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22:20-31

요절: 출애굽기 22:31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주님이 정하신 민법, 형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이 법규들은 삶의 최저
표준입니다. 율법은 마음 상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규정합니다. 율법의 2대 목적이라고 한다면 첫째
죄를 알게 함이요(롬3:20), 둘째 죄를 깨달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
이라 할 수 있습니다(갈3:23).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니
이는
율법이, 너는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욕을 알지 못하였을 것임이라.
](롬7:7)고 했습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이 없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우리는
죄가운데 살지만 그것을 죄인줄 알지 못합니다. 양심은 결코
기준이 될 수 없는데, 이는 사람의 양심이 모두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해 주며, 우리의 죄성을
폭로해 줍니다. 이것이 율법의 거룩한 목적입니다.


율법의 또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율법을 통해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들을
벌하시는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계명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런즉 율법도 거룩하고 명령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도다.
](롬7:12).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민족은 전
세계에 유대인들 밖에 없습니다. 모든 민족은 사회 관습에
바탕을 둔 법을 만들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법을
써서 주셨고, 말씀을 통해 기록해 주셨습니다. [이 날 내가
너희 앞에 두는 이 모든 율법과 같이 의로운 법규와 법도를
가진 큰 민족이 어디 있느냐?
](신4:8)고 합니다. 우리가
모세오경을 읽는 것은 결코 유다의 역사나 관습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거룩한 법도를
통해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이 명령을
주신 것은 생명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내 법규와 내 법도를 지킬지니 사람이 이것들을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리라
. 나는 [주]니라
.](레18:5). [
법규 안에서 걸으며 내 법도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로운 자니 반드시 살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겔18:9). 그러나 이런 위대한 율법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누구도 이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될 육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하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생명에 이르게 하려고 정하신 명령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내가 알았나니
](롬7:10)라고
탄식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 이런 율법의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믿음은
율법을 든든하게 세우기 때문입니다(롬3:31).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주님이 정해 주신 율법을 통해 주님의
거룩하심과 우리 삶의 기준을 잡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절입니다. [[주]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물을 드리는 자는 진멸할지니라
.](20).
주님은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어긴 데 대한 형벌을 정해
주셨는데, 사형(死刑)입니다. 왜 다른 신에게 희생물을
드려서는 안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지니 이는 [주]가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
.](출34:14). 주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에 다른
신들에게 희생물을 드려서는 안됩니다. 우상들은 질투를
모릅니다. 그래서 범신론과 다신론이 별 문제가 없습니다.
우상들은 호흡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분이시며, 호흡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신에게 희생물을 드릴 때 주님은 반드시 그를 멸망시켜
버리십니다
.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이 날 너희에게 선언하나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요
, 너희가 요르단 /강/을 건너가 소유할 땅에서
너희 날들이 길지 못하리라.
](신30:17~18). 오직 한 분
하나님 외에 은밀히 다른 신들을 경배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망합니다. 자기 배를 섬기든지, 돈을 섬기든지, 사람을
섬기든지 마음 속에 어떤 우상들을 섬길 때 주님은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요”라고 선포하십니다. 사람을 신뢰하고,
자기 육체를 신뢰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는 튼튼해요. 저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어요.
사장님과 저는 매우 친해요. ...” 이런 말들이 주님의
심판을 막아 주지 못합니다. 인맥(人脈)과 금맥(金脈)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 한 분만을 신뢰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방패가 되고, 나의 몫이 될 때 사람들이 나에게
아무 해(害)도 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에게 희생물을 드릴 때 주님은 분노의 불을 붙이십니다
.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그들 손의 모든 일로 내 분노를 일으켰음이라. 그러므로 내
진노가 이곳을 향해 /불같이/ 타올라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왕하22:17). 사람의 의무는 다른 신들을
버리고 주님께 와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주님께 올 때 그는 복을 받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할 때 주님의 분노의 불길이 꺼지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주님을 버리고 분향하는 신은 교육(敎育)입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교육은 끝까지
시키고자 합니다. 교육이 모든 선이요, 최고의 가치인 줄
압니다. 좋은 대학이 좋은 사람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좋은 대학이 믿음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좋은 자녀,
좋은 일꾼,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를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이 주님 대신 학교들, 선생들에게 분향한다면 주님은
분노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주님을 버리고
분향하는 신은 돈입니다. 대부분 맘몬을 섬깁니다. 저는
사람들인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사는 거의
본 적이 없지만 돈 때문에 죽었다, 자살했다, 죽였다는
기사는 자주 듣고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조차도
돈벌이의 연장선상에 두고, 하나님도 나의 돈을 벌어 주는데
도움을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같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도 나의 돈 벌이에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주님을 버리고 거의 매일
분향하는 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분노를 일으키십니다. 현대인들이 주님을 버리고
분향하는 신은 쾌락입니다. 세상은 매일 T.V, 영화, 잡지,
신문 등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이리로 오라’고
광고합니다. 교회로 가는 대신 운동장으로 가자, 예배를
드리는 대신 T.V 앞으로, 영화관으로, 놀이터로 가자고
유혹합니다. 돈이 있으면 유혹은 더 많아집니다. 배운게
많은 사람은 더 강한 유혹이 찾아옵니다. 마귀는 어리석고,
돈없는 사람에게는 죄를 짓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치를 떨게
만들고, 배우고 돈 좀 있는 사람에게는 광명의 천사를
보내서 유혹합니다.


