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21:12-36

요절: 출애굽기 21:17


오늘은 성경의 몇 가지
형법에 대해서 같이 공부해 보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는 사형 제도와 성경의 사형 제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는 기회를 갖겠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인권에 대한 관심은 급기야 교회들을 비롯한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사형 반대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캐톨릭 국가들은 이미 사형을
폐지했습니다. 이곳 미국에서도 이런 운동은 매우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단연 교회와
성직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연 성경은 사형을
지지하고 있는가? 사형은 성경적인 제도인가? 등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은 사형 제도를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오늘 본문은 어떤 경우에 국가에서
사형을 시켜야 하는가?를 가장 잘 보여 줍니다.


●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12).


●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15).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5).


● 유괴, 인신 매매자는
사형에 처한다(16). [사람을 훔쳐서 팔거나 자기 손에 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늘 저주하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17).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7)


● 짐승과 함께 눕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19). [누구든지 짐승과 함께 눕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9). 위의 법들은 기독교
국가이든 아니든 인간 사회의 기본적 틀을 유지하는
법입니다. 사형 폐지론 자들이 하나님을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성경에 대해 공개적인 무지(無知)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와 목회자들, 성도들이 그런
운동에 서명을 하며, 사랑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일은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신성 모독에 관련된
죄 외에도 살인, 도둑질, 부모에 대한 불경(레20:9), 수간(레20:16),
간통(레20:10), 근친 상간(레20:11-12), 동성연애(레20:13) 등에
대해서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명령하셨고, 정상참작이나
예외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부리는 영을 지녔거나 마술사는
반드시 죽이고(레20:27), 쇠 연장이나 돌, 나무 등의 연장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면 이는 실수로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민35:16-18). 주먹으로 쳐서 죽인
자 역시 반드시 죽이게 했습니다(민35:21). 엄정한 사형
집행은 범죄 예방을 위한 최선의 길입니다. 물론 경찰이나
검찰의 실수로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사형장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형 제도를 없애는 것이 성경적이란
주장은 전혀 근거없는 말씀입니다. 흔히 구약의 율법을
신약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신약의 사도들 중에, 순교자들 중에 사형 제도의 억울함,
사형제도의 불법성, 사형 제도가 비성경적 제도라고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기꺼이
맞이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칼에 목이 잘렸습니다. 물론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형 제도가 잘못된
제도라고 항소한 적이 없으며, 그런 언급이나 암시조차도
없습니다.


12절입니다. [사람을
쳐서 죽게 한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2). 하나님은
살인, 살해에 대한 법으로 사형을 명하셨습니다. 사람을
때려서 죽인 것은 사고가 아니라 고의적인 살인이여,
살해입니다. 성경은 율법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이 법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리니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음이니라
.](창9:6). 사형은 살인자에 대한
가장 합법적이고 정당한 형벌입니다. 그러나 만약 고의가
아니라 사고로 죽였다면 이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도피성으로 가서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숨어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그 사람의 손에 넘겨준 것이면
내가 네게 한 곳을
정하여 주리니 그가 거기로 도망할 것이니라
.](13).
도피성은 레위 지파의 감독하에 설치된 성읍으로 요단강
동서에 각각 여섯 개씩 있었습니다. 이들은 공정한 재판을
받기 전까지 이 도시성에서 보호 받을 수 있었습니다(민35:6,14;
수20:7이하; 21:13, 27, 32, 38). 과실치사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에는 주님께서 그 사람을 죽음에 넘겨 준 것으로 본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로 도끼로 나무를 찍다가 도끼
날이 빠져서 사람이 머리에 맞아 죽는 경우와 같은 그런
사고이며, 오늘날 흔히 있는 교통 사고와 같은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사람이 고의로 자기 이웃에게 와서
교활하게 그를 죽이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끌어내어
죽일지니라.
](14). 주님은 계획적인, 고의적인 살인을
용납하지 않으셨는데, 그는 주의 제단에 있을지라도
끌어내어 사형을 집행하게 하셨습니다. 신앙과 종교를
빙자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는 요압의 경우에 그대로 해당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요압이 죽지 않기 위해 제단 뿔을 잡았을 때 끌어내어
죽였습니다. [이 소문이 요압에게 들리매 그가 [주]의
성막으로 도망하여 제단의 뿔을 잡으니 이는 그가 돌이켜서
압살롬을 따르지는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따랐음이더라.
](왕상2:28).
요압이 반역에 가담했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15절과 17절은 십계명 중에
다섯 번째 계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효도법이
있습니다. 자녀는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도 이르기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하여금 먼저 집에서 효성을 보여 자기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며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딤전5:4)고 기록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구약의 율법을 넘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뜻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엡6:1) 했고,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은 {주}를 매우 기쁘시게
하는 것이니라.
](골3:20). 효도는 하나님 앞에서 선하며
받으실 만한 것이요, 옳은 일이요, 주를 매우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녀가 효도는 고사하고 자기 부모를
칠 때 이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자녀를 때려서
교육하지 않는 부모는 부모를 때리는 자녀를 만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5). 부모를 때리는 죄를 하나님이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때리는 행위가 아니라 말로
저주를 하는 행위도 사형에 처하게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7).
사도 바울은 율법은 범죄자들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하면서 당대에 있던 일들을 기술했는데, 그 중에는 자기
부모를 죽이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알지니 곧 /주께서/
율법을 만드신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요, 오직 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속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사람을 죽이는 자와
](딤전1:9).
이는 타락한 인간 역사의 한 단면입니다. 주님은 이 구절을
두 번이나 인용하시면서 당시의 유대인들의 죄를 엄중히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이르시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셨거늘
](마15:4). 그러나
이들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면서 이 법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악용했습니다. 주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법을 굳게
세우셨는데, 이는 부모가 하나님의 모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7:16에는 율법이
더욱 강화되어 치고, 저주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모를
업신여기기만 해도 저주를 명하셨습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온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27:16).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일에 대해서 장수를
약속하셨고, 내세(來世)가 아니라 현세(現世)에서 주실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로 하여금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하려 함이라.
](엡6:3).


