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21:1-11

요절: 출애굽기 21:6


오늘은 십계명이 아닌
일반 사회 생활의 기초가 되는 형법과 민법, 도덕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법규를 기록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이면서도 동시에 성문법(成文法)에
기초한 입법 국가로 세워졌습니다. 모든 법의 근본 정신과
입법 취지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6:5).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주]니라.
](레19:18).
하나님의 어떤 법도 이 두 가지 기초 위에서 세워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율법은
완성됩니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대한 케이스별 규례가
법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모든 명령 중에서 첫째 /명령/은 이것이니,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주}시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명령이니라. 둘째 /명령/도 그와 같으며 곧 이것이니,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명령이 없느니라
.](막12:29~31). 십계명 역시 사랑이
바탕입니다.


모든 사회 규범은 이웃
사랑이 있으면 다 해결됩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웃 사랑에
기초한 법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면
종에 대해 주님이 세우신 법도는 자연스럽게 지켜질
것입니다. 흔히 기독교를 비파하는 인본주의자들은 성경이
노예 제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노예
제도가 아니라. 종의 제도를 지지합니다. 성경의 정치
제도는 왕정입니다. 이는 이런 제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진리에 대한 조명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1장부터 23장에 나오는
법은 십계명의 해설판과 같은 것입니다. 신정 국가로 출범한
이스라엘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법을 제정하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사회적 합의나 법학자들이나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에서 법을 제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법을
주시는 분으로서 자신이 제정하신 법에 통치를 받는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듣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다면 그
법대로 징계를 받게 됩니다.


“법대로”(lawfully)란 말은
현재 지구상의 모든 국가에서 추구하는 기본적인 통치
체제입니다. 사람들은 ‘법대로’ 보다는 ‘멋대로’
하기를 좋아합니다. 남에게는 법대로, 자기에게는 ‘마음대로’를
외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로 ‘자기 마음의 악한
상상대로’ 걸었습니다(렘7:24,13:10, 16:12, 23:17). 그 결과
그들은 철저하게 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법대로 하지 않으면 주님의 상급이 없습니다. 가끔 기독교
자유 방임주의자들, 율법 무용론자들은 멋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법, 사랑의 법,
자유의 법, 왕가의 법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살면 그는
반드시 죽을 것이며,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우승하려고 애쓰는 자가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월계관을 얻지 못하며
](딤후2:5). 성경은 법을
주신 하나님의 법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시고, 고기를 주시고, 물을 주신
일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욱 큰 일은 하늘에서 주의
음성을 보내시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어느 민족도 자기들이
믿는 신(神)으로부터 법(法)을 받은 민족은 없습니다. 종교
경전을 가지고 있지만 경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활의 작은 부분까지
어떻게 판단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법을 정해
주셨습니다. 오늘 선포된 이 법들은 광야에서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법들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광야 생활 동안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광야의 여행은 생업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말씀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1절입니다. [이제 네가
그들 앞에 세울 /판단의/ 법도는 이러하니라
.](1). 왜 법을
주셨습니까? 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법이 없을 때는
모세가 하나님께 물어서 백성들의 일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법이 주어짐으로써 백성들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기준이 생겼습니다. 문제는 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법을 몰라서 지키지 않는
것보다 알면서 지키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4:14, [그때에 [주]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법규와
법도를 가르치게 하셨나니
이것은 너희가 건너가 소유할
땅에서 그것들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4:14).
지키지 않을 법이라면 그것은 없느니만 못합니다.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제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령하신 명령과 법규와 법도가
이러하니라. 너희가 가서 소유할 땅에서 이것들을
행할지니
](신6:1). 아담에서 노아까지,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그리고 이삭 야곱을 거치면서 요셉에 이르는
시대에도 하나님은 은혜로 대하셨지만 이렇게 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왕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백성들을 통해 하늘의 왕국의 모형을
건설하시고, 전적으로 독특한 백성을 통해 온 세상
민족들에게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살아 계신 주(主, LORD)란
사실을 선포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독특한 보물이요,
아들들이었습니다.