다른
신에게 희생물을 드릴 때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그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게 경배하였은즉 내가 그들의 모든 사악함에
대하여 나의 심판을 선고하리라
.](렘1:16). 이교도들은
자기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신들이라도 몇 백년,
몇 천년 대대로 섬기고 경배합니다. 그들은 결코 신(神)을
버리지 않으며, 바꾸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왜
자신들의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까? 이는 마음 가운데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롭고,
경건하시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한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헛된 우상들을
섬기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싫어하는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요3:19).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주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것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죄성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경배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가 결정됩니다.


21절입니다. [너는
나그네를 괴롭게 하거나 학대하지 말지니 이는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니라.
](21). 주님은 외국인들,
타지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외래
문화를 개방한다는 것은 외인(外人)들을 살게 해주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영적, 도덕성이 낮다면 외래
문화는 급격히 유입됩니다. 반면 그들이 견고한 믿음에
있다면 나그네들은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주님이 나그네를
괴롭게 하지 말고 학대하지 말라는 것은 이들 역시
나그네였기 때문입니다. [너는 또한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지냈은즉 나그네의
심정을 아느니라
.
](출23:9). 인종 차별 못지 않게 견디기
힘든 것이 텃세입니다. 하나님은 타국인들, 나그네들에
대해서는 텃세를 행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그네가 너와
함께 너희 땅에 거하거든 너희는 그를 괴롭히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그 나그네를 너희 가운데서 태어난 자같이
여기며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지냈음이니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레19:33~34). 이것이 주님의 법입니다.
주님은 나그네들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이셨으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는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모두 나그네요,
순례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영원한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나그네였고,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자신들을 나그네라고 고백했습니다(히11:13).
저는 이곳에 이민 와서 사는 동포들이 이 사실을 매우 잘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이곳 미국인들은
나그네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않는 나라에 속합니다.
나그네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것은 주의 법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우리가 나그네인고로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는 이로써
알지 못하는 가운데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니라.
](히13:2).


22절입니다. [너는
과부나 아버지 없는 아이를 괴롭히지 말지니라. 네가 만일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것이요, 나의 진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들은 아버지 없는 자가 되리라.
](22-24).
과부와 아버지 없는 아이에 대한 법은 현재로 말하자면 사회
보장제도입니다.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은 여자와 아이,
장애인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1차 산업이 거의 전부인 농경 사회에서 노동력이 없는
여자나 아이들은 쉽게 따돌림을 당하고,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성품과
법을 크게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동정심이
지극히 많으신 분이십니다.


