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3:20-33
요절: 출애굽기 23:25
크리스찬은 구도자(求道者)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진리를 믿고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걸으며, 성령 안에서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먼 곳에 목표 지점으로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이런 진리는 출애굽의 역사적 현장에서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으로 가라” 명령만 하시고 뒷짐지고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광야의 순례길에 맨 앞서 나가고 계십니다.
목동들은 양들 중간이나 뒤에 서지 않습니다. 맨 앞에
섭니다. 우리는 앞서 가신 어린 양의 발자취를 따라서, 옛
길을 따라서 묵묵히 걷기만 하면 넘어지거나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한 천사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하여금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20). 주님은 한
천사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광야는 뱀, 전갈과 각종 짐승들의 위험이
많은 곳입니다. 광야는 먹을 것이 없는 대신 낮에는 더위가
밤에는 서리가 내리는 곳입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의
길에 맨 선두에는 모세가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섰으며, 그가 하나님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을
보호하였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여기 언급된 한 천사는 “주의 천사”인데
성경에서 주의 천사는 주로 성육신하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내 육체 안에 나를 시험하는
것이 있었으되 너희가 그것을 업신여기지도 아니하고
거부하지도 아니하며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같이
심지어 그리스도 예수님같이 영접하였도다.](갈4:14). [이는
나를 소유하신 하나님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천사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행27:23). 물론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The Angel of the LORD는 일반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현현으로
나옵니다. 벌링거란 유명한 성경 주석가는 여기 나오는
천사는 ‘천사장 미카엘’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는데, 그
근거로 이사야 63:9을 인용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고난
속에서 친히 고난 당하시고 자기 눈앞에 있는 천사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며 친히 사랑하고 동정하사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의 모든 날에 그들을 품으시며
이끄셨음이라](사63:9). 그러나 이 구절의 문맥은 미카엘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한 천사를
성육신하기 전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확신합니다.
20절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 적용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저 하늘에
이르기까지 보호하시고, 이르게 하신다는 보배로운 약속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천사를 보내셨는가?
정답은 그렇다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靈)들로서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히1:14). 교회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 주님은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현재 천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사실은 주님의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행하든지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하노라.](히13:5-6).
주님의 보호하심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주의 천사는 누구와
함께 있는가? 누구를 건지시는가? [[주]의 천사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지는도다.](시34:7).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의 mansion들입니다(요14:1-3). [내
아버지 집에 저택들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처소들이 있는 곳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21절입니다. [너희는
그에게 주의하여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이는 내 이름이 그 안에 있으므로 그가 너희 범죄를
용서하지 아니할 것임이라.](21). 주님은 자신이 보낸
천사에게 주의하여 그 목소리에 순종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의 지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의하여 순종하고, 노엽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변화산상에 있는 요한, 야고보,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또, 보라, 그 구름 속에서
나오는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매우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매](마17:5).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20).
외출하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학교
가는 자식들에게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회사에 가는 자식들에게는 회사의 상사들의
말을 잘 들으라고 합니다. 어떤 부모도 “불순종하라, 말을
듣지 마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의하여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 말을 듣지 않는 자녀는
이미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것이며, 선생님 말을 듣지 않는
학생 역시 부모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평범한 상식에 속합니다.
시편 78편을 보십시오. 17절,
[여전히 그들은 광야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를 노엽게
함으로 그분께 더욱 범죄하였도다.](시78:17). 여기서
우리는 매우 주의해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천사의 지위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동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계속 보십시오. [그들이 광야에서 그분을
격노하게 하고 사막에서 그분을 슬프시게 한 것이 얼마나
잦았던가!](시78:40)라고 탄식하는 시를 썼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불순종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그를 격노케 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 노발대발하시는가? 주님은 언제 슬퍼하시고,
노여워하시는가?를 잘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불순종할 때 노여워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악할 때
노여워하십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완악할 때
격노하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마음이 완악한 사람을 볼 때는 노를 격발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 실수에 대해서는 용서하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지만 완악한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격노하게 하던
때와 같이 또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頑惡)하게 하지 말라.](히3:8). [/주께서/ 이르시되,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게 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 하셨으니 이는 어떤 자들이
듣고 /그분을/ 격노하게 하였음이거니와 모세를 의지하여
이집트에서 나온 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느니라.](히3:15-16).
