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23:01-13

요절: 출애굽기 23:4-5


소위 모세의 율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들은 도덕적 감정과 진정한 정치적 지혜의 매우
간결한 원칙들입니다. 영감과 권위로 주어진 성문법이
있다는 것은 법치국가의 핵심 요소이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적인 요소를 안정시켜 줍니다. 계속되는 율법을
통해 우리는 모세의 율법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예배와, 이스라엘이 이교도 세계로부터의 분리라고 하는
대원칙에 입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근본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근거해 세워진 세부
항목들은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공의와 공공의 도덕성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1-3절은 소송법입니다.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세부 조항입니다. 사법부는 사회 기강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하나님은 법을 주셨지만 재판은 사람이 합니다.
또 재판에 임하는 것도 천사들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재판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증거와 증인인데 주님은 이
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지 말며 사악한 자와 손을 잡고 불의한 증인이 되지
말라
.](1).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여론 재판을 유도하거나
판결이 나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 몰아 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거짓 소문은 불특정 다수를 잠깐 동안 속이는
일에 매우 자주 쓰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우리는 그 실상을
너무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너는 네
백성 가운데서 위 아래로 다니며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되지
말고 또 서서 네 이웃의 피를 대적하지 말라. 나는 [주]니라
.](레19:16)고
하셨습니다. 거짓 소문, 유언비어, ‘--하더라’ 통신은 한
개인과 나라를 좌지우지합니다. 사람들은 진실은 잘 믿지
않아도 거짓은 이상하게 잘 믿습니다. 후에 거짓말로
드러나도 재미있었다고 말합니다. 당하는 피해자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잠언 18:8에 [소문을
퍼뜨리는 자의 말은 큰 상처와 같아서 뱃속의 가장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잠18:8/잠26:22)고 했습니다. 뱃속의
가장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영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소문은 우리의 마음과 영을 상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소문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둘 다 확인되지 않는
소문을 가지고 서로 맞다고 우기거나 패를 갈라 싸웁니다.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불이 꺼지는 것같이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없는 곳에서는 다툼도 그치느니라.
](잠26:20).


불의한 증인이란 진실과는
상관없이 자기 이득을 위해 증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특별히 사악한 자와 손을 잡고 하는 거짓 증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유대인들이 했던
죄이며, 스데반을 돌로 칠 때 동일하게 했던 죄입니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상대로 행했던 거의
대부분의 종교 재판은 헛소문, 거짓 소문을 바탕으로 불의한
증인들의 거짓 증거로 행해졌습니다. 하나님은 거짓 증인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게 다루셨습니다. [만일 거짓 증인이
일어나서 어떤 사람이 잘못했다고 그 사람을 대적하여
증언하면 그 분쟁하는 두 사람이 [주] 앞에 함께 나아가서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관 앞에 설 것이요, 재판관은 부지런히
조사할지니, 보라, 그 증인이 거짓 증인이요, 자기 형제를
대적하여 거짓으로 증언하였거든 너희는 그가 자기
형제에게 행하려고 생각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거하라.
](신19:16~19).


잠언을 지은 솔로몬은
명판관으로써 그 이름을 만방에 떨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재판만큼 복잡하고도 미묘한 일이 없습니다. 거기에 거짓
소문과 거짓 증인들까지 가세하면 재판관은 더욱 골치
아파집니다. 그런 그가 거짓 증인들에 대해서 일목 요연하게
정리 해 놓았습니다.