순수한 신앙이란 고와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지 않은 신앙심
은 이것이니 곧 고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약1:27). 하나님은 아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주의 백성들이 각별히
신경을 쓰고, 그들에게 선을 베풀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법을 거부하면 주님은 그들을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 버리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성경이 정한 사회
보장 제도에 관한 법은 형제들의 자발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니,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집행하며 저마다 자기
형제에게 긍휼과 동정심을 베풀고 과부와 아버지 없는 자와
타국인과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며 너희 중 아무도 마음
속에서 자기 형제를 치려고 악을 꾀하지 말라
, 하였으나
그들이 귀 기울이기를 거절하여 어깨를 빼고 듣지
아니하려고 자기 귀를 막으며 참으로 그들이 율법과 만군의
[주]가 이전의 대언자들을 통해 자신의 영으로 보낸
말씀들을 듣지 아니하고자 하여 자기 마음을 금강석같이 /굳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주께로부터
나왔느니라
.](슥7:9-12).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은 정부가
제공하는 어떤 복지 연금보다 더 큰 효과가 있습니다.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야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하늘에는 여전히 그들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셨듯이 모든 성도들의 남편이
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버지 없는 자들의
아버지이시며 과부들의 재판장이신 이는 자신의 거룩한
거처에 계신 하나님이시로다.
](시68:5). 누가 고아들과
과부들을 학대한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학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 타락이 일어나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학대와 수탈, 괴롭힘, 불공정한
재판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 사회
제도나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믿음과 신앙임을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지탱하는 힘,
여러분의 교회를 지탱하는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제력이나 헌금 액수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머리 수가
아닙니다. 주님이 자신의 영으로 보낸 말씀을 듣는 믿음,
영적 힘이 바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중추적인 힘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불의한 법령을 포고(布告)하고
자기들이 제정한 무거운 /법/을 기록하며 궁핍한 자를
따돌려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게 하고 내 백성의 가난한
자들로부터 권리를 빼앗아 과부들을 탈취물로 삼으며
아버지 없는 자들을 강탈하는 자들이여!
/너희를/
벌하시는 날에 멀리서 오게 될 황폐함 속에서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너희가 누구에게로 피하여 도움을 구하겠느냐?
너희의 영화(榮華)를 어느 곳에 남겨 두겠느냐?
](사10:1~3).
하나님의 법 대신 인간의 법으로, 제도로 약자들을 수탈한
자들에 대해 주님은 저주를 선포하셨고, 그들에게 심판을
보내셨습니다.


25-27절은 고리대금업에
대한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자 놀이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곁에 있는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 주거든 너는 그에게 빚쟁이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지니라.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질 때까지 그에게 넘겨줄지니라.
그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덮는 것이요, 그의 살을 덮는
의복이니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이는 내가 은혜로운 자이기 때문이니라.
](25-27).
성경적인 금융 거래는 은행을 통한 거래입니다. 주님은
게으른 종에게 이르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어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올
때에 이자와 함께 내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눅19:23).
주님은 자신이 맡긴 돈에 대해서 일을 해서 벌거나 최소한
은행에 넣어 이자 수익은 올리시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들에 대해서 땅 속에 묻어 두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긴 것들을 지혜로운 청지기처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가난한 자들에게는 빚쟁이처럼 빌려주지
말고 이자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냥 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자를 받는 것은 이웃 사랑이 아니며, 구제가
아닙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모든 율법의
기초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입법
취지와 목적에 따른 해석은 이 두 가지 사랑에 근거하면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고
쇠약하게 되어 너와 함께 있거든 너는 그를 구제하되
참으로 그가 나그네이거나 머무는 자일지라도 너와 함께
살도록 하고
](레25:35). 형제들을 통한 이자 놀이는
하나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형제들에게 이득(利得)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닙니다. 저는 교회에서 형제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것은
저주받을 일입니다. [너는 네 형제에게 꾸어 주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나 음식물의 이자나 이자를 낼
만한 어떤 것의 이자도 받지 말지니라.
](신23:19).


