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전도서 11:1-12:13
요절: 잠언 12:13
전도서 11장, 12장은 전도서 전체의 결론입니다. 전도자로서 솔로몬은 세 가지를 권면합니다. 1-6절은 믿음으로 행하라는 권면입니다. 11:7-12:7은 인생은 끝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12:8-14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복종하라는 권면입니다.
1-6절은 전도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보면 다소 무지한 듯한 행동이며, 믿음이 없이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들 위에 빵을 던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냥 읽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처럼 보이지만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게 이 구절은 매우 평범한 말씀입니다. 전도자는 빵을 물위에 던져야 합니다. 빵은 말씀의 빵(눅4:4)을 말하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물들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계17:1,15). 씨를 뿌리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자라게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경에서 씨라는 말은 항상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육신의 씨는 자식을 낳습니다. 말씀의 씨는 영적인 자식을 낳습니다. 의의 씨는 화평의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을 믿고 죽은 우리 몸은 영적인 생명의 부활의 열매를 맺습니다.
부자들이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던진다면 후에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버려지거나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후하게 베푸십시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효과가 없지만 ‘여러 날 뒤에’ 찾게 될 것입니다. [/너는/ 네 빵을 물들 위에 던지라. 이는 여러 날 뒤에 네가 그것을 찾을 것임이니라.](1). 주님은 후하게 뿌리는 자들에게 후하게 베푸십니다. 고린도후서 9:6, [오직 내가 말하려는 바는 곧 인색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인색하게 거둘 것이요, 후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후하게 거두리라 하는 것이라.](고후9:6). 주님은 율법에서 가난한 형제이 요청할 때 반드시 주라고 말씀하시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 마음에 근심하지 말지니 그 까닭은 그것으로 인하여 [주] 네 하나님께서 네 모든 일과 네 손으로 행하는 모든 것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신15:10).
2절은 가능한 한 많이 뿌리고, 많이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현 세상에서 내게 닥칠 재앙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몫을 나누어 줄지니 이는 무슨 재앙이 땅 위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2). 선을 많이 베푼 사람은 재앙의 날에 도움을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부유한 성도들은 재난의 날에 더욱 은혜와 긍휼을 입을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불의한 맘몬으로 친구들을 사귀라. 그리하면 너희가 실패할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존하는 거처로 영접하리라.](눅16:9)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앞을 보지 않고 살던 청지기가 자신의 앞날을 내다보고, 자신의 현재 위치와 힘을 이용해서, 친구들에게 베풂으로써 앞날을 대비한 지혜는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을 만 한 것입니다. 성도들 역시 자신들이 가진 지혜와 부(富)를 결코 혼자 묵혀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한 므나를 받은 종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땅 속에 파묻어 두었을 때, 엄히 책망하신 장면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욱이 영적인 보화들을 혼자만 지니고 있다가 저 하늘에 간다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3절의 구름과 비는 열매를 내기 위해 주님이 주시는 것이며, 동시에 삶의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항상 어려움만을 생각한다면 결코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구름과 비는 우리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 주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말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므로 우리가 보든 말든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는 비를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부는 바람을 반대 방향으로 불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지나 간 후에, 비가 멈춘 후에 그 흔적들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바람을 살피는 자는 씨를 뿌리지 못할 것이요, 구름들을 주목하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로다.](4). 파종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파종해야 할 때를 넘기거나 포기하는 법은 없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비가 오지 않아서 땅이 갈라지는 곳에 씨를 심고, 바가지로 물을 퍼나르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해마다 태풍이 전국을 강타하지만 모내기를 거른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의 발을 그리로 보내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사32:20).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강가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어리석어서 거기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름에 흙탕물이 거기를 덮치는데도 뿌립니다. 이유는 거기가 밭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 저것 다 생각하고, 계산하다 보면 그 밭은 아무 것도 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오늘날 세태와 마귀의 역사와 교회의 사정과 사람들의 이렇고 저런 사정들을 다 고려하다 보면 아무에게도 전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결혼 한지 오래되어서도 아이를 갖지 못했는데, 이유인즉 이것 저것 생각하다 보니 아이를 가질 기회를 놓쳤다는 것입니다. 지금 돈벌어 집사고, 차사고, 아이 양육비와 학비 마련하고...결국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나이가 너무 들어 지금 낳으면 아이가 클 때쯤 자신들이 너무 늙어 버릴 것 같아 결국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5절은 이런 식으로 ‘걱정이 팔자’인 사람들에게 주는 전도자의 말씀입니다. [영(靈)의 길이 어떠하며 아이 밴 여자의 태 속에서 뼈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네가 알지 못하는 것같이 모든 것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들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5).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먼 장래 일까지 미리 다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루하루 주님의 인도를 받아 삽니다. 걱정이나 근심 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공급하실 것이라는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신앙은 나의 플랜에 대해 성공과 실패를 미리 다 알아서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약속들을 믿고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부는 것과 사람의 거듭남이 매우 유사함을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요3:8). 성령의 역사는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비슷합니다. 임의로 부는 바람에도 순환회로가 있습니다(전1:6). 성령의 길도 방향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령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역사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결코 예수를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후에 만나 보면 목사가 되어 있는 사람, 선교사가 되어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을 다 알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삽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아침에 네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네 손을 금하지 말라. 그 까닭은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은 그 둘 다 똑같이 좋을는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6). 2,5,6절은 우리의 한계를 말하는 동시에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2,5,6). 우리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한 가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면 열매를 거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이상적으로 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귀중한 씨를 가지고 울며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뻐하며 자기의 /곡식/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126:5,6).