첫째,
거짓 증인은 형제 사이에 불화의 씨를 뿌리는 자들입니다.
[거짓들을
말하는 거짓 증인과 형제 사이에 불화의 씨를 뿌리는 자니라
.](잠6:19).
우리는 모두 화평의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신실한
증거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왜곡하거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불화의 씨를 뿌리는 거짓 증인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둘째,
거짓 증인은 속임수를 냅니다.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거니와 거짓 증인은 속임수를
나타내느니라.
](잠12:17).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아도 거짓
증인의 말은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는 자는 모두 진리를 말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증거하는 자는 다 거짓
증인입니다. 성경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말하는 것 역시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셋째,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합니다.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내느니라
.](잠14:5).
우리 주님은 신실한 증인이셨습니다. 신실한 증인은
자신에게 해가 되고 불리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순교자들은 신실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든가 백보좌
심판석에 서게됩니다. 그 때 우리는 신실한 증인이었는가?
거짓 증인이었는가?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넷째,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합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잠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하는 자는
망하리라.
](잠19:9). [거짓 증인은 멸망하려니와 듣는
사람은 확고하게 말하느니라.
](잠21:28).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거짓 증인들에게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2절입니다. [너는 군중을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소송에서 재판을 뒤집으려고 다수를
따라 기우는 말을 하지 말라.
](2). 이것을 여론 재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재판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당하신
우리 주님에 대한 재판입니다. [빌라도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나는 이 의로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그것과 상관하라, 하매
](마27:24).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았지만 군중을 따라 악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욥은 이런 면에서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평하게 재판했다고
자신했습니다. [혹시 내가 언제 내 불법을 내 품에
숨김으로 아담같이 내 범죄들을 덮어두었던가. 내가 큰
무리를 두려워하거나 여러 족속의 멸시를 두려워하므로
잠잠하고 문 밖에 나가지 아니하였더냐?
](욥31:33~34).
욥은 사람들의 무리와 여러 족속을 두려워함으로 진실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욥은 진정으로 행동하는
양심이었습니다. 다수결은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다수결은
다만 다수의 힘을 내세워 진리와 비진리의 구분없이 안정을
취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배제한 다수결은 혼란을
부르지 안정이 오지 않습니다. 성경적 진리는 다수결의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One man with God
is majority -Dr. Bob Jones, Sr-


3절입니다. [너는 가난한
자의 소송에서 그에게 호의를 보이지 말지니라.
](3). 이
말씀은 역차별에 대한 금지 규정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강한 자를 예우해 주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보호 본능으로인해 가난한 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곳 미국의 법을 보면 흑인과
백인, 종업원과 주인, 여자와 남자, 장애인과 정상인,
세입자와 주인 등이 동일한 문제일 경우 일단 약자 우선을
적용합니다. 예를 들어 유색 인종이 백인을 상대로 인종
차별로 고소할 수는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맞았다거나 성희롱을 당했다고 맞고소를 해도
이길 확률이 거의 없는데 성경은 이런 역차별 마저
금지하셨습니다. 주님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오직 의롭게”를 외치십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고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강력한 자라고 예우하지 말고 오직 의롭게
네 이웃을
재판할지니라.
](레19:15). 재판은 온 땅의 심판관이신
주님을 가장 잘 예표하는 제도입니다. 만왕의 왕이
주님이시듯이, 모든 재판은 다 주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서 외모를 보지 말고 큰 자뿐 아니라 작은 자의 말도
들으며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가 판단하기
어려운 사정이거든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신1:17).


4-5절은 이웃 사랑에 대한
법입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 밑에서 깔린 것을 보거든 돕고
싶지 아니하여도 반드시 그와 함께 도울지니라.
](4-5).
원수의 재산을 줍거나 우연히 취득했다 해도 반드시 돌려
주고, 원수의 나귀가 쓰러지거나 다쳤을 때, 짐에 깔렸을
때는 속으로는 기분이 좋을지 몰라도 반드시 도와 주라고
하십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원수와는 화해할 수 있으며, 더
큰 원수 맺음으로 인해 닥칠 비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원수에게 은혜 베품은 화해와
용서의 첫 걸음이며, 관계성 회복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주님이 이런 기회를 주시면 주저하지 않고
도와줌으로써 형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신약에만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잠언 25:21, [
원수가 주리거든 빵을 주어 먹게 하고 목마르거든 물을 주어
마시게 할지니
](잠25:21).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악순환의 연속으로 자신에게 돌아 옵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활 방식입니다. [조심하여
아무도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도 선하며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선한 것을 항상
따르라.
](살전5:15).