하나님은 형제들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집회에 모아 두고 이 부분에 대해서
엄하게 설교했습니다. [심사숙고하고 귀족들과
치리자들을 꾸짖어 이르되, 너희가 각각 자기 형제에게
이자를 취하는도다
, 하고 큰 집회를 열어 그들을
꾸짖어
](느5:7). 돈 문제는 형제도 원수처럼 만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내어 주지
않는 자는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이자를 받으려고 자기
돈을 내어 주지 아니하며 대가를 받으려고 죄 없는 자를
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결코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시15:5). 이자 놀이를 하지 않고 가난한
자를 돕는다면 주님은 불법으로 인한 심판 가운데서도 살아
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떠나게 하고 이자나 이득을 받지 아니하며 내 법도를
집행하고 내 법규 안에서 걸을진대
그는 자기 아버지의
불법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리라.
](겔18:17).
사람이 주님께 뭔가를 빌려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께
빌려 드리는 것이니 그분께서 그가 베푼 것을 갚아 주시리라.
](잠19:17).


만약 담보물을 잡았다면
해가 지기 전까지 담보물을 돌려주도록 하셨습니다. 중동의
밤은 사막 기후인 관계로 기온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가난한
자의 옷을 계속 담보로 잡고 있다면 그는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보다 사람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돈을 인간의 생명보다 중시하는 배금(拜金)주의
풍조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해가 질 때에 반드시
담보물을 그에게 돌려줄지니라. 그리하면 그가 자기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주] 네 하나님
앞에서 네게 의가 되리라.
](신24:13). 주님은 가난한 자들의
울부짖는 기도에 들으시고 그들을 학대한 자들에게 반드시
보복하십니다. 입고 잘 것이 없는 자의 기도를 주님은
들으십니다.


28절입니다. [너는
신들을 욕하지 말며 네 백성의 치리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28).
이 말씀은 바알이나 아스다롯이나 제우스나 이시스와 같은
우상 신들을 욕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들이란 하늘의 존재들을 말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 너희는 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자녀들이라,
하였으나
](시82:6). 이들은 천사들입니다. 이들은 욥기와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계시록 12:3-8에 다시 이 땅에 나타날 자들입니다.
신들이라 불리는 또 한 예는 출애굽기 7:1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神)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출7:1).
예수님은 유대인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神)들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들을 신들이라 하셨으며
또 성경 기록은
폐(廢)하지 못할진대
](요10:34~35). “너희는 신들을 욕하지
말며”란 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천사들에 대한
언급이며, 모세와 같은 주의 대언자, 재판관들을 언급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으로 자신의 잘못을
즉석에서 시인하고 회개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이는
기록된바, 너는 네 백성의 치리자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음이니라
, 하더라.
](행23:5).


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처럼 이 말씀을 마음에 기억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민주 사회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정치에 대해서 한 마디씩 하고, 정치인들을 마구 욕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신문, 방송에 연일 그들의
비리가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존경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
아들아, 너는 [주]와 왕을 두려워하고 늘 변하는 자들과
상관하지 말라.
](잠24:21)고 말씀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왕을
저주하지 말지니 네 생각 속에서도 말며 네 침실에서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이는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개
가진 것이 그 일을 말할 것임이로다.
](전10:20)고 했고,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경하라
.](벧전2:17).
신문 기사나 뉴스를 보면서 통치권자들을 비방하고 욕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29-30절입니다. [너는
네 익은 과일과 네 즙의 처음 것 드리기를 더디 하지 말며