이 말씀은 오늘날
성도들이 성령의 음성에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성령은 슬퍼하시며,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때 성령은 근심하시며, 거룩한 몸된 성전을
더럽힐 때 성령은 소멸되며, 육신적으로 생각하거나 행할 때
성령을 대적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모독할 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천사를 보내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주의하여 그
목소리에 순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22절입니다. [그러나
네가 참으로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가 말하는 바를 다
행하면 내가 네 원수들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對敵)들에게
대적이 되리라.](22). 순종은 하나님을 나의 방패요,
망대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의 견고한 요새가 되시고, 산성이 되십니다. 동시에
우리의 원수들에게는 원수가 되시고, 우리의 대적들에게는
대적이 되십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창12:3)한 말씀대로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고로 이 약속은 현재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의
음성에 순종하는 한 아무도 우리를 이길 수 없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원수들에게 원수가 되시고, 대적들에게
대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 차서 외친
승리의 찬가가 무엇입니까?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요, 참으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1-35).
23절입니다. [이는 내
천사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에게로 인도하고 내가 그들을 끊어 버릴 것임이니](23).
흔히 사람들은 출애굽의 영웅을 모세라 하고, 가나안 정복의
선두 주자를 여호수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세보다
앞서 가서 일하신 분은 하나님이 내 천사라고 말씀하신
주님이셨고, 가나안 부족들을 몰락시킨 것도 여호수아의
칼날이 아니라 주님의 천사였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앞서서
일하시는 분이시란 사실을 믿을 때 강한 확신과 담대함,
승리의 기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리 족속, 헷
족속, 브리스 족속, 가나안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을
지명하여 그들을 끊어 버리겠다고 하셨는데, 당시 이들의
문화는 신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한 음란 문화였습니다. 음악,
미술, 문학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모든 예술 행위는 다 동성
연애, 근친 상간, 수간 등을 바탕으로 죄악 그 자체였습니다.
신들은 얼마나 많았던지 셀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죄악이 가득 차서 친히 그들을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맨 선두에 서심으로 [주]의
군대 대장으로서(수5:14-15) 그들을 진멸하셨습니다.
24절입니다. [너는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들을 섬기지도 말고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며 오직 그들을 철저히 뒤엎으며 그들의
형상들을 부술지니라.](24). 이방 신들은 그 종교가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여도 모두 가증한 것이며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뒤엎고 부수어야 할
것들입니다. 가나안 문화를 요약하면 물질주의, 우상 숭배,
쾌락주의(음란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단이 금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해서 놀라거나 정교한 조각으로
빚어졌다고 해서 훌륭한 예술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때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소장 가치가 있고, 문화재로서,
작품으로서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엄청나게 많은 신전들과 조각상들, 금은동으로
만들어진 형상들을 볼 때 욕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오히려 너희는 그들의 제단들을 멸하고 그들의 형상들을
깨뜨리며 그들의 작은 숲들을 베어 낼지니라.](출34:13).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괴입니다. 과거의 청산 없이 새로운
미래가 없습니다. 제단들, 형상들, 작은 숲들을 그냥 둔 채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단절 없이
성령의 열매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여전히 술을 마시면서
신앙 생활을 합니다. 술집에 가던 발길로 교회에 옵니다.