6절은 이미 앞에서 드린
말씀의 반복입니다. [너는 가난한 자의 소송에서 그에
대한 재판을 뒤집지 말지니라.
](6). 이번에는 역 차별이
아니라 외모를 따라 재판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들에게 대충 아무렇게나 재판해도 뒤탈이
없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하지도 못하며,
법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따지지도 못합니다. 분명히 유리한
재판이었는데, 몇 번 지나서 확정 판결을 받을 때는 어느덧
뒤집어져 있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는 누군가 뇌물이나
청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런 것을
저주하셨습니다. [나그네나 아버지 없는 자나 과부의 재판을
굽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 할 것이요, 온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27:19). 온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멘으로 화답한 공정한 재판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계시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무너집니다. 모든 재판은 공정함이 핵심인데,
공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더 높은 재판관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만일 네가 어느 지방에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과 폭력으로 공의와 정의를 굽게 하는 것을
보거든 그 일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이는 가장 높은 자보다
더 높으신 이가 /이것을/ 주목하기 때문이니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느니라
](전5:8).


7절입니다. [거짓된
일에서 네 자신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지니
이는 내가 사악한 자를 의롭다 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7). 어떤 살인도 정당화 될 수 없지만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이 보낸
대언자들을 피흘려 죽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람들은 “의인들을 왜 죽여?”라고
생각하겠지만 역사상 흘린 수많은 피는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의 피였습니다. 인류에서 사람 가운데 맨 먼저 죽은
사람이 아담이나 이브가 아니었습니다. 아벨이었습니다.
아벨은 병들어 죽은 것이 아니라 돌에 맞아 피흘려 죽었는데,
무죄한 피요 의로운 자의 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주님이 이렇게 증거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23:35).
교회사는 피흘린 순교자들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또 의인을 벌하는 것이나 공평하다고
통치자들을 때리는 것은 선하지 아니하니라
](잠17:26)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대가만 주어지면 사악한 자를 의롭다고 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어떤 판사가 연회에 갔는데,
술에 취한 어떤 깡패가 주정을 하면서 “저 사람은 우리
편이야!”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기겁을 했습니다. 그
판사는 뇌물을 하도 많이 받았던 지라 조폭들의 세계에서도
유명 인사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보상(報償)을 받으려고
사악한 자를 의롭다 하며 의로운 자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사5:23). 불의의 대가를 탐했던 발람이나
탐욕에 눈먼 게하시가 아니더라도 범죄자를 무죄로
선포해서 ‘의롭다’고 법봉을 두드리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 뇌물은 지혜로운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만드느니라.
](8). 뇌물의
효과는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사무엘은 평생 뇌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보라,
내가 여기 있나니 [주] 앞과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나를 대적하여 증거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취하였느냐? 누구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학대하였느냐? 내 눈을 어둡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삼상12:3). 그가 만약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았다면 백성 가운데 누가 속으로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 사무엘과는 너무나 달리
뇌물을 취하고 재판을 돈 준 사람의 뜻대로 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길로 걷지 아니하고 옆으로 돌이켜
이익을 추구하며 뇌물을 취하고 재판을 굽게 하니라.
](삼상8:3).
사무엘은 자녀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는데, 이 일은
이스라엘 민족이 왕을 구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뇌물로 행한 재판이 신정 국가에서 왕정 국가로 바꾸는
사회적 격변의 단초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왕은 공의로
나라를 굳건히 세우나 뇌물을 받는 자는 나라를
뒤엎느니라.
](잠29:4)는 말씀대로입니다. 뇌물은
지혜로운 자의 눈을 어둡게 해서 선악을 분별할 시력을 잃게
만듭니다.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이는 뇌물이 지혜로운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기
때문이니라.
](신16:19). 뇌물은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합니다. 뇌물은 마음을 파멸시킵니다. [참으로 학대는
지혜로운 자를 미치게 하며 뇌물은 마음을
파멸시키느니라
.](전7:7). 뇌물을 받는 자는
사악한 자입니다. 대한 민국은 뇌물 공화국이라 불릴만큼
뇌물이 성행하는데, 이는 그만큼 사악한 자가 많다는
뜻입니다. [사악한 자는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의 길들을 굽게 하느니라
](잠17:23). 뇌물을
패가망신의 지름길입니다. 부자가 되려고 받았을지 몰라도
결국 그것으로 망하게 됩니다.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괴롭게 하나 뇌물을 미워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
](잠15:27).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을 원하고 안정적인 삶을 원한다면
뇌물을 미워해야 합니다. [오직 의롭게 걷는 자, 올바르게
말하는 자, 학대하여 얻은 재물을 멸시하는 자, 손을 저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바위로 된 요새가 그를 보호하는 처소가
되며 그는 빵 공급을 받고 물을 확보하리라
](사33:15-16).
주님은 손을 저어 뇌물을 받지 않는 자를 보호하고, 빵과
물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길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아직 뇌물을 받을 위치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며, 그런 자리에 한 번이라도 있어 봤으면 하고
부러워합니다. 죄에 대해 책망하는 설교를 하면 “누가
나에게 그런 유혹을 한 번이라도 해 주었으면...”합니다.
마음이 온갖 죄악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너무 낮은 위치에 있어서 전혀 그런 유혹이
없다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것에 너무 약한
나를 아시고 주님이 낮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뇌물은 마음에 탐욕이 더
강한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더 강한지를 시험해 주는 잣대
역할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돈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
가운데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뇌물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주님은 이스라엘 통치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버렸는지
증언하셨습니다. [네 통치자들은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들의
무리이며 다 뇌물을 사랑하고 보상을 따라가며
아버지
없는 자들을 /위해/ 재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사정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사1:23). 이스라엘의 내부 사정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을 보시면서
주시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
안에는 뇌물을 받고 피를 흘린 자가 있었으며 너는 이자와
이득을 취하고 욕심을 내며 네 이웃을 착취하여 /재물을/
얻었고 나를 잊어버렸도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겔22:12).
이 말씀은 먼 과거의 이야기도 미래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9절입니다. [너는 또한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지냈은즉 나그네의 심정을 아느니라.
](9). 이 말씀은 지난
시간에 다루었습니다.