반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면 그 사람의 등불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꺼지리라.
](잠20:20). 영적인 암흑이
도래합니다. 여기서 사람의 등불이 꺼진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영적 조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부모를 저주하는 자를
사악한 자로 보시기 때문에 결과 역시 동일합니다. [의로운
자의 빛은 기뻐하나 사악한 자의 등불은 꺼지리라
.](잠13:9).
여기서 등불은 사람의 영을 말합니다.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이니 뱃속의 모든 부분을 살피느니라
.](잠20:27).
부모를 저주하고 업신여기는 일은 사람 사이에 문제나 사회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 자식간의 집안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요, 영적인 문제입니다. [자기
아버지를 저주하며 자기 어머니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세대가 있느니라
.](잠30:11)고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세대입니다.


16절은 오늘날 광범위한
사회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을 훔쳐서 팔거나
자기 손에 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유괴와 인신
매매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어린이와
여성이 주로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유엔의 통계에 따르면
인신매매 문제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데,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매매(賣買)되고 있으며 이들은 종종 저렴한
인건비로 노동을 시키며 학대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일부 극단적인 경우에는 장기 매매용으로 어린이들을
유괴하기도 하며, 어린이 인신매매는 오늘날 12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또 어린이들은 종종
적지 않은 유럽 국가에서 노동력으로 착취되기도 하는데,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불법 어린이 노동자가 수십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는
어린이들을 섹스 산업의 희생자로 만들고 있는데, 이런 경우
많은 어린이들이 에이즈를 비롯한 질병에 감염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문명 사회의 선두주자라는 미국도 어린이,
여성 유괴와 인신 매매는 극심한 실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0에 율법은 이런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람을 납치하는 자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음행을
일삼는 자와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는 자와 사람을
납치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위증하는 자와 그밖에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리를 거스르는 것 때문이니
](딤전1:10).
마귀는 결코 사람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세상 문화는 마귀의
문화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근절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에 어둠의 권세들과 대적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지녀야
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적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이 세상의
최고의 상업 도시가 될 바빌론에는 노예들과 사람들의 혼을
주고 파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요, 고운 아마포와 자주색 옷감과 비단과 주홍색
옷감이요, 각종 향목(香木)과 온갖 상아 그릇이요, 매우 값진
나무와 놋과 쇠와 대리석으로 만든 온갖 그릇이요, 육계(肉桂)와
향료와 향유와 유향과 포도즙과 기름과 고운 가루와 밀이요,
짐승과 양과 말과 병거와 노예들과 사람들의 혼(魂)이라.
](계18:12-13).
인신 매매가 합법적인 상업 수단이 될 것임을 예언해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모두 반드시 죽음에 처하실
것입니다.