술을 마시던 입으로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포도즙을
마십니다. 말이 됩니까? 부수어야 할 것들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추억으로 간직하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멸하고, 깨뜨리고, 베어 낼지니라”
말씀하십니다. 몇몇 탐욕에 눈먼 이들은 깨뜨리면서 너무
아까운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탐욕은 주의 명령을 거부하는 대신 고상한
변명거리들로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들에게 이같이 행할지니 곧 그들의 제단들을 헐며 그들의
형상들을 깨뜨리고 그들의 작은 숲들을 찍으며 새긴
형상들을 불로 태울 것이니라.](신7:5). 주님의 심판은
철저합니다. 이 일을 백성들에게 직접하게 한 것은 이 일을
통해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주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 것인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이
진멸하시는 이런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만약 이런 것들에 마음을 둔다면 역시 이렇게 깨뜨려지고,
찍히고, 불태워질 것이란 것입니다. 형상은 태우더라도 금은
벗겨서 쓰자! 이런 생각도 부질없는 것입니다. [너는
그들의 신들을 새긴 형상들을 불로 태우고 그것들에 입힌
금이나 은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걸려들까 하나니 그 까닭은 그것이
[주] 네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기 때문이니라.](신7:25).
우상에 입혀진 금, 은을 탐내지 말라! 예술품이라고
운운하지 말라!
25절입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 빵과 물에 복을
줄 것이요, 내가 너희 가운데서 병을 제거하리라.](25).
하나님은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물론 이 약속은 조건부
약속입니다. 하님을 섬기면 첫째, 너희 빵과 물에 복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경제적 풍요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최대의 축복입니다. 요즘은 이념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중요합니다. 우파가 정권을 잡던,
좌파가 정권을 잡던 경제만 살리면 그는 훌륭한 지도자란
소리를 듣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빵과 물입니다. 빵과 물을
안정적으로, 풍성하게 얻는 방법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란
사실을 정확하게 간파한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경제의
비결은 바른 신앙입니다. [내가 이 날 너희에게
명령하는바 내 명령에 너희가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섬기면 내가 너희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 때에 주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을 거둘 것이요, 또 내가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을 내리니 네가 먹고 배부르리라](신11:13-15)
크리스찬들이 이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더 잘 먹고, 더 잘
마시기 위해 주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섬긴
결과가 경제적 성장이요, 부흥입니다. 세계의 국가들을
보십시오. 기독교를 버리고, 성경을 배척한 공산주의 국가들-
러시아, 동유럽-은 모두 망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동남아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대신 마리아를 섬긴 남미의 나라들은 풍족한 천연 자원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엉망입니다. 남한 보다 상대적으로 풍족한
자원을 가진, 더 발전된 공장들과 사회 기반 시설을 가진 채
출발했던 북한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는 한
개인과 가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오해하는 한 가지는 빵과 물을 얻는 비결이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것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섬길 때 주님께서 빵과 물에 복을 주십니다. [그분께서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며 또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태의
열매에게 복을 주시고 네 땅의 열매와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에 복을 주시며 네 암소의 번식과 양떼에도 복을
주시리니](신7:13). 이것이 진정한 경제적 부요함입니다.
주님이 주신 부에는 슬픔이 동반되지 않습니다. 돈을 벌어도
걱정이라면 그 번 것이 재앙일 것입니다. [[주]의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나니 그분께서는 이것에 슬픔을 더하지
아니하시느니라.](잠10:22).
주님을 섬길 때 얻는 두
번째 현실적 복은 건강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
가운데서 병을 제거하리라.](25). 영혼의 건강은 무시해도
육체적 건강에 관심이 많은 시대입니다. 운동도 하고, 좋은
음식도 먹고, 보약도 먹고, 몸에 좋다면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입니다. 몸의 건강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은사주의나 기복주의, 오순절
목사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건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나 디모데는 몸이 약했고,
질병을 달고 살았지만 성령 충만한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구약의 현세적, 물질적 복이 신약 성도들에게 그대로 다
적용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구약의
모든 진리는 신약 성도에게 해당 사항이 없다고 버리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주님을 섬길 때 주님은
병을 제거해 주십니다.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내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내 명령들을 귀담아 들으며 내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치유하는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출15:26). 잠언은 성경 신자들이
누릴 건강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성도들이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는가?에 대해서 예리한
통찰력을 얻기를 바랍니다. 잠언 3:8, 4:22, 12:18, 13:17, 16:24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자의 혀를 지닌 신실한 대사라면 여러
사람의 병든 마음과 상한 영을 고칠 수 있는 훌륭한 의사의
자격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잘 요리해서 성도들을
먹임으로 영양을 보충해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빵이요,
물이며, 고기요, 우유이며, 사과요, 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네 배꼽에 건강이 되며 네 뼈들에 골수가 되리라.](잠3:8).