10-11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법으로 안식년과 안식일에 대한
법입니다. 매 7년은 안식년으로서 땅에 안식을 주고, 종들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 땅에서 자연적으로 나는 곡식들이나
열매들은 거두지 말고 가난한 자들이 먹고, 들의 짐승들이
먹게 하셨습니다. 환경 보호를 아무리 외쳐도 이보다 더
철저한 환경 보호는 없을 것입니다. [너는 여섯 해 동안 네
땅에 /씨를/ 뿌려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으로 하여금 안식하게 하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들이 남긴 것은 들의 짐승들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올리브원도 그와 같이 할지니라
.](10-11).
가나안 땅이 얼마나 풍성한 소출을 내는 땅입니까? 1년을
묵힌다는 것은 그만큼의 손실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일은 너무나 힘든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땅을
놀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주님이 이들이 이렇게 일해선
번 돈을 정당한 소득, 의가 있는 소득으로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아니한 자
’로 인정하셨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교회에 나갈 시간이 없고, 일을 하느라
바빠서 주님의 왕국의 그분의 의를 구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나는 사기 치지도 않았고, 부정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열심히 땀을 흘려서 벌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들이 ‘나의 법을 어기면서 돈을 벌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25:4, [칠 년째 되는 해에는 그 땅에
안식하는 안식이 있게 할지니 이것은 [주]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네 밭에 씨를 뿌리거나 네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레25:4).
그러나 이들은 너무나 열심히 돈을 버느라 땅을 쉬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490년 동안 그들은 단 한 해도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가셔서 그 땅이 쉬지 못한 안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러면
너희가 너희 원수들의 땅에 거하는 동안에 그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리리라. 바로 그때에 땅이 안식하며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하며 안식할 때에 그 땅은
안식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 땅이 그 황폐한 동안에
안식하리라.
](레26:34-35). 이들이 안식일도, 안식년도
무시하고 땅에서 얻은 소출은 자신들의 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빼앗겼고, 그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
버렸습니다. [이로써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이 성취되어 마침내 그 땅이 자기의 안식을 누렸으니
이는 그 땅이 황폐한 동안 안식을 지키고 칠십 년을
마쳤음이더라.
](대하36:21). 오늘날도 유대인들처럼 주님이
주신 원칙과 법을 어기면서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된
성도들은 재물을 바르게 모으지 않는 성도들입니다.