시편147:19-20절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자신의 법규들과
판단들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분께서 어느
민족도 이와 같이 대우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분의
판단들로 말하건대 그들이 그것들을 알지 못하였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시147:19-20). 광야를 만나를
먹음으로써 이들이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율법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네게 교훈을 주시려고 너로 하여금 하늘에서 오는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자신의 큰 불을 네게 보여
주시매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분의 말씀들을
들었느니라
.
](신4:36).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분의
말씀은 불같은 율법이요, 불같은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 율법을 보내셨습니다. [그가 이르되, [주]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오시며 바란
산에서부터 빛을 내시고 수만(數萬) 성도와 함께 오셨으니
그분의 오른손에서 그들을 위하여 불 같은 율법이 나왔도다.
](신33:2).
불같은 율법은 지키지 않을 때 소멸하는 불이 될 것이며,
심판의 불이 될 것이며, 끌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불같은 율법은 죄인의 마음 안에 간직할 따스한 온기가 되며,
불결한 찌꺼기를 태우며, 냉랭한 마음을 녹이며, 뜨거운
기도와 뜨거운 사랑을 행하게 할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있을 때 예레미야가 고백했듯이 주의 말씀은 불같아서 견딜
수가 없는 말씀이 됩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그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분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 같아서 내 뼈 속에 사무치니
내가 참기에
지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노라.
](렘20:9).


불은 사용하기에 따라
그보다 더 유용한 것이 없고, 그보다 더 큰 재앙이 없습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산산조각 부수는 쇠망치
같지 아니하냐?
](렘23:29). 하나님의 말씀은 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쇠망치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에 불을 보내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12:49).
불은 진흙을 돌처럼 굳게 만들고, 얼음은 녹게 하며,
불순물은 태우고, 금과 은과 같은 보석은 단련시킵니다.
말씀을 통해 생명을 얻든지 말씀을 통해 심판을 받아
지옥에서 불타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말씀의 불이 마음
안에 붙을 때 마음은 뜨거워지고,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미지근한 교회를 가장
싫어하십니다(계3:15,16). 미지근한 예배, 미지근한 기도,
미지근한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들이 서로 이르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
자신들의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말씀은 타오르는
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위를 산산조각 부수는
쇠망치입니다. 만약 말씀의 불에 녹지 않는 단단한 금강석
같은 바위를 가진 마음이라면 그는 쇠망치에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서지던가, 녹아 나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마음 안에 간직함으로 늘
불꽃같은 인생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11절은 종에 관한
법입니다. 종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종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며, 내 형제란 사실입니다. 무거운
채무로, 어떤 범죄로 인해 종이 되었다면 종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주인은 종을 가혹하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종의 제도를 폐지하라는 말씀은 없지만 종을 어떻게
대하라는 말씀은 매우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종들의 인권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이집트의 종살이를 했던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어떻게 남의 민족을 섬기는가를 가르치지 않으시고,
어떻게 종을 다스리는가에 대한 말씀을 주셨는데 이는 인생
역전의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래 종살이했던 사람이
주인이 되면 더 무섭습니다. 종 살이를 통해 호된 학대를
당해 본 경험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학대해도 된다는
변명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입은 피해로 인해 나 역시
피해를 주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법이 아닙니다.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남종에 대한 법도입니다 [네가 히브리 사람
종을 사면 그가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거저 나가 자유로운 몸이 될 것이며 만일 그가 혼자 왔으면
혼자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갈 것이니라. 만일 그의 주인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녀가 그에게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의
자녀들은 그녀의 주인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혼자 나갈
것이로되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내 주인과 내
아내와 내 자녀들을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로운 몸이 되지
아니하겠노라
, 하면 그의 주인이 그를 데리고
재판관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기둥 앞으로
데리고 가서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으리니 그가 영원토록
자기 주인을 섬기리라
.](2-6). 6은 인간의 수입니다. 7은
하나님의 수입니다. 일곱은 언제나 완전수이며, 하나님의
수입니다. 하나님은 칠 진법을 사용하십니다. 6일간 일하고
일곱째 날 안식하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6년간 일하고 7년째는
풀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 규례는 영원한
속박을 금하고 7년째 되던 해에 자유로운 몸으로 풀어
주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종들이 6년 동안 주인을
섬겼으면 그가 어떤 사연으로 종이 되었던 간에 충분한
보상을 한 것으로 보십니다. 그 이후에 자유롭게 되거나
계속 종으로 살거나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며, 자유입니다.