18-19절은 상해(傷害)에 관한 법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다른 이를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의 시간의 손실을
배상하고 그가 완전히 낫게 할지니라.
](18-19). 싸움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전쟁터에서만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일터에서도 싸우고, 놀다가도 싸우고, 집에서도 싸우고,
모임에서도 싸우고, 길거리에서도 싸웁니다. 예배 드리러
와서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사람들은 왜 싸웁니까? 애들은
애들이라서 싸운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애들이나
어른이나 싸우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부부도 서로
싸우고, 형제도 서로 싸우는데, 싸우는 이유를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 전쟁과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속에서 싸우는 정욕(情欲)들로부터 나지
아니하느냐?
](약4:1)라고 합니다. 이것이 싸움의 원인이요,
이유입니다. 물론 싸우지 않는 것이 제일 좋지만 싸운
후에는 피해자에 대해서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시간의
손실에 대한 보상, 몸의 상처에 대한 보상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은 민, 형사상의 법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도 성경에서
지적하는 이 법들에 대해서는 잘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20-21절은 종을 상하게 한 주인에 관한 법입니다. [사람이
자기 /남/종이나 여종을 막대기로 쳐서 자기 손 밑에서 죽게
하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루나 이틀을 살아 있으면 형벌을 면하리니 이는 그 종이
그 사람의 돈이기 때문이니라.
](20-21). 여기서 주인이 종을
학대하는 법이 용인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 종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매를 들었을 때, 즉 훈계를
위한 매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매질하다보면 사람이 잘못
맞아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주인은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주인이 종을 학대하지 못하게 하는 주님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주인의 손 밑에서 죽었다는 것은 심하게
때렸거나 가혹하게 매질한 경우인데 이에 대해서는 형벌이
주어집니다. 만약 종이 하루나 이틀을 살아 있으면 주인은
종을 잃은 손해로 자신의 과실을 떼웁니다. 성경은 주인들이
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대하는 것을 엄히 금지합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종을 다치게 한 경우에는 종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남/종의 눈이나 여종의
눈을 쳐서 멀게 하면 그의 눈으로 인하여 그를 놓아
자유로이 가게 할 것이며 자기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쳐서 빠지게 하면 그의 이로 인하여 그를 놓아 자유로이
가게 할지니라
.](26-27). 하나님은 주인들이 종들에 대해 가혹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 상해를 입힐 경우에는
종을 풀어 주도록 했습니다. 눈이 다치거나 이를 부러뜨리면
주인은 더 이상 종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들의 인권이나 자유를 전적으로 주인의 손에 맡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주인들에게 종을 협박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너희 주인들아, 너희도 종들에게 이 같은
일들을 행하고 협박하는 일을 삼가라. 이는 너희 {주}인도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엡6:9).



욥은 주인으로서 이 점을 잘 알았습니다. [만일 내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다툴 때에 내가 그들의 사정을 멸시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분께서
돌아보실 때에 내가 무어라 대답하겠느냐? 나를 모태 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모태 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
](욥31:13~15). 비록 주종 관계라
할지라도 욥은 남종이나 여종이 자신과 다툴 때에 때린 것이
아니라 사정을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만들었듯이, 종들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란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권의 평등입니다.



22절은 낙태에 관한 구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구절은 낙태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구절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싸우다가
아이를 밴 여인을 다치게 하여 그녀의 열매가 그녀에게서
나왔는데 다른 손해가 없으면 그는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반드시 형벌을 받되 재판관이 결정하는 대로
지불해야 할지니라. 그러나 다른 손해가 있으면 네가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매는 매로 갚을지니라
.](22-25).
이 부분은 전에 킹 제임스 성경과 현대 역본의 차이를 다룰
때 살펴 본 내용인데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번 다루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낙태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많이 일면서,
낙태를 합법화 해야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습니다.
미국에서도 pro-life(낙태반대) vs pro-choice(낙태지지)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종교적, 윤리적, 사회적 문제를
넘어서 법리적 논쟁을 벌이면서 교회들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다만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교회와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교회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형제도
폐지 문제와 마찬가지로 성경적 입장을 견고하게 잡지 못한
교회들의 나약함과 올바르지 못한 성경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싸우다가 아이를 밴 여인을 다치게 하여 그녀의
열매가 그녀에게서 나왔으나 (출산을 말함) 다른 손해가
없으면(정상분만)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그가
반드시 형벌을 받되 재판관이 결정하는 대로 지불해야 할
지니라. 23. 그러나 다른 손해가 있으면(아이가 사산이나
유산했을 경우) 네가 생명은 생명으로...
] 아이가 죽어서
나왔을 경우, 고의적으로 낙태를 시킨 것이 아니라 싸우다가
임신부가 다쳐서 낙태가 된 경우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생명에 대해서 생명으로 책임지게 하셨습니다. 이는
살인죄를 적용한 것입니다. 부지중에 무의식적으로, 사고로
낙태케 했을 때에라도 주님은 그를 사형시키게 하셨다면
고의로 행한 낙태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살인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중에 있는 아이도 정상적인 인격과 사고를
지닌 인간으로 취급하십니다. 그래서, 복중에 있는 아기를
묘사할 때도 child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반면 현대 역본들은(개역 한글 성경)은 낙태를 합법화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합니다.
이는 자체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이란 말은
아이는 죽었으니 임신한 여자에게 해가 없으면 이란 뜻일
것입니다. 산모에게 아이가 죽은 것보다 더 큰 해가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이가 죽었는데 산모에게 다른
해가 없으면 남편이 보상을 요구하는 대로 벌금에서 그치게
함으로써 낙태는 합법화되고 말았습니다. 개역 성경은 죽은
아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산모의 상해(傷害) 여부와
벌금에만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진리들 중에서 발췌, 말씀침례교회,
Holypeace Yoon]



