마전까지 주님이 어디 계신지 몰라서 물었고, 찾아 나섰던 그녀가 정확히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의 단절이 증거를 통해서 회복된 순간입니다. 주님의 초청의 음성에 머뭇거려 그분의 임재를 놓쳤던 여인이 일순간에 주님의 임재를 찾았으며, 교제가 회복되었습니다. 여인이 곧바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님을 떠났을 뿐이란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곳에 계십니다. 3절은 2:16절에서 이미 언급되었던 구절이지만 이제는 순서가 뒤바뀌어 여인의 영적 성숙을 엿보게 해 줍니다. 4절부터 왕은 여인에 대해 자랑하고 있습니다.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아름다우며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위엄이 있구나’라고 말씀하셨는데 디르사란 도시는 북쪽 에브라임 위의 도시로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5절은 다소 의외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네 눈이 나를 사로잡으니 내게서 그 눈을 돌려 다오’(5)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여인의 사랑을 시험하신 것 같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일이나 봉사, 가족이나 부모, 자식, 친구 등에 눈길이 감으로써 주님으로부터 교제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회복한 사람들은 다시 주님으로부터 눈길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시험해 보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사랑하며, 누구를 사랑하시는지 묻습니다. 6-7절은 이미 앞에서 한번 언급되었습니다(4:1-5).

8절을 보십시오. 여기는 다섯 그룹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왕후는 구원받은 이방인들입니다.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시바 여왕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솔로몬에게 나왔고, 성전을 보며 솔로몬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찬양했습니다(왕상10:9). 구약 시대 때에 이방인들은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나와야 했습니다. 율법에서는 이방인들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출12:48, 레16:29,30참조). 이들과 비슷한 그룹으로 천년 왕국 때에도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나아올 것입니다(이사야49:22,23참조). 80명의 후궁은 아브라함의 첩 하갈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갈은 이집트 여자였습니다. 이들은 환란 때 구원받을 이방인들을 예표합니다. 첩은 아들과 함께 상속을 받지 못합니다(창21:10,12). 처녀들은 계시록 7장에 나오는 대환란을 통과하는 유대인들입니다(계14:4). 시편45:13,14 참조할 것.-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처녀들이 구분되어 있다.