[그 까닭은 그것들을 찾는 자들에게 그것들이 생명이 되며
그들 모두의 육체에 건강이 되기 때문이니라.](잠4:22).
한국 교회에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는 새벽 기도를 매일
하는 사람은 몸에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주위에는 새벽 기도를 매일 다니지만 몸이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영적
건강입니다.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12:18).
성경적인 건강법은 말입니다. 말은 건강을 좋게 하게도 하고,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기를
꺾고 모욕을 주는 말을 하면 사람은 시들해 지고, 병이 나고,
죽습니다. 반면 지혜로운 말은 기분이 좋아지고, 믿음과
소망과 용기가 생깁니다. 들으면 힘이 납니다. [사악한
사자(使者)는 해악에 빠져도 신실한 대사(大使)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13:17). 이 말씀 역시 건강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대사로서
복음을 전할 때, 준의 말씀을 증거할 때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병을 고쳐 줄 수 있습니다. 안수를 하지 않아도 단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불치병에서 나은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즐거운 말들은 벌집 같아서 혼에 달고
뼈에 건강을 주느니라.](잠16:24). 여러분이 기도 모임과
주일 예배에 오는 것은 피곤한 육체에 피로를 쌓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회복케 하는 길입니다. 몸에 좋다는
약수를 뜨기 위해 몇 시간을 달리고, 여행하고, 낚시하러
다니는 성도들이 막상 교회가 멀다고 투덜대는 것은
영육간에 많이 상한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멀리서 교회를 오면서 “집이 멀다”고 말하고,
사악한 사람들은 “교회가 멀다”고 말합니다.
건강이 솟구치는 방법을
또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주린 자들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며 내쫓긴 가난한 자들을 네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벌거벗은 자를 볼 때에 입히며 네 살붙이를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쏟아지고 네 건강이 신속히 솟구치며
네 의가 네 앞에서 나아가고 [주]의 영광이 네 후위대(後衛隊)가
되시리니](사58:7~8). 구제는 건강을 속히 솟구치게 하는데,
병든 자들이 남을 위해 봉사하고 뭔가 돕기 위해 베풀었을
때 몸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라고 주신 은혜의
손길입니다.
이미 몸과 마음이 상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호세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자. 이는
그분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6:1).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네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며 네 상처들을
낫게 하리니 ....](렘30:17a). 우리는 회개할 때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의
말씀대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병을 제거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주]께서
모든 병을 네게서 제거하사 너희가 알고 있는 이집트의
그 악한 질병을 네게 두지 아니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두시리라.](신7:15). 주님을 잘 섬기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의원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섬길 때
주님은 보상하시는 주님이심을 분명히 보여 주시고, 입증해
주십니다.
26절은 주님을 섬길 때
주시는 또 하나의 복입니다. [네 땅에서는 유산하는 자가
없고 수태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요, 내가 네 날 수를
채우리라.](26). 이스라엘의 산모들은 유산하거나 불임의
여성이 없을 것이란 약속입니다. 그리고 장수를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민족은 세상에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산모들은 산파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아이를 잘 낳았는데, 이는 주님이 주신 복입니다. 열매를
맺는 일은 주님이 주신 복입니다. 몇 차례나 유산을
거듭하는 여인들이나 불임의 여인들이 겪는 고통은
당사자와 가족들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들도 유산이나 불임이
없었습니다. [네가 모든 백성들보다 더 많이 복을 받아
너희 가운데 남자와 여자와 너희 가축의 수컷과 암컷에
수태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신7:14). 주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27-28절입니다. [내가
나의 두려움을 네 앞서 보내어 네가 만나게 될 모든
백성들을 멸하고 네 모든 원수들로 하여금 그 등을 네게서
돌리게 할 것이며 또 내가 말벌들을 네 앞서 보내리니 이
벌들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27-28).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소식은
여리고의 주민들 뿐만 아니라 가나안 모든 민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 조상들에게
몽고족이나 거란족의 침범 소식이나 왜구의 노략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28절에 말벌들을 보내신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주님은 ‘호박벌들’을 전쟁에 동원하셨는데,
이는 자연계를 마음대로 움직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잘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호박벌이 상징이나 비유인 줄로 압니다.