◎ 하나님은 어떤 인간이
평생을 종(從)으로 살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곱 째 날은
안식일이듯이, 일곱째 해에는 안식년인데, 주님은 이 규례를
통해 죄와 저주 아래에 사는 온 민족을 속박에서 풀어
주시는 모형으로 삼으셨습니다. 천년 왕국이 되면 더 이상
사람은 죄의 종노릇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곱째 해는 천년
왕국을 예표하는 해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벧후3:8, 시90:4),
인류의 칠 천년 째 되는 해에 주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마귀와 죄의 종노릇하던 모든 사람들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봅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내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불법과 범죄로 이혼을 당했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버린 네
어머니의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권자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 불법들로 인하여 너희
자신을 팔았고 너희 어머니는 너희 범죄들로 인하여 버림을
받았느니라.
](사50:1). 그러므로 주님은 이스라엘과의
문제에서도 혼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종이 아내와
가족이 있을 때 함께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단 주인이 종에게 아내를 준 경우에는
아내와 자녀들은 여전히 주인에게 속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아내와 자녀를 남겨 두고 가라니!! 매우 비정하고
매정한 처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것은 종을 주인의
재산이나 소유로 보았던 당대에는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었고, 가장 적합한 사회 규범이었습니다. 만약 종이
나가면서 주인에게 받은 여종을 아내로 삼아 데리고 나가
버리면 주인은 손해를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아내를 주어 가정을 꾸미게 했다면 이는 매우 가까운
사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위대한 진리를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아내와
자식이 없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종으로서 지상 사역을 마치자 자유롭게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영적으로 적용하자면 주님은 교회를
신부로 얻으셨습니다. 교회를 통해 많은 자녀들을
얻으셨습니다. 주님은 떠나실 때 교회와 제자들과 모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데리고 올라가실 수 없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내 주인과 내 아내와 내 자녀들을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로운 몸이 되지 아니하겠노라, 하면
그의 주인이 그를 데리고 재판관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기둥 앞으로 데리고 가서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으리니 그가 영원토록 자기 주인을 섬기리라
.](5-6).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인데
이는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자발적인
구속으로 이끕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을 택합니다.
사랑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의무와 복종을
이끌어 냅니다. 사랑은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포기합니다.
사랑은 은혜를 입은 감사의 행동적인 표현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아내를 주었고, 그로 인해
자식을 얻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자원해서 종으로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재판관에게 가서 귀에
구멍을 뚫고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됩니다. 여기서 ‘영원히’란
말은 주인이 죽을 때까지, 아니면 환희의 해(50년째 되는 해)때까지를
말합니다.


이 법을 통해 하나님은
구속의 예표를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은 종의 제도를
지지합니다. 종의 제도는 성경의 많은 계시와 조명을 받을
수 있는 성경적인 제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됩니다.


∨ 하나님의 종은 그 위에
하나님의 영을 두십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혼이
기뻐하는 자 곧 나의 택한 자를 보라. 내가 내 영을 그 위에
두었은즉 그가 이방인들에게 공의를 베풀리라
](사42:1).


∨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친히 내십니다. [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이제 들을지니 이는 그들이 기이(奇裏)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이니라. 보라, 내가 내 종 곧
가지를 내리라
](슥3:8). 예수님은 하나님이 내신
종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내신 종입니다.


∨ 하나님의 종은
슬기롭고 존귀를 받습니다. [보라, 내 종이 슬기롭게
행할 것인즉 높임을 받고 격찬을 받으며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사52:13).


∨ 하나님의 종은 의롭고
지식이 있습니다. [그가 자기 혼이 해산의 고통을 치른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리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니
이는 그가 그들의
불법들을 담당할 것임이라.
](사53:11). 이것이 종이
예표하는 성경적 진리입니다.