9절에 나오는 ‘나의 비둘기, 나의 더렵혀지지 아니한 자는 오직 하나 뿐’이라고 하는데 이는 교회를 말합니다. 10절은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달처럼 고우며’란 말은 달이 교회를 잘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은 생명이 없고 죽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습니다(엡2:12). 달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습니다(욥25:5참조). 달은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반사할 뿐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서 비출 뿐입니다. 달은 밤을 주관합니다. 교회는 밤에 해당하는 이 시대를 주관합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고 다시 올 때까지 역사는 밤입니다. 달은 태양을 따라 돕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달은 언약이 있습니다(렘33:20). 이 언약은 깨어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교회를 향해 하신 약속은 절대 파기되거나 없어질 수 없습니다.달은 인간에 의해 더럽혀졌습니다. 우주선을 통해 달 착륙을 시도한 이후로 달은 끊임없이 인간의 실험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발을 들여 놓은 후 계속해서 그런 일이 반복됩니다. 달과 태양 사이에 지구가 끼어들면 월식이 발생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교회 사이에 세상이 끼어들면 교회는 빛을 잃어버립니다. 일식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일식이 일어나면 지구에 의해 태양은 가려지고 달은 태양보다 더 크게 보이는데 교회가 태양이신 주님보다 더 커지는 것을 이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달은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점점 작아지지만 더 밝고 맑은 빛을 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상에서 분리되고 멀어질수록 작아보이지만 더욱 밝고 강한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다시 10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여인을 ‘깃발을 든 군대’의 모습에 비유했습니다. 교회는 깃발을 든 군대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20:5, 60:4절 참조. 깃발은 진리의 깃발이어야 합니다. 이 깃발은 사랑의 깃발입니다(아2:4참조). 우리의 손에는 진리의 깃발과 주님을 향한 사랑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11절은 주님께서 다시 한번 열매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미나답’의 문자적인 의미는 ‘나의 백성은 자유롭다’란 뜻입니다. 병거는 당연히 전쟁에 나가는 마차입니다. 병거에 꽂힐 깃발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13절에서는 처음으로 이 여인이 술렘미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술렘미 여인은 솔로몬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로서 교회를 예표합니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사람입니다(엡2:14-15참조). 주님은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주님과 함께 이 땅에 돌아올 우리들의 모습입니다(계19:14참조). 군대들이라고 복수로 묘사된 것은 교회가 이방인 그룹과 유대인 그룹들이 하나로 합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두 군대의 무리와 같도다’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7장입니다. 1-9절까지는 주님이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해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장면으로 이미 앞에서도 몇 차례 나왔습니다. 1절은 ‘발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은 이사야 52:7,8절에 나오는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발입니다. ‘넓적다리’는 육신적인 힘을 말하지 않습니다. 시편147:10에 따르면 주님은 사람의 다리에서 기쁨을 취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넓적다리는 주의 말씀의 칼을 항상 차고 있는 다리입니다(아3:8). 2절은 한국인들이 좀처럼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우리말에는 배꼽에 대한 신체 묘사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꼽(navel)은 몸의 중심이요, 탯줄이란 의미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지만 사람의 신체 묘사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자주 등장합니다. [네 배꼽은 즙이 부족하지 않은 둥근 잔 같고 네 배는 백합으로 둘러 놓은 밀 더미 같구나.](2). 여기서 즙(liquor)이란 포도즙을 언급하는데 이는 성령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우리 배에 영원히 솟아오르는 샘물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7:38,39참조할 것. 그래서 우리의 배꼽은 즙이 부족하지 않은 둥근 잔과 같습니다. 반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배는 그들의 신(神)입니다. 배꼽이 둥근 잔이며, 배는 밀더미 같다면 양식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밀은 빵을 만드는 재료이고, 교회는 밀더미 같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목마른 자들에게 물을 주고, 주린 자들에게 생명의 빵을 나누어 줄 수 있어야합니다.

3절은 4:5절과 비교해서 읽어보십시오. 4:5절에서 여인의 젖가슴은 꼴을 먹고 자라났습니다. 반면 7:3에서 젖가슴은 많이 자랐습니다. 7절에서는 더욱 자라서 이제는 젖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젖을 나누어줍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성장해서 열매를 맺고, 다른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위치로 자라나야 합니다. 4절은 눈과 목, 코에 대한 묘사입니다. 목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목이 상아 망대같다는 것은 주님께 온전히 순복하는 의지를 지닌 것을 말합니다. 눈을 헤스본에 있는 바드라빔 성문 곁의 고기 연못에 비유했는데 이는 그 곳의 연못이 너무나 맑아 들여다 보면 거울처럼 내 모습이 다 비취기 때문입니다. 맑은 연못같은 눈은 청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만 지닐 수 있는 눈입니다. 레바논의 망대같은 코라고 했는데 코는 냄새를 맡는 감각 기관으로 이는 선악을 분별하고 적을 대적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상한 냄새, 야릇한 냄새, 구린 냄새, 어딘가 냄새가 난다...는 모두 죄와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5절은 머리와 머리카락에 대한 묘사입니다. 칼멜산같은 머리란 말은 힘을 상징합니다. 이 산은 영적인 의미와 역사가 깊은 산입니다.

6,7절은 다 성장한 신부의 모습입니다. 이제 기쁨을 주고 열매를 맺습니다. 8-9절은 천년 왕국의 모습입니다. 혼인식이 있고 혼인 잔치가 열리면 가장 좋은 포도즙이 준비될 것입니다. 10절은 2:16, 6:3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성숙한 모습입니다. 나 자신이 사라지고 주님만이 모든 것이 됩니다.

11-12절입니다. 일찍 일어나서 주님과 함께 교제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묻히고, 다음에는 일에 묻혀 온 종일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포도원과 들을 돌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포도원에 야생 포도만이 주렁주렁 열리고 들은 온통 잡초로 가득하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의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13절은 우리를 위해 주님이 준비해 두신 것들입니다. 새 것과 오래 된 것들을 쌓아 두셨습니다. 새 것은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들, 주님이 마련해 두신 면류관들입니다. 오래 된 것들은 창세로부터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두신 것들을 말합니다.