7,8절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의 날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는 동안 죽음을 잊어 버리고 살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닥친 죽음 앞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미리 암선고라도 받고, 사형이 확정된 사람이 아니면 모를까 대부분은 자신의 죽음은 먼 장래의 일인 줄 알거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삽니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한 뼘 차이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9,10절은 육체의 젊음을 즐기고, 좋을 대로 하라는 말은 무한의 자유를 준 말씀입니다. 단 이 모든 일 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라고 말합니다. 어릴 때와 젊은 때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때입니다. 이런 때에 디모데처럼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삶을 산다면 그 인생의 가치는 훨씬 더 클 것입니다.
12장입니다. 1-7절은 노인에 대한 가장 시적인 표현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제 /너는/ 젊은 시절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재난의 날들이 이르기 전에 혹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아무 낙이 없다, 하는 해들이 가까이 이르기 전에](1). 사무엘은 어려서 주님을 알았습니다. 요시야 역시 그랬습니다. 밥 죤스 목사도 그랬습니다(6세). 존 R 라이스 목사 역시 어려서(6세) 주님을 알았습니다. 매튜 헨리는 어려서 성경을 알았고, 평생을 성경을 곁에 두고 읽었고, 만인을 위한 주석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 교육은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교육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노인들은 빛은 있으나 열이없는 생명같다면, 청년들은 열은 있으나 빛이 없는 생명 같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한 젊음은 오래지 않아서 ‘나는 아무 낙이 없다’하는 날들이 다가오고야 맙니다.
2절 말씀은 인생에 적용할 수도 있고, 세대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혹은 비가 온 뒤에 구름들이 되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 지는 때는 칠년 대환란 때입니다. 이 때는 더 이상의 은혜의 때가 아닙니다. 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달은 교회를 예표합니다. 별들은 성도들을 예표합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비추어지지 않을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적용하자면 우리는 늙기 전에 주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비가 온 뒤에 해가 뜨기 전”이 아니라 “비가 온 뒤에 구름들이 되돌아가기 전에”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늙으면 다시 젊어질 수 없습니다. 일기는 비가 온 뒤에 해가 다시 뜨지만 인생은 다시 해가 뜨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강한 자들이 자기 자신을 구부릴 것이며 맷돌 가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문들로 내다보는 자들이 어두워질 것이며](3). 집을 지키는 자들이란 ‘팔들과 다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리와 팔은 몸을 지킵니다. 적을 물리치기도 하고, 위협에 처하면 먼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감싸 잡기도 하고, 도망가지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발이 떠는 것을 말합니다. 젊었을 때와는 달리 잘 달릴 수도 없고, 몸을 지킬 힘도 없어집니다. 앞에 위험이 닥쳐도 멍하니 당할 수 밖에 없는 때가 찾아 옵니다.
‘강한 자들’은 척추를 말합니다. 나이가 들면 허리가 굽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려서는 네발로 걷고, 커서는 두발로 걷고, 늙어서는 세 발로 걷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늙으면 허리가 굽어집니다.