신명기 7:20에 [또한 [주] 네 하나님께서 호박벌을 그들
가운데로 보내사 마침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신7:20)라고 하셨는데 호박벌의 독성이
사람을 죽일 만큼 강했습니다. 주님이 보내신 호박벌은
군사용 무기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을 하면서 호박벌로
인해 승리를 쟁취한 예가 있습니다. [내가 호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이것은/ 너희 칼이나 너희 활로 한 것이
아니니라.](수24:12). 주님은 모든 피조 세계의 동, 식물,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땅과 산과 바다를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9-30절입니다. [그러나
그 땅이 황폐하게 되므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대적할까 염려하여 일 년 내에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불어나서 그 땅을 상속할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29-30). 가나안 족속을
섬멸하고 완전히 몰아내는데는 1년 안에 모두 완결되는 초
단기전의 전쟁이 아니라 수십년의 전쟁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기간에 모든 족속을 섬멸하면 땅이 황폐해지고,
들짐승들이 번성하여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그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한 번에 진멸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희 가운데 들짐승이 불어날까 하노라.](신7:22). 이는
급격한 환경 파괴로 인한 자연의 생태계에 대한 섬세한
배려입니다. 오늘날 환경 신학이란 이상야릇한 말이
있습니다. 자연 보호, 환경 보존, 멸종 동물들에 대한 보호를
위한 기금 마련 등에 교회가 앞장 서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들은 기독교가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자연 파괴를
앞장섰다는 반성과 회개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연
정복이 가장 훌륭한 자연 보호라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주님은 야생 동물들을
통해 앗시리아인들을 징계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하셨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처음으로 거할 때에 주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사자(獅子)들을 그들 가운데
보내시매 사자들이 그들 중에서 몇 사람을 죽이니라.](왕하17:25).
하나님께서 단번에 모든
민족들을 멸절하지 않으신 또 하나의 이유는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맹렬히 타올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내 언약을 어기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그 민족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자기
조상들처럼 주의 길을 지키고 그 길로 걷나 걷지 아니하나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그
민족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고 남겨 두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셨더라.](삿2:20-23).
이스라엘이 순종하면 하나님은 남은 민족들을 모두
정복하게 하시고, 그 땅을 주실 것입니다. 만약 불순종하면
그들이 올무가 되고, 심판의 막대기가 될 것입니다. 때로
주님은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완전하게
해결해 주시지 않고, 일부만 해결해 주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계속 믿음 안에
거할 때 정복자서 승리합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 살 때 그
문제들이 꺼진 불씨가 되살아나듯 다시 커지고 나를
위협하게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건강일 수도 있고, 돈
문제일 수도 있고, 인간 관계일 수도 있고, 자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잠시 잊었다 싶은데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문제들이 있다면 주님이 남겨 두신 족속들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31절입니다. [또 내가 네
경계를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사람들의 바다까지와
사막에서부터 강까지 정하리니 이는 내가 그 땅의
거주민들을 네 손에 넘겨줄 것이요, 네가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낼 것임이니라.](31). 주님이 주신 땅의 경계는 동서로
200마일(320 Km), 남북으로 600마일(960 Km)의 크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가 약 200만인데, 이 작은 인구가 뉴욕 주
정도의 크기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한반도 남북의 총 길이는
약 1,100㎞이고 동서의 길이는 좁은 곳이 200㎞, 넓은 곳은 320㎞이므로
200만의 주민이 살기에는 얼마나 큰 땅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간단합니다. 주님이 주신 것을 다 누리기 위해서는 전투를
통한 쟁취란 것입니다. 너무 쉽게 빠르게 얻은 승리는
적들을 과소 평가하고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교만으로 인해
자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속적으로 주의하고 깨어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32-33절입니다. [너는
그들이나 혹은 그들의 신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너로 하여금 내게
범죄하게 할까 염려함이라. 그 까닭은 네가 그들의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반드시 네게 올무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출23:20~33).