8장입니다. 1-3절은 우리 몸의 구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유난히 신체적 묘사와 성적 접촉을 연상시키는 구절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 묘사된 것들입니다. 3절은 실로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오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빨은 내 형제라면...’이란 표현은 동양인들에게는 너무나 이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은 윤리의식이 지배하던 예전에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있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부부라도 애정 표현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형제라면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있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여인은 주님과 깊은 애정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함께 있고 싶고,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가 되고 싶어합니다. 4절은 이미 앞에서 몇 번 언급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참된 교제가 있을 때 주님 한 분 외에는 어떤 것도 관심이 없음을 말해 줍니다. 여인은 세 번째로 주님과의 연합, 일치를 맛보았고, 세상의 어떤 문제나 중요한 일도 이 교제를 파괴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이런 체험이 없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에게만 온 정신이 팔려 세상 일에 대한 걱정도 근심도 다 사라진 채 종일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족한 나날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첫 사랑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 때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잃었다면 다시 찾고, 다시 회복하여 같은 고백을 몇번이나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인이 세 번째로 같은 고백을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삶을 살아가면서 동일한 고백을 드립니다. 그러나 성숙해지면 해 질수록 그 정도와 농도, 깊이는 훨씬 더 강해질 것입니다.

5절은 예루살렘의 딸들이 던진 질문에 주님이 답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기댄 채”-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전적으로 완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과 나무는 주님을 예표합니다. 2:3을 참조할 것. 여인은 사과 나무 아래에서 태어났고, 사과 나무 아래에서 자랐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나고, 주님으로부터 양육을 받습니다.

6,7절은 왕의 발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세상과 철학이 말하는 ‘승화된 사랑’은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너는/ 나를 도장같이 네 마음에 새기고 도장같이 네 팔에 새기라. 이는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가 무덤같이 잔인하기 때문이니 그 숯은 극히 맹렬한 불꽃을 지닌 불붙은 숯이니라. 많은 물도 사랑을 끄지 못하며 홍수라도 그것을 잠기게 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자기 집 재산을 다 주고 사랑을 얻으려 할지라도 철저히 멸시를 받으리라.](6-7).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요, 위치에 계시기를 원하며 우리는 주님을 마음에 새기고, 도장처럼 팔에 새겨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는 사실을 주님은 몸소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사랑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나타내셨습니다. 사랑은 질투를 동반합니다. 질투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불로써 심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잠언 6:34,35참조.

7절은 현대인들에게 그렇게 자주 노래되면서도 자주 무시되는 구절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목숨을 건것같지만 막상 재산이 날아갈 것같으면 사랑을 포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느니 재산을 잃는게 낫습니다. 사랑을 돈으로 사려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누가복음12:15참조.

8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작은 누이는 아직 성장하지 못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여인은 성장하여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자 하며,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을 찾습니다. ‘그녀에게는 가슴이 없도다’란 말은 아주 어린 상태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상태를 거쳐서 장성한 분량에 도달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신의 일을 돌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함께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인과 주님은 함께 어린 누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십니다. 영적 환경을 개선해 줄 수 있습니다. 양육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딤전4:16, 딤후2:12참조.

10절은 여인이 이전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1절에 솔로몬 왕은 열매를 가져 오게 했는데, 이는 장차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요구하시는 모습입니다. 12절은 주님이 일천개, 열매를 지키는 자들이 이백개를 가짐으로 우리가 일한 것에 대한 수고의 보상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13-14절은 여인이 주님을 향해 속히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전에(2:17에서) 주님께 돌아오라고 했다가 주님과 교제가 단절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향기나는 산들 위에서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주님이 속히 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음성을 듣고, 주여 ‘서두르소서’(8:14)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의무입니다.

주님과 친교가 있고, 그분과 정상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은 성도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고대하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아가(노래)”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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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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