12절입니다. 이 역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십계명의 세부 사항입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라. 그리하면
네 소와 나귀가 안식할 것이며 네 여종의 아들과 나그네가
원기를 회복하리라.
](12). 이미 안식일에 대해서
다루었기 때문에 오늘은 안식일의 부수 효과인 “원기를
회복하리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refresh(소생)라는 이
단어는 오늘날 심신이 피곤에 지친 현대인들이 놀러 갈 때
가장 흔히 대는 이유입니다. 재충전이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안식일을 통해 소, 나귀, 여종의 아들과 나그네들이 원기를
회복합니다. 휴식은 건강은 물론이려니와 노동을 위해,
생산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안식일은 원기 회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은 아무리 더운
여름일지라도 시원하게 보내는 방법, 짜증나고 불쾌한 일이
수두룩한 이 시대에 상쾌함(refresh)을 덧입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는 것은 우리의 몸과 기분을 상쾌하게 하기 위해 만드신
주님의 배려입니다. 안식일은 우리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이 날에 안식하심으로
상쾌하게 되셨습니다.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음이니라
, 하라.
](출31:17).


신약 성도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대신 주의 첫날을 정해 주님께 예배합니다.
이는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며,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쉼의 원리는 같습니다. 일요일에 노는
것을 보니 먹고 살만한가 보지!라면 빈정대는 장사꾼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조롱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일터로 가는 대신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오는 사람들은
영적 승리자들입니다. 늦잠을 자고, 들로 산으로 강으로
가는 사람들에 비해 100배는 위대한 전사들입니다.


◎ 좋은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특히 영적인 음악, 찬양은
성도들의 마음을 새롭게 해 줍니다. 다윗은 하프로 악령들린
사울을 상쾌하게 해 주었습니다(삼상16:23).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악한 영이 사울에게 임할 때에 다윗이 하프를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게 되고 나았으며 그 악한 영이
그에게서 떠나니라.
](삼상16:23). 저는 선교회에 있을 때 늘
찬양을 들었습니다. 눌린 마음을 풀어 주는 송정미 자매가
가사를 쓴 주찬양(1,2,3집) 테잎은 지금도 다시 듣고 싶은
음악들입니다. 영감있게 부른 박종호 씨의 테잎이나 다윗과
요나단 1,2집은 늘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차에서, 일터에서 대중 가요 대신 좋은 찬양을 듣는다면
여러분의 영은 상쾌하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 신실한 사자는 주인을
상쾌하게 합니다. [신실한 사자(使者)는 그를 보낸
자들에게 마치 추수 때에 내린 차가운 눈 같으니 이는 그가
자기 주인들의 혼을 시원하게 하기 때문이니라
.
](잠25:13).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의 대사들입니다. 우리가
신실한 대사로서 임무를 수행할 때 주님의 마음은 상쾌함을
입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상쾌함을 얻는 길입니다.
[그분께서 이 백성에게 이르시되, 이것이 안식이니
너희가 피곤한 자로 하여금 이 안식으로 안식하게 하라.
이것이 상쾌함이라
, 하셨으나 그들이 듣고자 하지
아니하므로
](사28:12). 지치고 낙심될 때 주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집회 시간에 놀러 가는 것은
몸의 피곤함을 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은 몸의 피곤함을 이기는
영의 상쾌함을 줍니다.


◎ 회개하는 일은 마음에
상쾌함을 줍니다.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눈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抹消)될 것이요,
](행3:19). 주님은
회개하는 심령에게 상쾌함을 주십니다. 죄를 안고 있는 것은
더운 여름 날에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무거운 짐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이는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므로 내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것같이
되었음이니이다. 셀라.
](시32:3-4)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회개할 때 우리는 새롭게 됩니다.