28-32절은 소에 관한 법입니다. 그렇다고 소를 위한 법이란
말이 아닙니다. 모세 율법에는 소에 관련된 법규가 몇
나오는데 그 법들은 소를 위한 법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법입니다. 고린도전서 9:9-10에 이르기를, [이는 모세의
율법에,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기록하셨음이니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시는
것이냐?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냐?
정녕 우리를 위하여 이것을 기록하셨나니
밭을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소망을 가지고 타작하는 자는 자기의
소망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리라.
](고전9:9-10). 농경
사회에서 소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며, 노동력입니다. 소는
들에서는 거의 사람과 같이 생활합니다. 그러다 보니 소로
인해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그들이 죽으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일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그 소의 주인은
형벌을 면하려니와 그 소가 전에도 뿔로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사실이 그 주인에게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소를 가두지 아니하므로 남자나 여자를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서 죽이고 그 주인도 죽일지니라. 그에게 일정액의 돈을
부과하면 그는 자기에게 무엇이 부과되든지 자기 생명의
대속물(代贖物)로 내야 할지니라. 그 소가 아들을 받았든지
딸을 받았든지 이 법도에 따라 그 주인에게 행할 것이며
만일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그 주인이 은 삼십
세겔을 그들의 주인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
](28-32).



먼저 소가 사람을 받아서 사람이 죽은 경우에는 소를
돌로
쳐서 죽입니다. 이는 창세기 9:5에, [내가 반드시 너희 생명의
피를 요구하리니 모든 짐승의 손에서 그것을 요구할 것이요,
사람의 손에서 곧 각 사람의 형제의 손에서 사람의 생명을
요구하리라.
](창9:5)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소의 잘못으로
인해 소의 주인은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가 받는 버릇이 있는 경우에는 주인이
주의를 해야 합니다. 소의 뿔을 자르든지, 철저히 고삐를
잡아 당겨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하든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로 다니고 잘 묶어 두든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받아서 죽이면 소도 죽이고 사람도
죽이게 하셨습니다. 만약 벌금이 부과되면 무조건 얼마든지
내야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주시는 법은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는 것들을 통제하지 못해서 사고를 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3-34절 역시 사고에 관한 법입니다.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
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하므로 소나 나귀가 거기
빠지면 그 구덩이 주인이 배상하여 그 주인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짐승은 그의 것이 될지니라.
](33-34). 성도는
선의든 악의든, 실수든 이웃에게 악(惡)을 행해서는 안되며,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보상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민법의 가장 기초 항목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자기 형제의 길에
걸림돌이나 넘어질 기회를 두는 사람이 없는지
판단할지니라.
](롬14:13)고 말했는데,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말과 행실이 형제들의 길에 걸림돌이나 넘어질 기회를 주지
않았는지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35-36절입니다. [어떤 사람의 소가 다른 사람의 소를 다치게
하여 죽게 하면 그들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그 돈을 나누고
죽은 소도 나누려니와 그 소가 전에도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알고도 그 주인이 그것을 가두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소로 소를 갚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소유가 될지니라.
](출21:12~36).
이곳에는 소를 키우는 집은 없습니다만 개나 고양이를
키운다면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사람들이 애지중지
하는 애완용 고양이나 개가 사람을 할퀴거나 피해를 줬다면
당연히 때려잡아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피해를
보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 고양이를 때려 죽이는 일도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팔아 치우고, 배상하는 정도는
해야하는데, 도리어 큰 소리치는 싸가지 없는 인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집트에서 소 떼와 양떼를 다 끌고
나온 백성들인지라 여행 중에 소로 인한 사고는 늘 발생했을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소로 겪는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차로 인해 겪는 문제만큼
흔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차량 사고에 대한 배상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리는 동일합니다. 피해를 입힐 경우 피해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법을 주신 하나님의 법에 대한 해석과
기준을 보여 주신 것으로 우리가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합니다.
법에 대한 바른 기준은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주며, 죄를
미워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법이 무너지면 사람은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구원을 위한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을 마음 속에 새겨 주는 역할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