이스라엘의 역사는 철저히 머피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은 철저히
배척하고, 주님이 예언한 저주에 대한 말씀을 그대로 다
받아 들입니다. 위에서 말한 복된 말씀대신 이들은 32-33절의
경고의 말씀대로 주님께 범죄하고, 주위 민족에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사마리아는 앗시리아의 혼혈 정책으로
인해 민족적, 종교적 특성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자면 “너는 교육과 철학과 과학과 종교와 예술과
스포츠와 인터넷과 돈과 여자와 술과 마약과 잡지, 음악,
도박 등 어떤 것들과도 언약을 맺지 말라”입니다. 우리는
거대한 물질주의, 쾌락주의, 자본주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것들과 언약을 맺으면 주께 범죄하고, 올무가 됩니다.
세상의 철학이 교회에 들어오고, 교인들에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세속주의입니다. 돈, 출세, 명예, 자랑거리들이 교회에
들어오고 그것을 경건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좋은 직장,
좋은 학교, 많은 돈, 높은 지위 등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힘을 부리는 잣대가 되었습니다. 합리주의, 실용주의와 같은
세속적인 사고가 성도의 정신 세계에 파고 들어와서 성경적
복음주의를 몰아내고 있습니다. 합리주의, 실용주의는
미국의 정신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에게 유용한 것들,
실질적인 것들, 현실적 유익이 있는 것들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덕분에 일의 능률, 효율을 철저하게
계산하고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의 유무가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는 철저한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이요, 인본주의의 산물입니다. 교회가 실용주의로
나간다면 예배의 효율성을 따지고 계산해야 할 것입니다.
오고 가는 시간과 경비, 이로 인해 내가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얼마인지...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재앙입니다. 가룟
유다는 합리주의자요, 실용주의자였습니다. 제자들은
거기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향유를 부은 여인은 낭비도
소비도 아닌 옥합의 향유를 전부 허비했습니다. 허비(虛費)란
말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죄악은 없습니다. 돈 가방을 맡은
가룟 유다에게도 마리아의 허비는 분노의 대상이요,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마26:8,막14:4).
[그분의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같이 허비하느냐?](마26:8). 12년이나 혈루증을 앓았던
여자는 고생도 많이 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했습니다(막5:26,
눅8:43). 약간의 나아진 것도 없기 때문에 허비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타향으로 간 둘째 아들은 가진 재산을
허랑방탕하여 다 허비했습니다(눅15:13). 그러나 주님께
허비하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주님께
허비하는 대신 투자하는 사람들은 기복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투자하는 사람들은 더 남는 곳에 투자합니다.
투자는 이익을 목적으로 합니다. 여러분은 예배와 일하는 것,
예배와 시험 공부하는 것, 예배와 친구 만나는 것 중 어느
것에 먼저 투자하십니까? 저는 합리주의와 실용주의와
언약을 맺고, 그것에 동화되어 섬기는 교인들을 보면
절망스럽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여러분이
누구와 언약을 맺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합리적 사고 방식을
가진 성도는 투자하지 허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도
믿음도 아닙니다. 믿음은 계산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허비하십니까? 허비하는
신앙이 참된 복음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신이
지배하는 이 시대 정신과 동화되거나 언약을 맺어서는
안됩니다. 철저히 복음적인 신앙을 따라 걷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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