◎ 성도들의 교제는 영을
시원하게 합니다. 악한 사귐은 선한 행실을 부패시키지만,
성도의 영적 교제는 우리에게 새 힘을 줍니다. 바울 사도는
서로간에 새 힘을 얻기를 구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새 힘을 얻게 하시기를 구하라
.](롬15:32).
바울은 스데바나를 비롯한 몇몇 형제들로 인해 자신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이 시원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
나와 너희의 영을 시원하게 하였음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인정하라.
](고전16:18). 우리는
서로 간에 영을 시원하게 하고, 새 힘을 얻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만나기만 해도 마음이
기쁘고,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는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형제와 형제들은 서로 위로를 주고 받고,
기쁨을 주고 받음으로 영이 활력을 받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너희의 위로를 통하여 위로를 받았고 참으로 디도의
기쁨으로 인하여 우리가 넘치도록 더욱 기뻐하였으니 이는 그의
영이 너희 모두로 인하여 활력을 얻었음이라
.
](고후7:13).
바울도 자주 낙담하고 지쳤지만 그 때마다 형제들로 인해 새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상쾌하게, 형제들을
시원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했습니다.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기
원하노니 이는 그가 자주 나를 유쾌하게 하고 나의
쇠사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
](딤후1:16).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형제들이 얼마나 다른 형제들에게 힘을
주었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도 이 점에서는 조금도
뒤쳐지지 않았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인하여 상쾌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도 네 사랑 안에서 큰
기쁨과 안위를 얻었노라.
](몬1:7), [참으로 형제여, 나로
하여금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마음이 주 안에서 상쾌하게 하라.
](몬1:20).


주일 집회나 주중의 기도
모임 등을 통해 이런 영의 상쾌함을 얻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격려와 위로를 통해 힘을 얻고 서로가 도전을 받는
그런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모임은 더욱 살아 있고,
그 모임을 사모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집회에 빠지면 마음이 불안하고 짜증이 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꼭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그런 기분이 성도들에게 들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모임이 늘 그런 모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의
완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마음, 불신과 불순종, 반역으로
인해 주님을 지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13절은 다시 십계명 중에
1,2 계명을 반복한 것입니다. [내가 네게 말한 모든 일에서
너는 신중히 행하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언급하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
](1,2).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일에 신중히 행하게 되면 길은 어긋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다른 신들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십시오. 우리의 언어 생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꾸 마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경계하자고
좋은 뜻으로 하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보다 마귀에 대한 이야기를 훨씬 많이 합니다. 이는
마음에 성령이 충만한 증거가 아니라 마귀가 충만한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의 타락과 죄악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듣기에도 민망한 어휘들을 계속 언급합니다. 3류
저질 신문이나 잡지에 등장하는 어휘들이 성도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름은
언급하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특히 성(性)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됩니다. [부패한 대화는 결코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쓸 좋은 것만을 말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4:29). [또한 추잡한 것이나
어리석은 이야기나 희롱하는 말도 적합하지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엡5:4). 말에는 은혜가 있어야
하고,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유대인이 모압 지방이나 멀리 주변 나라들에 무역을 하는데
거기서 듣고 보고 온 갖가지 이방 신들 이야기를 풍물
여행이랍시고 매일 떠들어 대면 그 중에 분명히 몇몇 얼빠진
형제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가서 보고
싶다’, ‘언제 기회 되면 그 신들을 한번 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오늘날 타락한 사회에
대해 상세하게 예를 들어가며 설교하자 몇몇 정신없는
형제들이 들으면서 “그런 것도 있었나?, 한 번 알아 봐야지...”하고
듣습니다. 어떤 형제가 죄를 짓고 나서 교회의 어떤 형제가
하는 말을 듣고 배웠다고 한다면 그 얼마나 수치스런
일입니까? 우리의 대화는 늘 입술에 소금을 쳐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있게 해야 합니다. 호기심과 탐심을 자극하게
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너희 말을 소금으로
맞추어 항상 은혜가 있게 하라
. 그리하면 너희가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바를 알게 되리라.
](골4:6).
전도서 기자 역시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려
하나니
](전7:6). 우리 입술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영광을 돌리는 입술입니다. 여기서 저주가 나오고, 욕설이
나오고, 신성 모독이 나오고, 부패한 대화가 나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좋은 것들을
말하고 대화하다 보면, 악한 것들을 멀리하게 되고 혐오하게
됩니다. 죄를 알아야 죄를 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면 죄를 멀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른 신들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말고,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
역시 주의해서 주의 말씀을 행하고 건전한 언어 생활을
통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