네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을 내게 줄지니라. 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은 그 어미와 함께 있게 하고
여덟째 날에 내게 줄지니라.
](29-3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처음 난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땅에서 나는 것이든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집트에서 죽음을 당했어야 하는 것들인데 주의 은혜로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통과한 것들이라 할 수 있으며,
분명히 주님의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처음
난 것 곧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를 여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그것은 내
것이니라
, 하시니라
.](출13:2).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이지만 특별히 처음 난 것들만 자신의
소유로 받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소출의
1/10을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난 자란 의미는
이렇습니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첫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처음 난 자입니다.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은 내 아들
곧 나의 처음 난 자라, 하시느니라.
](출4:22). 주님은 처음
나신 분이시며, 죽음에서 일어나신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처음 난 것은 다 주님의 것이며, 첫 열매는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죽음에서 부활하고 휴거될 모든 교회 성도들은 다
주님의 첫 열매들입니다(약1:18, 고전15:23).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몸을 마땅히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소출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몇몇 탐욕스런 성도들이
주님께 드려야 할 헌금을 내기 싫어서 ‘신약 시대에는
교회에 헌금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잠언 기자는 [네 재물과 네 모든
소출의 첫 열매로 [주]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이 새 /포도즙/으로 넘치리라
.](잠3:9-10)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에만 해당되고 신약 교회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정상적인 믿음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첫 열매를
주님께 드렸는데, 그 일이 복을 구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
정한 때에 나무 헌물과 첫 열매를 드리게 하였사오니, 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느13:31).
수확의 첫 열매, 소출의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는 것은 바른
경제관이 확립된 사람이요, 결코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반드시 그는 경제적 문제에
시달리게 됩니다. 성경은 어떤 주제보다도 경제적 주제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우리가 어떻게 돈 문제를 다룰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가 있고,
성령의 능력과 임재가 있는 교회의 성도들은 결코 헌금
문제로 시험에 들지 않으며, 그런 것들을 미적거리며 내거나
떼어 먹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반면 육신적인 교회
성도들은 항상 헌금의 문제에 민감하고, 그 문제로 토론하고,
주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낼까 말까 망설이다 내지 않고 한
달 두 달 넘어가고 맙니다. 쟌 웨슬레 목사가 말하기를, “성도는
지갑에서부터 회개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더디 드려서는 안됩니다. 안 드리는 것도 문제지만
어쩔 수 없이 할 수 없이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서
들고 온다면 그것은 잘못된 헌물입니다. [저마다 자기
마음 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9:7).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것의 모든 첫 열매의 처음
것과 너희의 온갖 봉헌물의 모든 봉헌물이 제사장의 소유가
되리라. 또 너희는 너희 반죽의 처음 것을 제사장에게 주어 그로
말미암아 복이 네 집에 머물게 할지니라
.
](겔44:30). 이
말씀은 오늘날 폐기되고 무효화된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많은 탐욕에 빠진 성직자들이 이런 말씀으로 헌금을
강요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말씀을 통해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즐거이
내기를 원합니다.


31절입니다.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들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31). 받은
율법을 지킬 때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민족이 되며, 거룩한 사람들이 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그들은 이방인들과 구분이 없어집니다. 거룩이란 수행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믿고 지킴으로 되는
것입니다.


“내게 거룩한 사람들이
될지니”란 말씀은 먹는 것에서부터 구분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처럼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피를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음식
규례를 주셨는데 이 규례들 대로하면 식탐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서 기는 것 즉 기어다니는 그 어떤
것으로 인하여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레11:44).
신약 성도들은 먹는 문제에서는 전적으로 자유롭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로 자신을 더럽히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은 성도들의 영적인 능력이요,
힘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정함에 이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요,
거룩함에 이르도록 부르셨음이니
](살전4:7). 성도들은
불경건한 생활 습관, 언어 습관, 행동 방식, 사고를 모조리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로 가져가 처리해야 합니다. 음행,
농담, 비속되고 허황된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정함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도록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를지니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12:14)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럽게 하는 것, 가증스러운 것들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권면하기를,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
](고후7:1)고 한
대로 혼들을 거슬러 싸우는 정욕들을 삼가고, 주님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신을 순결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거룩함임을 알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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