‘맷돌 가는 자들이 적으므로’란 말은 늙으면 사람들의 이가 빠져서 그 수가 적어진다는 말입니다. ‘창문들로 내다보는 자들이 어두워질 것이며’란 말은 눈이 어두워진다는 말입니다. 이르면 40대에 늦어도 50대에는 누구나 노안이 찾아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맷돌 가는 소리가 낮아질 때에 문들이 거리에서 닫힐 것이며 새 소리에 그가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딸들이 다 쇠하게 될 것이며](4). 맷돌 가는 소리가 낮아진다는 말은 잘 씹지 못하기 때문에 주로 부드러운 음식과 죽이나 마실 것들을 선호하는 때를 말합니다. 늙으면 이가 성하지 않기 때문에 맷돌 가는 소리는 낮아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다가, 먹고 싶은 욕구마저 끊어지면 죽습니다. 이 때에는 이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들이 거리에서 닫힐 것이며’란 말은 이리 저리 다닐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젊을 때는 아무 곳에나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 거리를 함부로 다니지도 못합니다. 영화관, 술집, 서점, 마켓 어디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합니다. 노인정을 왔다 갔다 하다가 거기 마저 닫히면 병원문이 열리고, 영안실이 열리고, 땅 속으로 들어갑니다. ‘문들이 거리에서 닫힐 것이며’란 말은 이 시대 상황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시골에는 대문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거리에 있는 집들에 문이 열려 있는 집이 없습니다. 모두 닫혀 있습니다. 지금 도시는 거대한 감옥과 같습니다. 아파트에라도 들어가면 입구에서부터 계속해서 닫혀진 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날들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새 소리에 그가 일어날 것이며’란 말은 노인들의 특징입니다. 이는 날이 새기 전을 말합니다(욥7:4). 노인들은 잠이 없습니다. 새벽에 깨 버리면 다시 잠을 들지 못해 고생합니다. 욥기 7:4에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지나갈까? 하며 날이 샐 때까지 하염없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욥7:4)라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말했습니다. 노인들은 귀가 어두워서 정상적인 소리(음성)를 잘 듣지 못합니다. 대신 겁이 많아져서 음향에는 매우 예민한 편입니다. 젊을 때는 전혀 신경쓰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새 소리, 바람 소리, 심지어 문풍지 소리까지 늙어서는 그렇게 잘 들릴 수가 없습니다.
‘음악하는 딸들이 다 쇠하게 될 것이며’란 말은 목소리(성대)를 말합니다. 젊을 때 아무리 좋은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해도 늙어서는 다 평준화됩니다. 제가 아는 70대의 할머니는 아직도 교회에서 특송을 자주 하시는데 그 목소리를 들어보면 젊을 때는 얼마나 노래를 잘 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다른 노인들에 비해서 목소리가 덜 쇠했다, 아직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점으로 성도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하지만 음악하는 딸들이 다 쇠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 과정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런 자들이 높은 곳을 무서워할 것이며 두려움들이 길에 있을 것이며 아몬드나무가 무성할 것이며 메뚜기도 무거운 짐이 될 것이며 욕구도 그칠 것이니 이는 사람이 멀리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며 애곡하는 자들이 거리로 다니기 때문이로다.](5). 노인들은 사다리를 잘 타지 못합니다. 엘리베이터는 물론이고 고층 아파트나 빌딩을 싫어합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노인들은 젊은이에 비해 비행기를 타는 것을 훨씬 두려워 합니다. ‘두려움들이 길에 있을 것이며’란 말은 손발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노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위험이 닥쳐도 몸이 마음을 따라와 주지 못합니다. 실제로 노인들은 많은 범죄자들의 손쉬운 표적입니다. 자동차 사고, 유괴, 강도, 살인, 테러 등으로 지금도 수많은 노인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사회적 관심의 대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아몬드 나무가 무성할 것이며”란 말은 머리카락을 말합니다. 금발이나 은발 머리가 아닌 검은 머리의 동양인들에게 이 말은 훨씬 더 잘 이해될 것입니다. 칠흙같은 머리결이 어느덧 하얕게 새고, 아몬드나무처럼 무성하게 됩니다. 성경은 노인의 흰머리를 의의 길에서 얻으면 영광이라고 말합니다(잠16:31).
“메뚜기도 무거운 짐이 될 것이며”란 말은 노인들의 움직임이나 힘이 너무 약해서 메뚜기도 잡아먹을 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침례인 요한은 광야에서 마음대로 메뚜기를 잡아 양식으로 삼았지만 노인들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양식으로 취하려면 그것이 마치 무거운 짐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늙으면 있는 반찬을 해 먹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하물며 벌어서 먹기란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욕구도 그칠 것이며”란 말은 늙은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늙으면 욕망은 크게 줄어 듭니다. 누가 말하기를 보이지 않는 만큼, 들리지 않는 만큼, 걸을 수 없는 만큼 욕구도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사실 늙으면 그동안 평생을 보아 온 것 중에 더 보고 싶은 것도, 더 듣고 싶은 것도, 더 가고 싶은 곳도 없습니다.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에만 처 박혀 있어도 별로 답답함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멀리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며 애곡하는 자들이 거리로 다니기 때문이로다.”(5)라고 말했는데, 이는 친구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는 예언적으로 대환란 때의 모습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기근과 전쟁과 재앙으로 이 땅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갈 것입니다.