◎ 종은
순종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셨고 하나님을 섬기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 사역을 감당합니다. 종의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빌2:5).
이 마음이 무엇입니까? 종의 마음입니다. 종의 마음은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인한 순종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순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던 마음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無名)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빌2:6-8). 우리는
주님이 종으로서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마가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전체가 다 종되신 주님의
신실하신 사역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종은
자기 기쁨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종은 주인의
기쁨을 위해 일하며, 주인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롬15:3).
주님은 지상에 사시는 동안 자신을 기쁘게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음이니 오직 /이것은/ 기록된바, 주를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를 덮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15:3).
그렇다면 우리의 삶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그런즉 우리
강한 자들은 마땅히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하리라
.](롬15:1).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 종은
섬기는 자이다.
주님은 하나님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죄인들을 섬겼습니다. 주님은
섬김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기 때문입니다(막10:45).
주님은 식탁에 앉아서 나오는 음식을 기다리는 주인이
아니라 음식을 나르는 종으로 계셨습니다. [음식 앞에
앉은 자와 섬기는 자 중에 누가 더 크냐? 음식 앞에 앉은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노라
.](눅22:27). 생각해 보십시오. Serving을 하고 있는
주님을 마음 속에 그려 보십시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의 물에 손을 담그신
주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종의 자세란 섬기는
자세입니다. 종의 마음은 섬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친히 본(本)을
보이시며,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김받기를 추구했던 제자들에게 주님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끼리는 그리 하지 못할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가장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지니라. 이는 사람의
아들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고
왔음이니라.
](막10:43-45). 이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종의 도(道)는 섬김에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서로 섬겨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성도들을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롬15:25).
스데바나 가정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가정은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전념해 온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고전16:15). 하나님은 섬기는 자들의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의 행위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지금까지 성도들을 섬기며 지금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
.](히6:10).
교회에서도 성경을 가르치고, 집사나 장로의 직분을 맡고,
무슨 감투를 써야 대단한 것 같지만 주님은 교회를 청소하고,
성도들의 교제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정리하며, 형제들의
필요를 돌보는데 힘쓰는 자들을 다 기억하십니다. [내가
행위와 사랑과 섬김과 믿음과 네 인내와 네 행위를 아노니

나중 것이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2:19). 사랑, 섬김,
믿음은 같은 행위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서로가 섬긴는 지체들로 가득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있었음에도 종으로 남는 것은 전적인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자들입니다. 그러나 모두 종으로서 주님을 섬기기를
소망하고 결단함으로 헌신된 삶을 삽니다.


주님은 종에 대한 법도를
통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안에는
주종 관계가 있다고 해도 그 종 역시 하나님의 피를 통해
구속받은 자유로운 자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주인과 종
구분없이 모두 이집트의 종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유월절
피로 구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만약 종들을 가혹하게
대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피로 사신 형제들을 가혹하게
하는 것이요, 자신 역시 은혜를 입은 종이란 사실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값주고 산 자유자들입니다.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으니 너희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7:23).
그래서 우리는 주의 종으로서 살아갑니다. 크리스찬으로서
우리는 자유로운 영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주의 자유로운 영으로 나를
붙드소서
.](시51:12).


둘째, 7년마다 종들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종의 세습을 막았습니다. 어느 나라나 한번
종은 영원히 종입니다. 노예의 신분은 풀어지지를 않습니다.
대(代)를 이어 세습됩니다. 그러나 6년간 일하고 자유를
줌으로써 종의 신분의 세습을 막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종들을 대할 때 사랑과 은혜로써 대해야 합니다. 특히
믿는 형제들은 아래 사람이라 할지라도 종 이상의 형제로서
대해야 합니다. [이제는 종으로서가 아니요, 오히려 종
이상의 사랑하는 형제로서니라. 특별히 내게 그러하거늘
하물며 네게는 육신 안에서나 주 안에서나 더 그렇지
아니하랴?
](몬1:16).