5절에서, 이제 사람의 몸은 죽었습니다. 이제 몸이 죽으면 곧 바로 영과 혼이 몸에서 떠납니다. 6절은 죽은 이후에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이 즉시 떠납니다. [그녀의 혼이 떠나려할 때에 (이는 그녀가 죽었음이더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베냐민이라 하더라.](창35:18). 혼은 그 사람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눅9:25-himself vs 마16:26-soul).
6절입니다. [혹은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물동이가 샘에서 깨지고 바퀴가 물 저장고에서 깨지기 전에 /기억할지니/](6). 이 말은 몸이 죽을 때 일어나는 총체적인 현상입니다. 뇌의 기능은 정지되고, 몸에 있는 수분은 모두 이탈합니다. 어떤 주석가는 은 줄을 온 몸에 있는 동맥이나 정맥, 금 그릇은 뇌를 담고 있는 해골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금 그릇은 성전에서 등잔대 위에 일곱 등잔이 모두 금 그릇이었습니다(슥4:2). 금 등잔대는 기름으로 채워져 있어서 불을 밝히는데, 이는 성령을 예표합니다. 우리 몸으로 볼 때, 이것은 머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 그릇이 깨어졌다면 이는 더 이상 기름을 담을 수 없습니다. 은 줄은 몸과 혼을 연결해 주는 끈과 같은 것입니다. 이 줄이 끊어지면 우리의 혼은 주님의 품으로 갑니다. 욥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자신이 죽을 줄로 알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줄을 푸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매신 줄을 푸셔서 나를 괴롭게 하시므로 그들도 내 앞에서 굴레를 풀었도다.](욥30:11).
‘물동이가 샘에서 깨지고 바퀴가 물 저장고에서 깨지기 전에’란 표현은 우리 몸의 수분이 어느 정도를 차지하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샘과 물 저장고는 우리의 몸을 말합니다. 흙은 본래 흙으로 돌아가고, 혼은 지옥이든 주님의 품이든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靈)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로다.](7). 몸이 죽을 때 영을 붙들어 둘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전3:21). 이것이 전도자가 본 인생의 말년입니다.
8-14절은 전도서의 결론이며, 인생의 결론입니다. [전도자가 말하노니,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또한 전도자는 지혜가 있으므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참으로 그가 깊이 주의를 기울이고 탐구하여 많은 잠언을 정리하였으며 전도자는 애를 써서 받아들일 만한 말씀들을 찾았나니 /여기/ 기록된 것은 올바른 것이요, 곧 진리의 말씀들이로다.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집회의 스승들이 굳게 박은 못들 같으니 이 말씀들은 한 목자께서 주신 것이니라. 내 아들아, 또한 /너는/ 이 말씀들로 권고를 받으라.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육체를 피곤하게 하느니라. 우리가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그 까닭은 이것이 사람의 온전한 본분이기 때문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은밀한 일과 더불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임이라.](8-14). 9-11절의 전도자의 자세를 유념해서 보십시오. 오늘날 말씀을 전파해야 할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아닌 철학과 종교와 세상 학문은 몸을 피곤하게 하지만 진리의 말씀은 건강을 줍니다.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과 헛된 속임수인 철학을 피하고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십시오. 진리의 말씀은 없다,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많은 책은 생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길과 진리며, 생명이신 분이 쓴 책 한 권을 믿고, 읽고, 부지런히 공부하십시오.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굳게 박은 못과 같습니다. 칼과 같습니다(히4:12). 망치와 같습니다(렘23:29). 오늘날 강단은 은혜란 말로 물탄 포도주같이 희멀건한 설교와 가르침으로 일관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대언자들로 그들을 넘어뜨리고 내 입의 말들로 그들을 죽였노니 나의 심판은 빛같이 나아가느니라.](호6:5).
전도자는 창조주와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전파했습니다. 우리 역시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롬14:12).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날 것임이라. 이로써 각 사람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서 행한 것들을 받으리라.](고후5:10).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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