셋째,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주인이든 종이든 그가 낳은 아들, 딸들을 자신의
여전히 자신의 백성으로 보십니다.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아들딸들을 데려다가 그것들에게 희생물로 드려
삼킴을 당하게 하였느니라. 네가 이러한 네 행음(核淫)을
작은 일로 여겨서
](겔16:20). 이는 주님이 종의 세습을
차단하신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내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아들, 딸”이라고 하심으로 육신의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마음대로 행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마찬 가지로
주인이 종들의 자녀까지 종으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종의 아들, 딸들이라도 주인은 그 아이들이 주의 자녀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주여, 진실로 나는 주의 종이요, 주의 종 곧 주의 여종의
아들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시116:16).
종의 아들의 결박을 푸시는 주님!! 뿐만 아닙니다. 주님은
종의 아들, 딸들을 구원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오 내게로
돌아오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주의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시86:16).


넷째, 주님은 종의 제도를
통해 구원과 구원자에 대한 아름다운 모형을 보여 주십니다.
주인을 사랑해서 떠나지 않는 종의 귀를 뚫은 것은 주님께서
그 귀를 열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는 희생물과 헌물을
원치 아니하셨나이다. 주께서 내 귀를 여셨나니 주는 번제
헌물과 죄 헌물을 요구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시40:6).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했고, 하나님이 주신 신부인
교회를 사랑했고, 낳으신 자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종이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매와 자녀들로
인해 주님께 자원하는 종이 될 때 주님은 우리의 귀를 열어
주시며,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이 붙드는 종은 그
위에 주의 영을 두시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공의를 베풉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혼이 기뻐하는 자 곧 나의 택한
자를 보라. 내가 내 영을 그 위에 두었은즉 그가
이방인들에게 공의를 베풀리라
](사42:1). 우리는 모두 이런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할만한 이유를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 자유로이 내 마음대로 천년 만년을 사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거하는 하루가 낫습니다. 주님의 뜻을 떠나, 주님의
사역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주님의
일로 지치고 고단해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세상의 짐,
죄의 짐을 지는 것보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는 것이
훨씬 더 편합니다. 이 사실을 절감했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는 주의 뜰에서의 한 날이 천 날보다
낫기 때문이니이다. 내가 사악한 자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집 문지기가 되는 것이 낫사오니
](시84:10).


7-11절은 여종들에 대한
법도입니다. 우리는 이 법을 통해 주님이 얼마나 약자를
보호하시고, 살피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녀는 남종들같이 나가지
못할지니라. 만일 그녀가 자기와 정혼한 자기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하면 그 주인이 그녀의 몸을 속량(贖良)하게 할
것이로되 그 여인을 속인 것이 되므로 그녀를 다른 민족에게
팔 권한은 없느니라. 만일 그가 그녀를 자기 아들과
정혼시켰으면 딸들의 관례대로 그녀를 대할 것이요. 만일
그가 다른 아내를 취한다 해도 그녀의 음식과 의복과 결혼의
의무는 줄이지 못할 것이요, 그가 그녀에게 이 세 가지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녀가 돈을 내지 않고 나가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니라.
](7-11). 자기 딸을 종으로 팔아 버린 종은
일곱째 해가 되어도 나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종은 아내와
자식은 물론이고 사유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자신이 종이라고 해서 자녀들까지 팔아서 종으로
전락시키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여종은 남자들과 달리 더
연약합니다. 여종이 제일 잘 될 수 있는 일은 주인과
결혼하거나 그 아들과 결혼해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의 신분이란 이유로 당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불이익에 대해서 주님은 미리 법도를 세우심으로
막으셨습니다. 결혼한 주인이 여종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멀리 다른 민족에게 팔아 버릴 수 없습니다. 종을 자기
아들과 결혼시켰다면 당연히 종이 아니라 딸(며느리)로
대해야 합니다. 만약 아들이 다른 아내를 또 취한다해도
먼저 결혼한 여종을 쫓아내거나 경제적 권리를 박탈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현재의 어느 나라 법보다도 여권 신장과
권익 보호를 철저히 법에 명시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종은 어느 해에라도 상관없이 그냥
자유롭게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종의 법도를
세우신 주님을 통해 오늘날 교회에서 종의 법도를 익힌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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